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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빗살무늬토기는 왜 '뾰족'할까?

잠용(潛蓉) 2023. 2. 3. 20:2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빗살무늬토기는 왜 '뾰족'할까… 실용성 갖춘 신석기시대 걸작 디자인
경향신문ㅣ2023.01.31 05:00  수정 : 2023.01.31 10:06

 

▲ 1970년대 초반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날렵한 V자형의 도기 표면을 3~7단으로 나눠 상·중·하로 화폭(토기 표면)을 나눠 갖가지 무늬를 새긴 선사인들의 예술품이다. 짧은 빗금과 마름모, 세모꼴의 선을 가득 채우고 문살과 생선뼈무늬를 차례로 배치했다. 또 단순한 점과 선을 이용하여 세모, 마름모, 문살 등을 닮은 다양한 무늬를 장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국 미술 5000년전!’ 1975년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도쿄(東京)에서 열릴 한·일 국교 정상화 10주년 기념 특별전에 붙인 이름이다. 그 무렵(1971~75년)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기원전 3000년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도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빗살무늬토기는 생활용기가 아닌가. 그것이 미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뭐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을 법하다.

예술점수 10점만점, 실용점수 0점
그러나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 토기의 ‘대표선수’를 한번 보라. 우선 V자형의 모습이 날렵하다. 여기에 3~7단으로 상·중·하로 화폭(토기 표면)을 나눠 갖가지 무늬를 새긴 선사인들의 예술품이다. 아가리 부분에는 짧은 빗금무늬, 그 아래에 점을 이용한 마름모무늬를 눌러 찍어 장식했다. 몸통 부분에는 세모와 마름모꼴의 선을 가득 채우고 그 밑으로 문살무늬와 생선뼈무늬를 차례로 배치했다. 또 단순한 점과 선을 이용하여 세모, 마름모, 문살 등을 닮은 다양한 무늬를 장식했다. 이런 도기의 쓰임새는 물론 음식의 저장과 운반, 조리와 같이 실생활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아니 그렇게 실생활에 쓰이는 용기인데, 왜 이렇게 ‘뾰족 밑’ 바닥으로 제작했을까.
똑바로 세울 수도 없는데…. 아무리 ‘예술점수=10점 만점’이라도 ‘실용점수=0점’이 아니었을까?

 

▲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 강동 암사동 선사유적지. 이곳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공반한 신석기 시대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쪽같이 사라진 암사동 청동기인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의 최신 논문(‘기후변화와 해수면의 상승과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문화와의 관계’, <재외동포저널> 통권18호, 2022 가을·겨울호)를 보면서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하강이 한강유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드라마틱한 영향을 끼쳤는지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신석기~청동기를 거쳐 기원 전후 한성백제 시대까지 한강 유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선사~역사시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약 정리되어 있다. 앞서 인용한 암사동 유적을 한번 살펴보자. 암사동 유적은 1967~2018년 사이 12차례의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 앞서 설명한 빗살무늬 토기를 대표선수로 한 신석기시대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 경기 하남 미사리에서 확인된 빗살무늬 토기. 암사동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종류이다. /숭실대기독교박물관 제공


연대는 기원전 4000~기원전 2100년 사이로 추정됐다. 그런데 발굴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유구의 현상이 일관되게 목격되었다.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 문화층과 초기 삼국시대 문화층은 보이는데, 그 중간에 청동기시대 문화층이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청동기인들이 암사동에서는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암사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디론가 이주했고, 초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이곳으로 돌아와 재입주했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서 이 암사동 유적의 해발고도가 17~18m라는 점을 주목해보자.
암사동 유적 뿐이 아니라 한강 하류와 경기 지역 신석기 시대 유적의 해발 고도가 대체로 15~20m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변이나 해안가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 경기 하남 미사리 선사유적. 이곳에서는 신석기 유적과 함께 조기 청동기 유적도 확인되었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뾰족밑 빗살무늬의 비밀
이 대목에서 강동구 암사동과 인접한 동네인 하남시 미사동으로 눈을 돌려보자.
1960~70년대 간간이 발굴된 미사동(리) 유적은 1983~1992년 한강종합개발 사업의 하나로 시행된 미사섬 강변의 제방부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전모가 밝혀졌다. 확인된 유구는 인근 암사동 유적과 쌍벽을 이룰 만큼 엄청났다.

해발 17~18m 사이에서 확인된 주거지 466기 중 무려 645개체 분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미사리는 빗살무늬 토기의 보고라 할만한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암사동과 미사리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변의 아주 작은 모래 입자와 조개가루, 운모가 섞인 고운 점토를 빚어 도기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를 새겨 뛰어난 예술성을 가미한 뒤 구워냈다. 무늬를 새길 때는 다양한 새김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운 점토를 바탕으로 다양한 무늬를 새기고 구워냈으니 신석기시대 걸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빗살무늬 토기만 보면 생겼던 궁금증을 풀어볼 수 있다. 왜 V자형, 뾰족밑으로 제작했을까.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곳은 강변, 즉 모래사장 인근지역이었다. 그랬으니 애써 만든 ‘뾰족밑 생활용기’를 모래가 많이 함유된 땅에 꽂아 넣어 두었을 것이다. 힘들게 땅을 팔 필요가 없는 모래사장에….
그래서 신석기인들의 터전이었던 암사동·미사리 등에 ‘뾰족밑 용기’, 즉 빗살무늬토기가 많았던 것이다.

