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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매화틀과 공중화장실··· 과연 냄새나는 역사일까?

잠용(潛蓉) 2021. 7. 28. 12:0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매화틀과 공중화장실··· 과연 냄새나는 역사일까?
경향신문ㅣ2021.07.16 11:05 수정 : 2021.07.16 11:06

“인류의 역사는 화장실의 역사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한 말이다. 하기야 사람이 혼자 살면 화장실이 필요없다. 아무데서나 해결하면 되니까. 그러나 사람은 인간이다. 인간(人間)은 문자 그대로 ‘사람(人)사이(間)’이다.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화장실이 필요하다. 따라서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화장실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 경복궁 내에서 확인된 대형화장실 유구. 한번에 10여명이 용변을 해결할 수 있는 대형 공중화장실이었다고.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 “화장실=인간의 역사”
지난주 경복궁에서 고종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대형 화장실터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위고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무자비하게 훼손된 경복궁을 복원정비하기 시작(1991년)한지 꼭 30년이 흘렀지만 화장실 유구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아니 궁궐에서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인가?
아니다. 경복궁 배치도나 ‘북궐도형, ’궁궐지’ 등을 보면, 경복궁 화장실은 최대 75.5칸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복원 정비한 곳은 아무래도 궁궐의 중심축, 즉 왕과 왕비가 정사를 돌보고 생활했던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왕과 왕비는 화장실을 쓰지 않았다. 매화틀(매우틀)이라는 해결도구를 썼으니 화장실이 발견될 리 없었다. 그러나 2045년까지 정비 복원이 공간을 계속 넓혀왔고, 그러다보니 화장실과 같은 주변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화장실 유구는 동궁 권역에서 하급 관리들과 군인들이 머물렀던 건물 공터에서 확인됐다.

 

▲ 경복궁에서 확인된 대형 화장실의 구조. 이 화장실은 경복궁 중건 때인 1868년 설치되었다가 20여년 뒤인 1891년 계조당을 다시 지으면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화장실=인간의 역사’라는 위고의 말처럼 화장실의 역사는 인간이 정착해서 공동체의 삶을 일굴 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맞는 얘기다. 이미 서주시대(기원전 1046~771년) 주나라 궁궐에는 똥·오줌을 물에 흘려보내는 ‘정언(井언)’이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수세식’ 화장실인 셈이다. 3000년전이다.
중국의 역사서 <좌전>에는 ‘화장실에서 빠져죽은 군주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노나라 성공 10년(기원전 580), 진후(晋侯)가 뒷간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주나라 뒷간은 밑에 매우 깊은 독을 묻었는데, 급한 복통이 일어난 진후가 잘못해서 떨어졌다는 얘기다.

예부터 화장실을 지칭하는 단어가 몇 있다. 후한시대(23~220) 자전인 <설문해자>와 <석명> 등은 화장실을 ‘측(厠), 혼(혼), 청(청), 잡(雜)’ 등으로 설명했다. 모두 뒷공간에 있는 더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 <석명>이라는 자전에 나오는 ‘잡(雜)’이라는 용어가 흥미롭다. “화장실에 사람이 섞여 있다”고 것이다. 이 말은 화장실의 원조는 개인 화장실이 아니라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다. 원래 화장실에는 칸막이가 없으며, 여러 사람이 뒤섞여서 용변을 본다는 뜻이다.

 

