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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十牛圖의 修行과 自我實現

잠용(潛蓉) 2015. 3. 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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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牛圖의 修行과 自我實現

 

 

김 말 환 *

 

 

목 차

 

Ⅰ . 머리말
Ⅱ. 普明禪師의 牧牛圖
Ⅲ. 廓庵禪師의 十牛圖
Ⅳ. 牧牛圖와 十牛圖의 比較
Ⅴ . 맺는말

 영문초록

 

 

Ⅰ. 머리말

 

한국 사찰 대부분의 壁畵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거나, ?十牛圖?가 그려져 있다. 이 ?십우도?는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나아가는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써 열 가지 단계의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선수행 초보자에게 자신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또한 선수행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에 그 根本的인 目標가 있으며, 妄念을 버리고 참된 마음을 發見하는 것과 自我를 확인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다.

 

?십우도?와 같이 그림을 통해 수행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經典이나 語錄 등과 같은 문자를 통해서 얻는 것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十牛圖?는 일찍이 중국의 普明禪師(11세기: 송대스님)의 牧牛圖廓庵禪師(1150년 전후로 추정: 碧巖錄으로 유명한 원오극근과 동문인 大隨元靜의 제자)의 십우도 등을 볼 수 있다.

?십우도? 연구에 유명한 柴山全慶은

 

“普明의 牧牛圖의 思想的 성격은 漸修頓悟적으로 觀心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曺洞禪적인 것이며,

이해 반해 郭庵의 十牛圖의 思想的인 성격은 臨濟禪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고 하였다.

이처럼 두 그림은 공통점이 있으나 서로 상이함을 나타내고 있다.

普明의 ?목우도?가 客塵煩惱로 인하여 迷妄이 가득한 마음에서 벗어나, 본래의 心性인 깨달음의 覺心으로 올라가는 수행과정이라면, 廓庵의 ?십우도?는 잃어버린 참 自我, 本性을 찾아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와같은 두 십우도를 통해 두 선사의 선수행에 있어 깨달음의 과정을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십우도?는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깨끗하고 깨어 있는 그곳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은 심리학적 측면에서 자아실현을 위한 심리발달과 성장을 위한 과정과 그 맥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비교고찰 하고자 한다.

 

* 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육군 사령부 군종 참모 대령.

1]柴山全慶, ?十牛圖?, (東京, 基中堂), p.66.

 

 

Ⅱ. 普明禪師의 ?牧牛圖?

 

普明선사는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종의 세력이 점점 확산되면서 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지침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십우도?의 중심으로 소를 등장시켰다. 길들여진 소는 농경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줄뿐만 아니라, 중국 선원의 노동과 수행을 하나로 하는 禪農一致의 수행관에서 소를 길들이는 방법이 마치 선수행과 비교하여 마음을 調伏 받고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학으로 승화시켜 마음 다스리는 심리적 묘사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보명의 열 가지 牧牛 그림의 변화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으며, 열 가지의 그림 제목은 未牧․初調․受制․廻首․馴伏․無碍․任運․相忘․獨照․雙泯이다.

 

열 가지 그림 중 첫 번째 검은 소를 붙잡는 未牧에서 네 번째 앞발과 머리가 흰 검은 소를 버드나무에 메어두고 있는 그림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 번째 그림은 ‘未牧’라는 제목으로, 아직 길들이지 않은 달리는 검은 소를 목동이 붙잡으려 하고 있다. 여기서 소는 본연의 心性, 참 性品 곧 覺心이다. 참 性品이 妄心으로 인해 산란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調伏받기 위해 수행에 나서는 제1단계이다. 본래는 깨어 있는 마음이지만 無明으로 인해 허망한 마음이 생겼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사나운 뿔을 하고 부르짖는 모습으로,

계곡과 산을 날뛰어 길을 따라 소요하니

한 조각 검은 구름이 계곡에 걸쳐 있네

누가 알겠는가 걸음걸음에 아름다운 싹을 범함을

 

이처럼 ‘未牧’은 忘情에 집착한 야생적인 들판의 소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면서 미친 듯 純化의 각성을 보이지 않는다. 迷妄의 검은 구름이 마음의 골짜기를 뒤덮어 빛을 가리며, 논이나 밭 들판의 경계도 없이 새싹을 밟아버리고 있다.

 

‘길들이지 않는 소’란 본연의 心性, 本有의 覺性인 心牛가 客塵妄情 때문에 오염되어 야생적인 소로 변하여 목동을 따르지 않고, 외양간을 잃어버린 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길들여지지 않은 소를 길들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달마대사가 "二入四行 "에서 가르친, 妄을 버리고 眞으로 돌아가는 것(捨妄歸眞)과 같다. ‘망을 버린다’것과 ‘眞에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생각 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동일한 물체의 양면성이며, 妄을 버리는 것이 바로 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一寸의 오염된 것이라도 버리는 것은, 一寸이라도 자기를 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림은 ‘初調’라는 제목으로, 최초로 목동이 소를 잡아 길들이는 모습이다. 다만 코 끝만 희고 나머지는 검은 소의 그림이다. 목동이 소를 잡았을 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수행의 초보 단계에 와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새끼줄이 있어 달리는 소의 코를 뚫으니

한번 날뛰면 아픈 채찍을 가하나

종래의 劣性을 길들이기 어렵구나

또한 山童이 힘을 다하여 잡아당긴다.

 

이 게송에 대하여 일본의 柴山선사는

"初調는 최초로 소를 길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믿음을 일으키게 한다. 마음의 소가 汚染되었다고 통감할 때, 비로소 그 順化의 覺性을 믿고 야성적인 미친 소의 코를 향하여 수행의 끈을 잡아맬 수가 있다. 만약 망정을 향하여 도망간다면, 한층 더 강한 정진의 채찍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야성에 오염된 心牛는 쉽게 진리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정진․노력․각고의 광명은 반드시 성대한 의기를 가지고 끈으로 고삐를 매지 않으면 안 된다."2]

2]蕂吉慈海 著, 韓普光 옮김, ?禪淨雙修의 展開?, (서울 : 민족사, 1991), pp.94-95.

 

고 해설하고 있다.

이처럼 소를 길들여 온순한 소를 만들듯이, 사람에게도 누구나 훈련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의지력을 키울 수 있으며, 客塵煩惱를 버릴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수행의 채찍이 마련되게 된다.

 

일찍이 ?涅槃經? 계통의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에서도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를 길들이는 비유가 나온다.

 

"이미 戒에 머물게 되었으면 五官(눈․귀․코․혀․피부)을 잘 거두어 五欲(色․聲․香․ 味․觸의 五境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다섯 가지 정욕)에 들어가지 말게 하라. 이를테면 소치는 사람이 회초리를 쥐고 단속함으로써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만약 五官을 제 멋대로 놓아버리면 오욕뿐만 아니라 가는 곳이 끝없어 마침내는 막 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나운 말과 같아서 단단히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그 수레에 태운 사람을 구렁이에 내동댕이칠 것이다.

… 이 마음을 놓아버리면 모든 착한 일을 잊어버리게 되지만 그것을 한곳에 모아 두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을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기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3]

3]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大正藏12, p.1111上).

 

고 하여 五官을 다스리되 소를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하여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세 번째 그림은 ‘受制'로서 머리부터 앞까지는 희게 되었지만, 몸은 아직 검은 소를 몰고 가는 목동이 그려져 있다. 惡을 행하지 않고 善을 행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점차로 길들이고 調伏 받아 날뛰는 것을 멈추고

물을 건너고 구름을 헤쳐 걸음걸음 따르며

손에 끈을 잡아 조금도 늦춤이 없으나

목동은 하루 종일 피로를 잊는다

 

漸調漸伏한다는 것은 ‘중생을 調伏하여 끝내 날뛰는 것을 멈춘다’는 것으로, 身․口․意의 三業을 점차로 조화하여 모든 악을 제어하여 調伏하는 단계를 말한다.

