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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궁궐 현판은 명필 임금도 쓸 수 없었던 이유

잠용(潛蓉) 2021. 12. 27. 17:1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궁궐 현판, 명필 임금도 쓸 수 없었던 이유… ‘잘난체 말라’는 뜻
경향신문ㅣ2021.12.21 05:00 수정 : 2021.12.21 10:01

 

▲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던 제1대와 7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미나미 지로(南次郞·1874~1955)의 현판. 데라우치의 것은 1914년 도쿄(東京)에서 열린 대정동경대박람회에 마련된 ‘조선관(朝鮮館)’이다. ‘관(館)’자의 오른쪽 변인 ‘관(官)’ 대신 ‘환(宦)’으로 대체했다. 미나미의 것은 1938년 덕수궁 안에 마련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 현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고에 간직한 현판 110점을 조사한 보고서를 펴냈다. 언론에는 문화재청이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을 복원한 2005년 당시, 옛 현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실을 모른 채 잘못 복원했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와, 복원된 태원전에 걸린 현판이 색깔도 서체도 다르다니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지적사항인 것만은 틀림없다. 경복궁 복원의 당사자인 문화재청도, 태원전 현판의 소장처인 국립중앙박물관도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지적말고 다른 착안사항이 있을까 하고 보고서를 살펴봤다. 그동안 조사가 안된 박물관 소장 현판을 총정리한 보고서인데, ‘태원전’ 이야기로만 끝낼 수 없지 않은가?

 

▲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주인 순종(재위 1907~1910)이 쓴 현판 두 점. 위 사진은 순종이 12살 때(1885년)에 쓴 오언절구 현판(‘8월 길한 날 경사로운 기쁨 읊노라·仲秋吉日 恭述慶喜)’이다. 어린 나이의 글씨라 다소 서투르지만 단정한 해서체로 쓰려고 노력했다. 아래 사진은 재위시절(1907년) 흥선대원군(1820~1898)의 별서인 석파정에 달았던 ‘삼계산방(三溪山房)’ 현판이다.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눈에 거슬리는 조선총독의 친필현판
강민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현판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청나라의 완복(1801~1875)의 교유를 보여주는 현판, 이광사(1705~1777)의 ‘연려실(燃藜室)’ 현판 실물 등을 착안사항으로 꼽았다. 기자로서 이야깃거리를 찾던 필자의 눈에 들어온 현판이 몇 있었다. 먼저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순종(재위 1907~1910)이 쓴 현판 두 점이 보였다. 순종이 왕세자 시절(12살)이던 1885년(고종 22) 8월2일 쓴 오언절구 현판의 제목은 ‘8월 길한 날 경사로운 기쁨 읊노라(仲秋吉日 恭述慶喜)’이다.
선학이 한개씩 물고온 대오리로 신선이 사는 해옥을 짓는다는 전설을 인용해서 왕실 웃어른의 장수를 기원했다. 어린 나이인지라 다소 서투르지만 단정한 해서체로 쓰려고 노력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순종 글씨가 몇 점 남아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의 별서인 석파정 건물에 달았던 ‘삼계산방(三溪山房)’ 현판도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 시절(1907년)의 어필이다.
이밖에도 필자의 눈에 밟힌 현판 두 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제1대와 7대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미나미 지로(南次郞·1874~1955)의 현판이다.

 

▲ 조선 국왕들의 친필글씨. 임금들은 3살 때부터 왕재(王才)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중 서예는 기본과목이었다.덕분에 조선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명필이었다.

