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우관’ 쓴 아프로시압 사절, “연개소문이 파견한 고구려 밀사가 맞다”
경향신문ㅣ2024.04.30 05:00 수정 : 2024.05.01 20:13
(아프로시압 벽화 ‘조우관 사절’, 연개소문 파견 고구려 밀사가 맞나)
“아들을 낳으면 석밀(산 벌꿀)을 입안에 넣어주고 손바닥에 아교를 발라준다. 아이가 성장하면 입은 늘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이 아교처럼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구당서> ‘열전·서융’)
예부터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를 중심으로 동서교역을 담당했던 소그드인들의 타고난 장사수완을 가리키는 기사이다. 중국에서는 소그드 연맹체 중 사마르칸트를 기반으로 한 왕국을 강국(康國)이라 했다. 강국의 도읍은 사마르칸트의 북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아프로시압 도성이었다.
▲ 조우관을 쓴 사절-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에서 모습을 드러낸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절’. 1965년 이후 아프로시압 궁전유적을 발굴한 우즈베키스탄 고고학자 라자르 알바움은 1958년 북한에서 발견된 쌍영총 벽화의 ‘조우관 쓴 인물상’을 인용, 1975년 펴낸 보고서에 ‘조선(한국) 사절’로 추정했다.
■ 사절들의 홀
1965년 이 궁전터에서 기념비적인 발견이 있었다. 도로 공사 도중 굴삭기의 삽날에 잘린 둔덕의 흙더미에서 벽화조각이 발견됐다. 발굴결과 벽화가 그려진 생활공간이 다수 노출됐다. 그 중에는 4면이 벽화로 장식된 방도 있었다.
아프로시압 궁전벽화가 학계에 정식 소개된 것은 1975년이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라자르 알바움(1921~1997)이 발굴보고서를 낸 것이다. 과연 어떤 내용의 벽화일까.
▲ 허리에 찬 고리자루큰칼- 조우관 사절이 허리에 찬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왼쪽 사진). 고구려 벽화분인 삼실총의 문지기도 똑같은 칼을 차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동벽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내용도 수수께끼다. 북벽에는 배를 타고 오는 중국식 복장의 여인 및 시녀, 오른쪽에는 사냥도가 그려져 있다. 남벽에는 벽 전체에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것 같다. 때문에 사마르칸트왕에게 시집온 중국 공주와 그를 안내하는 행렬, 중국 황제의 사냥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공주가 강국에 혼인하러 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장례행렬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서벽에는 사마르칸트 왕이 각국의 사절을 영접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 노출되는 ‘사절들의 홀’- 1965년 아프로시압 궁전터에서 도로공사 도중 확인된 아프로시압 궁전벽화. 정식발굴 결과 벽화가 그려진 생활공간이 다수 노출되었고 4면 모두 벽화로 도배된 방도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그래서 ‘사절들의 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심하게 훼손된 왕의 옷자락에 박트리아 문자와 고대 소그드어 명문이 쓰여 있다. ‘(주변 소국인) 차가니안과 차치의 사절이 강국(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 왕을 알현’하는 내용이다.
마침 바르후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신당서>와 <당회요>는 “650~658년 사이에 불호만(바르후만)을 강거도독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 벽화가 7세기 중~후반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다만 바르후만왕의 정확한 재위 기간이 기록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벽화가 그려진 시기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 1300년전 외교전- 7세기 중~후반 사마르칸트(강국) 왕이 각국의 사절을 영접하는 모습을 표현한 서벽화. 그래서 ‘사절들의 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 조우관을 쓴 사절의 정체
알바움의 발굴보고서에는 각국 사절과 관련,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다.
“가운데 비단 등을 바치는 중국 사절이 서 있다…서벽의 맨오른쪽 사절은 아마도 조선(한국)에서 온 사절이라 생각된다.”
