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바둑 잘 두는 신라공주가 중국의 기성 '마랑'을 만났다면…
경향신문ㅣ2021.12.07 05:00 수정 : 2021.12.07 09:39
▲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마랑’명 칠기. 발굴(1973~75년)된지 50년 가까이 정체를 몰랐다가 최근 ‘마랑’이 중국 서진 시대에 중국 바둑계의 최고수로 추앙받은 기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칠기는 ‘마랑’의 사인을 새긴 바둑통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 제공
황남대총은 신라의 왕과 왕비, 왕·귀족이 묻혀있는 경주 대릉원에서도 초대형 고분에 속한다.
표주박 모양으로 조성된 이 고분은 내물(356~402) 혹은 눌지마립간(417~457) 부부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분이 왕(마립간), 북분이 왕비 무덤으로 보인다. 1973~75년 대대적인 발굴 결과 금관과 금동관 등 7만 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1993~94년 황남대총(남분) 보고서를 쓰던 이은석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눈에 유독 밟히는 유물이 있었다.
주인공(60대 남성)이 묻힌 주곽(으뜸덧널)에 딸린 부장품 공간의 청동시루에서 출토된 칠기 2점이었다. 이중 1점(남분)의 바닥에서 확인된 ‘마랑(馬朗)’이라는 붉은 글씨가 심상치 않았다.
▲ 황남대총 남분의 청동시루 안에 들어있던 칠기(바둑통)의 출토모습. 똑같은 문양의 칠기가 2점 확인됐고, 그 중 1점의 바닥에 ‘마랑’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같은 문양의 칠기가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1점 보인다. 황남대총 남·북분은 신라 마립간(왕) 부부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은석씨 제공
■ ‘마랑’이 누구인가?
‘마랑’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명문인가. 한자(朗과 郞)가 비록 다르지만, 그래도 사람 이름이라면 원술랑이나 미시랑 같은 화랑 이름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들춰봐도 ‘마랑’이라는 화랑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어도 ‘마랑’이 던진 수수께끼는 이은석씨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25년이 훌쩍 지난 2018년이었다.
어느덧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된 이은석씨는 전국해양학자대회(7월·경기 안산)에서 중국 전공자인 정일 목포대 교수를 만나 ‘평생의 숙제가 있다’면서 ‘마랑’ 명 칠기 이야기를 꺼냈다.
“‘마랑’이라는 이름이 국내 문헌에는 없으니 혹시 중국인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은석씨의 청을 들은 정일 교수가 열심히 중국 문헌을 들춰보았다. 과연 중국 서진의 갈홍(283~343)이 쓴 도교서적(<포박자>)에 ‘마랑’ 이름이 등장했다.
▲ 황남대총 남분에서 바둑돌이 출토되는 모습. 가공흔적이 없어서 처음엔 바둑돌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둑돌통이 확인되면서 바둑돌로 인식되고 있다.
“마랑은 자가 수명이고, 바둑의 기술에서는 적수가 없으니 ‘기성(棋聖)’의 칭호가 있다.(馬朗 字綏明 圍棋藝無敵 有棋聖之稱)” 이 ‘기성’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내용도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한결같이 “기성은 바둑 최고수를 일컫는데, 마수명(마랑)과 엄자명 같은 사람들”(<포박자>·<의림>·<태평어람>)이라고 설명했다. 마랑이 바둑 전문서를 편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원강 연간(291~299) 조왕 륜의 사인인 마랑이 <위기세(圍棋勢)> 29권을 편찬했다.”(<통지> ‘예문학’)
조왕 륜은 사마륜(?~301)을 가리킨다. 진 선제(사마의·179~251)의 9번째 아들이다.
따라서 마랑이 사마륜의 요청으로 <위기세>를 편찬한 것은 3세기 후반임을 알 수 있다. ‘마랑’은 중국 서진(266~316) 시대에 실존한 인물이며, 바둑 전문서를 29권이나 펴낸 ‘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황남대총 남분의 ‘마랑’명 칠기와 북분의 칠기. 문양이 똑같다. 같은 시기에 수입되었다가 무덤 조성 때 나뉘어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은석씨 제공
■ 고분에서 속속 드러나는 바둑돌의 정체
‘마랑=중국 최고의 기성’이 틀림없다면 얽혀있던 실타래가 스르르 풀린다.
똑같은 문양의 칠기통(‘마랑명’ 포함)이 최소 2점 확인됐다면 그것은 바둑돌통 1세트가 아닌가. 과연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바둑돌 모양의 잔돌 243개가 확인된 바 있었다. 이 잔돌의 크기는 직경 1~2㎝, 두께는 0.3~0.7㎝ 안팎이다.