데라우치는 1914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대정동경대박람회에 조성한 ‘조선관(朝鮮館)’의 현판을 직접 썼다. 특히 ‘관(館)’자의 오른쪽 변을 ‘관(官)’ 대신 ‘환(宦)’으로 바꿨다. 자전에도 찾기 어려운 글자를 쓴 것은 일종의 멋부리기라 할 수 있다. ‘환(宦)’ 자 역시 ‘벼슬’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宦)’자에는 ‘환관’의 의미도 있으므로 필자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썩 기분좋은 서체는 아니다. 이 박람회는 일본의 발전상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선전장이었다. 박람회장에는 조선관 외에도 ‘대만관’이나 ‘만몽관’처럼 당시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의 전시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 한 점의 현판이 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쓴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다. 일제는 1933년 덕수궁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꾸며 일본 근대 서화를 전시했다. 1938년에는 석조전 뒤쪽에 신관(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을 만들어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 소장 미술품을 이전했다. 그러면서 석조전과 신관을 묶어 ‘이왕가미술관’이라 했는데, 이때 총독이었던 미나미가 현판을 쓴 것이다. 해서체로 쓴 현판의 옆면에 미나미의 글씨임을 밝힌 ‘남대장서(南大將書)’가 쓰여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망국의 군주지만 한때는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순종이 현판을 썼다는 것은 추호도 이상할게 없다.
그러나 데라우치나 미나미까지 식민지의 지배자를 자처하며 자랑스레 친필 현판을 남겼다.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아닌가.
현판의 사전적 정의는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의 벽에 다는 널조각’이다. 무엇이든 새겨서 높이 거는 널빤지라면 모두 현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게판(揭板)’이라고 한다. 잘못 발음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데라우치나 미나미의 현판을 말한다면 뭐 ‘개판’이라 한들 무엇이 이상하랴. 누가 쓰느냐에 따라 ‘게판’이 될 수도, ‘개판’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 정조의 어필과 아들 순조의 3살 때 글씨. 부전자전의 서예솜씨를 보였다.


■ 교태전은 교태(嬌態) 부리라는 뜻?
하지만 현판을 그렇게 희화화 할 수 없다. 현판 자체가 전통 건축물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판의 글씨와 내용 안에는 건물을 사용하는 이의 의지와 철학이 담겨 있다. 만약 궁궐이라면 한 나라의 통치 철학과 의지가 현판 하나하나에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경우 현판은 한 나라, 한 왕조의 ‘간판’이 되는 것이다. 조선이 건국한지 3년 후인 1395년(태조 4) 10월 7일 태조(1392~1398)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조가 정도전(1342~1398)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자 <시경> 구절을 외웠다.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경복·景福)을 받게 할 것입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정도전은 그러면서도 “군주는 궁궐 어느 곳에 머물든지 빈한한 선비를 돕고, 만백성을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계의 말을 얹은 뒤 차근차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갔다.
예컨대 임금의 침전 이름을 ‘편히 쉬라’는 뜻에서 ‘강녕전(康寧殿)’이라 지으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나태하면 절대 강녕할 수 없다”고 신신당부했다.

 

▲ 조선초에는 임금이 글씨자랑하는 ‘하찮은 기예’라 해서 금기시했다. 쓸데없는 기예에 정신을 팔아서 정사를 소홀히 할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들어 임금들이 자신의 서예솜씨를 현판글씨로 표현하는 사례가 늘었다.

임금이 즉위식 등 국가행사를 펼치고, 정사를 돌보는 건물을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있었다. ‘임금은 아침 저녁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근면한 태도로 백성을 화락하게 만들어야 하며’(근정전) ‘깊이 생각한 연후에 비로소 정사를 펼쳐야 한다’(사정전)는 것이었다. 왕비의 침전을 교태전(交泰殿)이라 이유도 있었다. 왕비가 남편(왕)에게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교태(交泰)’는 <주역>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궁궐 및 전각이름은 유교의 통치이념과 오행사상 및 풍수지리를 반영해서 지어나갔다.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은 물론이고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과, 융문루·융무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의 이름이 탄생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는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자들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을 불러들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빛이 사방에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方)’(<서경> ‘요전’)는 뜻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다. 이렇게 이름만 지으면 뭐하겠는가. 이런 심오한 뜻을 담은 현판을 각 건물의 처마와 벽에 새겨 걸었다. 그것이 현판이다.

 

