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3. 미군에 보낸 일본인 편지
"맥아더 각하, 쌀 배급만 늘려주면 천황제 없애도 환호"
한겨레ㅣ2019.02.02. 09:46 댓글 128개
맥아더 사령관에게 쓴 일본인 편지
점령 비판보다 호의 내용이 다수
오사카 근처 거주하는 한 여성
"부인들은 미국 지배 기쁘게 생각"
연합군 총사령관인 미국 육군대장 맥아더 원수가 1945년 9월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쪽으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했다. 이후 미군은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와 차이가 있다면 미군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일본 정부를 통해서 간접통치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NA II)과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는 점령기 동안 일본인들이 점령당국과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편지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50만통 이상으로 추산되니 무척이나 많은 양이다. 그 편지들은 일본인들이 패전 후 미군 점령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보았는지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 1945년 9월27일 일본 왕 히로히토가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방문해 맥아더 미군사령관을 만난 장면. 서양식 예복 차림의 일왕은 경직된 모습인 데 비해 황갈색 셔츠 차림의 맥아더는 두 손을 뒤춤에 받친 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 쪽은 이 사진의 사용을 꺼렸지만, 당시 미군은 각 신문사에 사진 게재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아사히신문> 등에 일제히 실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 1945년 9월29일 일본의 모든 신문 1면에 일제히 실린 히로히토 일왕의 모습. 군복 대신에 양복을 입은 일왕의 새 이미지는 전쟁 책임을 가려버리는 데 도움을 줬다. <아사히신문> 피디에프판
흥미롭게도 점령군과 점령정책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과 친근감을 드러낸 편지가 비우호적이거나 비판적인 편지보다 훨씬 많았다.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들은 당연히 권력자를 향한 탄원과 진정의 성격을 띠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듬뿍 담고 있다. 맥아더는 자기도취가 심했던 군인으로 알려져 있고, 점령 기간 중 나른한 오후 시간에 소파에 길게 몸을 눕히고 영어로 번역된 일본인들의 칭송 편지 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점령자가 피점령자에 의해 그렇게까지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진 사례는 역사상 흔치 않다. 일제가 패전 이전 일본 본국은 물론 조선, 대만 등 식민지와 기타 점령지역에서 미국과 영국을 ‘마귀와 짐승’(鬼畜米英)으로 부르며 극렬한 반미·반영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비교하면 일본인들의 그러한 태도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연합군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인들이 미군을 환영한 것이야 당연하다 치더라도 패전국 국민이 과거 적군이었던 점령군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후 일본의 지배층과 지배체제가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불신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인 천황’으로 부르며 맥아더 칭송
점령기 일본에서 맥아더는 일본인들에게 ‘벽안의 대군’ 또는 ‘백인 천황’(White Emperor)으로 불리었고, 일왕(天皇) 이상의 권위를 가졌다. 일본의 점쟁이나 무당들 가운데 맥아더를 몸주신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많았다고 하니 거의 신적 존재로까지 받아들여진 셈이다. 일본 민중이 점령군 수장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그를 정서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실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심지어 부녀자들이 보낸 편지들 가운데 ‘당신의 자식을 낳고 싶다’는 편지가 수다하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후대의 한 일본인 연구자는 ‘당시 일본인은 점령과 동침해서 개혁이라는 자식을 낳았다’고 표현했다.