▲ 백제시대 공동화장실 복원도, 익산 왕궁리 유적 서북쪽 공방근처에 있었다. 5칸-3칸-2칸짜리 화장실 3개동이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익산에서 확인된 백제 화장실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화장실이 한국 역사에서는 없었을까? 있다.
<삼국유사>에도 화장실 이야기가 등장한다. “혜공왕 2년(767), 대궐 북쪽 화장실에서 두 줄기 연꽃이 피어났다”는 기사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화장실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천하가 어지러워질 징조’라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혜공왕이 “대사면령을 내리고 목욕재계를 한 뒤에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2003년에는 백제시대의 화장실이 극적으로 발굴된 적이 있었다.
당시 전북 익산 왕궁리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길이가 10.8m나 되고 폭 1.7~1.8m에, 잔존깊이가 3.1m나 되는 대형 지하구덩이를 발굴했다. 구덩이 안에는 기와와 토기, 짚신, 나무자재와 나무막대를 비롯해 밤껍질이나 콩류, 참외씨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수분이 가득 포함된 유기물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이런 경우 과일이나 곡물, 물을 저장하는 지하창고로 판단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흙을 파내자 엄청난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코를 쥐고 조사를 마칠 때까지도 그 악취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하나 수수께끼는 출토된 6개의 나무막대였다. 조사단은 명문 목간이 아닐까 했지만 글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윗부분을 좀 둥글게 만든 나무막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그해 12월, 유적의 발굴성과를 정리하는 자문위원회에서 전문가 한사람(이홍종 고려대 교수)이 “화장실 유구가 아니냐”고 코멘트했다. 그때까지 국내유적에서 화장실 유구를 발굴했다는 보고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며 획기적인 발굴이 아닌가?

 

▲ 백제 공중화장실에 확인된 뒷처리용 나무막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과연 유기물 토양에서 편충과 간흡충, 회충은 물론 종 감별이 어려운 장내 기생 흡충류의 충란이 다량 발견됐다. 분명 국내에서 처음 찾아낸 화장실 유적이었다.
추가조사 끝에 첫번째 화장실과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제2, 제3의 화장실이 잇달아 확인됐다. 이곳은 2칸, 3칸 5칸 짜리가 차례로 설치된 7세기 백제시대 공동화장실이었다.
첫번째로 발견된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5칸이었다. 즉 5명이 한번에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두번째 화장실은 3칸짜리였고, 세번째 화장실은 2칸짜리였다. 2칸짜리가 가장 위쪽에 있었고, 그 아래로 3칸-5칸짜리가 배치됐다. 그렇다면 공동화장실도 신분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구분된 것일까?

여러가지 상상해볼 수 있다. 가장 위쪽의 2칸 화장실은 공방의 지체높은 인물이 사용한 곳일 수도 있다. 또 신분에 따라 3칸-5칸 순으로 가는 것이고… 혹은 2칸 혹은 3칸짜리는 여성 전용 화장실일 수도 있다.
화장실 유구로 판명됨에 따라 수수께끼 같던 나무막대의 용도도 파악됐다. 이 나무막대는 지금의 화장지, 즉 뒤처리용이었던 것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이 뒤처리용 막대가 필수였다.

또 하나 인근 배수로에서 확인된 이른바 ‘변기형 토기’ 2개체분도 주목을 끌었다. 요즘의 요강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매화틀’과 같은 ‘휴대용 혹은 이동식 변기’일 가능성도 있다. ‘매화틀’은 국왕의 전용 변기였다. 그렇다면 왕궁리에서 확인된 변기형 토기 2개체분은 혹 무왕과 왕비의 매화틀이 아니었을까. 이 대복부터는 상상의 영역이다. 이후 화장실 유구는 이후 부여 쌍북리 유적과 양주 회암사지에서도 확인됐다.

 

▲ 인근배수로에서 확인된 변기형 토기. 조선시대 국왕이 사용했던 매화틀과 비슷한 모양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부처님 하나님도 나섰던 배설물 처리
이렇게 화장실의 역사는 뿌리깊지만 배설물을 처리하는 문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18세기, 19세기 서울은 배설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북학파인 박제가(1750~1805)는 “서울에서는 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 내다버리므로 우물물이 모두 짜게 되고 냇다리의 석축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는 형편”(<북학의>)이라고 자아비판했다.
누가 보면 서울만 똥천지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창피해 할 일은 아니다. 서울 거리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니까…. 배설물은 우리 뿐 아니라 인류가 처리해야 했던 가장 골치 아픈 난제였으니까…