알바움이 주목한 두 인물의 모습이 심상치않다. 머리에 깃털 모양의 조우관을 쓴 두 사신의 패션과 허리에 찬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소매 안으로 손을 맞잡은 태도 등….
알바움을 이 대목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쌍영총·1958년 발굴)에 등장하는 ‘조우관을 쓴 사람’ 등을 인용한다.
▲ 바르후만왕을 알현- 심하게 훼손된 왕(추정)의 흰색 카프란 옷자락에는 ‘(주변 소국인) 차가니안과 차치의 사절이 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왕을 알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 “고구려인들은 고깔 모양의 모자를 쓰고…새 깃을 더 꽂는다”는 <북사>와 <신당서> 등의 기록도 거론한다.
알바움의 보고서는 세계 고고 미술 사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파견된 두 사절의 국적 및 연대 논쟁을 벌였다. 처음엔 신라인 혹은 발해인설도 제기되었다가 차츰 고구려인으로 무게감이 실렸다.
▲ 치열한 외교전- 바르후만왕이 당나라 강거도독으로 책봉될 무렵인 650년 전후면 당나라와 고구려가 패권 다툼을 벌인 때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나라를 견제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세력과 교섭을 벌이려고 사신을 파견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만약 벽화가 바르후만왕의 당 강거도독 책봉 시기(650~658)에 제작되었다면 그때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이었다.
신라는 649년(진덕여왕 3) 당나라 관복제도를 도입했다. 때문에 650년대면 신라가 조우관을 쓴 사절을 보낼 리 없었다.
그 무렵 당나라와 고구려가 패권 다툼을 벌인 때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나라를 견제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세력과 교섭을 벌이려고 사신을 파견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 발굴자의 눈썰미- 발굴자인 라자르 알바움은 1975년 펴낸 보고서에서 “서벽의 맨 오른쪽 사절은 한국인 사절로 추정된다”면서 “머리에 깃털 모양의 조우관을 쓴 두 사신의 패션과 허리에 찬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소매 안으로 손을 맞잡은 태도 등이 심상치않다”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직접 파견된 고구려사절이 아니다?”
7세기에 고구려가 8000㎞에 육박하는 먼거리까지 외교관계를 펼쳤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아프로시압 벽화의 ‘조우관 사절’은 1400년전 한국과 서역의 교류사를 증거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인식되었다.
한국-우즈베키스탄 외교가 바로 이 아프로시압 벽화를 토대로 진행되어 왔다.
2013~18년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이 아프로시압 벽화의 복원 및 보호 사업을 펼쳤다. 서벽 사절도와 명문 인물 부분의 복원 모사도를 제작했고, 이를 토대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까지 이어졌다.
2017년 11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당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프로시압 벽화’를 선물로 증정했다. 또 2019년 4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조우관 사절’의 예를 들며 1400년 된 한-우즈베키스탄 교류의 역사를 언급했다.
▲ 돌궐 비석의 비밀- 몽골의 오르혼강변인 호쇼 차이담 계곡에서 확인된 2개의 돌궐비문. 8세기 돌궐 지도자들의 비문에는 돌궐의 시조인 부민 카간(522~523)과 그 동생인 이스태미(室点蜜) 카간의 장례식에 참석한 각 나라의 조문사절이 기록되어 있다. /주류성 출판사 제공
그런데 2019년 당시 대중에게는 크게 부각되지 않은 ‘학술적인 사건’이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 일어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양국간 역사적 교류를 강조하기 3일 전인 4월17일이었다. 이날 동북아역사재단·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이 주최하는 학술회의에 나선 한국의 두 학자가 “고구려가 사마르칸트에 직접 사절을 보낸 적이 없다”는 요지로 발표했다.
▲ ‘해뜨는 동쪽의 배크리’ - 두 돌궐 비문에는 고구려를 가리키는 ‘해 뜨는 쪽의 나라인 배크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류성 출판사 제공
현장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이 1400년 전 고구려-사마르칸트의 직접 교류를 강조하는 것이 머쓱해졌다.었다.
