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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일가족 죽여묻은 순장 확인'… 1500년전 고인골 DNA 분석해보니

잠용(潛蓉) 2021. 9. 23. 06:3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가족 죽여묻은 순장 확인'… 1500년전 고인골 DNA 분석해보니
경향신문ㅣ2021.09.06 09:00 수정 : 2021.09.08 16:08

1982년 1월14일 해외 밀반출 되려던 유물이 부산세관에 의해 극적으로 적발된다.
은제 새날개형관장식과 순금제귀고리, 금은제 고리자루큰칼, 은제 허리띠 등 15점이 압수됐다. 유물을 빼돌리려던 장물업자 3명은 대구 중부경찰서로 넘겨졌다. 

이 유물은 경북 경산 임당동의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복숭아밭)에서 훔친 도굴품이었다.

 

▲ 임당유적에서 확인된 순장 무덤. 출토된 고인골의 DNA 분석결과 주곽(으뜸덧널)에 순장된 4~8세 여아는 부곽(딸린 덧널)에 묻힌 순장자 부부(④⑤)의 딸인 것으로 분석됐다. 무덤 주인공(①)을 위해 일가족이 순장된 경우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해외 밀반출 직전에 적발된 도굴품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소국인 압독국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압독국은 102년(신라 파사왕 23) 사로국(신라)에 투항했다. 예부터 이 일대, 즉 임당동과 조영동 등에 상당한 고분이 산재해있었다. 이곳 평야는 압독의 다른 이름(압량)을 따서 압량벌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에 신경 쓰느라 이곳의 정식발굴 및 보존대책은 뒷전이었다. 몇차례 도굴의 화를 입었지만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고분 9기가 산재된 과수원 구릉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 밀반출 직전 적발된 것이다.
뒤늦게 찾은 도굴 현장은 처참했다. 문화재위원회가 부랴부랴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6월24일부터 12월까지 도굴분과 인접고분을 대상으로 정식발굴이 이뤄졌다. 발굴단(영남대박물관)이 문화재관리국장(문화재청장)에게 12월14일 제출한 ‘임당동 고분 발굴 성과 보고서’를 보자.

 

▲ 임당유적에서 확인된 또다른 순장무덤(5세기 초반).  이 무덤의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성(36~50세)과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는 아빠와 딸 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 주곽에는 성인남성(36~50세)으로 보이는 무덤 주인공 주변에 10대 전후의 순장자들이 보인다. 그러나 성별을 알 수 없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도굴분(2호분)은 2개의 무덤이 합쳐진 형태로 조성됐다. 각각의 무덤은 주곽(으뜸덧널)과 부곽(딸린덧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도굴됐지만 3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주인공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백화수피·은제허리띠 일부와, 굽은옥, 유리구슬, 마름모 문양의 비단옷 및 금박 문양의 천조각 등이 발견됐다.
북쪽 주곽에서는 남녀 인골편과 순장된 개 3마리가 발견됐다. 주인공이 키운 반려견이었을 것이다. 부곽에서도 금동제 말안장 등 말갖춤새와 각종 토기, 그리고 토기 속에 든 닭뼈·상어뼈·돼지뼈·생선뼈 등이 확인됐다. 여기에서도 30대 초반의 남자 순장 인골이 발견됐다. 키가 172㎝ 정도로 측정됐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5·6·7호분은 여러 개의 봉분을 차례로 하나하나 연결한 형태의 고분이었다. 무덤이 시차를 두고 계속 조성된 것이다. 각 무덤은 도굴분처럼 주곽과 부곽으로 구성돼있었다.
여기서도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나왔다. 특히 7호분에서는 완형의 금동관을 비롯해 금제 장신구와 굽은옥, 철창, 꺽쇠 등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신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신라의 지배를 받고있던 옛 압독국 지도자의 후손이 무덤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짙다.