▲ 오사카 인근에 사는 오우치 하나코는 1945년 12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식량 배급을 늘려주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라고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
▲ 오우치 하나코가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의 겉봉투. /정용욱 교수 제공
▲ 오우치 하나코가 쓴 편지 원본 사진. /정용욱 교수 제공
문서 상자에 담긴 수많은 편지 가운데 맥아더 예찬과는 거리가 있는 유별난 편지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오사카 부근 사노마치(佐野町)라는 곳에 살았던 오우치 하나코가 자신을 전재여자(戰災女子)라고 소개하며 1945년 12월 맥아더 원수에게 엽서 한 통을 부쳤다. “친애하는 맥아더 각하, 우리들이 오랫동안 희망해온 부인참정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목하 전쟁의 피해를 입은 채 아직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이가 딸린 우리 아내들은 하루라도 빨리 식량난과 암시장 물가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온갖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식량 수입에 확실한 대답이 없는데 무엇이 장애가 되고 있는 것입니까. 천황제가 불가하다면 당장이라도 식량을 미국이 증대 배급해주는 조건하에 폐지해도 대중은 환호로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각하, 세간의 부인들은 미국에 지배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조차 합니다만 여전히 식량난이 계속된다면 미국도 역시 도조씨가 말한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식량난과 물가고를 겪는 패전국 부녀자의 애원이지만 동시에 점령군에게 당장 식량을 내놓으라는 협박조다. 심지어 식량 배급만 늘려준다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좋고, 식량난이 계속된다면 미국도 도조 히데키 전 일본 총리대신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도조는 일제의 전쟁 확대를 영·미 제국주의의 대동아 노예화와 세계 정복 기도에 맞선 성전이라고 선동하며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내몰았던 전력의 소유자다. 당시에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오우치 하나코는 식량난이 계속된다면 “도조씨가 말한 대로” 미국이 일본, 아시아를 노예화할 목적으로 점령을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이니 식량 공급을 늘려달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절박한 심정을 반영하듯 문장 끝에 마침표나 물음표도 미처 찍지 못한 채 단번에 휘갈겨 쓴 이 엽서는 간사이(關西) 사람의 기질을 드러낸 것인지 내용도 괄괄하고 필체도 활달하다.
주목할 것은 천황제에 대한 태도다. 천황제는 일본군국주의를 지탱한 핵심적인 기제였다. 일제가 연합국과 조건부 항복을 교섭하면서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끝까지 관철하려 했던 것도 천황제 유지였다. 메이지유신 무렵만 해도 ‘천황’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존재였으나, 일제가 아시아 각국을 침공하여 식민지를 확대할 때마다 인기가 올라갔고, 군국주의가 강화되어 감에 따라 신격 지위로까지 격상되었다. 미국 역시 전후 대일점령정책을 구상할 때 천황제 폐지 여부를 핵심적인 사안으로 고려했다. 미국은 점령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천황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특히 맥아더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1946년 새해 벽두에 히로히토는 ‘인간선언’을 통해 스스로 현인신(現人神)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이어서 일본 전국을 돌며 상징천황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재천명했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에게 일본인들은 평균적으로 매일 약 1천통의 편지를 보냈다. 각계각층이 보낸 이 편지들의 주요 내용은 미군사령부의 점령정책과 맥아더 사령관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관에 보존돼 있는 일본인들의 편지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천황제 존폐 여부에 대해서도
존속 대 폐지론이 최소한 반반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갇힌 일 군인
“우리 외면 천황 보며 후회의 눈물”
“천황이 전쟁범죄 무죄라고?”
일본 전후 정치의 출발점에서 천황제의 존폐가 가지는 중요성을 반영하듯 점령 초기 점령군에 배달된 일본인들의 편지에서 천황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신문 여론조사는 천황제 유지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편지들은 시기별로 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더 많은 시기도 있고, 비판과 지지가 비슷하게 나올 때가 많았다. 비판의 주된 논거는 천황제가 군국주의의 수단이자 온상이라는 것이었고, 노골적인 천황제 지지도 적지 않았지만 천황제를 철폐하기보다는 히로히토의 퇴위 정도로 그치거나 천황을 비정치화해 존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위의 편지는 천황제 존폐 논란에서 전쟁책임 문제, 점령통치를 위한 현실적 필요성, 전후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상징성 따위의 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쌀만 준다면 천황은 없어도 상관없고, 그 점과 관련해서는 점령군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 방에 정리해버린다. 황실에 대한 사소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국화의 터부’가 지배적인 오늘날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허용될 리 없고,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다. 천황제 문제는 당시 일본의 전쟁책임을 둘러싼 논의에서 핵심적 사안이었다. 아래 편지를 보자.
