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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전하! 제 하소연 좀!"… 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 농성장이었다

잠용(潛蓉) 2022. 8. 6. 22:0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하! 제 하소연 좀!"… 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 농성장이었다
경향신문ㅣ2022.07.12 05:00 수정 : 2022.07.12 07:01

 

▲ 국기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서울 백악산(북악산) 일원’. 북악산은 수려한 자연과 역사 문화적인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이유로 명승으로 지정됐다. /‘대통령 경호처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 2019년에서’

어릴적 청운동 산동네에 살던 기자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이미지가 몇 장면 있다. 북악산 바위 옆 계곡에서 빨래를 하던 어머니, 어지간히 많았던 송충이, 해마다 5월 쯤이면 단맛을 봤던 아카시아 꽃, 10월이면 부암동 산기슭 과수원에서 한 두 대야씩 사서 먹었던 씨알 작은 능금….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밤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오고, 다음날부터 며칠간 헬리콥터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간첩은 자수하라!”고 선무방송 하며 산 주위를 하루종일 선회했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1·21 사태)이었다. 이후 북악산은 얼굴을 바꿨다. 군사분계선처럼 철책을 쳤고, 곧 금단의 산으로 변했다.

 

▲ 경복궁이 내려 다보이는 북악산 동쪽 사면. 조선시대 때 억울함을 하소연 할 때 없는 하층민들이 이곳에 올라와 징과 꽹과리를 치고, 깃발을 흔들며 ‘고공농성’을 벌였다. 북악산은 조선시대판 고공농성의 무대였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인왕산은 통행금지에서 풀렸지만 북악산의 개방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청와대 뒷산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이 되어서야 성곽로가 개방되었고, 14년이 지난 2020년 북측 둘레길까지 열렸다. 급기야 올해 5월초 청와대 뒤쪽 북악산 남측면까지 완전 개방됐다.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기자는 북악산에 관한 한 남보다 조금은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다른 이들에게 “북악산의 동쪽 사면에 사람의 눈코입이 보이지 않느냐. 저 얼굴이 청와대를 외면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라고 아는 체 했다. 고려의 남경터가 이렇고, 조선초 회맹터가 저렇다. 정도전이 어쩌구, 무학대사가 저쩌구 하는 등의 ‘썰’도 풀었다. 며칠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2021년 10월 펴낸 <백악산의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종합학술보고서>를 보면서도 시큰둥 했다.

 

▲ 1902년(광무 6) 캐나다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서양에 소개한 서울지도. 한자와 함께 한글이름도 병기해놓았다. /영국 왕립아세아협회 소장

■ 그들은 왜 북악산에 올랐을까?
그런데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에 한 곳에 꽂혔다. ‘격쟁의 장소였던 백악산’(하일식 연세대 교수)이라는 대목이었다. “1465년(세조 11) 6월 28일 세조가 궁궐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백악산 기슭에 올라가 나무 끝에 종이를 매어 휘두르고 있었다. 임금 앞에 세웠더니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로 뽑아올린 종이었다. 옷이 남루하고 얼굴이 굶주렸다. 그는 ‘아침 저녁을 걸식하였고, 주인의 구박을 받아 말씀을 올리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호소했다.”
또다른 사례가 있다. “한 사찰(장의사)의 종 윤산이 그 절의 주지가 입은 피해를 호소하려고 백악산에 올라가 징을 치고 옷을 휘둘렀다”(<예종실록> 1469년 10월 29일)는 구절이다.

 

