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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스크랩] 한국불교의 역사와 현황 BBS불교방송에서

잠용(潛蓉) 2015. 2. 22. 07:21

한국불교의 역사와 현황

한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 6월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오면서부터다. 고구려에서는 이때 성문사(省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으며, 다시 2년 뒤에는 아도(阿道)스님이 오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本紀)에 있는 이 기록은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불교 공전(公傳)에 관한 것이고, 이 보다 앞서 한국에 불교가 전래돼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있다. 《양고승전(梁高僧傳)》에 의하면 동진(東晋)의 고승 지도림(支道林:314~366)이 고구려의 도인(道人: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釋亡名으로 알려지고 있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지도림은 소수림왕 2년보다 6년 전(366)에 입적한 고승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불교는 고구려에 공전되기 전에 이미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A.D 384)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왔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은 이때 왕이 몸소 교외에까지 나가 마라난타를 맞았으며, 궁중에 초청해 공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고구려나 백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기의 사찰들이 거의가 흥국(興國)ㆍ흥복(興福)의 사명(寺名)을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라의 불교수용은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여러 가지 기록(삼국사기ㆍ삼국유사ㆍ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사람은 눌지왕(419~458)때에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墨胡子: 또는 阿道)라는 전도승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족장세력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그들의 반대로 전도활동이 어려웠다.

묵호자는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郡)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교화를 하다가 죽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法興王)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다음부터였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 3국이 불교를 공인한 뒤 한국의 고대불교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 전국 곳곳에는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불교를 신앙했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인도로 유학을 가서 불교의 깊은 뜻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해 주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승려들 가운데는 중국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칠 만큼 뛰어난 학승들이 많았다.

고구려의 승랑(僧郞:413~491)은 중국에 가서 구마라습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연구하고 이를 더욱 체계화시켰다. 중국의 무제(武帝)는 중국승려 10여 명을 뽑아 그가 거주하는 섭산(攝山)으로 보내 그의 학문을 계승케 했다. 또한 신라의 왕손인 원측(圓測: 613~696)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범어(梵語)ㆍ서장어(西藏語) 등 6개 국어를 통달하고, 유식학(唯識學)을 깊이 연구하여 존경을 받았다.

신라의 의상(義湘:625~702)은 당(唐)에 유학하여, 화엄학(華嚴學)을 깊이 연구하여 방대한 화엄사상을 법계도(法界圖)에 간략하게 요약해 스승을 놀라게 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하여 신라 화엄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한편 혜숙(惠宿)ㆍ대안(大安)ㆍ혜공(惠空)ㆍ원효(元曉)와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써 모든 사람들이 쉽게 불교를 이해하도록 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목해야할 인물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는 원효(617~686)다.

그는 불교의 모든 교리를 종합 통일하는데 노력하여 불필요한 종파간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논리방식은 각(覺)과 일심(一心)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와 종합이 자재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ㆍ《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등 수백 권의 저술을 했으며, 그의 학설은 중국에서도 자주 인용했을 정도다. 원효는 학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실천에도 탁월한 데가 있었다. 그는 나라 안 곳곳을 다니며, 쉬운 말과 노래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그때까지 귀족적 성격이 짙던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앞장섰다.

이 밖에도 신라에는 원광(圓光)ㆍ자장(慈藏)과 같은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해 불법을 펴는 데 주력해 고대사회에서 불교는 국교(國敎)의 위치를 굳건하게 했다.

669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917년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50년이라는 세월을 유지했다. 통일신라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ㆍ후기로 특징이 나누어진다. 전기는 한국 불교사상(佛敎史上) 경론에 대한 주석이 가장 활발했던 때다. 원효ㆍ원측ㆍ의상은 물론이거니와 의적(義寂)ㆍ도증(道證)ㆍ승장(勝莊)ㆍ도륜(道倫)ㆍ대현(大賢)ㆍ현일(玄一)ㆍ신방(神昉) 등이 이 시기에 활약했던 고승들이다.

이들의 저술을 보면 대체로 경(經)으로는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ㆍ《법화경(法華經)》ㆍ《화엄경(華嚴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ㆍ《열반경(涅槃經)》ㆍ《금광명경(金光明經)》ㆍ《범망경(梵網經)》 등이고, 논(論)으로는 《광백론(廣百論)》ㆍ《유가론(瑜伽論)》ㆍ《유식론(唯識論)》ㆍ《인명론(因明論)》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에는 선법(禪法)이 전래되어 새로운 불교를 태동시켰다. 헌덕왕(憲德王:882년) 때 도의(道義)스님은 당(唐)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남돈선(南頓禪)을 전래했다.