 

 

 

 

 

네 번째 그림은 ‘廻首'로서 앞발과 머리가 흰 검은 소를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있는 목동이 그려져 있다. 자기의 날뛰는 마음을 점차 가라앉혀 마음과 경계가 점차로 상응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오랜 날의 많은 공으로 비로소 머리를 돌렸도다.

미친 듯한 마음, 점차로 다룸이 부드러워지지만,

목동은 아직도 전체의 모습을 다 보지 못하고

오직 끈을 잡고 또한 잡아맨다.

 

이처럼 마음과 경계가 상응하여 가지만 아직도 방심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소를 나무에 매어 두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비록 그 나아가는 방법은 알 수 있으되 행동화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만 정진의 실마리는 보이지만, 아직도 순일한 단계는 멀고 험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섯 번째 그림 ‘馴伏’은 목동이 소의 고삐를 놓고 있으며, 일곱 번째 그림 ‘任運’에서는 검은 소가 흰 소로 변하여 풀을 뜯고 목동은 졸고 있다.

 

 

 

 

 

다섯 번째 ‘馴伏’에서는 몸의 앞 부분만 흰 검은 소가 고삐도 없이 목동의 뒤를 따라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검은 소를 극복하고 점차 心牛와 자기가 동일선상에서 외부의 경계를 멈추고 내부의 순화로 돌리는 단계에 왔음을 보여준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푸른 버드나무 그늘 아래 옛 시냇가에서

오고 감이 자연스러우며,

해질 무렵 푸른 구름 덮인 芳草의 땅에

목동이 오고 감에도 고삐가 없구나.

 

위의 게송에서처럼 매둔 고삐를 풀고, 푸른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롭게 노니는 것은 心牛와 자기가 하나 되어 내부의 妄念마저 쉽게 되는 깊은 정진의 과정에 도달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여섯 번째 ‘無碍’의 그림에는 꼬리 부분만 검은 색이 남아 있는 흰 소가 앉아 있다. 그 옆에는 피리를 불고 있는 목동이 그려져 있다. 妄情野性과의 싸움이 종결되고 편안하게 태평가를 부르며 목동과 心牛가 하나되는 단계에까지 올라간 경계를 말한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露地에서 편안하게 잠자며, 그 뜻이 스스로 같으니

채찍을 잡을 수고로움 없어 영원히 메어두지 않고,

목동은 푸른 소나무 아래 편안하게 앉아

태평가의 한 곡을 스스로 즐기는 구나

 

아직도 그림은 꼬리부분에 검은 부분이 남아 있어 수행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종결에 가까워옴에 대한 환희로서 태평가를 즐기고 있다.

 

 

 

 

 

일곱 번째 그림은 ‘任運’인데, 꼬리만이 검은 흰 소가 풀을 뜯어먹고 그 근방에 목동이 졸고 있는 모습이다. 정진의 행이 점차 성숙되어 行과 解가 상응하고, 信과 行이 일치하며, 먹고 마심에도 자유로운 목동과 心牛가 하나되는 단계의 수행를 보여준다. 心牛는 움직이나 이미 삼매의 경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버들가지 봄바람에 날리는 저녁나절에

푸른 풀밭 위에 연기 자욱한데,

때맞추어 배고프면 마음껏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며

목동은 돌 위에서 곤한 잠을 자는구나.

 

라고 하여 흰 소와 목동이 하나가 되어 더 이상 수행의 의미가 없는 상태에 도달했음을 노래하고 있다.

 

 

여덟 번째 그림 ‘相忘’부터 열 번째 그림 ‘雙泯’의 그림을 보자.

 

 

 

 

 

여덟 번째 ‘相忘’으로 구름 위에 흰 소와 목동이 상대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먼 지상을 떠나 聖位에 오른 단계이다. 목동과 심우 즉 자기와 萬相이 平等一如가 되어 한 점의 汚染도 보이지 않는 수행의 극치에 오른 경계에 와 있는 것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흰 소가 항상 흰 구름 속에 있으니

사람은 스스로 무심하며, 소도 또한 그와 같구나

달이 白雲을 뚫으니 구름이 희게 비치고

白雲에 밝은 달이 동서로 맡겼더라.

 

이 게송을 柴山 禪師는

 

"흰색 천지의 세계는 정진의 극치이다. 밖으로 대립하지 않고 안으로 차별하지 않으며, 자기와 만상과 等等一如, 人牛等位自他平等이다. 法性三昧․理三昧, 먼 지상을 떠나 聖位에 오르며 八面玲瓏하여 한 점의 오염도 보이지 않고, 내외의 구별도 없다.

心牛가 목동을 비추고 목동이 心牛를 비추며, 주가 객을 비추고 객이 주를 비춘다. 소는 소를 잊고 法性으로 되며, 사람은 사람을 잊고 法性이 된다. 산은 산을 잊고 강은 강을 잊고 오직 法性으로 된다.

누각의 아래위에서 물이 불을 비추고, 마차가 오가면서 사람이 사람을 본다. 이는 如如․等等의 세계이다. 모두가 다하면 하나의 法性으로 된다. 자기도 세계도 지양하여 다한 純眞無作의 경지이다.

純白은 無心이며, 사람도 소도 等位의 物性으로서 소와 사람, 주와 객의 차별은 없다.

이는 영롱의 세계, 純眞의 세계이며, ‘聖’ ‘位’이다. 山川草木을 法性으로 비춘 等位無差別, 主半無盡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또한 柴山 禪師는 ‘相妄’을 해석하여 ‘주객이 각각 자기를 부정하고 無自己의 등위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相․等․如’를 가진 내면적 구조는 단적으로 ‘하나’가 아니고 ‘둘’이상의 것이 동일의 차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가 아니고 많은 것이 質에 있어서나 理에 있어서나 동등하며, 하나인 것이다." 4]

4] 전게서, pp.102-103.

 

라고 해석하고 있음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젠 소의 꼬리마저 희게 되어 수행의 완성이요, 더 이상 汚染 될 것이 없고, 汚染되지도 않는다. 四禪定에 있어 四禪의 단계에 올라왔다. 쾌락마저도 滅盡한 경계이다.

 

 

 

아홉 번째 ‘獨照’로서, 흰 소는 없어졌으며 홀로 있는 목동이 손을 들어 노래를 부르는 그림이 있다. 소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수행해야 할 대상도 없는 깨달은 自己, 법성의 自己이며, 깨닫기 이전의 자기와는 다른 참된 자기로 올라온 단계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송아지 없는 곳에 목동은 한가롭고

한 조각 구름이 높은 봉우리에 걸려 있도다.

밝은 달빛아래 손뼉치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저 태평함이여

 

이에 대해 柴山 禪師는 이것을 해설하기를,

 

"法性에 철저한 자기란 자기를 부정하기를 다한 絶對無의 것으로 드디어 자기도 법성도 理도 아니다. 이 絶對無에 철저했을 때 홀연히 자기 아닌 자기가 소생하는 부사의 한 심리적 비약이 온다. 이는 獨照의 자기 비약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약을 체험한 뒤의 자기는 覺體의 자기, 法性의 자기이며, 깨닫기 이전에 보는 자기와는 그 질이 전연 다르다.

깨달음 그것은 참된 자기로서의 자기이다. 人位의 자기가 아닌 聖位의 자기이다. 종교적 수행의 과정은 이러한 비약에서 최후의 証果를 성취하며, 드디어 이루어야 할 보살도 없으며, 제도해야 할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안의 한 조각 달빛에 수많은 집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나는구나’라고 한다.

