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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세종의 불통인사와 조선의 인사검증 시스템

잠용(潛蓉) 2019. 12. 25. 13:0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세종의 불통인사와 조선의 인사검증 시스템

경향신문ㅣ2014.06.17. 09:50 수정 2014.06.17. 14:14 댓글 0개 


"신 등은 도저히 임명장에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1415년(태종 15년) 7월 26일 사헌부가 헌납(사헌부 5품 관리)으로 임명된 장진의 서경(暑經)을 끝내 거부했다. 무슨 말인가.

서경이란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대간(사헌부·사간원)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제도를 말한다.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50일 이내에 대간이 임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해당 관리는 취임할 수 없었다. 철저한 인사검증시스템이었다. 대간들은 서경권을 행사할 때 비공개로 3번이나 모여 철저히 심사한 뒤 임금에게 동의여부를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제도를 완의(完議) 혹은 원의(圓議)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인사검증시스템(인사청문회)이라 할 수 있다.

대간들은 해당관리의 인사자료를 바탕으로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히 검증한 뒤 국왕의 임명장에 서명할 지를 판단했다.

만약 '부적격자'라는 결정을 내리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이조에 돌려보냈다. 또 하자는 있지만 불가피하게 서명을 해야 할 대상자에게는 '정조외(正曹外)'라는 세글자를 썼다.

'정조외'는 의정부·사헌부·사간원·홍문관·예문관 등 청요직에 진출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관직은 괜찮다는 일종의 '조건부 승인'이었다. 이밖에 '한품(限品)'이라는 서명도 있었다. 역시 일정한 품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조건부 서명이었다.

대단한 제도다. 서명거부도 모자라 평생 주홍글씨로 남을 수 있는 '정조외'와 '한품'의 낙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오죽했으면 1408년(태종 8년) 2월 4일의 실록을 보면 "'작불납'보다 더 심한 경우가 '정조외'"라 했다.



▲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이 된 신경행(1559~1623년)은 사후 200여 년 뒤 '충익공'으로 추증됐다. 사진은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한다는 순조의 명을 두고 사헌부가 서경권을 발동, '임명동의'를 해준 < 시호서경 > (보물 1380호)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작불납', '정조외', '한품'

그렇다면 태종 연간에 사헌부가 주목한 장진의 흠결은 무엇인가?

"장진은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좇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자집의, 그것도 병든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으니 마음과 행실이 청렴하지 못하다" ( < 태종실록 > )


사실 태종이 장진을 헌납으로 임명한 것은 1415년 4월 중순쯤이었다. 그러나 대간들은 서명마감일인 50일이 지나도록 동의해주지 않았다. 태종은 이것을 문제삼았다.

"50일이 지났는데 장진의 임명은 어찌된 것이냐. 안되겠다. 앞으로 고신(告身·임명장) 심사는 원의(圓議·비공개 인사청문회) 1회만 거치고 보고하도록 바꿔라."(1415년 6월 2일)


그러나 이조판서 황희는 "원의는 최소한 세 번은 거쳐야 한다"고 고집했다. 태종 임금은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없다면 문벌(門閥)이 무슨 상관이냐"고 투덜거렸다. 태종의 언급을 보면 이 때만 해도 대간들이 문제 삼은 장진의 흠결이 '문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태종은 "능력이 중요하지 집안이 무슨 문제냐"고 힐난하면서 "앞으로 3회인 원외를 1회로 축소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물론 황회의 반대로 가납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사헌부는 50여 일을 더 버틴 뒤 장진의 임명을 끝내 거부해버렸다. '돈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자집 딸, 그것도 병든 여자에게 새 장가 들었다'는 새로운 흠결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태종은 장진의 사헌부 헌납 임명을 철회하고 말았다.


"대간들은 대체 뭐하는 자들이냐?"



▲ 조선 후기 정덕필(1725∼1800)을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한다는 임금의 교지.


