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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

[불교가요] '수덕사의 여승' (1969) - 황금심 노래

잠용(潛蓉) 2016. 9. 9. 09:51




'수덕사의 女僧' (1969)
金文應 작사/ 韓東薰 작곡/ 노래 黃琴心

 

< 1 >
人跡 없는 修德寺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女人의 외로운 그림자
俗世에 두고온 情 잊을 길 없어
法堂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아아 아아 아~
修德寺의 쇠북이 운다.

< 2 >
산길 千里 修德寺에 밤은 깊은데
念佛하는 女僧의 외로운 그림자
俗世의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法堂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아아 아아 아~
修德寺의 쇠북이 운다~

 


송춘희 노래 (원창 1966)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金元周)”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 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尹心悳)이 그 한명이요, 또 한분은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羅蕙錫)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金一葉)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수덕사의 여승이었으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김일엽 스님의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지금도 그러하지만)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依足)을 한 장애인이었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청산하고 한국 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큐슈제국대(九州帝國大) 대학생이였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 직지사에서 활동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는 지금도 걸려있다고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자기 어머니가 보고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였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고 모질게 모자(母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 자식을 절 밖에서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修德旅館)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 내렸을까?

 

[사진] 당시의 수덕여관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19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에 발표한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출처: 위키백과]

 

수덕사 법당과 가수스님 송춘희

 

[사진] 수덕사의 여승 가수 송춘희


수덕사 산행길 입구에는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로 유명한 가수자 음성 포교사 송춘희 법사님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송춘희 노래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가사의 내용 면면은 지극히 속가적으로 '1966년 노래가 발표될 당시 방송 가요프로그램에서 수차례 1위를 거머쥘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고 하나 유행가로서의 애절한 가사는 인기를 얻었을지 모르나, 비구니 스님들의 입장에서 볼 땐 그 분들의 속가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일으키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수행에 역행할 수 있어 비구니 스님들이 노래비를 무너뜨리지 않았나 싶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있다. 백제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년)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삼층석탑, 고려자기,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수덕사 하면 《청춘을 불사르고》《어느 수도인의 회상》등을 써서 1930년대 센세이션을 이르킨 김일엽을 떠오르게 한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28년 만공선사(滿空禪師) 문하에서 득도 수계(受戒)하고 불교 신앙으로 전향하게 되어 만공(滿空)이 머물던 예산 수덕사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우리나라 유일한 목조건물로 고려 충렬왕(1308년)때 건립)

 

수덕사의 창건 설화로는 두 가지가 전한다. 그 첫번째 설화로는...

홍주의 한 마을에 사는 수덕(修德)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고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德崇) 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나서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낭자의 한쪽 버선만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德崇山)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

 

(관음바위 뒷쪽에 관세음보살 입상이 모셔져 있다)


두번째 설화로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佛事金)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供養主)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修德)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산궁곡(深山窮谷)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家産)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그 속으로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다. 그뒤부터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定慧寺)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京鄕各地)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수덕사는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捧彫)하게 되었다. [출처: 수덕사 홈페이지]

 

수덕사(修德寺)의 역사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전경)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백제말에 숭제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된 건물로서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으며, 1936년 대웅전 중수 때 발견된 벽화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서 주악공양비천도(奏樂供養飛天圖)‧수화도(水花圖)‧야화도(野花圖)‧금룡도(金龍圖)‧오선도(五仙圖)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밖에 이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노사나불괘불탱(蘆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63호), 만공탑(滿空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칠층석탑(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 등이 있다. 노사나불괘불탱은 1673년(현종 14)에 제작된 괘불로서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다.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하여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만공탑은 만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둥근 돌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부도이다.

 

조인정사 앞에 세워진 칠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으로서 지대석 위에 기단 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그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수덕사는 한국 불교를 해외에 알리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숭산(崇山, 1927∼2004)이 1949년 고봉(古峰)에게 비구계를 받은 사찰이기도 하다. [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