일체의 佛眼에 비친 光明三昧이다. 山川草木 穢土淨土 이 광명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換骨脫退 즉 이미 옛날의 중생의 마음이 아닌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한 상태이다. 본래 本覺과 始覺은 하나이다. 心牛와 목동은 하나이다. 송아지 없는 곳에는 목동도 없다.

獨照의 목동은 佛位의 목동, 絶對 主體的 목동이지 이미 인생대립에 선 목동이 아니다. 구름 속의 높은 산봉우리의 절경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聖位의 상징이다. ‘노래도 춤도 법의 소리이다’ 聖位의 삼매는 일거수 일투족이 광명이 아님이 없다. 그래서 ‘天地一指’, ‘萬物一馬’의 穩坐地도 敎外別傳(참된 선)의 一關은 猶透過를 보류시킨 경지에 지나지 않는다." 5]

5]전게서, p.104.

 

라고 설명하고 있다.

 

柴山禪師의 이야기처럼 인간의 지위가 아닌 聖位의 지위이며, 최후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이루어야할 보살도 없고 제도해야할 중생도 없는 禪定三昧에서 노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聖位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열 번째 그림은 ‘雙泯’으로 다음과 같이 一圓相이 그려져 있다.

 

깨닫고 돌아보니 흔적을 남기는 그 자체가 無理數이다. 그러므로 참된 禪의 가르침은 敎外別傳이며, 禪 수행의 진수는 無佛無聖이 아니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다 包容하였으나 오직 표현하자면 일원의 相으로 밖에 할 수 없다. 절대자유, 얽매임이 없는 대자유, 佛位의 단계를 초월한 無位에 있는 禪 중의 禪의 단계에 올라간 경계를 말하고 있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고 그윽한 흔적도 없는데

밝은 달 찬 빛에 만상은 텅 비었네.

만약 누가 그 뜻을 묻는다면

들꽃 방 초가 스스로 총총하구나.

 

이것에 대하여 柴山 禪師는,

 

"선의 참된 가르침은 敎外別傳이며, 종교이상의 극치인 聖位佛位의 지양이다. 그러므로 禪생활의 진수는 오히려 無佛無聖이 아니면 안 된다. 만약 佛位를 말한다면 佛位를 격하시킨 ‘凡位의 佛’이다. 天上佛이 아니고 地上佛이라 할 수 있다. 완전에로의 향상은 佛位에 다함을 우려한다. 그러나 불완전의 향하는 무한대의 遊化이며, 四句誓願의 발전이다. 절대자유의 경지는 차라리 佛位를 초월한다. 無位에 있는 禪의 禪인 생명이다. 사람과 소는 이미 相忘에서 그 人位, 牛位를 法性으로 지양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佛位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선은 이 종적도 남기지 않는 한 면에서 본다면 만상이 적적하여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만상이 텅 빈 위에 불도 중생도 자기도 세계도 있는 그대로 法位에 머무는 大肯定의 遊化가 있다. 沒蹤跡과 無碍三昧와는 실로 ‘唯佛無佛’의 無心의 妙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雙泯은 사람과 소를 의식하는 느낌에 있어 선의 참된 경지를 나타내는 데는 상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泯絶’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聖位나 佛位의 흔적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泯絶’ 또는 ‘雙泯’은 선종 초기 사람들의 종교적 이상이었던 ‘寂然無爲’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데 많이 사용되었던 단어이다."6]

6]전게서, pp.105-106.

 

라고 선수행의 마지막 단계의 그림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蕂吉慈海교수는,

 

"이와 같이 普明禪師의 牧牛圖에 나타난 사상적 특질은 그 궁극의 세계를 ‘雙泯’과 ‘圓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 원상은 단순히 공이나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보명선사의 종교적 경지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無一物中 無盡藏이라고 하듯이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무한한 圓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처음에 검은 소가 차차로 흰 소로 변화해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漸修的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雙泯’을 거쳐 ‘圓相’에 도달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면이 보이지만, 그로부터 깨달은 뒤의 수행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그것이 일원상에 머문다고 한다면 그것은 禪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일원상이 무한의 활동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명의 ?十牛圖?가 ‘圓相’을 가지고 최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보명의 ?十牛圖?의 특색이라고 말한다면, 그때까지는 아직도 충분하게 禪 수행의 절차를 표현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실에의 還相性이 결핍된 보명의 ?十牛圖?는 선의 본질을 충분히 나타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7] 7]전게서, p.106.

 

라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迷한 마음을 근원적인 본래의 자기의 진면목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선수행의 획기적인 내면의 역동성을 외부로 표현했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에서 ⑧까지는 迷의 세계를 벗어나는 수행의 단계이며, ⑨는 깨달음을 성취하여 자유를 얻은 단계이며, ⑩은 ‘寂然無爲’적인 경지로서 일체의 경계를 包攝한 절대무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보명선사는 중생의 마음을 수행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圖式하여 심리상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간심리의 투사장면을 현대 심리치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서양심리학자들과 비교한다면 일찍이 큰 성과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Ⅲ. 廓庵禪師의 十牛圖

 

앞서 살펴본 보명선사의 ?목우도?는 길들여지지 않은 검은 소에서 점차로 길들여져 가는 흰 소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은 본래의 본성에서 잃어버린 본래의 본성으로 돌아오는 점진적 수행과 더불어 깨달음으로 점점 비화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과는 반대로 곽암선사의 ?십우도?에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彷徨을 거듭하다가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찾아 소를 길들이면서 소와 목동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고, 진실의 자기로 회복하여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수행과 더불어 깨닫고 난 후, 다시 저잣거리에 돌아와 중생 구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깨달은 자의 참 모습이 보여진다. 이것은 단지 깨달음의 깊이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그 과정을 열 단계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의 순서로서, 尋牛․見跡․見牛․得牛․牧牛․騎牛歸家․忘牛存人 ․人牛俱忘․返本還源․入廓垂手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소를 찾아 나서는 ‘尋牛’에서 네 번째, 소를 얻는 ‘得牛’까지의 그림의 변화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尋牛’이다. 소를 찾아 산길을 가는 목동의 그림이다. 소는 자기의 마음이다. 자기본래의 성품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 시작된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茫茫撥草去追尋 :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水闊山遙路更尋 :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力盡神疲無處覓 : 힘 빠지고 피로해 소 찾을 길은 없는데

但聞楓樹晩蟬吟 :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 매미 울음만이 들리네.

 

이처럼 마음의 소를 찾는 진리의 탐구는 망망한 광야를 헤치고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잃어버린 소가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는 데서 구도의 수행이 보인다. 이는 곧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며, 내적으로 심각한 변화를 모색해 보고자하는 변화의 충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충격이 내적 변화의 달성을 도모하는 데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이것에 대하여 일본의 柴山선사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우리들이 참선 생활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大勇猛心, 大信心을 일으켜 첫 발을 내디딘 경지이다. 곽암선사는 이 이상을 得牛(소를 얻는 것)보다 忘牛(소를 잊는 것)로서 소를 상징하고 있지만, 이 이상의 尋牛는 실재로는 밖으로 향해서 찾을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 속을 향해서 찾아야 할 眞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아의 自內証이 바로 곽암선사가 주장하고자 하는 수도의 근본 뜻이다. 곽암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주객의 분별을 떠난 근본 주체적 자기를 自內証이라고 함과 동시에 이것에서 생긴 것을 수도의 목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러한 진아, 이러한 심우는 득실의 세계를 초월한 것이며, 본래 찾고자하는 자신에게 심안을 밖으로 향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곽암적인 심우는 찾는 자신, 바로 심안을 안으로 향하여 정진하고자 하는 수행의 방향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선은 한번 버려진 진아의 발견이 단순히 지식만이 아니고, 생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말을 떠난 실천적 靜練苦修를 필요로 하고 있다." 8]

8]전게서, p.108.