어디 장진을 둘러싼 인사파동 뿐이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임금과, 철저한 검증을 통해 번번이 거부권을 던졌던 대간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일쑤였다. 조선개국 후 3개월 남짓 흐른 1392년(태조 1년) 10월 6일부터 첫번째 갈등이 빚어진다.


고비고비 마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군관들을 1계급 특진시키자 대간들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화가 난 태조는 개국공신 조준·남은을 불러 "대체 대간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이냐"는 요지로 언성을 높였다. 태조는 결국 서경권의 범위를 '5품 이하의 관리 임명'으로 축소시켰다. 4품 이상의 관리는 임금이 직접 임명했다.(1392년 12월 22일) 그러자 사간원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재고를 요청했다.

"대간이 서경권을 행사하는 이유는 전하의 명을 거역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의 직무에 혹 있을 지도 모를 결점을 보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태조실록 > )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태조는 사간원의 상소를 가납하지 않았다. 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1408년 2월 4일 홍귀해라는 인물을 공조서령(供造署令·정 6품)에 임명했다. 홍귀해는 부왕(태조 이성계)가 총애하는 후궁(화의옹주)의 사위였다. 화의옹주는 원래 경상도 김해의 관기인 칠점선이라는 여인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됐다. 태조와의 사이에 낳은 딸(덕숙옹주)이 홍귀해와 혼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간들이 홍귀해의 임명장에 '사인'을 하는 대신 '작불납'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임금에게 올렸다. 태종은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의 사위를 출사시킴으로써 부왕을 기쁘게 해줄 참이었다. 그랬으니 대간들의 거부권 행사에 '버럭'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

"'작불납' 세글자를 삭제하고 고쳐 임명장을 내주어라. 내가 이 임명장을 덕수궁(태조 이성계가 거처했던 궁)에 갖다 드리겠다."


"대간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1425년(세종 7년) 4월 19일 세종 임금이 맹효증을 전구녹사(典廐錄事)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간원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세종이 사간원 좌정언 조수량을 불러 속히 맹효증의 임명장에 서명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사간원은 3일 뒤인 4월 22일 임금의 교지마저 "감히 받들 수 없다"고 거부했다. 사간원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는 맹효증이 죄인 이무의 외손자라는 것이었다. 우의정을 지낸 이무는 1409년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돼 사형을 당한 바 있다.


사간원은 임금의 교지를 토대로 재심을 벌인 끝에 "죄인의 외손에게 벼슬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최종결론을 내린 것이다. 임금의 교지마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세종은 역정을 냈다.

"선(善)은 길게, 악(惡)은 짧게 해야 하는 접인데, 이무의 죄가 어찌 그 외손에게까지 미치겠느냐. 이는 법률 조문에도 없는 것이다. 빨리 서경해주어라."


1435년(세종 17년) 7월 18일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간원이 함길도 도절제사의 도사(都事·종 7품)로 임명된 박욱의 서경을 거부한 것이다.

"박욱은 예전에 경상도 영해(영덕) 교수관 시절 영덕현수 이사청과 반목해서 서로 예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덕 사람이 나서 '박욱이 금척녀(가야금 악공)의 손자인데, 감히 수령을 욕보였다'고 고했습니다. 그 일로 박욱은 파면당했는데, 지금까지도 해명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임명장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가야금 악공의 아들인 천한 신분 주제에 현령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박욱이 그 문제를 두고 적극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의 임명장에 빨리 서명해주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거부권을 행사한 대간들을 질타한다.

"요즘들어 고신(임명장)의 서경에 문제가 있다. (능력보다) 애증 관계에 좌우된다. 게다가 서경의 권한이 아래사람에게 있으니 폐단도 적잖다. 대간들이 흠결이 있다느니, 의혹이 있다느니 하면서 50일이 지나도록 임명장을 내보내지 않는다. 대간 마음 내키는대로 하니 실로 불편한 일이다."( < 세종실록 > 1435년 7월 29일)


"청문회 내용을 보고하라"

제 아무리 만고의 성군이라도 대간들이 모여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서경권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신하들이 아래에서 관리들의 하자를 의논하고 있는데도 임금만 홀로 이를 알지 못한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1435년 8월 19일)


그러자 도승지 신인손 등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원의(비공개 청문회)의 일을 주상께 고주알미주알 보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의에서 마음대로 발언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감히 마음대로 남의 잘못을 말하겠습니까."

