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세종시대 ‘올스타’ 총출동해 완성한 ‘활자의 백미’
경향신문ㅣ2021.07.13 05:00 수정 : 2021.07.13 09:47
▲ 도심 한복판인 서울 공평동 유적에서 쏟아진 1600여점의 금속활자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세종이 1434년(세종 16년)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개발한 ‘갑인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들이다. 뒷면이 장방형인 됫박형태를 띠고 있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 관리학 교수 제공
“응, 이 형태는….” 지난 6월 초 도심 한복판인 서울 공평동에서 쏟아진 금속활자들을 검토하던 연구자들의 심장이 뛰었다. 뒷면이 장방형, 즉 쌀을 담는 됫박 형태로 보이는 활자들이 여러 점 확인됐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세종실록>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떠올렸다.
■ ‘됫박형’ 금속활자의 비밀
“후에 고친 활자는 네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른데다(사우평정·四隅平正)….”(<세종실록> 1435년)
그렇다면 이번에 출토된 활자 중 1434년(세종 16년) 주조된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르다’는 바로 그 ‘사우평정’의 ‘갑인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세종 때 맨처음 주조한 갑인자는 인쇄본에서는 보이지만, 활자의 실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물론 서울대 규장각도 ‘됫박 형태의 활자’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활자들이 <세종실록>에 표현된 이른바 ‘초주 갑인자’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갑인자는 ‘초주 갑인자’ 이후 ‘6주 갑인자’(1777년·정조 1년)까지 오랫동안 사랑받은 활자였다.
따라서 규장각 소장 ‘활자들’은 ‘갑인자 계통’ 중 하나로 추정되지만, ‘초주~6주’ 갑인자 중 어느 것인지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55년(세조 1년) 주조한 ‘을해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의 16세기 문화층에서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실물 자료’가 출토된 것이다. 물론 아직 본격 연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일단 578년만에 현현한 초주 갑인자로 추정하고 있다. 자문위원들이 육안으로 훑어본 뒤 초주 갑인자(한자)로 추정한 활자는 일단 30~50자 정도라 한다.
▲ 서울대 규장각 소장 미확인 금속활자. 뒷면이 됫박형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초주 갑인자(1434년)’부터 ‘6주 갑인자(1777년)’ 까지 주조된 ‘갑인자 계통’의 활자 중 하나로만 알려져 있었다.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팀장
■ 이천·장영실 등 당대 과학자 총출동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반듯한’ 갑인자에는 활자 개발을 위한 세종의 분투가 배어있다.
갑인자는 ‘활자의 백미’라 통할만큼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그럴만도 했다.
‘갑인자 프로젝트’는 태종이 시작하고(1403년) 세종이 완성한(1434년), 그야말로 2대에 걸친 개국 조선의 국책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2차 왕자의 난 등 우여곡절을 겪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3년(태종 3년) 금속활자를 주조할 주자소를 만든다. “무릇 훌륭한 정치를 펼치려면 반드시 서책을 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책이 부족해서 유생들이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물론 목판도 있지만 판이 깎이고 이지러지는 약점이 있으므로 특별히 금속활자를 만들고 싶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신료들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금속활자의 주조 및 조판 인쇄술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구구절절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주조기술의 부족 때문에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와 같은 흠결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활자를 제대로 주조했다 해도 조판과 인쇄가 더 큰 난관이었다. 조판틀에 넣은 밀랍(꿀찌꺼기를 끓인 기름)에 활자들을 배열하고 밀랍이 딱딱하게 굳으면 먹을 묻힌 뒤에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서 인쇄했다. 그러나 인쇄 때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종실록>은 “워낙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아무리 굳혀도 조판활자가 흔들려서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고 토로했다.
그랬으니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 신설을 강행했다. 비용이 큰 문제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부담시키지 않았다. 권근(1352~1409)이 쓴 ‘계미자’ 발문을 보면 “활자 개발에 임금의 종친과 공신들이 참여했고, 비용은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물)까지 쾌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도 부족한 예산은 대소신료들이 갹출해서 충당했다. 마침내 ‘계미자’(1403년)를 만든 태종은 4년 뒤(1407년) 계미자를 보완한 활자(‘정해자’라고도 한다) 주조했다. 또 3년의 시행착오를 겪고난 후인 1410년(태종 10년) 인쇄본을 찍어냈다.