 

이처럼 소는 분명히 자신 안에 있되 잃어버린 소와 같이, 자아 상실로부터 본래의 자아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시발점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다.

또한 최현각스님은 ?십우도?의 강의에서,

 

 

"예로부터 禪詩 문학에서 백미를 자랑하는 이 十牛歌는 불도 수행의 진면목을 상징하고 있다. 깨치는 상태를 소로 빗대고 목동과 소의 관계와 동작을 철학적 詩語로 표현한 것은 마치 시청각적인 효과마저 있어 매우 감동적이다. 禪이란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것의 표현이지만 일단 선학적 체계를 가지고 설명을 요하면, 반드시 문자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언어적 표현을 빌어 선의 당체에 이르고자 함은 현실적 요구이자 학문의 필수 요건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십우도?의 序文격인 ‘소 찾아 나서다’(尋牛)의 요지는 소 즉 자기 마음을 찾아 나서는 수행자의 첫 걸음을 표현하고 있다. 소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어디에 있겠지 하고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찾는다. …(중략)… 진리는 저 높은 곳에나 저 산 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행복 된 꿈이 자기의 위치된 현장에서 유리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현장에 있다. 불교나 참선이나 수행도 다 인생을 영위하는 현실에서 얽혀 나아간다. 지금 ‘소 찾아 나서는’ 서문은 부질없이 화려한 밖을 향하지 말도록 간곡히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소를 찾아야 한다. "9]

9] 최현각, ?선학 강의?, (서울: 불입출판사, 1984), p.122.

 

고 하여 ?십우도? 서문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소는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가까이에서 찾는다는 것은 항상 있지만 보지 못한다는 것이며, 보는 눈이 변해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는 심리치료에 있어서도,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잘못 알고 헤매는 등의 심리적 불안에 대하여 상담자가 내담자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전달하여 바르게 보도록 해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두 번째는 ‘見跡’이다. 목동이 소의 발자취를 발견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소의 형상은 비록 볼 수 없으나, 소가 있는 발자국을 발견하여 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곧 자기를 찾으려고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자기를 의식하는 수행의 단서를 포착한 단계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水辺林下跡偏多 :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芳草離披見也麽 :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는가 못 보는가?

縱是深山更深處 : 가령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遼天鼻孔怎藏他 : 하늘 향한 들창코를 어찌 숨기랴!

 

게송은 좀더 구체적으로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을 보고, 방초를 헤치고 나아가,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하여도,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에 의해서 意를 알고 敎를 열람하여 자취를 알뿐, 본래의 자기는 알지 못한다. 본래의 자기에 눈뜬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 경전이나 가르침을 읽으며,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소의 발자국을 보는 것은 개념적으로 자기를 알뿐이며, 소를 얻지 못한 것과 같이 본래의 자기에 눈뜬다고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세 번째 ‘見牛’이다. 소의 꼬리를 보고 따라가는 목동의 그림이다. 찾아 헤매던 소가 비로소 나타났으며, 소의 발자국을 따라 소를 발견한 단계이며, 곧 자기의 발견 단계이다.

 

또한 이 게송에는

 

黃鸚枝上一聲聲 :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日暖風和岸柳靑: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하다.

只此更無回避處 : 단지 더 이상 회피할 곳이 없고

森森頭角畵難成 :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처럼 소의 꼬리를 보았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得牛’이다. 목동이 소를 얻어 고삐를 잡고 있지만, 소는 도망가려고 하는 그림이다. 이는 곧 도망가는 소를 붙잡아 자기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단계이다. 곧 본래의 자기 성품을 보았되 확실한 見性의 단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竭盡精神獲得渠 : 온 정신을 다하여 소를 잡았으나

心强力壯卒難除 : 마음이 강하고 힘이 세어서 다스리기 어려워라

有時纔到高原上 : 어느 때는 겨우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갔다가

又入煙雲深處居 : 또한 연기 자욱한 구름 깊은 곳에 숨으려 한다.

 

이제 소를 찾으려고 헤매다가 발자국을 찾고, 소를 발견하고, 소를 얻은 단계까지 왔다. 곧 깨달음의 단계에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는 곧 마음이니, 마음 즉 眞實된 참 마음은 “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마음과,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다”라는 그 마음을 의미한다. 잃어버린 본래의 참마음, 참나를 보고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요, 변화의 새로운 모습으로 가기 위한 첫 단계이다. 또한 여기서 소의 행위는 마음작용을 의미하며, 비록 소는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 야성이 남아서 잘 다루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채찍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그림 ‘牧牛’에서 들판에 있는 소를 기르다가 여섯 번째 ‘騎牛歸家’로서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림이다.

 

 

 

 

다섯 번째 ‘牧牛’이다. 소의 고삐를 잡아끌고 가는 목동의 그림이다. 소를 먹여 기르는 단계로서 깨달음 이후의 수행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의 고삐를 잡고서, 늦추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면서 방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 게송에는,

 

鞭索時時不身 :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恐伊縱步入埃塵 : 두렵도다,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 갈까봐

相將牧得純和也 :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鎖無拘自人 :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라고 하여, 생각 생각마다 心牛를 자기에게 길들이며, 찰나의 사이에도 티끌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일찍이 고려 普照國師 知訥스님(1150~1210)은 스스로 호를 ‘소치는 사람(牧牛子)’이라 하였는데, 이는 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修心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수행했다고 한다.

?普照法語? 「修心訣」에서,

 

"“저 이르되 몰록 깨달음이 비록 佛과 같으나 多生의 習氣가 깊은지라 바람은 머므르되 물결은 오히려 솟고 理致는 나타나되 생각은 오히려 침노한다 함이요 또 杲禪師(大慧宗杲선사)가 이르시되 가끔 가끔 利根의 무리가 많은 힘을 허비하지 않고 이 일을 처 發하면 문득 용이한 마음을 내어서 다시 닦아 다스리지 않다가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前을 의지해 流浪하여 輪廻를 면치 못한다 하시니 곧 어찌 可히 一期(한때)의 깨달은 바로써 문득 뒤에 닦음을 두겠는가? 고로 깨달은 뒤에 오래 동안 모름지기 照察하여 妄念이 忽然히 일어나거든 못내 따르지 말고 들고(損) 또 들어서 하염없이 없는데 이르러야 바야흐로 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이 이것이라.” "10]

10]?修心訣?, (?普照法語全? 金呑虛 譯. 서울: 回想社, 1961), pp.48-49.

 

고 하여 깨달은 후에 牧牛行을 강조하고 있다.

또 ?眞心直說?에서 지눌은 소치는 일을 마음 닦는 일에 비유하면서 소가 설혹 잘 길들여져서 말을 잘 듣는 듯해도 쉽게 채찍과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소가 곡식 밭에 들어가서도 곡식을 상하지 않는 경지까지 가야 비로소 고삐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11]고 하여 보조국사는 깨달은 후에도 철저한 수행을 당부하여, 頓悟漸修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몰록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여도 끝까지 그것을 지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리치료에 있어서도 상담자에 의해 내담자가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여도 내담자는 끝까지 완치될 때까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1] 前揭書 ?진심직설?, p.48-49,

“曰學道之人이 得眞心現前時에 但習氣를 未除하야 若遇熱境하면 有時失念하나니 如牧牛에 雖調到牽拽隨順處라도 猶不敢放了鞭繩하고 直待心調步穩하야 赶趁入苗稼中하여도 不傷苗稼하여서 方敢撤手也라 :

도를 배우는 사람이 眞心이 現前함을 얻을 때에 다만 習氣를 제하지 못하여 만일 익숙한 경계를 만나면 有時에 생각을 잃나니 소를 먹일 때 비록 調伏에 끌어 隨順하는 곳에 이를지라도 오히려 敢히 채찍 줄을 놓지 말고 바로 마음이 調伏하고 걸음이 평온하여 苗稼 가운데 들게 하더라도 苗稼를 상치 않음을 기다려야 바야흐로 감히 손을 놓음과 같은지라.”

