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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2100년 전 장례식에서 생긴 일

잠용(潛蓉) 2019. 12. 21. 13:0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100년 전 장례식에서 생긴 일

경향신문ㅣ2012.09.26 11:07 수정 : 2013.01.30 14:25

 


▲ 다호리 통나무관에서 나온 2100년 전의 제수용 밤. 하관 때 사용된 동아줄 주변에 뿌려져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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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밤이야?” “이건 감이잖아.”

1988년 경남 의창(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확인됐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조성된 무덤에서 나온 밤(栗)과 감(枾)이었다.

감 3개는 통나무관의 밑바닥에서 옷칠을 한 고급 제기 속에 고스란히 담긴채 확인됐다. 밤은 시신을 넣은 통나무관을 하관할 때 쓴 동아줄 주변에 흩뿌려진 채로 확인됐다. 28개나 됐다.


감과 밤은 대추와 함께 제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삼색과일’이다. 전통의 제사상 기본차림이 이미 2100년 전부터 확립됐다는 뜻인가. 당시 발굴책임자인 이건무 학예관(전 문화재청장)의 회고를 토대로 2100년 전 다호리의 장례현장을 복원해보자.


2100년 전의 장례식

기원전 1세기~기원 전 후 사이 다호리 일대를 다스린 소국의 수장이 별세했다. 유족들은 슬픔을 감춘채 장례절차에 들어간다. 먼저 통나무관을 세로로 잘라 내부를 각각 구유형으로 파내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한다. 그런 다음 시신과, 각종 부장품(칠초동검, 철검, 목합, 유리구슬, 목걸이, 철정 등)을 넣는다. 목관을 밀봉한 다음 목관 다리 부분의 ㄴ자형 구멍에 굵은 동아줄을 건다. 이 목관의 줄을 여러 사람이 끌어 장지까지 옮긴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여행렬을 지켜보며, 혹은 따라가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한다.


마침내 장지에 닿자 유족들은 미리 파놓은 묘광의 바닥에 다시 구덩이를 판다. 이 구덩이에는 다양한 보물들을 가득 담은 ‘대나무 바구니(竹협)’를 부장한다. 바구니에는 칠을 칠한 각종 무기류와, 쇠도끼 등 철기류, 그리고 중국거울과 허리띠고리 등 장신구류가 가득했다. 또한 오수전·말방울·칠기 붓 등도 넣었다. 이 모두 소국의 지도자였던 고인이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물품들이다.


이어 각종 제기에 감 등 과일과 같은 다양한 제물을 담아 묘광 바닥에 넣는다. 그런 다음 고인을 추모하는 1차 제사를 올린다. 이 때 마지막으로 밤(栗)을 뿌린다. 다음 절차는 하관이다. 굵은 밧줄을 이용해 목관을 안장한 다음 목관과 토광 사이에 흙을 뿌려 덮은 뒤 다시 칠기와 철기 등을 올려놓는다. 다시 2차 제사를 지낸다.


“아마도 두번째 제사 때는 망자와 가까운 사람들, 즉 친족이나 주변 읍락의 수장이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넣어주었을 겁니다. 생전에 망자와 친분을 나눴던 사람들이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을 겁니다.”(이건무 선생)

2차 제사를 끝낸 뒤 목관 위에 다시 제수용품을 담은 칠기 제기들을 배열한 다음 마지막(3차) 제사를 지낸다. 이건무 선생은 “유물의 양상을 토대로 추정하면 하관식 때 최소한 3차례의 제사행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東夷는 君子不辭의 나라”

3차례의 제사라. 깍듯하기 이를 때없는 장례의식이다. 하기야 조상과 하늘을 기리는 제사행위는 동이족의 유별한 덕목이었다. 동이는 중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예(禮)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통했던 것이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는 ‘동이’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 제기에 담긴채 발견된 2100년 전의 감 3개체. 이미 이때부터 제사의 기본 차림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이(夷)는 동방에 사는 사람이다. 동이는 대의를 따르는 대인이다. 동이의 풍습은 어질다. 어진 이는 장수하는 법이며,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이다.(夷 東方之仁也 惟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공자도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구이에 가고 싶다.(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논어> ‘자한’)고 했다. 이뿐이랴.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 등을 보자.

“이(夷)는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는 즐겁게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한 일이다.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사이(四夷)에서 이것을 구했다.”


그러면서 부여와 고구려, 삼한의 풍속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음식을 먹을 때 제기인 조두(俎豆)를 쓴다. ~은력 정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모여 연일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장례는 5개월이나 지내는데, 오래 끌수록 번성한 집안이다.”(부여)

“장사를 후하게 지낸다. 금은비단을 죽은 자에게 보낸다. 시월에 나라의 동쪽에서 거국적으로 하늘제사를 지낸다.”(고구려)


“오월에 씨를 뿌릴 때 귀신(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춘다. 날마다 밤낮없이 쉴 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마한)

지역마다 다소간 차이는 있으되 조상신과 하늘신을 제사지내는 예(禮)에 공통으로 심혈을 쏟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밥먹을 때도 제기를 썼던…

그러니 소국의 수장 하관식에서 무려 3차례나 제사를 지낸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발굴된 제사용품도 흥미진진하다. 우선 옻칠을 한 다양한 형태의 제기가 눈에 띈다. 사각형 제기, 원형 제기, 원통형 제기 등이 확인됐다. 중국인들은 제기를 통틀어 ‘조두(俎豆)’라 한다.