▲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의 정당에 걸려있던 장안당(長安堂) 현판과 명성황후가 머물다가 시해당한 ‘곤녕합’의 현판. 고종의 친필 현판이다. ‘임금이 오래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이고, ‘곤위(왕비)가 평안하다’는 뜻의 ‘곤녕합’인데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 건청궁은 1909년(융희 3) 철거된 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광복이후 한국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현재의 건물은 2007년 복구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명필 군주들
이렇게 한 나라의 국정 철학이 담긴 궁궐 현판이라면 당연히 최고지도자인 임금이 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궁궐의 전각이나 문의 현판은 임금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임명한 서사관이 써야 했다.
임금의 서예실력이 들통날까봐 그랬을까?
아니었다. 왕조시대 군주가 될 이는 3살부터 왕재(王才)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중 서예는 임금 될 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기본과목이었다. 이렇게 코흘리개 세자 시절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명필이었다.
예컨대 문종(1450~1452)은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들었다. 세조(1455~1468)는 근엄하고 힘찬 필치를 자랑했고, 성종(1469~1494)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는 평을 들었다.
선조(1567~1608)는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暗君)’이라는 혹평에 시달리지만 서예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명필인 한석봉을 발탁한 것도 선조이다. 선조의 글씨는 한호의 글씨처럼 강한 필치로 대담하게 휘두른 붓 맛이 일품이었다.
선조의 필치를 닮은 인조(1623~1649)·효종(1649~1659)·현종(1659~1674)은 물론이고, 한결 부드러워진 필치를 과시한 숙종(1674~1720)과 영조(1724~1776) 역시 명필이라 일컬을 만했다. 할아버지(영조)에게서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던 정조(1776~1800)는 굵고 시원한 필치로 당당한 인상의 글씨를 썼다. 순조(1800~1834) 역시 아버지(정조)의 글씨를 본받은 명필이었다. 서예에 안목이 없는 필자 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조선 국왕의 글씨, 즉 어필(御筆)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만큼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세기 초 제실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창경궁의 경춘전, 환경전, 명정문 행각 등의 각 칸(間)마다 여러 궁궐 및 전각, 문의 편액을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흩어져있던 현판들은 1963년 이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모아두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글씨 자랑은 군주의 덕목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에는 왜 임금이 직접 붓을 들고 현판을 쓰지 않았을까?
단적인 예로 글씨 좀 쓴다는 성종의 붓이 근질근질 했다. 평소 성종의 글씨 솜씨는 “전하(성종)가 글씨를 쓰면 저절로 난새(鸞·전설상의 새)가 놀라고 봉황이 되돌아올 정도”(대사헌 이세좌·1445~1504)라는 극찬을 들었다. 의기양양한 성종은 1484년(성종 15) 6월28일 “(막 창건한) 창경궁 내간(內間·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전각 현판은 과인이 직접 쓰고 싶은데 괜찮냐”고 운을 뗐다. 몇몇 신료는 “만세에 전하는 현판 글씨인데 (명필인) 어필(임금의 글씨) 현판이라면 더 좋지않겠느냐”고 반색했다. 근정전이나 사정전 같은 대형 전각도 아니고 부녀자들의 거처 정도에 임금 글씨를 달겠다는데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러나 다른 신료들은 “어필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 실록기사를 쓴 사관은 “몇몇 신하가 임금이 친히 하찮은 일, 즉 현판 글씨를 쓰도록 권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기예를 좋아하는 임금의 뜻에 부응했다”고 꼬집었다.(<성종실록>)
이 무슨 말인가. 임금이 글씨나 그림 솜씨를 자랑하면 신료들이 나서서 ‘잡기말예(雜技末藝)’니 ‘완물상지(玩物喪志)’니 하면서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던 게 바로 조선시대였다.
이들이 즐겨 인용한 성현이 있었으니 바로 북송의 도학자인 정이(1033~1107)다. 정이는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 성어를 인용하면서 “글 짓는 것은 오로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俳優)와 다를 바 없고, 글쓰는 짓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싸잡아 비판했다. ‘완물상지’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면 본래의 뜻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 2010년 복원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 현판(왼쪽)과 <경복궁 영건일기>로 복원해본 ‘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 현판. 현재 문화재청은 이 ‘검은 색 바탕’의 광화문 현판을 제작하고 있다. 현재 금판을 입히는 작업 중이라 한다. /김민규의 ‘경복궁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에서