 

▲ 영남대박물관은 머리뼈 분석과 얼굴 근육층과 형태소 형성, 피부층 완성 등으로 1500년전 임당 고분군에 묻힌 무덤주인공(주피장자)와 순장자의 얼굴을 복원했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1000년의 생활사
이후 임당동과 조영동, 부적리 등에 대규모 택지개발이 본격화했다.
제대로 된 문화재보존 조치없이 공사가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유구와 유물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봉분이 남아있는 지역과, 공사중 유구가 노출된 곳을 대상으로 두차례(1988·1989~90)에 걸쳐 대대적인 후속발굴이 이뤄졌다. 이후에도 유적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가 이어졌다.
발굴성과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압량벌과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릉 위에 조성된 대규모 복합유적(분묘 및 생활)이 노출됐다. 기원전 4세기~기원후 7세기 사이 1000년의 생활사까지 복원될 수 있는 유적이었다. 구릉에 토성이 축조됐고, 토성 주변에 마을이 형성됐다. 토성 북쪽으로는 저습지와 환호(마을 방어용으로 둘러 판 도랑)가 조성됐다. 제사공간도 마련됐다. 토성의 주변에는 고분(임당동·조영동·부적리)이 축조됐다. 무덤은 모두 1700여 기가 확인됐고, 2만5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 1982년 도굴된 무덤(2호분) 인근의 7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왼쪽)과 금동신발. 신라 중앙정부가 옛 압독국의 후예로 이 지역을 다스린 토착지도자에게 내린 사여품으로 추정된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왜 마을전체가 전소되었을까?
특징적인 유구와 유물만 살펴보자. 기원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77기가 확인됐다.
부뚜막과 구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 화재로 소실된채 확인됐다. 기둥과 서까래까지 불에 탔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긴 달걀형 토기, 손잡이 달린 그릇, 시루, 항아리 등 생활토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을에서는 변기로 쓰인 항아리가 박혀 있기도 했다.
왜 마을이 불에 탔을까? 전쟁 때문에? 혹은 전염병 창궐로? 누군가의 실화 혹은 방화로?
계곡부에 형성된 저습지에서도 유의미한 유물이 쏟아졌다. 부산, 김해에서 반입된 토기는 물론이고, 일본제 하지끼(土師器·적갈색 연질토기), 중국 오수전(기원전 2~기원후 7세기 사용) 등이 수습됐다.
이곳 주민들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 임당유적에서 순장자의 발밑에 묻어둔 상어를 순장자와 함께 복원한 모습. 임당 고분에서 다양한 제사 음식 가운데 특히 많은 양의 상어뼈가 눈에 띈다. 연구자들은 상어고기를 토막내어 소금에 절인 돔배기를 떠올린다. 경상도 내륙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돔배기’가 2000~1500년전 사람들도 즐겼을 것이다. /국립대구박물관 복원

임당 유적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가 ‘대호(大壺·큰 항아리)’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고분의 부곽 또는 주구(무덤 주변을 돌려 판 도랑) 등에서 적게는 2점, 많게는 8~9점 들어 있었다. 대호 안에는 곡물이나 술 등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발굴단(영남대박물관)은 이 대호를 ‘압독국의 명작’이라 한다.
임당동·조영동·부적리 고분 주인공의 위상을 드러낸 유물이 바로 금동관을 비롯한 황금제 유물이다.
특히 도굴 직후에 발굴한 7호분에서 확인된 완형의 금동관은 신라제품일 것이다.
5세기 무렵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 즉 옛 압독국왕의 후예에게 내린 사여품이었을 것이다. 금동관 뿐 아니라 금동관모,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 신라 귀금속 일체가 출토됐다.