▲ 북악산에서 보이는 삼각산(북한산)의 봉우리들. 삼각산~북악산이 이어져 있다. 이 능선을 타고 호랑이와 범이 북악산을 너머 경복궁까지 자주 출몰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한 달 여 뒤인 11월18일에도 “경기 고양 출신의 윤계종이 백악산 위에 올라가 통곡하고 옷을 휘둘렀다”는 실록기사가 보인다. “내(윤계종)가 군역에 복무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틈에 마을 사람이 ‘빚을 받아간다’면서 가산을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윤계종은 “이런 내용을 형조와 사헌부에 잇달아 고소했는데 소용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백악산에 올라갔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의 농성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세조는 북악산에 올랐던 광주 노비에게 사옹(궁중 요리사)이 차린 음식을 제공하고, 면포로 만든 옷과 함께 양식까지 두둑하게 주어 돌려 보냈다. 사찰의 분쟁 건은 사찰 승려인 돈성이라는 자가 비리를 저지르고 주지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으로 밝혀졌다. 형조의 수사결과 승려 돈성에게 곤장 100대 및 자자형(얼굴에 문신 새기는 형벌)과 함께 강제 환속의 처벌을 내림으로써 마무리됐다. 세번째 윤계종의 경우 임금이 사헌부와 형조의 관리를 불러 사정을 들은 뒤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 북악산이 조선 개국 후 나라를 지키는 산이라는 뜻에서 ‘호국백(護國伯)’의 관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도성공사와 천재지변, 이상기후가 있을 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곳은 백악신사라는 사당이었다. 지금 북악산 정상에서 조선시대 기와편이 확인되곤 한다. 백악신사가 이곳 어디엔가 존재했을 것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 그들은 북악산에서 징과 꽹과리를 쳤다
북악산은 경복궁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다. 때문에 왕실에서는 암자가 들어서거나 민간인이 올라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일례로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사찰·암자를 모두 철거하고, 백악산 인근의 민가 뒤에 담을 쌓아 오르지 못하도록 한다”(<연산군일기> 1503년 11월9일)는 기사가 보인다. 연산군은 “경수소(경비초소)를 두어 단속하라”(11월 11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악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은 남의 이목을 피해 경복궁이 잘 보이는 북악산 동쪽 사면에 올라 징과 꽹과리를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임금님, 제발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청와대, 아니 요즘이라면 용산의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격이다.

 

▲ 조선 후기 화가인 김윤겸(1711~1775)과 엄치욱(생몰년 미상)이 그린 백악산(북악산) 그림. 커다란 바위가 노출된 북악의 모습과 부아암, 능선을 따라 한양 도성 눈에 띤다. 아래쪽에는 우거진 송림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소장

사실 격쟁은 신문고와 함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옳지 못한 것과 잘못을 따지는 수단으로 인정됐던 제도였다. 즉 중국의 성인군주인 요임금은 신문고와 유사한 감간지고(敢諫之鼓·감히 간하는 북)를 설치했다. 우임금은 대표적인 타악기인 종과 북, 경, 목탁, 땡땡이(도고·도鼓) 등을 사안에 맞게 의견을 개진하는 공론수렴제도를 만들었다. “정치 관련 청원은 북(鼓), 민생은 종(鐘), 행정은 목탁, 반역사건 등의 고발은 경(磬), 소송은 땡땡이(도鼓)를 사용했다”(<명종실록 1566년 9월4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1401년(태종 1) 7월18일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치라”는 신문고를 매달았다. 그러나 신문고는 서울의 문무관원들이 청원·상소의 도구로 주로 이용됐다. 일반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문턱이 너무 높았다.

 

▲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백악산(북악산) 그림. ‘독락정’은 부아암 아래쪽의 계곡 주변에 위치해 있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조성된 문이다. ‘취미대’는 삼청동 계곡 중턱에서 경복궁 북쪽 궁장과 저멀리 남산을 조망한. ‘청송당’은 북악산의  서남쪽 자락인 현재 칠궁의 후면부 주변이다. 북악산의 특징인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소장

이때 구중궁궐에 있는 국왕에게 직접 구구절절한 사연을 전달하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징과 꽹과리 등을 사용한 격쟁이었다. 그들은 국왕이 궐밖으로 나서는 때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궁궐 안까지 난입해서 징·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군인인 김수의가 야밤에 궁궐 문 밖 나무에 올라가 격쟁했다. 임금이 ‘빨리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지만 김수의는 날이 새도록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수의는 장 100대의 처벌과 함께 변방 고을의 종으로 예속되었다.”(<성종실록> 1481년 9월21일)

실록은 김수의라는 병사가 왜 나무에 올라가 밤새도록 고공농성을 벌였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이 뿐이 아니다. “1560년(명종 15) 5월2일 경기 장단의 일반 백성이 군복으로 변장하고 칼까지 찬채 몰래 궁궐 안까지 들어와 격쟁을 한 일로 병조와 도총부 관리들이 줄줄이 문책됐다”(<명종실록>)는 기사가 보인다.