중국인들의 눈에는 부여 사람들이 평소 식사할 때도 제기인 조두를 썼다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여긴 것 같다.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썼다”(<삼국지>)고 특별히 기록했을 정도였으니까….


 

▲ 다호리 통나무관에서 확인된 붓. 문자생활을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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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의 후예임을 인정한 공자는 “어릴 적 늘상 소꿉장난을 할 때 조두를 펼쳐놓고 제사를 지냈다”(<사기> ‘공자세가’)고 한다.

제기인 조두가 다호리 무덤에서 다수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조두 위에 감 3개가 담긴채 발견되었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하관식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인 것이다.


또 의미심장한 유물은 목관 밑에 뿌려진 밤 28개였다. 통나무 관을 하관할 때 사용된 동아줄 주위에 뿌린 것이다. 이 또한 허투루 넘길 주제가 아니다. 하관 때 제의행위의 일종으로 뿌린 것이므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감과 밤은 대추와 함께 제삿상에 올리는 ‘삼색과일’이다. 이미 2100년 전 다호리에서 제삿상의 기본차림을 확립했다는 뜻이다.


관 주변에 밤(栗)을 뿌린 까닭

조상들은 왜 밤과 감을 제사에 없어서는 안될 과일로 꼽았던가. 우선 ‘밤’의 경우를 보자.

“마한의 금수초목은 중국과 비슷하지만, 배 크기만한 굵은 밤이 난다.(出大栗 大如梨)”(<삼국지> ‘위서·동이전’)


1611년 허균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밀양 밤이 크고 맛이 달고 좋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대사의 고향인 압량군(경산시)에는 한 톨이 밥 그릇 하나에 가득 찰 정도의 어마어마한 밤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 밤꽃의 향기는 약간 시큼한, 남성의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는 ‘망측한’ 소리를 들어왔다.


하지만 밤은 우리네 제사상에 뻬놓지 않고 올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밤송이 하나에 보통 3개의 알이 들어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 즉 제사 때 삼정승(영의정·우의정·좌의정)을 배출시켜 달라는 염원에서 밤을 올렸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설이 있다. 밤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은 한결같은 효심의 열매라는 것이다. 즉 밤은 싹이 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 두고 싹만 올라온다. 그런데 땅 속에 남아있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 굉장히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밤나무는 자신을 나아준 부모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로 여겼다.


그래서인가? 밤나무 목재는 신주(神主)와 위패, 제사상 등 제사용품의 재료로 쓰였다.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겠다면서 밤을 목관 주변에 뿌렸을 것이다.



▲ 다호리에서 확인된 고사리 무늬 철기. 이미 정교한 철기문화가 다호리 사회를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기에 감(枾)을 담은 사연
제기 위에 담긴 감도 대표적인 제사용 과일이다.

감나무를 비롯한 과일나무는 무거운 열매를 지탱하느라 진이 빠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나무 문화재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감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감나무가 골프채 헤드에 안성맞춤이라 해서 수도 없이 잘려 나갔다. 그러니 100년을 넘긴 감나무가 드물었다.


그런데 감나무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감나무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절대 탐스러운 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어미보다 훨씬 못한 땡감이 달릴 뿐이다. 그래서 감나무와 비슷한 고욤나무를 대리모로 고용해야 한다. 고욤나무를 밑나무로 하고 감나무 가지를 잘라다 접을 붙여서 대를 잇는다.


사실 감과 흡사한 고욤은 너무 떫고 온통 씨투성이여서 먹기가 어렵다. 서리를 맞히고 흑자색으로 완전히 익혀서 반죽처럼 으깨어 놓아야 겨우 먹을만 하다.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식사대용으로 사랑받았다. 어떻든 감나무는 정성껏 남의 자식을 키우는 고욤나무 덕에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까 감과 고욤의 이야기는 사람은 다른 이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조상의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난다는 교훈을 제사상의 감은 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 운구 때, 그리고 관을 내릴 때 사용한 동아줄. 동아줄 주변에 밤을 뿌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세종실록> ‘오례(五禮)’을 보면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종묘에 새로 나온 곡식이나 과실을 먼저 올리는 의식)를 올릴 때 10월의 과일 속에 감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미 2100년 전부터 제사상에 감을 올렸음을 다호리 제기 속의 감은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복숭아는 ‘부적격’

제사의 필수인 ‘삼색과일’ 가운데 대추는 확인하지 못했다. 조사단의 눈에 씨앗만 남았을 대추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대에 제작된 전한시대 중국거울이나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청동거울의 명문에서 대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대추의 역사는 깊다.