따지고보면 황남대총 남분에서만 바둑 관련 유물이 보인 것은 아니다.
천마총(350개)과 금관총(약 247개)은 물론 7세기에 조성된 용강동 6호분(253개)에서도 바둑돌이 나왔다. 분황사터에서는 전돌로 만든 15×15줄 바둑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간과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바둑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바둑 관련 유물이 남성이 주인공인 고분(금관총·천마총·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 신라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쪽샘 44호분에서 바둑돌이 출토되는 모습. 분류해보니 검은 돌이 425점, 흰 돌이 438점으로 띠를 이루고 있었다. 바둑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자료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바둑을 두었던 신라공주
그런데 지난해(2020년) 11월 신라 왕·귀족무덤이 집중된 경주 쪽샘지구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나왔다.
쪽샘 44호분 발굴과정에서 금동관과 금귀고리, 가슴걸이, 팔찌, 금반지, 은허리띠 장식, 은장도 등 장신구를 풀세트로 치장한 주인공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었다.
유물의 착장 흔적으로 주인공의 신장을 추정해보니 150㎝ 내외였다. 출토 유물이 주로 여성용이었고, 그 사이즈도 작았다. 하지만 돌무지의 규모(16~19m)가 왕릉급(서봉총 16~20m, 금관총 20~22m)과 맞먹고, 장신구 조합의 위상이 황남대총·천마총 등에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따라서 이 쪽샘 44호분의 주인공은 ‘5세기 중반을 살았던 신라공주’로 판단됐다.
▲ 8세기 중반에 조성된 투르판 아스타나 187호묘에 그려져있는 ‘바둑두는 여성 그림(위기사녀도·圍棋仕女圖)’. 여성들도 바둑을 두었다는 실증 자료이다.
그런데 온갖 금은제품으로 치장한 주인공의 발치 아래 부장된 토기군 사이에서 도드라진 유물들이 확인됐다. 바둑돌이 무려 863점이나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것을 분류해보니 검은 돌이 425점, 흰 돌이 438점으로 띠를 이루고 있었다. 바둑돌의 크기는 지름 1.0~2㎝, 두께 0.5㎝ 내외였으며, 평균 1.5㎝ 정도였다.
이 쪽샘 44호분이 ‘신라공주의 무덤’이라면 어떤가. ‘바둑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등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실제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투르판 아스타나 187호묘에는 ‘바둑 두는 여성 그림’, 즉 ‘위기사녀도(圍棋仕女圖)’가 그려져 있다. 이 여성은 17×17줄의 바둑을 두고 있다. 가만 보면 실크로드의 연장선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에서 여성이라고 바둑을 두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신라 시대 바둑관련 유물 출토현황. 바둑돌과 바둑판에 이어 황남대총 남분에서 바둑통 등이 확인됐다.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자료를 토대로 정리
■ 신라-당나라 바둑전쟁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나왔지만 바둑과 관련된 문헌 기록은 있을까. 꽤 많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도 바둑 관련 일화가 상당수 보인다. 그 중 신라와 당나라 간 교류의 기록도 생생하다.
즉 737년(효성왕 원년) 당나라 현종(712~756)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가지를 당부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비길만 하다는구나. 신라인들에게 대국(당나라)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또 하나의 당부가 있었다. “당의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구당서> <신당서>는 “당 현종이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소식에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을 파견했다”면서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 이때 신라 효성왕은 양계응 등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
당시 당나라는 ‘기대조(棋待詔)’라는 전문기사제도를 두었다. 황제와 바둑을 두는 일을 맡은 관리들이었다.
그랬으니 당 현종이 당나라의 바둑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신라-당나라 바둑교류 사실을 전하면서 “신라의 바둑고수가 당나라 양계응 밑에서 나왔다”고만 기록했을 뿐 자세한 승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 천마총 나무곽(목곽)의 부장품 상자에서 확인된 바둑돌. 금동신발과 금동장식,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와 같은 화려한 유물과 함께 서쪽 한가운데 단지모양의 칠기 아래 토기들 사이에서 바둑돌이 350점 확인됐다. /어창선 학예연구관 제공
아마도 신라의 바둑고수들이 돌아가면서 당나라 기성인 양계응과 흥미진진한 친선대국을 펼쳤을 것이다. 서라벌 전체가 신라-당나라간 반상대결로 들썩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의 바둑실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당나라 시를 모은 전집(<전당시>·1705년 편찬)에는 당나라 시인 장교가 신라로 귀국하는 ‘기대조’ 박구라는 인물을 전송하는 시(‘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棋待詔朴球歸新羅’)가 실려있다.