 

 

 

 

여섯 번째 ‘騎牛歸家’이다. 소를 잘 먹인 후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 그림이다. 이제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소의 고삐도 필요 없다. 드디어 소는 유유히 걸어서 밖으로 도망가지 않으며, 티끌 속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목동 즉 자신이 소를 타고 오히려 소에 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소와 자신과의 갈등과 싸움과 시비가 없어졌으며, 소가 자연히 걷는 그대로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이것은 見牛가 始覺의 자리에 왔다면 騎牛歸家는 本覺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騎牛邐慾還家 :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羗笛聲聲送晩霞 :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놀에 실려간다.

日拍一歌無限意 :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知音何必鼓牙 :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柴山禪師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수도가 극에 달해 主客․人牛가 모두 理三昧에 이르려면, 따라서 사람과 소를 證得하고, 主․客에 들어가고, 客․主에 들며, 是非․得失 모두 함께 자기의 모양을 잊고 理에 통일된다. 그래서 無心의 사람, 無心의 소를 타고 本覺無相의 집으로 돌아간다.” 12]

12] ?禪淨雙修의 展開?, pp.117-118.

 

수도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파도가 있다하더라도, 평화로워 무사태평을 노래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갔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현각스님은,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상태는 소와 내가 하나로 일치된 경지이다.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통일된 상태이다. 소를 타고 가되 소에 맡긴 체 피리를 불며 유유히 귀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석양에 지는 아름다운 들녘을 배경으로 소 타고 돌아오는 모양은 한 폭의 예술이다. 소를 먹이는 한나절의 노력도 끝나고, 안식처를 찾아 집에 오는 모습은 선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의 맥락이 닿는다.” "13]

13]崔玄覺 엮음, ?선학강의?, p.147.

 

고 하여, 항상 마음과 현실이 상응되게 실천하는 깨달은 자의 아름다운 노래로 찬양하고 있다.

 

이처럼 깨달음의 극치는 평화로움과 즐거움이 함께 하며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리치료에 있어서도 내담자가 늘 불안과 공포에서 시름하다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또 참 자기로 돌아가 세상을 보는 밝은 눈을 얻었다면 얼마나 기뻐 할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다음은 일곱 번째 ‘忘牛存人’, 이미 길들인 소는 없고 목동만 있는 그림에서부터 열 번째 ‘入廓垂手’으로 포대화상이 큰 자루를 메고 마을로 나가는 그림이다.

 

 

 

 

 

일곱 번째 ‘忘牛存人’이다. 소는 없고 사람만이 집에 있으며 달이 떠 있는 그림이다. 찾으려고 애쓰고 먹이 주어 길들이기 애쓰던 소마저 버렸다. 왜냐하면 소를 찾고 보니 본래의 自己와 소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잃어버린 소와 잃어버린 사람이 결코 둘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는 하나되어 찾으려 하였던 소는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始覺과 本覺이 본래 하나인 깨달음의 단계에까지 올라왔다.

 

이 게송에는,

 

騎牛已得到家山 :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牛也空兮人也 : 소도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紅日三芉猶作夢 :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鞭繩空頓草堂間 : 채찍과 고삐는 초당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라고 하고 있다.

 

보명선사의 ?목우도?의 十頌 중 아홉 번째인 ‘獨照’와 같은 그림이다. ‘獨照’의 게송에서 “송아지 없는 곳에 목동은 한가롭고, 한 조각 구름이 높은 봉우리에 걸려 있도다. 밝은 달빛 아래 손뼉치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저 태평함이여”라고 했던 것과 같다. 즉 심우와 목동은 하나이며, 송아지 없는 곳에 목동도 없으며, 그 경계는 이미 절대 주체적 목동이지 인생 대립에 선 목동은 아닌 것이다. 이는 聖人의 위치이며, 부처님의 위치에 있는 깨달음의 위치이라고 할 수 있다.

 

 

 

 

 

여덟 번째 ‘人牛俱忘’이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一圓相만 그려져 있다. 이러한 단계는 더 이상 찾고 추구하는 경계를 뛰어넘은 言語道斷이며, 마음이 행하는 바도 멸할 곳도 없는 心行處滅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自覺의 근원이며, 참된 覺體이며, 無的인 자기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鞭索人牛盡屬空 :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나니,

天遼闊信難通 : 푸른 하늘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도다.

紅爐焰上爭容雪 :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雪을 용납하리오

到此方能合祖宗 :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이처럼 목동도 소도 더 이상 설 곳이 없는 아주 空寂한 본질에 도달한 경지이다. 적어도 제1~제7단계까지가 세속에서 탈출하여 도를 향하는 길이였다면, 제8단계부터는 수행의 정상에 이른 단계로서, 부처님의 경계이며, 둥근 달처럼 원숙한 인격을 갖춘 경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보명선사의 ?牧牛圖?에서 본다면 마지막 단계인 ‘雙泯’ 즉, 一圓相과 같은 경지이다.

 

 

 

 

 

 

아홉 번째 ‘返本還源’이다. 꽃․새․산․물 등 자연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깨친 뒤의 모습으로, 覺의 완전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깨달은 자는 변하였으나, 외부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세상과 깨치고 난 후의 세상을 보는 눈이 다만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肉眼이 아니라 法眼이요, 佛眼의 경지에 올라간 단계이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返本還已費功 :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爭如直下若盲聾 :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庵中不見庵前物 :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水自茫茫花自紅 :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柴山선사는 여기에서,

 

"全體卽眞⑧은 全體卽用⑨에로 돌아가는 것에서 禪은 창조적 자유성을 발휘한다. 절대부정은 절대긍정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禪의 체험은 내면적으로는 추상적 심리적 경험이지만, 외면적으로는 구체적 표현적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 禪은 활발한 움직임의 모습으로 생명을 지속한다. ⑧은 ⑨에 생명을 부여하고, ⑨는 ⑧에 의의를 부여하는 관계로 존재하며, 無로부터 有로의 발전은 동시에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⑨에서 歸源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단순히 상대의 존재로서 妄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無心․無證․無碍에 투철하면, 榮枯盛衰도 꽃이 날고 낙엽이 지는 것도 모두 無心의 길로서 本地風光(선종의 용어로서, 심성의 본래모습 즉 본래면목을 뜻함) 아닌 것이 없다. ‘月落不離天’에 따라 한 티끌을 받을 여유도 없다. 청산은 철저히 청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투고, 綠水는 철저히 녹수 그대로의 모습을 나투는 경지이다."14]

14]?禪淨雙修의 展開?, p.124.

 

고 하였다.