 

▲ 겸재 정선이 3점이나 그린 ‘대은암’ 그림. 대은암은 중종 때의 권신인 남곤의 집 근처에 있는 바위를 지칭했다. 조선후가 서울의 명소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 일단 맞고 시작하라
이렇게 궁궐을 시끄럽게 하는 일이 잦아지자 조정에서는 격쟁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든다. 격쟁하는 사람을 일단 피의자로 간주하여 우선 곤장 등을 친 다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임금이 타는 말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궁궐에 소란을 일으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 글을 지어 올리는 ‘상언’ 제도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하층민들은 ‘일단 맞고 시작하더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여과없이 국왕에게 전할 수 있는 격쟁을 선호했다. 하지만 ‘일단 맞고 시작하는’ 절차에 큰 문제가 있었다. ‘우선 맞고 시작하는 절차에서’ 너무 심하게 때려서 격쟁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효종실록>은 “1658년 8월26일 경남 고령에 사는 배순룡이 격쟁을 한 뒤 형조에서 곤장을 맞아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실록은 “미약한 백성이 머나먼 서울까지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일이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 이들에게 경복궁이 빤히 보이는 북악산이 ‘마지막 희망산’이었을 것이다. 혹여 이 ‘북악산 고공농성’을 본 임금님의 선처를 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 북악산 부아암(負兒岩). 서로 포개진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정선의 그림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공극산은 아니다
‘북악산 고공농성’ 자료를 공부하며 종합보고서를 읽어보니 그동안 ‘띄엄띄엄’ 알았던 북악산 스토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전면개방도 되었으니 북악산과 관련된 핵심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북악산의 명칭은 어떨까. 백악, 북악, 면악, 공극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서울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보편적이었다.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통칭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산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면악(面嶽)’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백악산이라 했다.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 아는척 하는 이들이 ‘공극산(拱極山)’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이름은 적당치 않다.
1537년(중종 32) 3월14일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이 북악산의 이름을 ‘공극산(拱極山)’이라 붙였다. 중국 사신은 “이 산이 서울의 북쪽에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공극’은 ‘공신(拱辰)’과 비슷한 말로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처럼 사방의 백성들이 덕정을 펼치는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논어> ‘위정편’)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아는 척한다고 굳이 북악 혹은 백악산을 ‘공극산’이라 일컬을 필요는 없다. 문화재청은 2009년 명승으로 지정할 때 공식 명칭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대문’ ‘숭례문’ 처럼 혼용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 지금의 청와대터에는 조선시대부터는 임금과 공신들이 모여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인 회맹식을 열었던 ‘회맹단’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 쪽이다. 경복궁 신무문 밖에 있었다.

■ 북악산은 왜 골산일까?
북악산의 또다른 특징은 거대한 바위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흙이 적고 뼈가 드러난 골산’(무학대사·1327~1405의 언급)이라는 혹평도 들었다. 이유가 있다.
선캠브리아기(46억년~5억년전) 편마암 밑에 마그마가 뚫고 들어간 뒤에 1억년이 넘는 동안의 지각변동과 침식을 거쳐 지하 깊이 있던 화강암이 드러나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특히 10㎞나 되는 두꺼운 피복층이 중생대 백악기~신생대를 거치면서 침식과 풍화를 받아 사라지면서 다양한 화강암 풍화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급경사에 모암(母巖)이 곳곳에 노출된 돌산, 바위산의 모습이다.

이번 종합보고서에서 자연식생 부문을 담당한 연구자(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는 소나무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특히 촛대바위 부근의 소나무 군락이 인상깊었던 것 같다.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군락을 이룬 소나무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의 계곡 중턱에 있는 약수터 위 바위에는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이라는 각자가 적혀있다. ‘임금의 수명이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과,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의 노인성 같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누군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이 재임시절(1948~1960) 이 약수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예부터 ‘소나무는 백목(百木)의 장(長)으로 황제의 궁전을 수호하는 나무’(사마천의 <사기>)로 꼽혔다. 그런만큼 조정에서는 북악산 등의 소나무 식재에 무척 신경을 썼다. 해마다 군대를 동원해서 대대적인 소나무 식재작전을 펼친 것(<비변사등록> 1797년 2월)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북악산에서는 돌 하나라도 캐낼 수 없었다. <세종실록> 1431년 3월 19일자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공용으로 쓴다 해도 백악산의 돌은 채취하지 말 것이며, 이미 채취한 것이라도 가져오지 말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인왕산과 북악산에 출몰했다는 호랑이 이야기는 진실일까.

