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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22] 왜 한국인은 선글라스 끼면 폼이 안 나지?

잠용(潛蓉) 2023. 9. 10. 08:29

 [본헌터 22] 왜 한국인은 선글라스 끼면 폼이 안 나지?
한겨레ㅣ2023-09-06 11:00 수정 2023-09-06 14:31


[역사 논픽션 : 본헌터 22] 머리뼈의 역사
옛 한반도 사람과 현대 한국인을 비교해 얼굴이 넓적한 정도를 탐구해보니

 

▲ 머리뼈 계측기. 유해를 발굴한 뒤 감식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다. /사진 고경태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왜 서양인이 선글라스 끼면 더 폼이 나지?’
한가하고 유치한 소리 같은가? 서구 숭배라는 지청구를 들을 수도 있다.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주관적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래 전부터 선주가 붙들고 온 화두였다. 아시아인들보다 서양인들의 선글라스 낀 모습이 더 근사해보였다. 선주는 그 이유를 얼굴형에서 찾았다. 자료를 찾아보면, 서양인들의 얼굴이 평균적으로 더 갸름하고 광대뼈가 뒤로 향해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인의 얼굴은 광대뼈가 옆으로 향해 있으며 더 넓적했다. 선주는 여기에서 의문을 더 확장시켰다. 한국인의 얼굴형은 원래 그런 것이냐, 생활습관 때문에 그리 된 것이냐. 아이들을 엎어놓고 재우면 좌우로 얼굴을 베고 자기 때문에 머리통이 예뻐진다고들 한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갸름하다. 그럼 이들은 누여 키웠을까 엎어서 키웠을까?


1989년, 선주는 귀국했다. 미국 유학 10년 만이었다. 충북대에 정착을 했다. 귀국하기 1년 전 마침 이 대학에 고고미술사학과가 만들어졌다. 충청북도는 한반도에서 동물과 사람 유해가 가장 많이 발굴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선주로서는 전공을 살릴 기회가 많기도 했다. 버클리 유학시절부터 충북대 박물관과는 청원 두루봉 동굴의 흥수아이 감식 등을 둘러싸고 교류가 잦았다. 선주는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고고학 분야를 고고학과 인류학 분야로 쪼개어 커리큘럼을 짜고 인류학을 맡았다.


1990년대는 선주에게 학문의 기지를 구축하는 시간이었다. 버클리 박사과정에서 공부한 체질인류학을 한국 사회에 열심히 전파했다. 그 무기는 강의와 저술이었다. 서울대와 단국대 등 여러 대학을 다니며 강의했다. ‘고인류학’, ‘인류의 기원과 진화’, ‘체질인류학’, ‘인류의 시대’, ‘생물인류학’ 등의 인류학 도서를 쓰거나 번역했다. 버클리에서 터득한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틈만 나면 논문을 썼다.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나온 하이에나 화석, ‘한국 플라이스토세 유적지에서 출토된 식육류화석’, ’서해안 지역 출토 조선 후기 인골의 인류학상 연구’, ‘한국 성인과 옛사람의 이빨 형태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 등등.
1970년대 석사과정에 있던 선주는 사람의 털(체모)에 관심을 가졌다. 인종별로 성별로 부위별로 털이 어떻게 다른지 연구하겠다며 야심을 보이다 좌절한 적이 있었다. 석사와 박사를 모두 마치고 1990년대 교수가 된 뒤의 주된 연구 관심사는 한국인의 기원이었다. 그 기원을 찾을 매개는 얼굴, 즉 머리뼈였다. 선주가 보기에 인류의 유전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머리뼈였다. 지금의 한국인 머리뼈는 한반도에서 구석기 시대를 산 사람들과 같았을까? 그들은 한국인 또는 한민족의 직접조상이라 할 수 있을까? 신석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는? 고려와 조선시대는?