이후 신라고승들은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선(禪)을 배워 속속 귀국함으로써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차례로 성립했다. 구산선문이란 도의(道義)가 개창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필두로 하여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범일(梵日)의 사굴산문(闍掘山門),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무염(無染)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도헌(道憲)의 희양산문(曦陽山門),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구산선문의 흥기는 교학(敎學)불교가 중앙귀족의 집권체제에 영합했던 데 비하여 지방호족의 무사적 기질과 선(禪)의 논리가 맞아떨어진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후의 선(禪)은 한국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체계로 위치를 확고히 했으며, 이 전통은 오늘에도 여전하다.

신라 말 중앙귀족의 부패와 어지러운 정세를 반영하여 일어났던 후삼국은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王建)에 의해 재통일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전조(前朝)와 같이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으며 승려들을 우대했다. 그러나 고려불교는 통일신라기의 불교처럼 교학과 실천면에서 생기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민중들은 신라말기의 혼란과 퇴폐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를 자기극복과 완성을 위한 목적으로 보기보다는 현세적 삶을 안일하게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따라서 신앙도 현세의 복락을 추구하는 기복주의(祈福主義)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도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자로서 출가하여 고승이 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교의로 결사(結社)운동을 일으킨 지눌(知訥) 등이 바로 그 주역이다.

의천(義天:1055~1101)은 당시 불교계가 혼미해짐을 우려하여, 교학과 관행(觀行)을 아울러 닦을 것을 강조했다. 교학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교리를 이해함이 없이 종교적 체험만을 위주로 하는 일은 위험하며, 그 반대로 논리에만 치중하는 것도 불교적 이상을 실천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또한 중국에 가서 숱한 장경(藏經)을 수집해 돌아왔으며, 천태종을 제창해 고려불교의 새로운 기풍진작에 힘썼다.

지눌(知訥:1158~1210)은 중국에서 발전한 혜능선(慧能禪)을 그 사상적 근간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불교교학 전반에 걸쳐 폭넓게 공부를 하여 한국선(韓國禪) 확립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선(禪)을 중심으로 하되, 선과 교를 혼합하여 독특한 불교를 선양했다. 또 어떤 특수한 종파나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불교의 진수가 되는 것은 자유롭게 수집하여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그의 사상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ㆍ《진심직설(眞心直說)》ㆍ《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지눌의 사상은 그의 선배인 원효나 의천이 지향하였던 종파불교 통합재창조의 노력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고려일대에는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임제선풍(臨濟禪風)을 선양한 태고(太古), 고려 말 불교계를 빛냈던 나옹(懶翁)과 같은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의 불교가 이처럼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보호정책 때문이었다. 고려는 광종(光宗) 9년(958)부터 승가(僧科)라는 승려과거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위신과 자질을 높이는 데 힘썼다.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실시한 이 제도는 합격자에게는 선종의 경우 대선(大選)→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주었으며, 교종은 삼중대사(三重大師)까지는 선종과 같고 그 위의 법계로는 수좌(首座)→승통(僧統)이라는 법계로 진급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 선종의 선사ㆍ대선사, 교종의 수좌ㆍ승통의 법계에 오른 승려 가운데 덕망이 높은 자는 특별히 왕사(王師) 또는 국사(國師)로 받들고, 왕의 정치ㆍ학문ㆍ인격도야를 위한 스승이 되게 했다.

고려 왕실은 또 국난극복과 국가흥륭을 위해 각종 불사(佛事)와 법회를 자주 열었다.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고려대장경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기 위해 조판(雕板)되었고, 백고좌회(百高座會) 팔관회(八關會) 등도 국태민안을 위해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불교에 대한 지나친 비호와 사원경제의 비대화는 승려의 타락을 초래했고, 각종 법회의 남설(濫設)은 국가재정마저 탕진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로 인해 조야(朝野)에서는 일찍부터 불사(佛事)의 폐해가 자주 지적되었으며, 마침내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이 일어나면서 배불론이 거세게 대두하는 원인이 됐다.

이성계가 무혈정변(無血政變)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 조선(朝鮮)을 창업하자 불교는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조선왕조의 중심세력은 주자학을 치국이념으로 내세운 유자(儒者)들이었고, 이들은 극렬한 상소로 불교배척운동을 벌였다.

조선왕조 세 번째 임금 태종(太宗)은 조정 중신의 요청에 따라 제종(諸宗)폐합을 단행, 11종을 7종으로 줄이고, 사찰소유 토지를 몰수했다. 노비는 군정(軍丁)으로 충당했고, 도첩제를 엄하게 실시해 승려가 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이어 세종(世宗)은 7종을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줄이고, 사찰도 양종에 각 18개만 남기고 모두 폐지시켰다.