1463년(세조 12) 12월9일 경복궁의 후원(취로정) 연못가까지 출현한 호랑이를 추격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467년(세조 16) 11월 19일 북악산에 출몰한 호랑이를 찾아 세조 임금이 추격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골짜기에 숨어있던 호랑이를 쏘아 죽인 일도 있었다. 이밖에도 호랑이와 범 이야기는 실록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 있는 촛대바위. 일제강점기에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다. 해방후 쇠말뚝을 빼고 촛대를 세우며 이름을 ‘촛대바위’라 했다. 지금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마감되어 있다. (출처:‘<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2019년’에서

■ 북악산 밑에 세운 남경
북악산과 관련해서 중요한 핵심스토리는 뭐니뭐니해도 이 산 밑에 조성했다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야기다.
풍수지리에 빠진 고려왕조는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도참사상을 받아들였다. 왕실의 영속성을 위해 도읍지(개경)외에 서경(평양)과 남경(서울)을 설치한 것은 바로 이 풍수지리의 영향이다.
1101년(고려 숙종 6) 그 남경의 궁궐터로 낙점된 곳이 바로 면악, 즉 북악산 남쪽 땅이었다.

이듬해인 1102년(숙종 7) 중서문하성이 마련한 남경의 도시계획도에 따르면 동쪽으로 대봉(낙산), 남쪽으로 사리(용산 한강대교 부근 사평도), 서쪽으로 기봉(무악재), 북쪽으로 면악(북악)에 이르렀다.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궁궐이 완공됐다.
1104년(숙종 9년) 임금은 대신·내관들을 대동하고 남경을 친히 찾아와 10여일 머물렀다. 그러나 정식천도는 하지 않았다.
“임금이 해마다 해마다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할 것”(<고려사>)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숙종은 남경을 건설한 뒤 완전 천도하지 않고 ‘순주(巡駐)하는’ 도읍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경의 궁궐터가 바로 북악산 남쪽, 즉 지금의 청와대 부근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있다.
조선개국 후 천도를 위해 한양을 둘러본 권중화(1322~1408)·정도전(1342~1398)·심덕부(1328~1401) 등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394년(태조 3년) 전조(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궁궐터(경복궁)를 정했다”(<태조실록>)는 기록이 그것이다.

 

▲ 탐방로 주변 숲속에는 멧돼지와 노루, 사슴이 서식하고 있다. 조사단의 답사 도중 사슴 2마리가 탐방로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인공적으로 방사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 호국백의 작위가 붙은 지체높은 산
또 북악산이 ‘호국백’(護國伯·나라를 지키는 산)이라는 작위를 받은 지체높은 산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태조실록> 1393년) 1월21일) 이후 북악산에서는 도성공사와 천재지변, 이상기후가 있을 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곳은 백악신사라는 사당이었다. 지금 북악산 정상에서 조선시대 기와편이 확인되곤 한다. 백악신사가 이곳 어디엔가 존재했을 것이다.

멀리서봐도 도드라지는 바위가 있으니, 그것이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부아암’이다.
‘부아암(負兒岩)’은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해태 바위’라고도 한다. 정도전이 “불의 형상인 관악산의 화마가 걱정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에 “‘백악의 해태바위(부아암)가 물을 상징하고, 앞에 한강이 흐르니 화마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에는 ‘대은암’도 있다. 권신 남곤(1471~1517)의 집 근처에 있던 바위이다. 어숙권(생몰년 미상)의 <패관잡기>는 “박은(1479~1504)이 공무로 바빠서 만나주지 않았던 술친구(남곤)를 겨냥해서 붙인 바위 이름을 ‘대은(大隱)’이었다”고 전했다. 엄청 큰 데도 잘 보이지 않는 바위와, 좀체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술친구를 ‘대은(大隱)’이라 풍자한 것이다. 대은암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모른다. 촛대바위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다. 광복 후 쇠말뚝을 빼내고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도 ‘촛대바위’라 했다.

 

이밖에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의 계곡 중턱에 있는 약수터 위 바위에는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이라는 각자가 적혀있다. ‘임금의 수명이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과,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의 노인성 같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누군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이 재임시절(1948~1960) 이 약수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북악산은 금단의 산이 아닌 이상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해발 342m 정도의 동네 뒷산이 되버렸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북악산은 수려한 자연과 역사 문화적인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이유로 국가지정문화유산(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에 사는 풀 한포기와 나무 한그루, 이곳에서 밟히는 흙 한 줌, 돌 한 점, 그리고 우뚝 서있는 바위 하나에도 옛 사람들의 채취가 남아있다. 동네 뒷산처럼 오르내리더라도 북악에 담긴 역사적인 함의 만큼은 기억해두고 싶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백악산(북악산) 종합보고서>는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하일식(연세대)·이선(한국전통문화대)·김문식(단국대)·홍태한(전북대)·류성룡(고려대)·최태선(중앙승가대)·방병선(고려대)·김윤정(고려대) 교수 등이 집필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