■ 면박 당했던 임금의 글씨자랑
조선 초 명필로 알려진 양녕대군(1394~1462)은 세자 시절 부왕(태종·재위 1400~1418)의 명을 받아 경회루의 현판을 썼다.(1412년 6월9일) 그런 양녕대군에게는 글씨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2살 때인 1405년(태종 5) 8월19일 세자(양녕대군)가 40여자의 글씨를 써서 스승(성석린·1338~1423)에게 보여주자 성석린이 “아주 잘 쓴 글씨”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세자가 “예전의 국왕 중에는 누가 글씨를 잘 썼느냐?”고 되물었다. 성석린은 “당 태종과 송 휘종이 잘 썼다”고 하면서도 핀잔을 준다.
“그러나 당태종은 참덕(慙德)이 있고, 송 휘종은 천하를 잃었습니다. 글씨는 군왕이 그렇게 중하게 여길 바는 못됩니다.”
이 무슨 말인가. 당 태종(626~649)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만고의 성군이다. 그러나 맏형(건성)과 동생(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은 옥의 티다. 그 일을 ‘당태종의 참덕(잘못)’이라 한다. 역시 시·서·화에 능했던 송 휘종(1100~1125)은 풍류천자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금나라에 사직을 잃은 망국의 군주였다. 성석린은 서예와 그림 같은 잡기에 능하다고 다 옳은 군주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명필의 대명사인 석봉 한호(1543~1605)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퇴촌(왼쪽)’과 ‘덕수이씨봉선지암(오른쪽)’ 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코흘리개 어린 시절 스승에게 한 수 배운 양녕대군은 훗날 조카인 세조에게 똑같이 가르쳐주었다.
즉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자 양녕대군이 면전에서 면박을 주었다.
“군주가 비록 몇사람을 당해 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제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세조실록> 1459년 5월10일)
아무리 큰아버지지만 지존이 된 조카 임금이 자랑 좀 했기로서니 그렇게 정색을 하고 돌직구를 날릴 것까지야 있었을까?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임금의 글씨 자랑을 경계한 이유는 분명하다.
군주가 서예와 같은 한가지 일에 집착하면 정사에 소홀할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 아닌가. 아무리 제 자랑은 금물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군주라도 넘치는 재능과 끼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신권보다 왕권이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초기에는 ‘완물상지’ 즉 “잗단 기예에 빠져 정사에 초심을 잃는다”면서 금기시됐던 어제와 어필 현판이 자주 걸리기 시작했다.

 

▲ 이름난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연려실(燃藜室)’ 현판. 연려실은 이광사의 아들이자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1736~1806)의 당호이다. 중국 한나라의 학자인 유향(기원전 79?~기원전 8?)이 옛 글을 교정할 때 신선이 내려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靑藜杖)를 태우며 불을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이긍익은 아버지로부터 이 글씨를 받아 벽에 붙여두었는데 친지들이 이광사의 득의작이라 해서 앞다퉈 본떠서 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현판의 유랑사
이처럼 왕조의 통치이념과 철학을 담은 현판은 파란만장한 조선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거했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같은 병란과 잦은 화재 등으로 불에 타거나 훼손되어 사라졌다가 다시 걸리기를 반복했다.
경복궁 중건(1865~68) 등으로 겨우 제자리를 찾게 된 것도 잠시였다. 을미사변(1895년)을 겪은 고종이 진저리를 치면서 도망치듯 자리를 비운 경복궁은 급격하게 원형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1900년대에 자행된 일제의 궁궐 훼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1907년 창경궁 어원(동·식물원, 박물관) 조성, 1910년 강제합병 직전 궁궐의 불용건물 자재 매각,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1917년 창덕궁 내전 일곽 화재 등 갖가지 이유로 조선의 궁궐 건물은 대부분 훼철됐다. 이때 궁궐과 전각, 문에 달려있던 현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주인을 잃은 현판들은 창경궁의 경춘전, 환경전, 명정문 행각의 각 칸(間)마다 매달려 있었다. 더이상 궁궐이나 전각, 문을 상징하는 간판이 아니었다. 차마 버릴 수는 없기에 다른 건물에 그냥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청나라의 완복(1801~1875)의 교유를 보여주는 ‘선인도’ 현판. 산수간에 책을 쌓아두고 학을 기르며 사는 신선과 차를 달이며 몸을 웅크리고 조는 동자를 그렸다. 청나라 학자이자 김정희의 스승으로 알려진 완원(1764~1849)의 아들인 완복이 김정희에게 준 글씨와, 김정희가 쓴 글씨를 판각했다. 그림을 새긴 현판이라는게 특이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된 현판들은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근정전 회랑과 사정전, 천추전 등의 전각에서 보관됐다. 그러다 또 떠돌이 생활이 이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창경궁 장서각(1981년)-창덕궁 인정전 서행각(1986년)-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1992년)-국립고궁박물관(2005년) 등을 전전했다. 비로소 국립고궁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현판은 770점에 이른다.
그 와중에 어찌된 일인지 다시 떨어져나간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됐는데, 그것이 이번에 보고서에 기록된 110점이다.
어떤가. 모진 풍파를 다 겪은 궁궐 현판의 수난사를 곱씹어보면 꼭 파란만장한 한국의 역사를 읽는 것 같다.
그렇게 천덕꾸러기처럼 부대끼며 이리저리 떠돌던 현판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770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올랐다. 건축과 서예, 공예가 접목된 기록물이자 종합예술품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디 예술품의 가치만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마음씨가 그 현판 속에 녹아있지 않겠는가. 또한 조선 초기의 정신, 즉 군주는 현판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바로 그 ‘완물상지’의 경각심 또한 잊어서는 안될 가치일 것이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