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성 소수자는 인류가 아니다?
경향신문ㅣ2013.05.21 09:18 수정 : 2013.05.21 09:45
▲ 사방지를 ‘비인류’로 표현한 <세조실록>. 세조는 사방지를 병자로 취급했다가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격리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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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가 되었다. 첫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늘 여자놀이를 하고 자랐다.”(<삼국유사>)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년)의 이야기다. <삼국유사>는 ‘원래 여성인 혜공왕이 남자의 몸을 빌려 태어난’ 사연을 전한다.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근심하던 왕은 표훈(충담) 대덕에게 “복이 없어 아들이 없으니 천제에게 청하여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명했다.
왕명에 따라 상제(上帝)를 만나고 내려온 표훈은 혜공왕을 만나 고개를 내저었다.
“상제께서는 ‘딸은 구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인데 아들로 태어난 임금
경덕왕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간청했다.
“제발 딸을 아들로 바꿔 만들어달라고 한번 더 부탁해보시오.”
표훈은 할 수 없이 천제를 다시 찾아갔다. 그러자 천제는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며 기뻐했다. 과연 경덕왕은 아들을 낳았다. 그 사람이 바로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아버지 경덕왕이 죽자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혜공왕의 여성취향은 더욱 심해졌다.
“왕은 늘 비단주머니를 차고 다녔고, 도류(道流)를 희롱하며 놀았다. 그 때문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피살됐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원인을 혜공왕의 ‘동성애 취향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를 뜯어보면 신라가 혼란에 빠진 진짜 이유를 따로 설명해놓은 대목이 있다.
“(혜공)왕이 너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혜공왕이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어린 왕 대신 정사를 주무른 태후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혜공왕이 남성기와 여성기를 둘 다 갖고 태어난 양성(兩性)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성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든 혜공왕의 성적 취향은 ‘후천적’이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판 스토커
조선의 유명한 동성애 사건은 세종 시대에 터졌다.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며느리, 즉 세자(훗날 문종)의 부인이었던 봉씨였다. 세종대왕은 <세종실록>에 성군 답지 않게 며느리의 추행을 미주알고주알 밝히고 있다.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대의 성군이 왜 며느리를 쫓아내야만 했는지 구구절절 역사 앞에서 변명했으니 말이다. 1436년 10월26일이었다. 세종은 일부 신하들만 은밀히 불러 며느리 봉씨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종 소쌍에게 직접 들은 진술내용을 설명하며 한탄한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글쎄 세자빈(봉씨)이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구나. 소쌍이라는 아이가 동침을 거부하면 세자빈이 마구 윽박지른다는구나. 그래 마지못해 옷을 반 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세자빈이 나머지 반을 강제로 벗기고 눕게 한 뒤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한다는구나.”
▲ 춘화를 함께 보고 있는 여인들을 그린 그림. 사방지는 여인차림으로 과부 이씨와 10년 이상 사귀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봉씨는 소쌍이 다른 여종인 단지라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미행을 붙여 감시하고, 서로 만나지 말라고 협박했다. 소쌍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려 하면 대놓고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전형적인 ‘조선판 스토커’, 아니 ‘조선판 미저리’의 행각이 아닌가. 소쌍은 지나친 세자빈의 사랑에 질려 주변 사람들에게 넋두리했단다.
“빈께서 날 사랑하는데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세종은 결국 봉씨를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동성애가 적발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알코올 중독 세자빈
하지만 모든 잘못이 봉씨의 동성애에서만 비롯된 것일까. 물론 봉씨의 책임이 컸다. 우선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이 아니었다. 성격이 과격했다.
봉씨가 처음에 세자빈에 책봉되자 시아버지인 세종은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하지만 봉씨는 며칠만에 “이따위 책을 배워서 뭘하느냐”며 집어던졌다. 또한 말술을 즐겼고, 주사 또한 대단했다.
세종의 넋두리 속에는 세자빈 봉씨의 술버릇이 생생하게 표현된다.
▲ 중국 당나라 시대의 궁녀들. 맨 오른쪽 여인은 남장을 했다. 궁중에서 외롭게 살아야 했던 궁녀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많았다고 한다.
“세자빈은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댔다는구나. 취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뜰 안에서 업고 다니도록 했고…. 술이 모자라면 사가에서 가져와 마시고…. 이 어찌 세자빈이 할 노릇이냐는 말이다.”
전형적인 알코올 증세가 아닌가. 그러나 봉씨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자인 남편, 즉 문종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봉씨를 위한 변명
사실 봉씨는 두번째 세자빈이었다. 세자(문종)은 일찍이 김씨라는 여인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자를 미혹시키는 압승술(壓勝術)을 썼다는 단서가 발각됨으로써 폐출됐다.