 

▲ 임당유적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된 한 무덤의 부곽에서 꿩 70마리분을 담은 항아리가 확인됐다. 특이하게도 살이 많은 부위만 선별해서 부장했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DNA로 분석한 1500년 전의 삶
뭐니뭐니 해도 임당 유적의 핵심은 고인골이다. 주로 산성 토양인 국내 발굴 현장에서 인골은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당동 인근의 토양은 진흙이 굳어져 생긴 무른 퇴적암 계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무른 암반을 깎아서 묘광을 조성한 뒤 그 틀 안에 무덤을 조성했다. 시간이 지나면 물과 진흙이 밀폐된 묘광 안에 가득 차게 됐다. 그렇게 바깥으로부터 산소유입이 차단된 진공상태가 유지됐고, 그 안에 안장된 인골도 쉽게 썩지않았다. 게다가 퇴적암은 알칼리성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인골은 최근까지도 환영받는 자료가 아니었다. 양질의 인골이 수습된다 해도 동티(금기시된 행위로 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가 난다고 여겼다. 조상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처럼 불효는 없었으니까… 곧바로 화장하거나 이장하는 것을 죽은 이를 위한 기본예의라 여겼다.

 

▲ 임당 유적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가 ‘대호(大壺·큰 항아리)’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고분의 부곽 또는 주구(무덤 주변을 돌려 판 도랑) 등에서 적게는 2점, 많게는 8~9점 들어 있었다. 대호 안에는 곡물이나 술 등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그러나 인골을 극히 터부시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1980년대) 임당유적을 발굴한 영남대박물관 등은 출토된 인골의 조각편까지 놓치지 않고 물체질까지 해서 걸러놓았다.
당시 발굴을 총지휘한 정영화 영남대 교수가 고인골을 탐구하는 구석기 전공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당동·조영동·부적리 고분 등에서 발굴한 인골은 총 500여 구에 이르렀다. 그 중 영남대박물관이 259구 정도 소장해왔다. 그렇게 모아놓은 인골이 이제와서 1500~2000년 전 역사를 복원하는 ‘신의 한수’가 될 줄이야.


최근들어 뼈에 담겨있는 DNA를 통해 옛 사람의 혈연관계와 건강 및 질병상태 등을 분석하는 학문이 생겼다. 고고학과 유전학을 융합한 고고유전학이다. 고고유전학은 고인골에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서 개인과 집단의 유전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은 임당유적의 고인골 가운데 46개 시료를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의 과학 연구소에 보냈다. 사실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1500년 된 고인골에서 DNA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낭보가 들렸다. 시료에서 뼛가루를 내어 DNA를 추출했더니 46점의 시료 중 35점에서 사람의 DNA가 존재한다는 소식이었다.

 

▲ 임당유적에서는 금동관 뿐 아니라 금동관모,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 신라 귀금속 일체가 출토됐다. 5세기 무렵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수장, 즉 옛 압독국왕의 후예에게 내린 사여품이었을 것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일가족 순장의 충격
DNA 분석 성과는 흥미로웠다. 예컨대 5세기 초반 축조된 무덤을 보자. 이 무덤의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성(36~50세)과 10세 전후의 여자아이는 아빠와 딸 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5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또다른 무덤에서는 주곽에 안장된 주인공(성인 남성·31~40세)의 곁에, 여자아이(4~8세)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 축조된 부곽 안에는 성인남성(41~60세)과 성인 여성(36~50세)이 순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DNA 분석결과 놀라웠다. 부곽에 순장된 성인 남녀는 부부이며, 이 부부의 딸이 주곽의 무덤주인공 곁에 순장된 여아(4~8세)임을 밝혀낸 것이다. 또 5세기 후반 무덤의 주곽에 순장된 어린아이와, 20여 년 뒤 축조된 또다른 무덤의 순장자(혹은 주인공)는 남매 관계로 추정됐다.

 

▲ 목곽묘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 화로형토기, 목짧은토기, 손잡이달린 항아리, 굽다리접시, 항아리, 입넓은작은 항아리, 컵형토기, 소형그릇받침, 뚜껑있고 귀달린 항아리, 갑옷, 철손잡이달린 도끼 등이다.