▲ 규장각 소장 활자를 세종 때(1434년) 주조된 초주 ‘갑인자’로 찍은 <자치통감>에 등장하는 같은 글자와 비교했더니 놀랍도록 흡사하다.|이승철 팀장 제공
■ 주자소에 술과 고기를 하사한 세종
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의 눈높이에서 볼 때 계미자는 성에 차지 않았다. 여전히 조판 인쇄에도 취약했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공조참판 이천(1376~1451), 좌대언(좌승지) 정초(?~1434), 지신사(도승지) 김익정(?~1436) 등을 불러 활자의 개선을 명했다. 이천은 대간의·소간의·앙부일구 등 해시계와 혼천의 등을 제작 지휘한 인물이다. 또한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와, 김익정 등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 소속 관리들이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를 수장으로 하고 직접 임금의 지휘를 받는 승정원 고위관리들을 활자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한 것이다. 7개월간의 노고 끝에 ‘계미-정해자’의 단점을 보완한 ‘경자자’를 만들었다. 이로써 하루 20여 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세종실록> 1422년 10월29일) 세종은 경자자 개발에 나선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가 ‘네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르다’는 의미의 ‘사우평정(四隅平正)’이라고 기록된 <세종실록> 1435년 8월24일자
■ ‘갑인자’는 활자의 백미
하지만 세종은 만족하지 않았다. 애써 개발한 경자자의 글자꼴이 다소 작고, 빽빽하다는 촌평이 나왔다. 특히 1434년(세종 16년) 7월2일 세종은 “대군들(세종의 아들들)이 ‘활자를 좀더 크게 만들자’고 건의하더라”고 소개했다. 세종은 활자 프로젝트의 재가동을 선언했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지중추부사(명예직·정2품)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개선해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천이 ‘어려운 과업’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세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종실록>은 “이천에게 활자 개발을 강요했다(予强之)”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계미·정해자(1403·1407년)-경자자(1420년)에 이은 3번째 활자 개발은 당시 조선의 역량을 결집한 그야말로 대대적인 국책사업이었다. 활자체는 왕희지체로 간행된 옛 경전 등에서 따왔고, 책에 없는 글자는 둘째아들인 수양대군(1417~1468·재위 1455~1468)이 썼다.
갑인자 개발은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이천을 중심으로 물시계인 자격루 등을 발명한 장영실(생몰년 미상)과 이순지(?~1465), 집현전 직제학 김돈(1385~1440)과 김빈(?~1455) 등 당대 내로라는 과학자·문신들이 총출동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 출토된 추정 <갑인자> 가운데 ‘불 화(火)’자는 1449년(세종 21년)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인쇄된 ‘화(火)’자를 빼닮았다. 1434년 주조된 갑인자가 확실해보인다. /옥영정 교수 제공
그렇게 개발한 활자가 1434년(갑인년) 모습을 드러낸 갑인자이다. 다소 작고 빽빽한 느낌을 주었다는 경자자에 비해 갑인자는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다. 무엇보다 조판·인쇄 때 활자의 흔들림을 대폭 줄였다. 기존에 썼던 밀랍은 아무리 굳힌다 해도 그 부드러운 성질 때문에 인쇄할 때 이리저리 쏠리는 폐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인자를 사우평정(四隅平正), 즉 뒷모양이 정방형인 됫박형태로 만든 이유가 바로 조판 때의 단점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활자 뒷면을 정방형으로 고르게 배열한 뒤에 대나무로 틈새를 꽂아서 고정하니 흔들림을 최소화했다.
“처음에는 조판법을 몰라 밀랍을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이 때문에 경자자는 끝이 모두 송곳 같았다(미개여추·尾皆如錐). 그런데 그 뒤에 대나무로 빈 데를 메워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용재총화>)
이런 방법을 써서 하루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갑인자로 찍어낸 인쇄본은 글자획에 필력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서 판면이 크고 늠름하다. 때문에 갑인자로 찍어낸 책을 ‘활자본의 백미’라 하는 것이다.
▲ 공평동에서 대거 쏟아진 한글금속활자. 1461년(세조 7년) <능엄경언해>를 찍을 때 쓰인 것과 흡사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인 것으로 평가된다. 또 1465년(세조 11년) 새롭게 주조한 ‘을유 한글활자’도 눈에 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 음주의 폐해를 경계하는 글도 금속활자본으로
세종은 이렇게 주조한 금속활자로 기존에 이미 주조한 경자자와, 새롭게 개발한 갑인자로 찍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펴낸다. <세종실록>은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 종이 30만권을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면서 “<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술과 관련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교지를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했다. <세종실록> 1433년(세종 15년) 10월 28일조는 “술의 해독이 참혹한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서 “비록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제 한 몸도 챙기지 못한단 말이냐”는 교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태아의 교양법을 논한 태교와 영아의 보호육성법을 담은 <태산요록>도 주자소에서 간행했다. 이밖에 <성리대전>과 <사서대전>, <오경대전>과 이백의 시와 다양한 역사서 등도 찍어냈다.
기존의 목판인쇄도 함께 활용했다. 삽화와 그림설명 및 시까지 붙인 <삼강행실도> 역시 간행했다. 법령을 몰라 불효를 저지르고 존속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또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소학>)도 찍었다.
▲ 공평동에서 출토된 한글활자는 <능엄경언해>(1461년)에 쓰인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와 흡사하다. 세종 때인 1447년 <석보상절>을 간행하면서 주조한 한글활자와는 확연히 다르다. /옥영정 교수 제공
■ ‘갑인자’와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
물론 1434년 개발된 갑인자는 한자 활자였다. 따라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예쁜 활자’(갑인자)를 만든다 해도 백성들이 읽을 줄 모르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세종은 갑인자 개발 9년 만인 1443년(세종 25년)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창제했다. 그 이유가 ‘나랏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잘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실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자와 이두만으로는 무지한 백성을 깨우치기 힘들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법조문은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있다”면서 “문신도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법조문을 이제 막 배우는 생도는 얼마나 어렵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든다. 이번에 공평동에서 출토된 한글활자는 ‘갑인자’인가, 아닌가?