“해동(신라)에 그대의 적수 누가 있을까(海東誰敵手). 고국에 돌아가면 바둑 둘 상대가 없어 외로우리(歸去道應孤). 당나라 대궐에 새로운 묘수 전파하고서(闕下傳新勢) 귀국하는 뱃전에서 옛 기보 펼쳐보네(船中覆舊圖)….”
시에 따르면 신라인 박구는 당나라 조정에서 황제의 지근거리에서 바둑을 두었던 기대조였다. 또 박구가 당나라 조정에 깜짝 놀라게 한 묘수를 전파했고, 귀국길 배 안에서도 기보를 펼쳐보고 연구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 금관총에서 출토된 바둑돌들. 247개로 추정됐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크기는 1.0㎝~1.7㎝이며, 두께는 0.3~0.9㎝로 둥글고 납작한 형태이다.
신라인의 바둑 실력이 당나라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유사> ‘피은·신충괘관’을 보면 효성왕(재위 737~742)과 관련된 바둑 관련 에피소드가 보인다.
“효성왕의 태자 시절, 어진 선비 신충과 함께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굳게 약속했다. ‘내 그대를 잊지 않겠소. 혹여 나중에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요.’”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다. 신충이 왕을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좋은 잣나무가 가을이 채 안돼 떨어지니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 우러러 보던 얼굴이 바뀌었네…. 세상 다 잃은 처지여라.”
신충의 노랫말이 붙은 나무는 갑자기 말라버렸고, 노래는 삽시간에 퍼졌다. 시중의 노래를 들은 효성왕이 그제서야 신충을 기억해냈다.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 용강동 6호분에서 확인된 바둑돌들. 돌의 재질, 색깔, 크기에서 명확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흑백돌의 조합이다.
■ 한성백제의 명운을 가른 바둑간첩
신라인들만 바둑을 잘 두었을까?
그렇지 않다. 중국자료인 <구당서>는 “고구려는 위기(圍棋·바둑)와 투호 등의 유희를 좋아한다”고 했고, <후주서>는 “백제인들은 말타고 활쏘는 것과 역사서적을 좋아하는데, 특히 바둑 두는 것을 숭상한다”고 했다.
고구려가 바둑간첩으로 백제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즉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장수왕(423~491)은 한성 백제의 숨통을 끊을 계책으로 극비리에 첩자를 구한다. 이때 승려 도림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고 손을 든다.
도림은 ‘국수(國手)’라는 명성을 얻을만한 바둑의 최고수였다. 도림은 백제 개로왕(455~475)이 ‘바둑 마니아’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한 뒤 개로왕에게 접근한다.
“신이 바둑을 한 수 지도할까 합니다.” 개로왕이 시험해보니 도림은 과연 국수였다. 도림을 상객으로 모신 개로왕은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났다”고 한탄한다.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낸다.
“백제는 천혜의 요새인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엉망입니다…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 경주 분황사에서 출토된 바둑판 형태의 전돌. 15줄 바둑판이다.
개로왕의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도림의 꾐에 넘어간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새로 세웠다. <삼국사기>는 “궁실과 성곽이 웅장하고 화려했고, 그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도탄에 빠졌다”고 기록한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한다. 475년(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장수왕은 이때다 싶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도림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개로왕이 땅이 꺼지도록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싸우려 하겠는가.”
한성은 결국 함락되고 고구려군에 붙잡힌 개로왕은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만다. 삼국 가운데 맨먼저 전성기를 이룬 백제의 한성시대가 고구려가 보낸 바둑간첩의 세치혀 때문에 종막을 고한다. 493년만에….
바둑은 이렇게 나라를 기울게 만들 정도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백제·신라 할 것 없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자줏빛 나무에 그림이 새겨진 바둑판·木畵紫檀碁局).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돼 있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둑은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성행했다.
■ 고구려제 바둑통?