양국 간 교류 차원에서 개최된 학술 회의가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기획 및 발표자의 구성을 두고 ‘미스 캐스팅’이라는 이야기는 나올 만 했다. 그러나 학자가 연구 내용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학술적인 주장은 학술적인 방법으로 논쟁을 벌여야 한다. 곧이어 두 연구자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문이 나왔다.
고구려가 그 시절 충분히 초원로를 거쳐 사마르칸트까지 교류할 여력이 충분했음을 논증하는 학자의 견해였다.
▲ 배크리=맥(貊)+구려(句麗)- 고대 튀르키에 어에서 B음과 M음이 서로 환치될 수 있다. 따라서 ‘배크리’는 ‘매크리’가 된다. 즉 ‘맥(貊)+구려(句麗)’를 음사한 말로 추정된다. /주류성 출판사 제공
■ “고구려 사신은 관념적인 표현?”
사실 고구려 사절이 사마르칸트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1998년 일본 학자의 논문에서 처음 제기됐다.
즉 “아프로시압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사절’은 고구려가 실제로 파견한 사신을 그린 것이 아니라 현지 화가가 당나라의 궁정화를 모본으로 해서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2019년 사마르칸트 학술회의 등에서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발표된 것이다.
연구는 7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와 전쟁 상황에서 고구려가 8000㎞ 떨어진 강국까지 사절을 파견하기도 어려웠다는 점을 들었다. 고구려에서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는 것이다. 또 650~658년 사이 강국(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왕이 당나라로부터 강거도독으로 책봉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 호선무 추는 댄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서역 관계를 알려주는 그림이 허다하다. 안악3호분(357년)에는 비파와 퉁소 등을 서역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함께 서역춤인 호선무춤을 추는 무용수가 눈에 띈다.
그때면 당나라의 세계관이 사마르칸트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 사절은 사마르칸트의 입장에서 동쪽의 끝에 자리한 대표 국가를 그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른 연구도 아프로시압 벽화의 고구려 사절은 직접 파견된 모습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보았다.
다만 벽화의 끝자락에 고구려 사신을 배치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보았다.
즉 몽골 오르혼 강가에서 출토된 돌궐 비문에 등장하는 ‘동쪽 끝의 나라=고구려’라는 내용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돌궐인들은 ‘고구려=동쪽의 해뜨는 나라’로 강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벽화의 끝자락에 표현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절과 달리 고구려 사신들을 칼 찬 무인으로 묘사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거듭된 공격에도 대항하는 나라로 사마르칸트인들에게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바르후만왕의 치세를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아프로시압 벽화에 등장인물로 묘사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맨손 맞짱 뜨기- 안악3호분의 남쪽 동벽에는 수박희(맨손 격투기)를 겨루는 두 사람이 보인다. 한 명은 고구려인 같다. 그러나 상대방은 코가 유난히 높고 눈도 크다. 서역계 인물로 보인다.
■ “서역 가는 길이 막혀있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기본적으로 고구려 사절이 사마르칸트까지 갈 수 없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는 그 때 사마르칸트에 사절을 보낼 수 없었을까. 우선 6세기말~7세기초 국제정세를 살펴보자.
알타이 산맥을 넘어 유연을 격파한 돌궐은 552년 이후 북아시아 유목세계의 패자가 되었다. 583년 돌궐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뉘어졌고, 사마르칸트는 서돌궐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중국(수나라와 당나라)은 강성한 돌궐의 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가 630년 동돌궐, 657년 서돌궐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당시 변방에서 얻은 영토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 도독부와 도호부, 주를 설치하되 그곳 지도자들에게 관직을 주며 간접통치했다. 굴레(기·羈)와 고삐(미·미)를 씌워 다스린다는 뜻으로 ‘기미(羈미) 지배’라 한다.