연산군은 사찰을 기방(妓房)으로 만들고, 승과(僧科)를 폐지시켰으며, 중종(中宗)은 불상을 녹여 군기(軍器)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승려는 환속했고, 사찰은 폐허가 되어 전래 이후 2천여 년 간 찬란했던 불교는 명맥을 이어가기에 급급해야 했다. 물론 세종은 만년에 이르러 불교를 숭상했고, 세조(世祖)는 불교중흥에 애를 쓰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일 뿐 정부의 정책변화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불교는 명종(明宗)대에 이르러 수렴정치를 하던 문정왕후의 비호아래 풍운의 승려 보우(普雨)를 앞세워 승과를 실시하고 부흥운동을 벌이지만, 끝내는 유자(儒者)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척불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변함없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승려는 대개 산중에 은거하는 산중불교(山中佛敎)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혹심한 탄압아래서도 불교는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명종 대에 일시 부활된 승과에 의해 청허(淸虛:1520~1604)와 유정(惟政:1544~1610)과 같은 인물의 배출은 조선시대 불교계로서는 커다란 힘이요, 활력소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의 승도(僧徒)를 규합 구국항마군(救國降魔軍)이라는 승군을 조직해 전쟁에 나가 싸워 전공을 세웠다. 이들의 활약으로 정부의 탄압은 약간 고삐를 늦추었다. 이때를 기회로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같은 시대의 부휴(浮休:1543~1615)도 뛰어난 고승이었다. 그의 문하에는 벽암(碧岩)과 같은 인물이 배출돼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모두 청허와 부휴의 문손(門孫)이다. 청허의 문하에서는 편양(鞭羊)ㆍ풍담(楓潭)ㆍ월저(月渚)ㆍ환성(喚惺) 등이 법맥을 이었고, 부휴의 문하에서는 벽암(碧岩)ㆍ응준(應俊)ㆍ처능(處能)ㆍ자초(字初)ㆍ성총(性聰) 등의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승려의 사회적 신분이 현저하게 저하돼 도성출입마저 제한을 받을 지경이 됐다. 이 치욕스러운 법령은 일본승려들의 탄원에 의해 1875년 해제되나, 오랜 기간 탄압에 의해 자립의 힘을 잃은 불교계는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시대사조에 능동적인 대처를 못하고 방황했다.

이 무렵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의 병탄(倂呑)을 위해 일본불교를 앞세워 민심을 선무했다. 한국불교는 일본의 숨은 야욕을 모른 채 도성출입금지 해제의 은혜에 연연해 친일 경향을 나타냈다.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고 31본산제를 운영했다. 이에 대해 불교계는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 항일운동에 나섰다. 3ㆍ1운동에 한용운ㆍ백용성 등이 민족대표로 참여했으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많은 선각적 승려와 불교계 인사들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이후 한국불교계는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국토의 분단으로 이북에서는 종교 활동이 금지됐고, 사찰은 다시 폐허화됐다. 일본불교가 남기고 간 유산인 대처(帶妻)문제를 해결키 위해, 1954년 ‘정화운동’을 시작했으나,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대처 측과의 싸움으로 번져 쓸데없는 정력낭비가 되고 말았다.

1962년 공화당 정부는 일제의 사찰령을 모방한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하면서 이 지루한 싸움도 끝났다.

한국불교는 분규가 종식된 후 가장 큰 종파인 조계종을 비롯해 태고종(太古宗)ㆍ천태종(天台宗)ㆍ진각종(眞覺宗)ㆍ법화종(法華宗) 등 18개 종파로 분립됐다. 조계종은 한국불교 전통종단으로 승려가 1만여 명, 사찰은 전국에 2천여 개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해인사ㆍ통도사ㆍ불국사ㆍ범어사ㆍ송광사ㆍ법주사 등은 모두 조계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신흥종단의 사찰은 새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교신도 수는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교리를 이해하는 정예화된 신자는 극히 적다. 한국불교 각 교단은 신자교육을 이해 매주 정기법회를 사찰단위로 갖고 있다. 법회는 어린이회ㆍ중고등학생회ㆍ대학생회ㆍ청년회ㆍ일반신도회로 구분하여 수준에 맞는 설법을 하고 있다.

승려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는 전국 25개 본사에 설치된 강원(講院)과 경기도 김포에 중앙승가대학교가 있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방법과 교과목으로 불교교리를 가르친다. 일반 교육기관으로는 종립(宗立) 동국대학교가 있으며, 이 대학 내에 불교대학이 설치돼 있다. 불교계가 세운 학교로는 이 밖에도 초등학교 1, 중학교 12, 고등학교 10개가 있으며, 이 학교들은 불교적 이념아래 교육을 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유아교육에도 관심이 높아져 전국적으로 100여개가 넘는 유치원을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불교가 이 나라의 가장 전통 있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신도들을 교화해야 할 승려들의 자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또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서양종교(기독교)의 폭발적 교세확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포교사업에 현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한국불교는 멀지 않아 박물관의 유물로 들어앉을지도 모른다.

출처 : 사유수(思惟修)/불교인의 모임
글쓴이 : 아사달(法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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