이는 곧 깨달은 후의 전체의 모습이 眞如 아닌 것이 없고, 그 쓰는 용도 또한 생명이 넘쳐흐른다. 그러므로 참된 선의 체험은 내면적으로는 추상적 심리적 경험이지만, 외면적으로는 구체적 표현적 행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⑨畵는 선의 妙用을 나타낸 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각스님도 이 그림에서,

 

“第九畵의 내용은 깨친 뒤의 세상사를 설명하고 있다. 세간은 깨치기 전이나 깨친 뒤에나 마찬가지 모습이겠지만 주체가 수용하는 존재 의미는 전혀 다르다. 물리적 세간이 다른 게 아니고 정신적 세간이 다르다. 즉 물리적 세간에서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보다, 정신적으로 체험돼 거듭난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그 질에서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한 좋은 例話가 있다.

?吳燈會元? 卷17 청원유신 장에 나오는 법문이다. ‘내가 참선하지 않을 때는 산을 보니 산이요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참선해 깨달은 바 있고 나서는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막다른 곳을 이해하고 보니 산은 의연히 산이요 물을 의연히 물이더라!’

이것은 유명한 例話지만 지금 제 9의 포인트는 막다른 곳을 이해한 상태의 노래이다. 그래서 본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진리는 저 산 넘어 있지 않다. 늘 자기가 놓인 위치에서 실천할 당연한 덕목일 뿐이다. 생활 속에 있다. 따라서 평범하고 일상적일 수밖에 없다. 신기하거나 기적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이나 평범 속에서 거듭나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거듭난 삶이 진정한 진리의 구현이요 근원에 닿은 지혜이다. 먼저 거듭나는 과정에서 충실한 일이다.” 15]

15]玄覺스님 엮음, ?선학강의?, p.162.

 

이는 바로 깨닫고 나니 본래 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이며, 더 이상 왜곡된 현실에서 누를 범하지 않는 단계이며,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바로 행한다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소, 즉 잃어버린 自我를 찾아 나아갔지만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다. 부정에서 부정이 되어 철저한 긍정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더 이상 산이다 물이다 是非가 끊어졌다. 즉, 절대 평온 안온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경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열 번째 ‘入廓垂手’이다. 포대화상이 큰 자루를 메고 마을로 나아가는 그림이다. 사바세계가 싫어졌고 세간이 싫어서 산 속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였건만, 깨닫고 보니 사바와 극락이, 世間과 出世間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보이는 모든 것이 정답고 아름다운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고, 중생의 세계로 다시 내려오신 그 뜻과 같다 하겠다.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露胸跣足入廛來 : 맨 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抹土灰笑滿 : 검정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不用神仙眞秘訣 :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直敎枯木放花開 :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이처럼 ‘싸리문을 닫고 홀로 고요하니 수많은 성인도 그 속을 알지 못하네, 자기의 풍광을 묻어버리고 옛 성현들의 간 길도 등져버린다.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오며,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룬다’고 하고 있는 것처럼, 철저한 無碍 道人의 보살행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蕂吉慈海교수는 이 ⑩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보살 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직접으로 역사의 세계에 나아가 여러 가지 현실의 苦惱를 제거하고, 따뜻하고 올바른 역사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방향과 또 하나는 역사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자기를 자각하게 하는 방향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가지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다. ?十牛圖? ⑧까지는 往相面(진정한 자기로 돌아감)이며, ⑨와 ⑩은 還相面(타인으로 되돌아감)인데, 이중 ⑨의 ‘返本還源’의 활동 가운데에는 위의 양면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진정한 菩薩행이나 佛道라고 하는 것은 ⑧의 ‘人牛俱忘’을 주체로 하고, ⑨의 返本還源적인 모습으로 활동하고자 함으로써 자기에게 비로소 열반에 머물지 않는 無緣大飛를 행한다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⑩의 ‘入廓垂手’이고 참으로 저자 거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16]

16]上偈書, p.128.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적절하다고 본다. ①에서 ⑧까지는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이라면, ⑨와 ⑩, ‘返本還源과 入廓垂手’는 깨달은 후의 활동으로서, 열려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無緣大悲로서 온 중생을 포용하여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 가고자하는 실천행으로 볼 수 있다.

 

 

Ⅳ. 牧牛圖와 十牛圖의 比較

 

깨달음에 있어서 단계적 표현은 불교의 기본 교리에서부터 나타난다.

 

그 기본교리인 四聖諦 즉 苦․集․滅․道로서, 苦를 벗어나 滅道에 이르는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苦의 원인은 무엇인가? 곧 苦의 원인이 集이다. 그 集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苦는 없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滅의 결과가 되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道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의 실천은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는 등 八正道의 수행이다.

 

또한 불타의 깨달음의 핵심인 緣起法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상호조건 속에서 존재되어지므로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도 곧 제거된다는 것이다. 또한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있을 까닭이 없다. 모든 존재 그 자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四聖諦에서, 최초의 괴로움의 원인인 集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그것은 無明에서 시작된다는 12 緣起法에 설해지고 있다. 12緣起는 無明에서 시작하여 行이 생기고 行 ⇔ 識 ⇔ 名色⇔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이 있어 老死가 있으며, 生死가 있으니 곧 苦가 있다. 그러므로 苦의 최초 원인은 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역순으로 老死가 없으면 生이없고 生이 없으면 有가없고 …<중략>… 行이 없기 때문에 無明도 자연이 없다는 단계적 思惟 논리를 초기 경전인 ?阿含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보명의 목우도는 야생의 검은 소가 외양간을 잃고서 방황하는 것을 목동이 길들이는 단계를 묘사하고 이다. 목우도에 묘사된 소는 처음 인간의 妄情分別 때문에 오염되어 있으나 차차로 머리부분부터 꼬리부분에 걸쳐 한 단계씩 희게 되는 모습은 수행이 진척되면서 본연의 모습, 즉 淸淨純眞의 흰 소로 변화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망염을 점차로 제거하고, 스스로 참된 지혜를 발하게 하는 선종 초기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서 그림과 게송에 의해 비유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곽암의 십우도는 보명의 漸修頓悟적인 수행을 탈피하여, 소가 오염으로부터 점차로 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각해야 하는 소로서, “종래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처럼, 이미 갖추어져 있는 性品에 더이상 무엇을 붙인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不立文字요 敎外別傳인 頓悟頓修적인 看話 禪風을 그림과 게송으로 단계화 하여 묘사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선수행의 단계화는 ①에서 ⑩까지라는 획일적인 연결 고리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흐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수행의 단계를 표현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또 다른 모순 속에 얽어매는 누를 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선수행의 깨달음의 단계를 문자를 빌어 표현하였다는 것은 후학들의 공부에 큰 지침이 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많은 선 사찰에는 ?십우도?가 그려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Ⅴ. 맺는 말

 

이처럼 ?十牛圖?의 그림은 깨달음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수행 초기의 자아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후, 자아의 변화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선수행의 과정은 프로이트(S. Freud)의 ?精神分析?에서 말하는 無意識을 意識化하여 자아를 성찰하고 실현하는 작업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는 본래 있었지만 소를 찾고자 하는 그 순간부터 소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연구한 아브람 메슬러(A. Maslow)는 “인간은 本能的 慾求(instinctive needs)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욕구가 강한 것으로부터 약한 것으로 동기가 유발된다” 17]고 하였다.

또 칼 로저스(K. Rogers)도 “相談者는 來談者로 하여금 자신의 느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허용하여야 한다”18]고 지적하고 있다.

 

17] 최창호, 전게서, p.274.

18]이동식, ?도와 심리치료?, 「한국에 있어서의 정신치료 및 철학적 기초의 필요성」, (대구: 소암 이동식선생 고희기념논문집, 1972), p.152.

 

이처럼 상담의 과정에 있어서 내담자가 防禦的 機制를 가지고 접근을 불허하였던 문제를 상담자에 의해서 털어놓음으로써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선수행이 잃어버린 자아(妄念)에서 참 나인 자아를 스스로 밝혀 내듯이, 상담에 있어서도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과 같은 것이다.