"과인이 당사자의 하자 사유를 죄다 듣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의논한 사항을 압축해서 간략하게만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아니되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추가해서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어째서냐. 아니되겠다. 앞으로 '작불납', '정조외', '한품'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그 때의 원의(청문회) 내용을 이조와 병조가 발췌해서 올리거라."


사헌부 관리들의 출근저지 투쟁

서경 거부의 가장 극적인 예 역시 세종 연간에 있었다. 1420년(세종 3년) 3월 16일 세종은 이발이라는 인물을 대사헌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이발은 태종 때인 1417년(태종 17년), 그러니까 3년 전에도 인사파동을 겪었던 인물이었다. 즉 그 해 5월 3일 태종은 이발을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이발이 대량의 포물을 사사로이 싣고 가 현지에서 팔았던 게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 조정에서도 화제를 뿌렸다. 명나라 예부상서는 이발에게 "가져온 포물은 좀 팔았냐"고 비아냥댈 정도였다.


사절단은 웃음거리가 됐고,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조선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외교스캔들로 번졌다. 그런데도 태종이 지탄의 대상이 된 이발을 사정기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한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이발이 대사헌이 되어 출근하던 날 사헌부가 거부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헌부가 상언했다. '이발은 비웃음을 사고 왕명을 욕되게 했습니다. 마음 씀이 간사하고 탐욕이 있으니, 사헌부 수장으로서 불가합니다.'"( < 태종실록 > )


한마디로 출근저지 투쟁이었다.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이발의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이 문제적 인물인 이발을 다시 대사헌에 임명한 것이다. 사헌부가 다시 한 번 벌떼처럼 일어난다. 원래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출근하면 모든 사헌부 관리들이 청사의 뜰 아래 도열해서 정중히 영접하는 것이 법도였다. 신임 대사헌이 첫 출근한 3월22일,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 세종이 "빨리 이발을 마중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사헌부 장령(4품)인 송인산이 딱 잘라 거부한다.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이발은 욕심을 품어 왕명을 욕되게 한 자입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지금으로 치면 4급 관리가 직속상관의 출근을 저지한 것이다. 그것도 국왕의 명을 단칼에 거부하고….

세종은 결국 13일 만에 이발의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만다,


'불통의 인사권'을 발휘한 세종

그런데 세종의 오기(傲氣)도 어지간하다. 6년 만인 1426년 3월 15일 문제의 이발을 슬그머니 병조판서(정 2품)에 임명해버린 것이다. 전형적인 '불통의 인사'이자 '오기의 인사'가 아닌가? 당연히 대간들도 아우성쳤다. 좌사간 허성은 "이발은 염치 없는 인물"이라고 맹비난한다. 사간원은 이발이 저지른 예전의 허물에다 "이발은 태종의 승하를 중국에 알리는 사신으로 갈 때 육포(마른고기)를 싸가지고 가면서 조금도 슬픈 표정도 없었다"고 탄핵했다.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유치한 탄핵이 아닐 수 없다. 육포를 싸가지고 간 것까지 비난받은 것이다.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사간원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예 서경권을 발동해서 이발의 임명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기서 잠깐…. 대간의 서경권은 5품 이하의 관리임명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정 2품인 병조판서의 임명은 서경권과는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었다, 세종은 바로 그 해(1426년) 1월 26일 좌사간 허성의 상소를 받아들여 서경의 범위를 1~9품, 즉 전체 품계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런데 두 달도 되지 않아 이발의 병조판서 임명건이 일어난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제 발등을 찍었다고 할까.