오죽했으면 부처님과 하나님까지 발벗고 나섰을까? 무슨 말인가?
부처님(기원전 568?~483?)이 활약했던 시기가 기원전 6세기이다. 불교사원 주변이 온통 똥·오줌밭으로 변하자 부처님이 화장실을 만든 다음 반드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일러주었다.
“문을 세번 두드릴 것, 땅에 독을 묻고 눌 것, 냄새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닫을 것, 벽이나 널에 문질러 바르지 말 것, 돌이나 숯덩이, 나뭇잎으로 닦지 말고 반드시 주목(나무막대)을 쓸 것…”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가.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14장을 보라.
“너의 부대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부대 안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부대를 거룩히 하라.”
한마디로 뒤처리 제대로 하라는 말씀이다.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결함이다. 그러니 아무데서나 배설하지 말고 군대의 진 밖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만들어 깔끔하게 처리하라. 뭐 이런 말씀이었다.

▲ 경기 양주 회암사지 서쪽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공동화장실(해우소) 유구. 깊이가 4미터가 가깝다. 처음에는 음식물저장고로 여겼다가 바닥에 갈린 흙에서 기생충알이 다수 발견되면서 화장실 유구로 확정됐다.

■ 길거리에 던져버린 똥과 오줌
이렇게 부처님 하나님까지 나섰지만 인구가 급속하게 늘면서 배설물 처리는 더욱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기원후 2세기 동안 로마의 인구는 1000~1500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규정상 셋집에는 상하수도 시설을 갖출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야밤에 분뇨와 쓰레기를 창밖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65~128)는 “밤마다 남의 집 창 밑을 어슬렁 거리고 싶으면 유언장을 먼저 써놓는 편이 낫다”고 조롱했다.

서양의 하이힐이 인간 배설물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얘기이다. 즉 중세 유럽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갈 위에 퍼진 동물과 인간의 분뇨가 뒤섞여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굽이 높은 나무 신을 신었는데, 이것이 훗날 패션의 상징인 ‘하이힐’로 발전했단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은 어떤가. 성 전체에 수세식 시설을 한 화장실은 한 곳도 없었다.
국왕의 접견이 몇시간에 걸쳐 이뤄졌기 때문에 지체높은 여성들은 선 채로 풍성한 스커트를 보호막 삼아 생리욕구를 해결했다. 신사들은 기둥, 벽감, 커튼, 테피스트리 뒤에서 소변을 봤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여름철이면 어디에 앉아도 소변냄새가 났다. 사방에 대변이 깔려 있었다”고 코를 쥐었다. 하지만 화장실은 더러운 곳만은 아니다.

▲ 19세기 중반 영국 템스강의 오염을 고발한 풍자그림. 물의 신인 넵투누스가 왼손에 대변을 치우는 스시랑을 들고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 쓴채 강물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들녘 제공

■ “화장실은 심신안정 되찾는 곳”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화장실은 분명 혼자서도 첫날밤을 치른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곳이다. 그 어느 것도 몸에 지니지 않는 한갓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겸손의 장소다. 인간이 휴식을 취하는 곳, 하지만 부드럽게,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감행하는, 그런 장소다.”

그런데 중국 서주 시대의 화장실을 가리키는 ‘정언(井언)’을 보라. 우물 정(井)자와 함께 붙은 ‘언(언)’자는 ‘도랑’과 ‘변소’를 가리킨다. ‘수세식 화장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언’자에는 다른 뜻도 있다. ‘편안하다’와 ‘휴식을 취하다’는 뜻이다. ‘화장실=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는 인식은 20세기 서양의 브레히트가 아니라 벌써 3000년 전 동양에서부터 통용된 말이 아닌가?
그러고보면 용변 조차 매화틀(매우틀)에서 해결해야 했던 왕조 시대 임금의 신세가 더 기구했던 것도 같다. 정사를 펼치느라 눈코 뜰새 없는, 용변을 볼 때보차 화장실에 앉아 잠깐의 여유도 즐길 수 없었던 그런 자리였으니 말이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