선수행이나 심리치료에 있어 중요한 요체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인지하고 그것으로부터 얽매임을 벗어나 진실된 자아의 실현을 깨닫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십우도?의 수행과정은 잃어버린 참 자아를 찾아서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갈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주제어 - 보명선사 목우도 곽암선사 십우도 선수행 심리치료 깨달음(覺) 프로이트(S. Freud)의 精神分析, 무의식

 

 

 

 

ABSTRACT

 

The Practice of 『Sipwoodo』 and Self-realization

 

Kim, Mal-hwan

Ph. D Candidate, Graduate School of Dongguck Univ.

 

It is very difficult to express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by means of words and languages. Especially because in Zen world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is a transcendental process it is regarded as the supreme teaching based on the teaching without words and the transmission without scriptures. Fortunately in Song dynasty Ven. Bo-meng and Ven. Kwak-am described ?Mokwoodo? and ?Sipwoodo? with poem and painting respectively.

 

?Mokwoodo? which is 10 kinds of paintings painted by Ven. Bo-meng described the process that a cowboy trained a wild black cow thar lost the cow-house and wandered from place to place. It is described the progress of practice that all black feature from head to tail makes white step by step although the black cow is contaminated by impure mind.

 

By contrast, Ven. Kwak-am's ?Sipwoodo? does not describe the contaminated black cow which changes into white one. It focuses on reovering the original true self, finding a human nature which is originally in it. Therefore it is not necessary to find the cow because it has never been lost. Through these two paintings it can be realize a difference between the self-feature before practice and the changed self-feature after practice.

 

If we can compare the process of Soen practice with the process of consciousness from sub-consciousness in S. Freud's ?Psychoanalysis?, A. Maslow said that everyone was born with instinctive needs, but it is induced to weak motives. It can be said that children become adults and that gradually strengthen self-consciousness and pursue self-realization.

 

Like ?Sipwoodo? shows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it is very important to realize self-feature for oneself. Therefore, it is the nature of self-realization that human beings recognize instinctive needs, and get rid of attachment to it, and open mind.

 

 

...

 

 

< 원 논문 파일에 이미지가 없어 임의로 삽입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는 중국의 웹에서 발췌하였음.

 

 

 

 

宋代廓庵禪師《十牛圖頌》

 

十牛圖第一圖圖頌

 

忙忙撥草去追尋,

水闊山遙路更深。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晚蟬吟

 

 

十牛圖第二圖圖頌

 

水邊林下跡偏多,

芳章離披見也麼?

縱是深山更深處,

遼天鼻孔怎藏他?

 

 

十牛圖第三圖圖頌

 

黃鸝枝上一聲聲,

日暖風和岸柳青?

只此更無回避處,

森森頭角畫難成?

 

 

十牛圖第四圖圖頌

 

竭盡神通獲得渠,

心強力壯卒難除。

有時才到高原上,

又入煙雲深處居。

 

 

十牛圖第五圖圖頌

 

鞭索時時不離身,

恐伊縱步入埃塵。

相將牧得純和也,

羈鎖無抑自逐人。

 

 

十牛圖第六圖圖頌

 

騎牛迤邐欲還家,

羌笛聲聲送晚霞。

一拍一歌無限意,

知音何必鼓唇牙。

 

 

十牛圖第七圖圖頌

 

騎牛已得到家山,

牛也空兮人也閑。

紅日三竿猶作夢,

鞭繩空頓草堂間。

 

 

十牛圖第八圖圖頌

 

鞭索人牛盡屬空,

碧天廖廓信難通。

紅爐焰上爭熔雪,

到此方能合祖宗。

 

 

十牛圖第九圖圖頌

 

返本還源已費功,

爭如直下若盲聾。

庵中不見庵前物,

水自茫茫花自紅。

 

 

十牛圖第十圖圖頌

 

露胸跣足入廛來,

抹土塗灰笑滿腮。

不用神仙真秘訣,

直教枯木放花開。

 

 

 

一、尋牛
忙忙撥草去追尋,水闊山遙路更深,
力盡神疲無處覓,但聞楓樹晚蟬吟。
  
二、見跡
水邊林下跡偏多,芳草離披見也麼?
縱是深山更深處,遼天鼻孔怎藏他?
  
三、見牛
黃鸝枝上一聲聲,日暖風和岸柳青;
只此更無回避處,森森頭角畫難成。

 

四、得牛
竭盡神通獲得渠,心強力壯卒難除;
有時纔到高原上,又入煙雲深處居。
  
五、牧牛
鞭索時時不離身,恐伊縱步入埃塵;
相將牧得純和也,羈鎖無拘自逐人。
  
六、騎牛歸家
騎牛迤邐欲還家,羌笛聲聲送晚霞,
一拍一歌無限意,知音何必鼓唇牙。

 

七、忘牛存人
騎牛已得到家山,牛也空兮人也閑。
紅日三竿猶作夢,鞭繩空頓草堂間。
  
八、人牛俱忘
鞭索人牛盡屬空,碧天遼闊信難通。
紅爐焰上爭容雪?到此方能合祖宗。

九、返本還源
返本還源已費功,爭如直下若盲聾?
庵中不見庵前物,水自茫茫花自紅。

 

十、入廛垂手
露胸跣足入廛來,抹上塗灰笑滿腮。
不用神仙真祕訣,直教枯木放花開。

 

 

 

廓庵和尚十牛圖頌

 

一• 尋牛

茫茫拔草去追尋,水闊山遙路轉深。

力盡神疲無覓處,但聞楓樹晚蟬吟。

 

二• 見跡

水邊林下跡偏多,芳草離披見也麼?

縱是深山更深處,遼天鼻孔怎藏他?

 

三• 見牛

黃鶯枝上一聲聲,日暖風和岸柳青。

只此更無回避處,森森頭角畫難成。

 

四• 得牛

竭盡精神獲得渠,心強力壯卒難除。

有時才到高原上,又入煙雲深處居。

 

五• 牧牛

鞭索時時不離身,恐伊縱步入埃塵。

相將牧得純和也,羈鎖無拘自逐人。

 

六• 騎牛歸家

騎牛迤邐欲還家,羌笛聲聲送晚霞。

一拍一歌無限意,知音何必鼓唇牙。

 

七• 忘牛存人

騎牛已得到家山,牛也空空人也閑。

紅日三更猶作夢,索鞭空頓草堂間。

 

八• 人牛俱忘

鞭索人牛盡屬空,碧天遼闊信難通。

紅爐焰上爭容雪,到此方知合祖宗。

 

九• 返本還源

返本還源已費功,爭如直下似盲聾。

庵中不見庵前物,水自茫茫花自紅。

 

十• 入廛垂手

露胸跣足入廛來,抹土圖灰笑滿腮。

不用神仙真秘訣,直教枯木放花開。

 

 

 

 

禪宗十牛圖 (附普明禪師偈)

 

 

未牧第一

猙獰頭角恣咆哮,奔[3*牛]溪山路轉遙;  奔走? 