 

▲ 한강 하류와 경기 지역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적의 해발 고도. 신석기 유적은 해발 15~20m 사이에, 청동기 유적은 신석기 유적과 잠깐 공존했던 하남 미사리(해발 18~20m)를 빼고는 해발 35~123m 사이에 존재했다. /이형수 교수의 논문에서

뾰족밑에서 납작밑으로 바뀌는 도기
그런데 미사리에서는 청동기 시대 문화층이 보이지 않았던 암사동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 목격되었다.
미사동의 신석기 문화층(해발 17~18m) 위에 조기 청동기 시대 문화층(해발 18~20m)이 나타난 것이다. 또 이 조기 청동기 문화층이 반짝 하고 나타났다고 사라지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조기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도기들이 빗살무늬 토기류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재료로 쓰인 흙의 입자가 굵고 거칠어졌다. 작은 입자의 모래가 섞인 고운 점토질로 만든 빗살무늬 토기와 상대가 안됐다.

 

▲ 한강 유역 및 경기 지역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적 분포도. 신석기 유적인 해안이나 강변에, 청동기 유적인 얕은 구릉 지역이나 북한강·남한강 상류에 분포되어 있다. 해수면의 상승과 함께 삶의 터전을 구릉이나 상류쪽으로 옮겨간 결과다. /이형구 석좌교수 제공

흙이 굵고 거칠었으니 도기의 표면에 빗살무늬 토기에서처럼 다양한 무늬를 새기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미사리에 살았던 조기 청동기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빗살무늬처럼 정교한 문양을 낼 수 없었다.

그래도 도기의 아가리 부분에 띠를 둘러 그 위를 손톱으로 툭툭 누르거나, 구멍을 열지어 내거나, 토기의 입술 부분에 점토 띠를 덧붙이거나, 아예 무늬는 없이 흑색이나 붉은 색의 광물안료를 써서 빚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성을 발휘했다.
참으로 못말리는 끼의 발휘가 아닌가. 도기의 형태도 달라졌다. 신석기시대 뾰족밑 빗살무늬 토기가 아니라 밑이 더 둥글어진 형태나 혹은 아예 평평한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기원전 2000년 무렵무터 해수면이 급상승하기 시작해서 기원전 1000년 무렵 다시 하강-상승 커브를 그리다가 기원전 4~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하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청동기 도기는 왜 거칠어졌을까?
그렇다면 왜 도기의 재료가 되는 흙이 거칠고 굵어졌으며, 그 형태도 둥굴고 평평해졌을까?
이 미사동의 조기청동기 시대 유구(주거지 등)의 연대는 기원전 1100년 이전으로 측정되었다.
여기서 서해안의 해수면 변동 자료가 인용된다. 즉 해수면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000~기원전 1000년 사이에 해수면 상승으로 한강유역으로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미사동이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이라는 뜻이다. 조기 청동기 시대 주거지에서 신석기시대의 산물인 빗살무늬 토기편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 그러한 과도기를 웅변해준다. 정리해보자.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한강 유역에서 곱고 점성이 강한 점토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랬으니 산기슭에서 구할 수 있는 거친 황갈색 점토를 도기재료로 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삶의 터전 또한 모래가 적거나 없는 구릉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랬으니 밑에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는 점차 무용지물이 변해갔고, 밑이 평평한 도기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10~20년 사이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1000년에 걸친 수위변동에 따른 점차적인 변동이었을 것이다. 신석기~조기청동기가 공존한 미사동 유적은 바로 이러한 과도기적인 문화양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 하남 미사리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구와 함께 조기청동기 시대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신석기~조기청동기가 공존한 미사동 유적은 바로 이러한 과도기적인 문화양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형구 교수 설명

암사동·미사동을 떠나는 선사인들
그런데 해발 18~20m에서 관찰된 조기 청동기 시대 유적은 미사동이 유일하다.
왜냐면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해수면이 지금보다 2m 이상 높아졌다는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밀물 때와 겹치는 여름철 홍수기에 한강 수위가 8m 이상 상승하지 않는가. 지금보다 해수면이 2m 이상 높아지는 청동기 시대에는 암사동·미사동 같은 한강 유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사동 주민들을 비롯한 청동기인들은 어디로 떠났을까?