어쨌든 세종은 대간들의 인사청문회에서 이발의 임명이 거부되자 특유의 인물론을 내세웠다.

"이발이 꼭 필요한 인물이니 빨리 임명장에 서경하라."


그러나 사간원은 "법에 따른 정당한 거부권 행사"라고 버텼다. 세종은 1년도 못돼 대간들의 서경권을 다시 5품 이하로 축소시키고 말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경은 결국 성종 대에 완성된 < 경국대전 > 에 '5품 이하'로 한정되었다.


인사검증이 중요한 까닭

흔히 왕조시대를 일컬을 때 절대군주가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 실록 > 을 일별하면 조선이 얼마나 건강한 시스템을 갖추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423년(세종 5년) 5월 17일, 사헌부가 서경권을 5품 이하에서 1품까지 확대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필요성을 밝힌다.

"군주가 사람을 쓴다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버릴 재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자리에 앉아 어찌 수많은 인재를 다 살펴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자리에 앉아 모든 재목을 알 수 없으니 대간의 서경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대간이 임금의 귀와 눈을 대신하여 임명자들의 충(忠)과 사(邪), 직(直)과 곡(曲)을 숨김없이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서경입니다. 그래야 군자의 도는 길어지고 소인의 도는 사라질 것이며, 나라의 운명도 영원할 것입니다."

혹독한 인사검증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미 700년 전 선현이 알려주고 있다.

“신들은 도저히 임명에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1415년(태종 15년) 사헌부가 헌납(사헌부 5품 관리)으로 임명된 장진의 서경(署經)을 끝내 거부했다. ‘서경’이란 임금이 임명한 관리를 대상으로 대간(사헌부·사간원 관리)들이 3차례 비공개회의(원의·圓議)를 통해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히 검증한 뒤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사진). 혹독한 인사검증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부적격자로 판정되면 ‘작불납(作不納)’, 세 글자를 임명장에 써서 돌려보냈다. ‘정조외(正曹外)’는 일반직은 괜찮지만 핵심 부서 요직 발탁은 안된다는 조건부 통과였다. 인사검증에서 낙마하면 주홍글씨가 찍힌 채 평생 살아야 했던 것이다. 장진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를 좇아 부잣집의, 그것도 병든 딸과 재혼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흠결이 됐다.

 

세종의 ‘불통 인사’를 번번이 좌절시킨 것도 바로 대간들의 인사청문회였다. 1420년 세종은 이발을 대사헌에 임명한다. 그런데 이발은 ‘문제적 인물’이었다. 1417년(태종 17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 사사로이 대량의 포물을 싣고가 중국 현지에서 팔았던 게 물의를 빚었다. 이른바 외교사절의 신분으로 보따리장사를 한 것이다.


세종은 바로 그런 인물을 사정기관(사헌부)의 수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반발한 사헌부 관리들은 이발의 첫 출근길을 막아섰다. 세종이 “빨리 이발을 맞으라”고 재촉했다. 사헌부 장령(4품) 송인산이 감히 왕명마저 딱 잘라버렸다.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목숨을 건 출근저지 투쟁에 세종은 결국 이발의 임명을 취소했다. 그러나 세종의 ‘오기·불통 인사’도 대단했다. 6년 뒤인 1426년, 슬그머니 문제의 이발을 병조판서로 재발탁한 것이다. 사간원은 “염치없는 이발은 절대 안된다”면서 서경을 거부해버렸다. 세종은 “이발은 능력 있는 사람”이라며 인물론을 내세웠지만 대간들은 굽히지 않았다. 이렇듯 인사권을 행사하는 임금과 철저한 검증을 고집한 대간들의 신경전은 늘 팽팽했다. 1392년(태조 1년), 사간원이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하의 명을 거역하고자 대간이 서경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의 직무에 혹 있을지도 모를 결점을 보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태조실록>)
혹독한 인사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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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사회에디터 http://leekihwa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