一片黑雲橫谷口,誰知步步犯佳苗。

 

 

初調第二

我有芒繩驀鼻穿,一回奔競痛加鞭;

從來劣性難調製,猶得山童盡力牽。

 

 

受制第三

漸調漸伏息奔馳,渡水穿雲步步隨;

手把芒繩無少緩,牧童終日自忘疲。

 

 

回首第四

日久功深始轉頭,顛狂心力漸調柔;

山童未肯全相許,猶把芒繩且留。   

 

 

馴伏第五

綠楊陰下古溪邊,放去收來得自然;

日暮碧雲芳草地,牧童歸去不須牽。

 

 

無礙第六

露地安眠意自如,不勞鞭策永無拘。

山童穩坐青松下,一曲升平樂有餘。

 

 

任運第七

柳岸春波夕照中,淡煙芳草綠葺葺;

饑餐渴飲隨時過,石上山童睡正濃。

 

 

相忘第八

白牛常在白雲中,人自無心牛亦同;

月透白雲雲影白,白雲明月任西東。

 

 

獨照第九

牛兒無處牧童閑,一片孤雲碧嶂間;

拍手高歌明月下,歸來猶有一重關。

 

 

雙泯第十

人牛不見杳無蹤,明月光含萬象空;

若問其中端的意,野花芳草自叢叢。

 

 

 

 

十牛圖-普明

 

1 未牧

1.1 生獰頭角恣咆哮奔走溪山路轉遙一片黑雲橫谷口誰知步步犯佳苗

【賞析】《易經》雲:“君子卑以自牧。”人的心性未經琢磨時,就如同未 受調馴的野牛,揚頭橫角,恣意咆哮,猙獰可畏。未能制禦的野牛終日奔走在溪山之間,越走越遠,不知回家;禪人不知調禦心性,也會有違“明心見性”的宗旨, 遠離真心的家園,無悟道之可能。色、受、想、行、識這樣的五陰惡念就象烏雲一般到處彌漫,遮住了光明本性,以至迷失了歸途。只可惜,那難得的善根所生長的 佳苗,被狂奔的野牛踐踏殆盡。

 

2 初調

2.1 我有芒繩驀鼻穿一迴奔競痛加鞭從來劣性難調制猶得山童盡力牽

【賞析】牛喻心性,牧童則喻心的主人。好比是勇敢的山童,猛然間用芒繩穿貫牛 鼻;放蕩不羈的心性終於被主人強行管束,受到調製。然而,心猿意馬,甚難控制,所以還會“一回奔競”,為此牧童仍須痛加鞭策。人的心性由於長時間被無明煩 惱薰習污染,一下子很難蕩滌乾淨,就象牛兒不甘芒繩穿鼻,奔走馳競,不遵約束。因此,主人絲毫不能懈怠,尚需時加惕磨,盡力護持,務使其循善去惡,改過自 新,方能免其恣縱。

 

3 受制

3.1 漸調漸伏息奔馳渡水穿雲步步隨手把芒繩無少緩牧童終日自忘疲

【賞析】牛兒既已受制,且在痛加鞭策之後,已經野性漸去,不再四向奔跑;心性調伏之後便不再顛倒妄想,違理犯過。但是,這時仍處在 關鍵時刻,心主——牧童的制禦功夫仍不可省,無論是流涉人世苦海還是穿過現象界的迷雲,都必須緊隨其後,不能稍懈。只有這樣,才能善念日增,劣性日消,否 則便會前功盡棄,牛不調馴,心不調伏。當然,調製心性,遷善改惡雖極其辛苦,但苦中有樂,樂而忘苦,所以牧童終日忘其疲倦。 3.2

 

4 迴首

4.1 日久功深始轉頭顛狂心力漸調柔山童未肯全相許猶把芒繩且

【賞析】俗話說:放下屠刀,回頭是岸。牛既受制已久,調馴功深,便開始回心轉意。當然,回心轉意也經歷了由勉強轉頭到自然回首的過 程。人性亦同。人有劣性,自知懺改,即是回首。換句話說,心由勉強向善而進至於自然向善。然而,此時心主——山童仍然不能完全相信相許,放鬆警惕,因為顛 狂之心雖已調和柔順,可是長時間的習染不可能一下子蕩除乾淨,時時都有逾越的危險,因此克制的功夫、防閑的工具斷不可去,還需把清規戒律這條芒繩系在牛的 鼻子上。

 

5 馴伏

5.1 綠楊陰下古溪邊放去收來得自然日暮碧雲芳草地牧童歸去不須牽

【賞析】“綠陽陰下”和“古溪邊”在普明禪師那裏別有喻意。前者喻“色界”,後者喻“空界”。就是說,只要牛兒野性全消,那麼無論 是在綠楊陰下,抑或是在古溪岸邊,都會放收自如。同樣,人的劣性全消,善性純乎精粹,則動輒亦會合乎天理良知,不待修持克制,不假勉強作為。此時牛已馴伏 于牧童,不勞牽調,在薄暮濃雲的芳草地上,步步自隨主人之後。

 

6 無礙

6.1 露地安眠意自如不勞鞭策永無拘山童穩坐青松下一曲昇平樂有餘

【賞析】黑牛變成白牛,喻心性由劣性臻於善境,不僅繩索既除,而且廄櫪亦廢,露地安眠,絲毫不加防範,因此才“不勞鞭策永無拘”。 正因為惡念盡消之後,所作所為皆出自然,合乎天性,無拘無礙,所以心主牧童便可安閒自在,穩坐青松之下,短笛橫吹,奏出升平的樂調,一片快樂詳和的景象。 只是“牛”的一念尚存,還需在開悟之後經過“保任”之期。

 

7 任運

7.1 柳岸春波夕照中淡煙芳草綠茸茸饑餐渴飲隨時過石上山童睡正濃

【賞析】牛的純白喻心的純善,此時心已達到完全解脫自由的境界。如果說此前“無礙”階段尚需心主牧童照料看守的話,至此“任運”階 段則一切外力均屬多餘。因為一切行為,如日月之行天,出於天性自然,毫無勉強。於是,牛在“柳岸春波夕照中”,在“綠葺葺”的“淡煙芳草”裏,饑餐渴飲, 隨時任運,自然合道;牧童也可以安眠石上,高枕無憂,一任牛兒東奔西馳。此所謂隨心所欲而不逾矩。

 

8 相忘

8.1 白牛常在白雲中人自無心牛亦同月透白雲雲影白白雲明月任西東

【賞析】白牛白雲,純乎一色,至此不僅心性純乎善、合乎道,而且主客之間的差別也已泯滅,從而達到性無善惡、形元爾我的境地。對於 心主牧童來講,已不存在牛的念頭,更不會起心作念去調伏;對於牛來講,再也不需要牧童的牽拽而能自然合道。牛與牧童的相忘,是謂“人自無心牛亦同”。這裏 的“明月”代表自性,為體;“白雲”比喻現象,為用。明月與白雲同色,意指色空一如,體用不二,人牛相忘,主客不分。在明月與白雲的交相輝映下,任東任 西,無不自在。

 

9 獨照

9.1 牛兒無處牧童閑一片孤雲碧嶂間拍手高歌明月下歸來猶有一重關

【賞析】客體的牛已不復存在,“一片孤雲”如同性分中一點靈光,徹上徹 下,縱橫舒卷,無掛無礙。用這顆無差別的心去觀照世間一切現象,則無不光明正大,些無渣滓。至此地步,調攝心性,已臻至境,只是主體的“我”還在明月下拍 手高歌,尚未能攝歸大全,因而必須突破最後一關,方可走向圓滿。

 

 

10 雙泯

10.1 人牛不見杳無蹤明月光寒萬象空若問其中端的意野花芳草自叢叢

【賞析】牛已不見,人亦不見,無爾無我,人我兩忘,唯餘象徵大圓鏡智的一輪明月,光含萬象,將人牛等俱攝于宇宙大全之自性。至此主 客雙泯之極地,道行圓成,一切複歸於自然。就一個參禪者的過程而言,一般在未悟道之前,見山是山,見水是水;及悟道有個入處以後,見山不是山,見水不是 水;經過“保任”、“休歇”之後,見山仍是山,見水仍是水。這裏的“野花芳草自叢叢”即此開悟後的境界。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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