“따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새싹에 불어/파릇파릇하니/어머니의 노고가 생각나네.”

<시경> ‘국풍’ 편에 나오는 ‘개풍(凱風)’이라는 시의 내용이다. 기록으로만 봐도 족히 3000년은 넘는 재배의 역사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 제사를 지낼 때 맨 먼저 놓는 과일은 대추였다. 오죽했으면 과일 놓는 순서가 ‘조율이시(棗栗梨枾)’, 즉 대추·밤·배·감이었을까.

“마한에 배 크기만한 굵은 밤이 난다.(出大栗 大如梨)”(<삼국지> ‘위서·동이전’)는 기록을 보면, 배(梨)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예전부터 시골에서는 밭둑엔 대추나무, 야산자락엔 밤나무. 마당가엔 감나무, 숲속엔 돌배나무를 심었다. 식량으로도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제사용 과일을 조달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여담 하나.

복숭아 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없애주는 주술적인 징표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런데 조상들은 제사상에는 이 복숭아를 절대 올리지 않았다. 왜일까. 중국 요임금 시대, 동이의 명궁인 예가 제자 봉몽이 휘두른 복숭아 방망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제자 봉몽이 예의 활솜씨를 시기한 나머지 스승을 때려 죽인 것이다. ‘귀신(조상)들의 우두머리’가 된 예는 나쁜 귀신을 쫓는 종포신(宗布神)이 됐다. 또한 제사상을 차릴 때는 절대 복숭아를 올리지 않았다. 귀신의 우두머리(예)를 때려죽인 복숭아 나무가 아닌가. 그러니 조상 귀신을 위한 제사상에도 차마 복숭아를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명절을 비롯해 때때마다 지내는 제사상에 이렇듯 뿌리 깊고 속깊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2100년 전 막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며 슬픔을 참고 제사상을 차리던 분들이 어렴풋 떠오른다. 문득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의 마음씨가 전해온다. 고인의 은덕과 조상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 추석을 휴일로 치부하며 허투루 지낼 일이 아닌 것 같다.


“웬 밤이야?” “이건 감이잖아.”
1988년 경남 의창(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확인됐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조성된 무덤에서 나온 밤(栗)과 감(枾)이었다.

감 3개는 통나무관의 밑바닥에서 옷칠을 한 고급 제기 속에 고스란히 담긴 채 확인됐다. 밤은 시신을 넣은 통나무관을 하관할 때 쓴 동아줄 주변에 흩뿌려진 채로 확인됐다(사진). 28개나 됐다.  

하관식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 뒤, 다시 밤을 뿌리면서 고인을 추모한 것이 틀림없었다. 감과 밤은 대추와 함께 제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삼색과일’이다. 전통의 제사상 기본차림이 이미 2100년 전부터 확립됐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 등의 기사를 보자.


“정월에 온 나라가 제사를 지내면서…. 장례는 5개월 이상 치른다.”(부여) “장사를 후하게 지낸다. 시월에 하늘 제사를 지낸다.”(고구려) “귀신(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노래하고 춤춘다.”(마한)

하기야 “평소 ‘밥 먹을 때도 제기(조두·俎豆)를 사용한’ 민족이었다”(<삼국지> ‘부여’)지 않은가. 동이족의 후예인 공자도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할 때 조두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니…. 그런데 밤과 감이 제사의 필수 과일이 된 까닭은 뭘까. 우선 밤을 보자. “(마한의) 큰 밤은 배 크기만 하다(出大栗 大如梨)”(<삼국지>)는 기록이 있다. 유명한 ‘정안 밤’의 시초일까?


삼한의 밤이 튼실했음을 알 수 있다. 밤은 근본을 아는 과일로 꼽혔다. 무슨 말이냐면 밤나무의 경우 싹이 틀 때 껍질을 땅속에 남겨둔다. 싹만 올라온다. 그런데 다른 나무와 달리 땅속에 남아있던 밤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그러니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는 기특한 효심의 나무로 여겼다. 그래서 밤나무를 신주(神主)와 위패, 제사상 등 제사용품의 재료로 썼다.
  
감은 어떤가. 감나무를 그냥 심으면 땡감만 열릴 뿐이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잘라 접붙여야 튼실한 감을 얻을 수 있다. 감나무는 ‘새엄마’인 고욤나무의 보살핌 덕에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상의 감은 다른 이의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문득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의 마음씨가 전해온다. 고인의 은덕과 조상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 추석을 휴일로 치부하며 허투루 지낼 일이 아닌 것 같다. 



<참고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갈대밭의 나라 다호리-그 발굴과 기록>, 2008
□ 이건무, <다호리 유적발굴조사의 의의>,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09
□ 송의정, <다호리 유적 발굴조사의 성과>,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09
□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김영사, 2011
□ 홍일식,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정신세계사, 1996
□ 이형구· 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책문, 2009
□ 정재서, <중국신화의 세계>, 돌베개, 2011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