어찌됐든 북아시아 유목세계는 당나라의 치하로 넘어갔다. 이랬으니 고구려가 동돌궐이 멸망한 630년 이후 8000㎞나 되는 먼 길을, 그것도 당나라의 지배로 막힌 루트를 뚫고 갈 수 없었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그동안 ‘평양-사마르칸트’ 루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학계에 새로운 논쟁점을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고구려-서역’ 대결- 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의 씨름 및 수박희 장면 가운데는 고구려-서역인의 대결구도로 짜인 그림이 많다.
■ 안시성 대첩의 내막
그러나 동돌궐의 멸망(630) 이후 사마르칸트행 루트가 꽁꽁 막혔다는 것은 팩트일까. 기존의 견해와 반박 논문 등을 토대로 살펴보자.
우선 630년 동돌궐이 멸망했지만 몽골 초원에서 그 틈을 잠시나마 메운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설연타였다. 645년 <구당서>는 의미심장한 기사를 싣는다.
“(당) 태종(626~649)이 요동의 여러 성을 쳐서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 막리지(연개소문·?~665?)가 몰래…많은 이득을 제시해 설연타 추장(이남)을 꾀였다. 그러나 이남(설연타 추장)이 두려워 감히 군사를 동원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기사를 보면 고구려와 설연타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런데 이 무렵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당 태종이 유명한 안시성 전투에서 갑자기 철수해버린 것이다. <자치통감>은 “태종이 요동 출정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설연타가 군대를 이끌고 두 차례나 중국 중원을 약탈했다”고 전했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갑자기 철수한 이유가 설연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해줄까. 동돌궐 멸망(630) 후에도 고구려의 사마르칸트행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 서역계 문지기와 장사- 약수리·대안리 1호분·수산리·안악2호분·쌍영총·삼실총 등 4~7세기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문지기 혹은 역사 가운데 상당수가 서역인이다.
■ 당나라 기미지배의 한계
이런 사정은 설연타의 멸망(646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몽골초원을 지배한 당나라는 6도독과 7주를 관할하는 연연도호부를 고비 사막 남쪽에 설치했다. 사막 이북의 부족에게는 담비 등을 세금으로 걷는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반란이 계속 이어졌다. 당나라는 661~662년 초까지 고구려 평양성을 맹렬하게 몰아붙였지만 갑자기 철수했다. 몽골 초원의 철륵(바이칼족 근처에 살던 부족연맹체) 등에서 일어난 반란이 661년 10월부터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것이다.
반란은 663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진압됐다. 이 무렵 고구려가 사절의 루트를 개척할 수도 있었다.
초원 지대의 유목 세력은 한 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직접 통치가 어렵다. 세력이 약할 때는 엎드려 있다가 커지면 당나라 변경을 약탈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니 몽골 초원이 당나라의 지배에 들어갔다 해서 고구려 사신이 거쳐갈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강국(사마르칸트)을 휘하에 두고 있던 서돌궐은 651년부터 반당 세력이 바뀌었다가 657년 멸망한다. 그렇다면 651~657년 사이 고구려가 아직 서돌궐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강국에 사신을 보내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야유회 속 서역인- 장천 1호분 앞방 북벽의 들놀이(혹은 백희기악도)에는 씨름꾼 외에도 다수의 서역계 인물이 보인다. 씨름 중인 사람 외에도 말을 달래는 사람, 말에게 놀란 사람, 수레를 끄는 사람, 주인에게 쫓겨 달아나는 사람 등이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 해뜨는 나라, 배크리
무엇보다 고구려는 예부터 북방 유목부족과 교류하고 있었다. 돌궐에 앞서 북아시아를 호령한 제국은 유연(4세기~552)이었다. 그런데 472년 백제 개로왕(455~475)이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하는 국서를 보낼 때 유연이 등장한다.
“고구려가…북으로는 연연(유연)과 맹약하여 서로 순치(脣齒·입술과 이빨의 관계)를 맺었다”(<위서> ‘백제전’)고 비난한 것이다. 유연의 뒤를 이은 돌궐과는 어땠을까. 몽골 오르혼 강변의 호쇼차이담 계곡에 서 있는 두 개의 돌궐 비문을 보자.