■ 시동·시녀·유모에서 호위무사·집사·기술자까지
한가지 의문점이 든다. 무덤주인공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임당 유적의 순장자들은 무덤 주인공과 함께 주곽(으뜸덧널)에 묻힌 경우와, 부곽(딸린 덧널)에 묻힌 경우로 나뉜다. 주인공과 함께 주곽에 순장된 12명 중에는 1명을 빼고 모두 20세 이하인 점이 눈에 띈다.
따라서 주곽에서 주인공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은 생전에 주인공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시동이나 시녀일 가능성이 짙다. 만약 무덤 주인공이 어린아이라면 어땠을까. 어떤 무덤에서는 3~5살 되는 어린 주인공을 위해 15세 전후의 소년이, 6~10세의 주인공을 위해 성인(36~50세)이 각각 순장된 흔적도 보인다.
주인공이 2~4세인 무덤에서는 같은 또래의 어린 순장자와 함께 성인 여성(21~35세)이 묻혔다. 무덤 주인공인 어린이를 평소 돌보던 유모나 보모가 순장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 임당유적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불에 탄 흔적.  임당에서는 기원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77기가 확인됐다. 그런데 대부분 화재로 소실된채 확인됐다. 기둥과 서까래까지 불에 탔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양한 생활토기가 그대로 있었다. 전쟁 때문에, 전염병 창궐로, 아니면  누군가의 실화 혹은 방화로 마을전체가 소실되었을 것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이밖에도 무덤주인공의 첩이나 소실로 보이는 여성이 묻힌 흔적도 보인다.
임당유적의 순장 모습을 살펴보면 한가지 특이점이 있다.
순장자가 금동귀고리 등 장신구와 구슬, 철제대도(큰칼), 도자(작은칼)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숫돌과 쇠낫 등이 세트로 놓여져 있었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무덤주인공과 함께 순장된 이들의 신분이 만만치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순장자들이 노비계급인 시동이나 시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과 신변을 관리하고 지키던 집사나 호위무사, 혹은 전문기술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순장자의 머리맡에 제사유물이 놓여있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주인을 따라 죽는 순장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임당 유적의 계곡부에 형성된 저습지에서는 부산 및 김해에서 반입된 토기는 물론이고, 일본제 하지끼(土師器·적갈색 연질토기), 중국 오수전(기원전 2~기원후 7세기 사용) 등이 수습됐다. 이곳 주민들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순장의 비극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필자는 근본적인 회의감을 버릴 수 없다.
순장자들의 신분이 높든 낮든 결과가 달라지는가. 주인의 사망과 함께 졸지에 따라 죽게 되는, 그것도 한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운명을 달래기 위해 까짓것 그저 던져주는 마지막 은전은 아니었을까?
특히 가족 단위의 적나라한 순장 풍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지금의 잣대로 당대의 순장풍습을 재단할 수는 없다. 순장은 고대 사회의 보편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금동귀고리를 달아주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해도 한사람도 아닌 가족 전체가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순장제도가 공식으로 폐지된 것이 6세기초, 즉 502년(신라 지증왕 3년)이었다. <삼국사기>는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신라본기·지증왕조’)고 기록했다.
옛 압독국 지역인 경산에서 가족 단위로 자행된 순장 풍습도 이 무렵부터 자취를 감춘다. 500년 무렵, 즉 6세기 극초기에 죽어 묻혀야 했던 일가족이야말로 불운의 순장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 임당유적의 전경.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고, 압량(압독의 다른 이름)의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임당유적.예부터 임당동과 조영동, 부적리 등에 상당한 고분이 산재해있었다. 이곳에서 대규모 복합유적(분묘 및 생활)이 발견됐다. 기원전 4세기~기원후 7세기 사이 1000년의 생활사까지 복원될 수 있는 유적이었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숙취가 심했을 1500년 전의 여성
DNA로 파악한 또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바로 각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의 혈연관계였다.
즉 조부와 손자녀, 삼촌(큰아버지)와 조카, 사촌지간, 심지어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제 3명의 DNA까지도 확인됐다.
영남대박물관은 지금 DNA와 법의학적인 분석으로 인골의 키와 함께 얼굴까지 복원하고 있다.
