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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목자득국!' 연호한 이성계의 금강산 대권출정식

잠용(潛蓉) 2021. 6. 24. 09:1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목자득국!' 연호한 이성계의 금강산 대권출정식… 1만명 모였다
경향신문ㅣ2021.06.15 05:00 수정 : 2021.06.15 17:51

‘최고급 석영유리로 제작됐다.’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냈다. 1932년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보물 제1925호) 중 유리제 사리병을 보존 처리하다가 이 병의 재료가 석영유리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 1932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중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최고급 석영유리의 비밀
유리제 사리병(높이 9.3㎝, 지름 1.2㎝, 무게 31g)은 은제 금도금 판에 원통형 유리를 끼우고, 위에는 은제 금도금 마개로 막았다. 내부에는 사리받침대가 들어있는 형태이다. 아마 이 사리병 속에 사리를 봉안했던 것 같다. 신용비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는 “유리제 사리병의 복원과정에서 사리병의 주성분이 석영유리임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즉 일반적인 유리는 규소를 주로 사용해 1000℃ 미만에서 제작된다. 녹는 온도를 낮추기 위하여 용융제로 나트륨·칼륨·납을, 안정제로 산화칼슘 등을 사용한다.

반면 순수한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해서 1500℃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이기 때문에 고도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황현성 학예연구사는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과학의 영역이다. 이제부터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왜 이성계 사리기를 당대 최고의 재료인 석영유리로 제작했을까?

▲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유리제 사리병은 석영유리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해서 1500도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이기 때문에 고도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다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금강산에서 출토된 돌상자 안에는…
1932년 10월6일 강원 금강산 월출봉(해발 1580m)에서 산불 저지선을 확보하는 공사를 벌이던 인부들이 돌상자(석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가 들어있었다.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한 라마불교의 탑 양식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15.5㎝)와 팔각당형 사리기(19.8㎝)가 먼저 눈에 띄었다. 이어 백자향로(12㎝)와 백자그릇, 청동사발, 은제숫가락 등도 보였다. 라마탑형 용기에는 4구의 불상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 곳곳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글자는 놀라웠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물기씨(勿其氏)’.

▲ 1932년 12월13일 중앙일보 기사. 금강산 월출봉에서 500년전의 납골기가 발견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리를 봉안한 이가 다름아닌 ‘이성계’와 부인 ‘강씨’라는 이야기이다. 이성계 앞에 붙은 25자의 기나긴 수식어는 무엇인가. 이성계는 1389년(창왕 2년·공양왕 원년) 당시 왕위에 있던 창왕이 우왕(1374~1388)과 함께 왕씨가 아니라 신씨(신돈·?~1371)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위시키고 공양왕(1389~1392)을 세웠다. 공양왕은 그런 이성계에게 붙일 수 있는 온갖 수식어를 다 붙여 예우한 것이다.
팔각당형 사리기와 2개의 백자사발에서도 명문이 보였는데, ‘경오년(1390년) 3월’(팔각당형 사리기)와 ‘신미년(1391년) 4월’(백자사발) 등의 연대가 주목거리였다.

또 하나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로 시작하는 다른 하나의 명문도 의미심장했다.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명문을 종합하면 몇가지 키워드가 눈에 띈다. ‘부인 강씨’, ‘금강산’, ‘미륵하생’, ‘1391년 5월’, ‘1만명’ 등이다.

▲ 1932냔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세트’. 출토유물 곳곳에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두번째 부인만 기록한 이유는?
첫번째 키워드는 ‘부인 강(康)씨’이다. 아니 이성계가 부인과 함께 사리장엄구 봉안의 불사를 주도한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있다. 왜냐면 ‘부인 강씨’는 바로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를 가리킨다. 사리를 봉안한 시점이 1391년 5월이라면 이성계의 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년 9월23일)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성계는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명문에 새겼다. 대대적으로 펼친 봉안의식에도 강씨만 참석했다. 병중이던 첫번째 부인인 한씨는 4개월 후(9월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지금 잣대로 볼 수는 없다. <태조실록>은 “고려 말에는 예법이 문란해지고 기강이 무너져서 대소관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각각 처(아내)를 두고 마음대로 거느렸다”고 기록했다. 무슨 말인가. 고려말 혼인제도가 무너져서 고관대작들이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었다는 것이다.