‘압승술’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술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사랑의 묘약’이라고 할까. 김씨가 썼던 술법 가운데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는 방법’이 있었다. 또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방법’도 있었다. 이럴 경우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해괴한 방술이 적발됨으로써 ‘부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폐출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봉씨가 두번째로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승휘(承徽·세자의 첩) 권씨가 세자의 아들을 낳자 봉씨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봉씨는 가만 있지 않았다. “임신을 했다”며 거짓으로 고해 한 달 간에나 남편을 중궁전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봉씨는 또 남편을 사랑하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여종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고, 빈궁을 지키던 늙은 여종에게 ‘세자를 불러오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남편은 봉씨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줬다.
아버지 세종의 꾸지람이 있어야 겨우 세자빈의 처소를 찾았다. 그것도 며칠 왕래하다가 발길을 끊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세자가 봉씨의 처소 근처에 어슬렁거리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그 때마다 세자빈의 애간장이 녹았다. 세자빈은 지게문을 바라보면서 애를 태웠단다.
“저 분은 왜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인가?”
세종도 그런 무심한 아들을 어지간히 닦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세종의 넋두리가 하늘을 찌른다.
“저렇게 금슬이 좋지 않으니…. 비록 부모라 할 지라도 침실의 일까지야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김씨나 봉씨의 분투가 가여울 뿐이다. 예컨대 <실록>은 봉씨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거짓임신’을 칭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달리 생각할 소지는 없을까. 혹시 반드시 남편의 아이를 갖겠다는 집착이 낳은 상상임신은 아니었을까. 또 첫번째 세자빈이었던 김씨는 오죽했으면 사랑의 술법까지 써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했을까? 그렇다면 봉씨의 동성애 소동 역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던 좌절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플룩으로 애정표현한 짝궁
“하늘에 달려있는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고, 사람에게 달려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입니다.(在人之道曰男與女) 이 사람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此人非男非女) 마땅히 죽여야….”(서거정)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此人非人類) 함께 살 수 없으니 외방의 노비로 영원히 삼는 것이 옳다.”(세조)
1467년(세조 13년), 온 조정을 들끓게 한 추문을 매듭짓는다. 추문은 남성기와 여성기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 ‘사방지’ 사건을 일컫는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방지’ 사건의 내막을 <세조실록> 등을 통해 더듬어보자.
노비 출신인 사방지(舍方知)는 태어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태어난 성소수자였던 것 같다. 그의 어미는 사방지에게 여자 아이의 옷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발라주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늘 여장을 하고 다니던 사방지는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벼슬한 선비들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 와중에 남편(김구석)과 사별하고 독수공방하던 과부 이씨와 인연을 맺는다.
이씨의 집안이 대단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세종을 보필하면서 과학기술 정책을 다졌던 천문학자 이순지(1406~1465년)였고, 아들은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사위였다. 엄청난 가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 과부 이씨와 사방지는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된다.
“둘은 사랑하게 됐다. 늘 좌우에 함께 있으면서 음식도, 그릇도 같이 쓰고 앉고 눕는 것도 함께 했다. 심지어는 의복도 같은 빛깔로 하니 사치스럽고 화려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과부 이씨와 ‘양성’의 사방지는 의상까지 ‘커플룩’으로 맞춰 입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씨는 노비인 사방지를 집주인처럼 끔찍하게 대했다. 그러기를 10년 가까이 흘렀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지만, 둘의 관계는 더욱 대담해졌다.
"남성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급기야 1462년 4월, 해괴한 소문을 들은 사헌부가 직접 감찰에 나서 사방지를 체포한 뒤 몸을 살펴본다.
분명 겉모양은 여자였는데, 음경과 음낭은 곧 남자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다시 한 번 사방지의 몸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보고가 올라왔다.
“머리와 옷은 여자인데 음경·음낭은 남성이며, 단지 정도(精道)가 경두(莖頭) 아래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습니다.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성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이의’는 ‘남성기와 여성기를 둘 다 갖춘 양성(兩性)의 소유자’을 뜻한다. 문제는 사방지가 이씨 부인 말고도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내시의 아내와 여러 차례 정을 통했고, 심지어는 여승(女僧)들과도 사통해서 파계시키기도 했다. 신료들은 사방지는 물론 과부 이씨와 그 아버지인 이순지까지 처벌하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임금(세조)은 ‘사방지를 병자(病者)이니 너무 책하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되레 사방지 사건을 문제삼아 내사를 벌인 사헌부 관리를 파직시켜 버렸다.