최근 경주에서 ‘신라의 바둑문화’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황남대총 남분의 ‘마랑’ 명 바둑돌통을 발굴한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 바둑통이 중국제가 아니라 고구려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바둑통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연화문, 즉 연꽃 무늬에 가깝고, 이와 비슷한 문양은 덕흥리 1호분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은석 학예연구관은 “또한 바둑알통이 확인된 황남대총 남분 출토 청동용기의 뚜껑 꼭지(손잡이) 아래에도 8엽의 연화문양이 부착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런 연화문양이 새겨진 제품들은 불교가 고구려에 도입된 4세기 중후반 무렵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 이은석씨의 견해이다. 이 때 제작된 고구려 제품이 신라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이 무렵이면 중국의 기성인 마랑이 편찬한 29권짜리 바둑전문서인 <위기세>가 고구려 상류층에 폭넓게 퍼졌고, ‘마랑’ 이름을 새긴 칠기 바둑통도 명품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칠기 바둑통의 문양과 고구려 벽화고분 속 문양. 바둑통의 문양이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4~5세기 고구려 벽화의 연화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제품이라는 견해가 제기됐다.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 제공
■ 공자왈, “노느니 바둑을 두어라!”
바둑과 관련된 성현의 말씀 중에 ‘공자왈’이 가장 재미있다.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 ‘양화’)
하는 일없이 노느니 바둑·장기로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이다. 기원전 5세기를 풍미했던 공자님 ‘말씀’이니 바둑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기야 <박물지> 등 중국문헌은 “이미 요(堯)임금이 바둑으로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고 기록했다. 바둑은 이후 다양한 이름을 얻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난가(爛柯)의 전설’은 바로 바둑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신선놀음’이라는 뜻이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근심을 잊는다’해서 ‘망우(忘憂)’,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으로 일컬어졌다.
한결같이 낭만적이면서도 심오한 뜻을 간직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 조훈현·서봉수·이창호·박정환·신진서·최정 9단.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온 프로기사들이다.
■ 이제는 알사범에게 배우지만…
불과 몇 년 전(2016년 1월)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인간인 이세돌 9단과 바둑대결을 펼친다고 했을 때 모든 바둑기사들이 코웃음쳤다. “5판 중 한판이라도 지면 알파고의 승리로 여기겠다”던 이세돌 9단의 호언장담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뭐 기자도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부화뇌동했다. 이런 논리였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사실상 무한대다. 한번 놓을 수 있는 가짓수만 361개(19×19)에 달한다. 흑과 백이 첫수를 주고 받는 경우의 수만 12만9960 (361× 360) 가지에 이른다. 두 번 씩만 주고받아도 167억 가지(361×360×359×358)가 되고, 모든 경우의 수를 굳이 계산하면 ‘10의 170제곱’에 이른다. 우주의 원자수 10의 80~100제곱 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수학의 ‘경우의 수’니 확률로 계산할 수 없는 ‘패’나 ‘먹여치기’ ‘되따기’ 등의 요지경 같은 바둑룰까지 있다. 더욱이 순간의 감정과 직관을 발휘해서 그때 그때의 국면에 대처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차가운 논리 만으로 둘 수 없는 바둑이기에 제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난공불락이 아닌가. 기계가 입신의 경지라는 바둑 9단의 마음까지 훔칠 수 있겠는가?
뭐 이런 호언장담으로 인공지능(AI)을 깔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큰소리친 결과는 어떤가? 이세돌 9단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완패했다. 그 뿐이랴. 이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최정상급 프로 9단도 이제는 2~3점을 깔고 둬야 겨우 인공지능에 맞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정상급 기사의 바둑스승이 ‘알사범(알파고 사범)’이라고 하고, 세계바둑의 페러다임을 뒤바꾼 이창호 9단마저 인공지능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한들 인간이 돌을 놓는 한 바둑은 인간의 영역이다. 그래서 여전히 인간은 바둑을 두고 있다. 때마침 최정 9단이 제4회 오청원배 세계대회에서 중국의 위즈잉(於之瑩) 9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신라 바둑공주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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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이은석, ‘마랑명 칠기를 통해 본 신라 유입 유물에 대한 재검토-칠기에 보이는 문양을 중심으로’, <신라의 바둑문화>(제14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 경주시, 2021
□ 정일·이은석, ‘황남대총 남분출토 마랑(馬朗)명 칠기의 의미’, <중앙고고연구> 27권, 중앙문화재연구원, 2018
□ 어창선, ‘신라시대 바둑 관련 출토유물 현황’, <신라의 바둑문화>(제14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 경주시, 2021
□ 정수현, ‘신라의 사료에 담긴 바둑의 의미 고찰’, <신라의 바둑문화>(제14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 경주시, 2021
□ 남치형, ‘신라 고분 출토 바둑돌과 바둑의 한반도 전래에 관한 일고찰’, <신라의 바둑문화>(제14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 경주시, 2021
□ 이희준, ‘7세기 초 신라 고분 출토 바둑알과 그 의미’, <영남학> 24권24호,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13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배경음악/ 산절로 수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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