임당유적에서 출토된 인골 37개체의 대퇴골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른바 경산인(남성)의 평균키는 165.36±3.8㎝ 였다. 2019년부터는 관련 전문기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무덤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녀 성인(남 21~40, 여 21~35세) 2명과, 순장자로 보이는 여성 1명(21~35세)의 얼굴을 복원했다.
특히 지난해(2020년) 복원대상인 남자 주인공과 여성 순장자를 대상으로 인골DNA를 분석했더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두 인골의 혈액형이 AO형이고, 젖당 내성을 갖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1500년 전 살았던 사람의 혈액형까지 측정했고, 젖당을 포함한 우유를 마셨을 때 배탈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까지 찾아낸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여성 순장자는 알코올을 빠르게 분해하지 못해 술에 금방 취하고 숙취가 심했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여성은 급성 심장사, 이상지질혈증, 비만 등의 심혈관계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또 남성 주인공의 경우도 급성 심장사나 죽상동맥경화증 등에 취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임당유적은 1982년 1월14일 해외 밀반출 되려던 유물이 부산세관에 의해 극적으로 적발되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은제 새날개형관장식과 순금제귀고리, 금은제 고리자루큰칼, 은제 허리띠 등 15점이 압수됐다. 이 유물은 경북 경산 임당동의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복숭아밭)에서 훔친 도굴품이었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1500년 전의 영남 소울푸드
임당유적에서는 소소한 당대의 생활사도 읽을 수 있다.
특히 고분에 부장된 토기에는 다양한 음식 잔존물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상어고기이다. 임당 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제사 음식 가운데 특히 많은 양의 상어뼈가 눈에 띈다. 이를 두고 경상도 내륙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돔배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돔배기’는 상어고기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음식이다. 포항의 과메기, 안동의 간고등어와 견줄수 있는 경북의 별미다. 포를 뜬 돔배기를 꼬치에 가지런히 꿰어 식용유를 두른 팬에 굽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경상도 사람들의 ‘소울 푸드’라고 한다.
그렇다면 1500년 전 임당동 사람들도 무덤 주인공이 평소 즐긴 돔배기를 토기에 담아 넣어주었을까?
아니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한마리를 통째로 무덤의 빈공간에 넣어준 케이스도 있다. 죽어서도 어릴 적부터 즐겼던 ‘소울푸드’를 마음껏 먹으라는 배려의 발로였을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이 꿩뼈이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 재위 654~661)가 하루에 쌀 3~6말, 꿩 9~10마리를 먹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임당유적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된 한 무덤의 부곽에서 꿩 70마리분을 담은 항아리가 확인됐다. 주인공이 묻힌 주곽(으뜸덧널)에는 금동관과 금동허리띠 같은 최고급 유물(조각)이 들어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훗날의 태종 무열왕처럼 무지무지 꿩을 좋아했던 지역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 1982년 도굴분(2호분)과 함께 발굴조사된 5·6·7호분. 특히 7호분에서는 완형의 금동관을 비롯해 금제 장신구와 굽은옥, 철창, 꺽쇠 등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신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영남대박물관 제공

■ 물체질한 인골의 증언
영남대박물관은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임당 발굴과 고고학의 세계’ 특별전을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지금까지 30년의 임당유적 조사성과를 총정리하는 전시회란다.
필자는 특별전에 발맞춰 이 글을 정리하면서 참 기막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굴의 화를 입고 너덜너덜 상처난 채로 노출된 고분군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훗날을 위해, 그때는 아무도 주의깊게 들여다보지 않은 인골 등의 유물을 물체질까지 해서 걸러낸 결과가 이렇게 역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법의학과 DNA 분석을 통해 복원된 ‘1500년 전 경산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떤가. 지금의 경산 사람들과 비슷한가?

(이 기사를 쓰는데 정인성 영남대박물관장과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