 

▲ 머리길이는 얼굴의 길이가 아니다. 그림 1번에 있는 눈썹 사이 가운뎃점에서 뒤통수 뒷머리점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머리 높이란 3번(전체 높이)과 4번(수직 높이)으로 귀 옆 점으로부터 머리 꼭대기에 있는 정수리점 높이까지의 거리다. 머리너비는 2번으로 각 귀 옆 점 사이의 거리를 잰 것이다. /출처 한국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손보기 지음)

머리뼈를 잴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머리뼈의 길이와 높이, 너비다. 머리뼈의 길이란 얼굴의 길이가 아니다. 눈썹 사이 가운뎃점에서 뒤통수의 뒷머리점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높이란 귀 부위부터 머리 꼭대기에 있는 정수리점 높이까지의 거리, 너비는 각 귀 옆 점 사이의 거리를 잰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현대 한국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머리 길이가 짧고 그 높이가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장두 중두 단두 중에 단두라는 말이다. 장두는 머리 길이와 너비의 비율상 ‘좁고 긴 머리’에 해당하고, 단두는 그 반대였다. 단두란 한마디로 “넓적한(둥근) 머리”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 어른 남자들의 평균 머리뼈 길이는 175㎜, 여자는 168㎜였다. 선주는 여기서 거꾸로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 출토된 인골의 머리뼈와 아래턱뼈 기록을 찾아 분석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의 논문이 ‘한국 후기 플라이스토세 호미니드의 머리뼈 변화’였다. 후기 구석기 시대 사람의 머리뼈는 198.3㎜로, 유일하게 200㎜에 가까웠다. 이는 1980년 평양의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나온 용곡 사람(4만3000년~4만5000년전)과 만달 사람(후기 구석기 또는 중석기 시대)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의 머리뼈 길이는 170~190㎜로 다양했다. 청동기 이후는 174~178㎜로 오늘날과 비슷했다.


선주는 이 머리뼈 길이 분석을 근거로 북한에서 주장해온 “구석기시대부터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주장을 논박했다. 선주의 주장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부터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와 기존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혼재돼 살았다. 머리 길이가 짧은 시간에 바뀐 점이 근거였다. 그들이 한반도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170㎜대로 바뀌며 청동기 시대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해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관개수로 설치와 공동 경작을 통해 뇌를 쓸 일이 많아졌고 이를 통해 앞머리 용적률이 늘어나며 전뇌가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선주는 한국인의 조상을 청동기시대 사람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고조선에 해당했다.

 

▲ 1986년 여름방학 때 일시 귀국해 머리뼈를 들고 충북대 박물관에서 특강을 하던 시절의 선주.


선주는 1990년대 중반 여러 대학의 의대, 치대 교수들과 한 팀이 되어 ‘편평도 조사’를 하기도 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진행한 프로젝트의 이름은 ‘옛 한국인과 현대 한국인의 얼굴 편평도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 편평도란 넓적한 정도다. 여러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서 학생들의 실습이 끝난 뒤 보관중인 한국인 머리뼈 180개와 한반도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출토된 40개의 뼈 보고서를 샘플로 삼았다.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 시대 등으로 분류해 각 시기의 머리뼈에서 얼굴 편평도를 비교하였다.


얼굴편평도는 머리길이와 높이, 너비 뿐 아니라 이마뼈지수, 코뼈지수, 광대위턱뼈지수 등을 바탕으로 한다. 가령 코뼈지수는 코가 길고 갸름하냐, 짧고 넓냐 따위를 잰 값이다. 논문의 결론은 현대 한국인의 얼굴편평도에 관련된 모든 지수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사람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거였다. 광대위턱뼈지수는 철기시대나 후기 신석기 시대 사람들과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호기심을 보이다가도 머리 아프다며 손사래를 쳤다.


머리뼈의 변화엔 생활습관의 변화와 기후조건, 다이어트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식습관의 경우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많이 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류가 불을 가해 음식을 먹은 이후 부드러운 걸 씹게 되면서 아래턱 어금니에 영향을 주고 턱은 더욱 작아졌다.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는 한국인의 얼굴에 어떻게 펼쳐질 지는 계속 연구해야 할 주제였다. 2020년대에 다시 편평도 조사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식단은 훨씬 서구화됐고, 다이어트와 운동을 위해 음식 조절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넓적했던 한국인의 얼굴은 갈수록 더 갸름해진다. 아직도 한국인은 선글라스 끼면 폼이 안 날까?


머리뼈를 통한 한국인 탐구의 결과는 기본 데이터가 되었다. 남들에게 부질없어 보일 수도 없는 이 작업이 나중에 중요하게 쓰일 줄은 선주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