▲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명문. 이성계와 부인 강씨의 이름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성계 또한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를 향처(한씨)와 경처(강씨)로 두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이미 한씨와의 사이에 장성한 6남2녀를 두고 있었다. 장남(이방우·1354~1393)은 고려에 충성을 바쳤지만 둘째 방과(정종·1357~1419·재위 1398~1400)와 다섯째 방원(태종)이 건재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 한씨와는 약 5살, 남편 이성계와는 약 20년 차이인 강씨는 2남1녀(방번·방석·경순공주)를 두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서울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다.

우선 함경도 변방(영흥의 옛 이름) 출신인 이성계로서는 권문세족 출신인 강(康)씨가 출세의 디딤돌이었다. 강씨의 아버지 강윤성(?~1358) 가문은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공민왕(1351~1374) 때 재상권문가로 세도를 떨쳤다. 게다가 강씨는 여걸이었다. 한씨 소생인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도 조선 개국 전에는 중요한 대소사를 강씨와 의논했다. 예컨대 위화도 회군 때 남은(1354~1398)이 태조(이성계)를 추대할 것을 비밀리에 의논하고 이를 태종(이방원)에게 알렸다. 그러자 태종은 “ ‘이런 큰 일을 가벼이 말해서는 안된다’면서 강씨에게 아뢰어 전달했다”(<연려실기술>)는 기록이 있다. 적어도 조선개국 때까지는 이방원과 강씨가 동지적 관계였던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역할이 특히 눈에 띄는 사료가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1337~1392)를 참살하자 이성계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분기탱천한다. 그러자 신덕왕후 강씨가 정색하면서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 백자주발. 이성계가 1만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미륵의 하생’을 바라면서 사리봉안식을 펼쳤음을 알리고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공(이성계)이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했으면서…. 어찌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우유부단한 남편의 마음을 강씨가 확 휘어잡은 것이다.
물론 조선개국 후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들은 철천지 원수가 된다. 후계자 자리를 두고 혈투를 벌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태조가 개국공신인 배극렴(1325~1392)·조준(1346~1405) 등을 불러 후계자 자리를 논했다. 그때 배극렴은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고했다.
이에 따르면 강씨의 소생 둘은 적장자(신의왕후의 둘째아들 방과)도, 공있는 자(다섯째 방원)도 아니었다.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기가 질린 배극렴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결국 강씨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세자책봉은 화를 불렀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1396년) 불과 2년 만(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로 책봉된 방석과 첫째 아들인 방번이 비명횡사한다. 태종 이방원과 한때는 동지적 관계였지만 왕위를 두고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서거한지 186년이 지난 뒤인 1582년(선조 15년)이 되어서야 재평가된다.
“신의왕후 한씨가 돌아가신 것이 고려말이며, 그 이후 태조를 내조한 이는 신덕왕후 뿐이고…. 태조가 이미 신덕왕후를 높여서 정식 배우자로 삼았고 태종 역시 모후로 삼았으니 누가 우리 신덕왕후를 국모로 보지 않겠습니까.”(<연려실기술> ‘정릉정사’)

이런 판국이니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사리함에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1591년 5월) 병석에 누워있던 조강지처(신의왕후 한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병이 더 도졌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 시대에 경처와 향처 등 2처제도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고려 말엽 부부의 도리가 무너져…욕망을 좇고 정애에 미혹되어 처가 있는데도 또 처를 얻는…자가 있으니 적은 손실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태종실록>)
가만 보면 아버지(태조 이성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 청동그릇. 1391년 3월 신견, 묘명, 박룡 등 3인이 시주해서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태조 왕건을 좇아 금강산으로
또 하나의 키워드는 ‘금강산’이다. 이성계는 왜 하필 금강산에서 사리를 봉안한 걸까. 이유가 있다. 금강산은 고려불교의 성지였다. 담무갈보살이 1만2000명의 제자를 데리고 금강경을 설법한 산이라 해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만2000명의 제자가 봉우리로 변해서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바로 이 담무갈보살의 현신을 목격하고 예를 갖췄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이 만남을 기념해서 금강산 정양사가 창건됐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굳이 금강산을 찾아 사리를 봉안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키워드는 ‘미륵하생’, ‘1391년 5월’, ‘1만명’이다. 먼저 이성계는 왜 ‘미륵의 하생’을 기다렸다는 것일까. ‘미륵하생’ 신앙은 민중을 구원할 미륵불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후삼국시대 스스로 미륵불로 칭했던 태봉국 궁예왕(재위 901~918)이 그랬듯 민중이 도탄에 빠지는 말세에 나타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구세주의 출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고려말에도 그랬다. 1382년(우왕 8년) 고성에서 이금이라는 자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섰다. <고려사절요>는 “(술법을 부리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이 없어질 것”이라는 이금의 말을 믿고 “백성들이 다투어 쌀과 비단, 금은보화를 헌납했다”고 기록했다.