“천황은 모든 전쟁범죄로부터 무죄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는 그의 신하들이 그의 명령은 지상명령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그들의 의무를 수행했고, 또 국가의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결과 전범으로 차례차례 사형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까? A급 전범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민족의 아버지로서 해외에서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C급 전범들을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런 동정적 태도를 취할 때만 일본국 헌법이 유지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천황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후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한 일본 군인이 고향 지바(千葉)에 살던 아내에게 보낸 1947년 10월의 편지는 B, C급 전범은 천황의 지상명령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며 그들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천황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천황의 전쟁책임 면책이 일본 국민, 일본 사회 전체의 면책을 주장할 수 있는 심리적 토양을 제공했음을 잘 보여준다. 천황이 면책되자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기준이 군국주의나 비민주적 가치에 대한 비난으로 설정되지 않고, 일본 국민 사이에서 전쟁으로 이익을 본 자들에 대한 비난과 자기비판의 결여로 나타났으며, 평화를 유린한 죄와 침략행위에 의한 가해 인식을 희박하게 만들어버렸다. 즉, 일본인의 전쟁책임에 대한 인식이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은 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에 의해 지배되었고, 일본 국민 사이에서 ‘피해자론’의 확산은 일본의 타민족 침략과 식민지화의 가담자로서 일본 국민의 책임에 대한 자각을 봉쇄해버렸다. 오우치 하나코가 자기를 지칭할 때 썼던 ‘전재녀’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으로 피해를 본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였으나 전후 일본이 져야 할 전쟁책임 문제라는 맥락에서 보면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 편지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의 결여와 책임 회피로 이어진다.
▲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 선언을 발표한 이른바 ‘옥음방송’을 듣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 사진 <점령과 개혁>(아메미야 쇼이치 지음, 유지아 옮김)
가해자 의식 대신 여전한 우월의식
“만약 동양인 중 일본인에 대해 특권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태도는 장래 또 싸움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역사상 도쿠가와 시대 이전에는 세계의 강대국, 문명계에 돌입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일본은 문명국, 공업국으로 창조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인종에 대해서 그러한 감정을 가진다면 반드시 일본인의 감정 폭발을 초래할 것이다. … 국가 관념이 없는 인종은 열등민족이다. … 재일동양인은 이겼다는 관념을 버리고 없애야 한다. … 재일동양인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승리했다는 관념을 없애야 한다. … 일본인은 동양인에게 실력, 국력으로 절대 패하지 않았다.”
1946년 6월에 쓴 ‘세계평화에 대한 조선인 중국인 재일자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투서에서 발신자가 사용한 ‘전승국민화한 동양인’이라는 표현은 민족적 우월감에 상처를 입은 데서 비롯된 증오의 감정조차 띠고 있고, 일본인을 동양인과 구분하고 있다. 종전으로 일본인은 패전국민이 되었고, 반면 식민통치의 대상이었던 조선인과 중국인은 해방된 민중이 되어 마치 승리자처럼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일본인들 앞에 서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 발신인은 그러한 상황이 못내 거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북한 감정을 불식하려는 듯이 일제가 식민통치 내내 강조했던 인종적 편견을 다시 꺼내든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화의 목표를 탈아입구(脫亞入歐)에 두고, 자신을 야만적 ‘동양’과 구분하여 문명화된 ‘서양’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일본인들이 과거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스스로 피해자가 됨과 동시에 타민족에 대한 가해자가 되거나, 또는 가해에 가담했던 것에 대한 인식을 결여했다. 그들 사이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의 자각이나 진지한 반성도 없고, 민족적 우월 의식이 여전히 무반성인 채로 잔존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은 또 어떤 점령을 겪었을까?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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