 

▲ 하남 미사리와 강남 역삼동, 남한강 유역의 여주 흔암리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토기. 미사리 등 한강 하류에 살았던 청동기 주민들이 인근 구릉지역(역삼동)과 상류(흔암리)로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형구 교수 설명

“한강물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서 강변에서 살 수 없게 된 청동기인들은 구릉 쪽으로 올라갔겠죠. 더러는 북한강이나 남한강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겁니다.”(이형구 교수)
그러한 예가 한강 유역의 도처에서 보인다. 즉 조기 청동기시대 유적 50여 곳 가운데 미사동을 제외하고 모두 구릉부에 분포되고 있다. 예컨대 미사동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이 한강 유역의 구릉 위로 올라간 흔적이 인근 가락동과 역삼동에서 보인다.

송파 가락동 안산(해발 40m) 산마루에서 확인된 주거지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은 겹입술(이중구연)도기 등이다. 가락동 출토품 가운데는 미사동에서 나온 심발형 도기(그릇 몸통의 지름보다 속이 깊은 그릇)의 변형토기가 보인다.
강남 역삼동 청동기 시대 주거지는 매봉산(해발 95m)의 남쪽 기슭(해발 36m)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도기 역시 미사동과 가락동 도기와 흡사하다.

 

▲ 송파 가락동과 여주 흔암리 등에서 확인된 청동기 토기. /이형구 교수 설명


해수면 상승에 따라 한강 상류로…
아예 한강 중·상류인 북한강과 남한강 쪽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터전을 잡은 곳이 아마도 춘천 중도(해발 72~74m)였을 것이다.
알다시피 춘천 중도는 블록장난감(레고)를 주제로 한 레고랜드 테마파크가 들어선 곳이다. 테마파크 조성을 위한 사전발굴조사에서 3000기가 넘는 유구와 8000건이 넘는 유물이 확인되기도 했다. 가히 청동기 도시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중도 유적의 청동기 유구 가운데는 미사동 출토품들과 유사한 도기들이 확인된다.
중도의 청동기인들 중에 물이 차오른 한강 하류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온 이주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남한강의 구릉지역인 여주 흔암리(해발 123m)와 강원 정선 아우라지에서도 청동기 유적이 보인다.
청동기시대 인류들이 한강 하류 유역이 수몰되자 한강 상류로 옮겨가 집단생활의 터전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기원전 3~기원전 2세기 무렵 제작된 국보 고운무늬 청동거울(왼쪽). 3개의 구획 안에 중심이 같은 동심원들과 1만3000여개의 선(線)이 그려져 있다. 선의 간격은 0.3~0.34㎜, 원의 간격은 0.33~0.55㎜에 불과하다. 이 거울문양의 원조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라는 견해가 있다. /숭실대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해수면 하강과 함께 들어선 백제 왕국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해수면 상승에 따라 급격하게 높아지던 해수면은 기원전 4~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다시 하강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한강 유역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이곳에 남한강·북한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다시 강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수천년전 그들의 선조가 살았던 곳에서 다시 삶의 터전을 잡는다. 그 증거가 미사동 등지에서 출현한 이른바 ‘춘천 중도식 토기’이고, 풍납동에서 확인된 이른바 ‘풍납리식토기’이다. 고향에 돌아온 이들은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내려온 새로운 세력(온조왕)과 함께 왕국(백제)을 세운다. 그들의 도읍지가 된 곳이 암사동과 미사동의 남쪽 구역인 풍납동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 기원전 4~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한강수위가 하강하자 물길을 피해 구릉과 강 상류로 옮겨갔던 주민들이 다시 한강하류로 내려온다. 그들은 기원전 18년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세력과 함께 왕국(백제)을 건설한다.

빗살무늬 토기의 후예들
“빗살무늬 토기가 뾰족밑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래밭 인근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이 뾰족밑 도기를 모래 밭에 꽂아두려고 그렇게 만든 거죠. 구릉으로 이주할수록 도기의 밑은 평평해지죠.”(이형구 교수)
또 무늬가 정교하고 다양한 빗살무늬 토기에 비해 청동기 시대 토기의 표면이 거칠고 문양 또한 조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해수면 상승에 따라 삶의 터전이 강변에서 구릉으로 옮겨지고, 그에 따라 고운 흙이 아닌 거칠고 굵은 흙으로 도기를 구웠기 때문이다. 그런 도기였기에 그 표면에는 정교한 무늬를 새겨넣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제작한 거칠고 굵은 도기의 표면에 띠를 두르고, 손이나 새김도구로 쓱쓱 비교적 간단한 무늬를 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빗살무늬토기의 예술은 끊어지지 않고 면면이 이어졌다. 마침내 기원전 300~200년 쯤이 되면 0.3㎜의 극세선 예술을 선보인 고운무늬 청동거울(정문경 혹은 다뉴세문경)’로 정점을 찍었다. 요즘에는 고운무늬 청동거울의 무늬와 빗살무늬의 친연관계에 천착하는 연구가 주목을 끌기도 했다.(김찬곤의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기본무늬와 세계관 연구’, <인문사회 21> 제21권 3호, 아시아문화학술원, 2020) 해수면의 상승과 하강에 따른 한강 유역의 문화상은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 이 기사를 위해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박혜미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사진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명상음악/ 홀로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