▲ 출토 금속활자 중에는 갑인자(1434년)보다 14년 빠른 1420년(세종 2년) 주조한 ‘경자자’일 가능성이 있는 활자들이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 /이승철 팀장 제공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중인 금속활자는 40만자가 넘는다. 그러나 이중 한글금속활자는 불과 750여 점이다. 한글을 창제하고(1443년) 반포한(1446년) 세종이 한글로 처음 찍어낸 책은 <석보상절>(보물·1447년)이다. <석보상절>은 승하한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을 시켜 펴낸 석가모니의 일대기이다. 세종은 아들이 지어바친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국보·1449년)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활자라는 ‘초주 갑인자 한자’와 함께 주조한 이른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찍어냈다. 갑인자(한자)로 이 두 책을 찍을 때 함께 사용한 한글금속활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에 쓰인 한글활자는 현전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한글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을해자 병용 한글금속활자’이다. ‘을해자’는 1455년(세조 1년)에 주조한 한자 활자이다. 따라서 한자활자인 ‘을해자’와 함께 쓰인 한글활자라 해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라 한다.
이번에 출토된 한글금속활자 가운데 바로 이 ‘을해자’와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가 보인다. 1461년(세조 7년) <능엄경언해>를 찍을 때 쓰인 것과 흡사한 활자로 평가된다. 출토된 활자 중에는 1465년(세조 11년) 새롭게 주조한 ‘을유 한글활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일단 <석보상절>(1447년)과 <월인천강지곡>(1449년)에 쓰인 이른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금속활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검토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 출토 활자 중에는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여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이나’, ‘하고’, ‘하며’, ‘시니’)도 10여 점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 동국정운식 표기란?
출토된 한글금속활자 중에는 15세기에 한정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보였다.
<동국정운>은 당시 들쭉날쭉했던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려고 만든 표준운서이다. 돌이켜보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최만리(?~1445) 등이 반대한 명분은 바로 “언문(한글)을 창제하면 누가 한문을 배우겠냐. 언문 창제는 중국을 저버리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때 세종은 “아니야. 오히려 한자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한글을 만드는 거야”라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그러려면 들쭉날쭉했던 한자음 갖고는 안돼. 한글로 통일된 표준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해야 해”라면서 <동국정운>을 편찬했다. 말하자면 한글 반대파의 목소리를 무마시키려고 만든 책이었다.
▲ 출토된 금속활자 중 ‘동국정운’식 표기법일 쓴 활자가 보였다. 한글창제 연간인 15세기에만 쓰인 표기법이다. /백두현 경북대 교수 제공
하지만 막상 만들고보니 비현실적이었다. 일률적으로 수많은 한자의 표준음을 표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15세기 말인 성종(1469~1494) 때 흐지부지됐다. 그 중에 ‘ㅭ, ㆆ, ㅸ’ 등은 15세기에 반짝 쓰였다가 사장된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라 한다. 그런데 이번에 바로 그런 활자가 보인 것이다. 또한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여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이나’, ‘하고’, ‘하며’, ‘시니’)도 10여 점 출토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도심한복판인 공평동에서 쏟아진 1600여 점의 금속활자는 세종 연간에 제작된 활자(한글이든 한자든)가 전무한 상태에서 맞이한 갑작스러운 홍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직 연구자들이 자세히 검토한 것이 아니어서 1600여 점 가운데 또 어떤 의미를 간직한 활자들이 존재하는 지 모른다.
출토된 한자금속활자 중에서 1434년 주조한 ‘초주 갑인자’보다 14년 앞선 ‘경자자’일 수 있는 활자가 보인다는 일부 연구자의 견해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또 한글금속활자 중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에 쓰인 활자가 있는 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 출토된 ‘동국정운’식 한글활자가 <동국정운>에 사용된 예. /백두현 교수 제공
■ 한글활자에 명칭을 부여하자
필자는 어느날 시쳇말로 ‘갑툭튀’한 금속활자 관련 공부를 하다가 굉장히 헷갈리는 대목이 있었다.
한자 활자에는 ‘갑인자’니 ‘을해자’니 하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왜 한글활자에는 그에 합당한 명칭은 없을까. 아무리 한자와 함께 쓰인 한글이라도 그렇지,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니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이 하는 이름을 얻었을까. 왠지 남의 이름으로 사는 느낌이랄까. 뭐 지금까지는 워낙 현전하는 한글활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치자. 그러나 이번에 엄청난 양의 한글금속활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글금속활자에도 그에 걸맞은 명칭을 부여해야 할 것 같다.
도심 한복판에서 홀연히 나타난 세종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어찌 대접하고 어찌 보존하며, 어찌 연구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 같다.
(이 기사는 출토 금속활자들을 자문한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 관리학 교수,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팀장,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백두현 경북대 교수 등의 도움말로 작성되었습니다.)
■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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