▲ 은제 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사리를 넣은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용기이다.  1390년 사리탑을 조성해서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의 이름을 새겼다.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승려 월암. 영삼사사 홍영통, 동지밀직 황희석,   그리고 박자청의 이름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불타는 착취대장
오죽 민중의 삶이 피폐했으면 혹세무민의 말에 현혹되겠는가 그럴만도 했다.
고려말 백성들은 극심한 외우내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1380년(우왕 6년) 왜선 500척이 충청·전라·경상도를 마구 노략질했다. 마을이 불탔고,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었다. 왜구는 노략질한 곡식을 배로 운반했다. 운반하느라 땅에 버려진 쌀이 한 자 두께나 될 정도였다.

<태조실록> 총서는 “포로로 잡은 어린아기까지 모두 죽여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고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뤘다. 2~3세 되는 계집아이를 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쪼개 깨끗이 씻어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기록했다. 나라안 사정은 어떠했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권필(1569~1612)의 <석주집>을 보면 참혹한 표현이 나온다. ‘가난’이라는 제목의 시다.

“남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지만(人無置錐地) 나는 본래 꽂을 송곳도 없다오(而我本無錐)….”

고려말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원래 고려의 토지제도는 나라가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갖고 관리들에게 일정 규모의 토지를 할당하는 것이었다. 할당 받은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관리들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접어들자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단계를 지나 겸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땅을 두고 7~8명이 앞다퉈 세금을 거둬갔다. 토지제도가 문란해진 것이다. 귀족들의 토지겸병이 극심해지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줄 토지가 사라져갔다. 백성들의 굶주림도 임계점을 넘었다.

세상을 뒤집을 명분을 찾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권문세가들이 독점·겸병한 토지, 즉 사전(私田)을 혁파함으로써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1389년(창왕 2년·공양왕 원년) 이성계 세력이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공·사전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것이었다.
“공전과 사전의 장부를 저잣거리에서 불살라버렸다. 그 불길이 며칠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태조실록> ‘총서’)

며칠이 지나도록 훨훨 타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토지대장 더미를 바라보며 백성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성계를 향해 만세를 부르지 않았을까. 고려 창왕은 불타는 토지대장을 바라보며 “고려의 토지법이 내 재위기간에 끝났구나! 애석하다!”(‘총서’)고 탄식했다. 고려왕은 한낱 기득권 세력의 대표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성계 세력은 내친김에 과전법을 시행했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에게 녹봉(봉급) 대신 경기도의 토지를 차등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과전을 받은 관리들은 수확량의 1할(10분의 1)만 세금으로 받았다. 기존에 수확량의 50%까지 내면서 수탈당했던 백성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쌍수를 들었다. 이 제도는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신진사대부, 즉 조선 건국의 주체들에게도 큰 힘을 주었다.

▲ 백자그릇 안쪽에 새겨진 명문. 신미년(1391년) 5월 시중 이성계가 1만명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신용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 ‘목자득국, 이성계!’
이성계 세력이 과전법을 시행한 것이 ‘1391년 5월’이라는 착안점도 재미있다. 이성계가 금강산에서 사리를 봉안한 때와 일치한다. 착취대장(토지대장)을 불태우고(1389년), 과전법을 실시한(1391년 5월) 이성계는 백성들에게는 구세주로 떠올랐을 것이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려고 하생한 미륵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랬으니 ‘1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금강산에서 벌어진 사리봉안식에 동참했을 것이다. 어떠한가?

한마디로 ‘1391년 5월의 금강산 사리봉안식’은 1만명의 지지자가 참석한 이성계의 ‘대권 출정식’이었다. 지지자들은 위화도 회군 뒤에 민간에서 널리 퍼졌다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의 구호와 함께 ‘이성계! 이성계!’를 연호하며 금강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목자득국’은 ‘木(목)+子(자)’ 즉 , ‘이(李)’씨 왕조가 도래한다는 사자성어이다. 이것이 최고급 석영유리로 제작했다는 이성계 발원 사리함의 사리기에 담겨있는 조선 왕조 개국의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