“간통 현장을 적발한 것도 아닌데 재상집(이순지) 일을 경솔하게 의논·내사하여 임금에게 올린 것은 불가한 일이다. 사헌부 관리를 파직토록 하라.”(<세조실록>)
조선시대에도 명백한 현장을 잡지 못하면 간통죄는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조는 결국 사방지의 처리를 과부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에게 맡겼다. 이순지는 곤장 10여 대를 친 뒤 기내(畿內·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는 머슴의 집에 보냈다.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과부가 된 딸의 외로움을 달래준 사방지를 배려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방지를 잊을 수 없었던 과부 이씨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찾아낸 뒤 몰래 불러 올렸다. 그게 화근이 됐다. 조정의 공론이 다시 일자 세조는 더는 관용을 베풀지 못했다. 세조는 사방지에게 신창현(충남 아산)으로 유배형에 처했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
<실록>을 잘 읽어보면 사방지가 여성과 남성을 모두 지닌 ‘양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장 차림으로 뭇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양성’인 사방지를 ‘병자’로 취급하면서 “더는 추국하지 말라”고 엄명까지 내렸다. <명종실록>을 보면 사방지와 비슷한 ‘양성’의 소유자가 1548년(명종 3년)에도 출현했다.
“길주(함경남도) 사람인 임성구지는 양의(兩儀·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갖춰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이 함경감사의 장계를 보면 임성구지라는 인물은 양성을 다 갖춘 양성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은 이 함경감사의 장계를 두고 고민한 끝에 “‘사방지의 예’를 따라 사람들과 격리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부인도, 남편도 둔 이 천지간에 요사하고 음예(淫穢)한 요물을 죽이라”는 사간원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명종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괴이한 물건이긴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저 외진 곳에 두어 인류와 섞이지 않게 하라. 굳이 중전(重典·엄한 법률)을 쓸 것까지는 없다.”
그러고보면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망국의 씨앗이라느니, 정사를 어지럽힌 반란의 징조라느니…. 또 사람의 도리, 강상의 도리를 해치는 요물이니 죽여야 한다느니…. 그래도 병자(病者)에 불과하니 격리시키면 된다느니…. 때로는 측은지심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죄악시하고, 경원시하고, 경멸하는 그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은 또 어떤가. 여전히 성소수자를 ‘병자’ 혹은 ‘격리시켜야 할 비인류’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낯선 사람’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입니다(在人之道曰男與女)”(서거정),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此人非人類). 함께 살 수 없으니 격리시켜라”(세조·사진)
1467년, 세조는 대갓집 과부와 정을 통한 사방지에게 유배형을 내린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노비 출신인 사방지는 ‘이의(二儀)’, 즉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갖고 태어났다.
여성 차림으로 다닌 사방지는 훗날 독수공방하던 과부 이씨와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세조실록>은 “둘은 침식을 함께했고 옷색깔을 맞춰 입었다”고 했다. ‘커플룩’을 맞출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살자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급기야 1462년, 세조까지 나서 사방지의 성을 확인했는데, ‘남성의 형상이 더 많은 양성(兩性)’이었다. 세조는 ‘병자(病者)’라며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부 이씨와 사방지의 관계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자, 마침내 격리(유배형)시켰다. 1548년(명종 3), “양성인 임성구지라는 이가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갔는데’ 이런 요물은 죽여야 한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이에 명종은 “괴이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중요하므로 격리시켜 인류와 섞이지 말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까?
세종의 며느리였던 봉씨의 ‘동성애’는 유명하다. 봉씨는 소쌍이라는 여인의 옷을 벗기고 남자와 교합하는 모양으로 희롱했다. 평소 소쌍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만약 만나주지 않으면 “난 널 좋아하는데, 넌 왜 날 싫어 하느냐”며 원망했다. ‘조선판 스토커’였다. 결국 봉씨는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봉씨는 타고난 동성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다. 남편 사랑을 담은 ‘연가(戀歌)’를 짓기도 했고, 아이를 간절히 원해 ‘상상임신’까지 했다. 그럼에도 남편은 봉씨에게 곁눈도 주지 않았다. 봉씨는 알코올 중독에 걸릴 정도로 술독에 빠졌다. 어쩌면 봉씨의 동성애는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한 좌절감의 다른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동성애’의 낙인이 찍혀 속절없이 폐출된 것이다. “원래 여자인데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삼국유사>)는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년)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주범으로 폄훼됐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성소수자를 보는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비인류’라는 세조의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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