동돌궐 제2제국의 빌게 가한(재위 716∼734)과 그 동생인 퀼테긴(?~731)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그런데 두 비문에는 돌궐의 시조인 부민 가한(재위 552~553)과 그 동생인 이스태미(?~576) 가한의 장례식에 참석한 각 나라의 조문 사절이 기록되어 있다. “해가 뜨는 쪽의 배크리가 조문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 “돌궐이 당나라에 50년간 복속되었는데, 그때 해뜨는 쪽의 배크리 가한까지 정복했다”는 대목도 들어있다. 고대 튀르키에 어에서 B음과 M음이 서로 환치될 수 있다. 따라서 ‘배크리’는 ‘매크리’가 된다. 즉 ‘맥(貊)+구려(句麗)’를 음차한 말로 추정된다.
▲ 우주를 떠받치는 역사- 장천1호분의 천장 고임 각 모서리에 그려진 우주역사는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두 다리를 좌우로 벌리고 엉덩이가 땅에 닿을 정도로 무릎을 굽혀 버틴 자세로 두 팔을 힘껏 위를 받치고 있다.
■ 들통 난 고구려-돌궐의 밀통
<수서> ‘열전 배구전’ 등에 등장하는 607년 4월의 기사가 극적이다. 당시 장성 지역을 순행중이던 수 양제(604~618)는 내몽골 초원에 있던 계민 가한(?~609)의 돌궐막사(진영)를 깜짝 방문했다.
계민은 돌궐 내부의 분쟁에서 수나라가 세운 위성정권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다.
마침 고구려 밀사가 계민 가한을 방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었던 계민은 고구려 밀사를 수 양제에게 데려갔다.
<수서>는 “고구려가 돌궐이 밀사를 보내 이미 통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크게 빈정이 상한 수 양제는 이때 “고구려 사신은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짐(황제)를 알현하라’고 일러라. 그렇지 않으면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고구려-돌궐의 교섭은 무산됐다.
이 기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나라의 꼭두각시 지도자가 수나라와 견원지간인 고구려 사신을 만나 교섭했다는 것이 아닌가. 수나라의 ‘위성국’도 그럴진대, 당나라의 ‘기미국’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라가 몽골고원을 차지했다지만 고구려 사절의 사마르칸트 방문이 완전히 막혔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 8000㎞의 여정-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자그만치 8000㎞나 떨어져 있다. 도보로는 200여일, 말을 타고도 80여일 걸리는 대장정이었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에 등장하는 사절단이 바로 연개소문(?~665?)이 파견한 밀사였을 것이다.
■ 서역인 천지의 고구려벽화
다른 예를 살펴볼 필요도 없다. 고구려 벽화고분에 등장하는 고구려-서역의 교류 흔적을 짚어보자.
안악3호분(357년)에는 비파와 퉁소 등을 서역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함께 춤을 추는 무용수가 눈에 띈다.
무용수는 이목구비가 영락없는 서역인이며, X자로 다리를 꼬고 호선무를 추고 있다. 호선무는 소그드의 전통 무용이다.
또 이 벽화의 남쪽 동벽에는 수박희(맨손 격투기)를 겨루는 한 사람은 코가 유난히 높고 눈도 큰 서역계로 보인다. 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의 씨름 및 수박희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서역인의 얼굴이 보인다. 주로 서역인-고구려인의 대결구도로 짜여있다. 치열한 국제대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약수리·대안리 1호분·수산리·안악2호분·쌍영총·진파리1호분·삼실총 등 4~7세기 고분 벽화의 문지기 혹은 역사 가운데 상당수가 서역인이다.
▲ 1400년의 우정- 최근 한국문화재재단과 문화재청이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환경개선 공사를 마무리하고 재개관했다. 또 국가유산종합관리센터에 유물 분석용 X-ray를 포함한 유물 보존·분석 및 고고학조사 전문 기자재를 지원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벽화고분 중 장천1호분에는 서역 문화 요소가 도드라진다. 앞방 북벽의 들놀이(야유회)에는 씨름꾼 외에도 다수의 서역계 인물이 보인다. 또 이 벽화분의 천장 고임 각 모서리에 그려진 우주역사는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두 다리를 좌우로 벌리고 엉덩이가 땅에 닿을 정도로 무릎을 굽혀 버틴 자세로 두 팔을 힘껏 위를 받치고 있다.
이밖에도 오회분 4호·5호묘에서 표현된 부채꼴 형상의 팔메트문과 연화화생의 장면 역시 서역문화의 요소이다.
이렇듯 4~7세기 고분벽화를 보고 있노라면 고구려는 이때부터 다국적·다문화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누차 밝혔듯이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자그만치 8000㎞나 떨어져 있다. 도보로는 200여일, 말을 타고도 80여일 걸리는 대장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외교 교섭을 위해 떠나는 사절단, 즉 특히 밀사였다면 어떨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지인 사마르칸트까지 갔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에 등장하는 사절단이 바로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과 연개소문이 파견한 밀사였을 것이다.
최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환경개선 공사를 마무리하고 재개관했다. 박물관의 1층 전시실과 궁전벽화 전시실을 새단장했고, 지붕 시설도 교체했다. 새삼 1400년 전 온갖 역경을 딛고 사마르칸트에 닿았을 사신단의 노고를 떠올려본다.
(※ 이 기사를 위해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전호태 울산대교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한국문화재재단 국제협력단과 동북아역사재단 홍보콘텐츠팀, 주류성출판사에서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 이성제, ‘650년대 전반기 투르크계 북방세력의 동향과 고구려-고구려 사절이 아프라시압 궁정벽화에 그려진 배경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65호, 2019
□ 정호섭, ‘조우관을 쓴 인물도의 유형과 성격-외국 자료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의 모습을 중심으로’, <영남학> 24권24호,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13
□ 서길수, ‘아프라시압 고구리 사절에 대한 새 논란 검토-고구리 사신 사행 부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Ⅰ), <고구려발해연구> 66집, 고구려발해연구회, 2020
□ 서길수, ‘아프라시압 고구리 사절에 대한 새 논란 검토-고구리 사신 사행 부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Ⅱ), <동북아역사논총> 68호, 2020
□ 이성제·정호섭·박아림 외,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와 한국·우즈베키스탄 교류>(국제학술회의 자료집), 동북아역사재단·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 2019
□ 고광의, ‘아프로시압 궁전벽화 디지털 복원 모사’, <동양예술> 41권, 한국동양예술학회, 2018
□ 이승희,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그리고 한반도와 소그드의 교류’, <숭실사학> 44집, 숭실사학회, 2020
□ 전호태,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와 중앙아시아의 교류’, <한국고대사연구> 68권68호, 한국고대사학회, 2012
□ 노태돈,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북아시아 유목민 국가’, <동양학> 제58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2015
□ 이재성, ‘아프라시압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 사절에 관한 고찰-고구려에서 사마르칸드까지의 노선에 대하여’, <중앙아시아연구> 18권 18집, 중앙아시아학회, 2013
□ 권영필·정수일·지배선·최광식·장준희 외, <중앙아시아 속의 고구려인 발자취>, 동북아역사재단, 2007
□ 가게야마 에츠코(影山悅子), ‘사마르칸트 벽화에서 보이는 중국회화의 요소에 대하여-조선인 사절은 와르후만왕을 방문했는가’, <서남아시아연구> 49, 1998
□ L. I. 알바움, <아프라시압 벽화>, 타슈켄트 판, 1975
□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몽골 오르혼 비문의 고구려’, <계간 한국의고고학> 26호, 2023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명상음악/ 홀로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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