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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27] ‘한 집에 한 명만 살려준다’… 그렇게 일가족 11명 끌려가

잠용(潛蓉) 2023. 9. 27. 15:30

[본헌터 27] ‘한 집에 한 명만 살려준다’… 그렇게 일가족 11명 끌려가
 한겨레ㅣ2023-09-25 11:00 수정 2023-09-25 22:14


[역사 논픽션 : 본헌터 27회] 맹씨네 이야기
생존자는 학군단 제적…성재산에서 또 유해를 찾아

 

▲ 웅재의 대학 학생증. 4학년 ROTC(학생군사교육단) 임관을 앞두고 특무대의 조사를 받은 뒤 학군단으로부터 즉시 제적됐다. “부역자,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본인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없다.
나는 카운트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부, 숙모, 고모, 누나 또는 언니들이 포함된 몰살자 명단 속에 나는 없다. 부당하다. 나도 한 생명으로서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 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 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전, 나를 뱃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태어났다면 맹씨네 일원이었다. 73년 된 태아의 신비로운 힘을 빌려, 나와 함께 몰살당한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살아남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살아남았으나 국가에 버림받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난과 감시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가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1951년 1월4일,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바로 그날이었다. 충남 아산군 배방면 휴대리 65번지에 살던 할아버지 무섭(46), 할머니 중희(47), 엄마 규옥(27), 규옥 뱃속의 나, 숙부 용재(18), 숙모 우순(18), 고모 숙재(15) 은재(7), 삼촌 웅재(11), 누나(또는 언니) 만호(4), 삼촌 복재(1), 이렇게 11명이 배방면 모산역 곡물창고에 끌려가 갇혔다. 창고 안에는 200여명이 바글바글했다. 1950년 9·28 수복 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부역 혐의로 끌려가자 할아버지가 연판장을 돌리고 진정서를 면사무소와 경찰서에 보낸 게 화근이었다. 동네 목숨줄을 쥐고 있는 향토방위대 부위원장 김씨의 눈밖에 완전히 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멸족의 불씨가 되었다.

이틀 뒤 10명의 가족이 곡물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모산역 철길을 따라 성재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11살 웅재 삼촌만 살아나왔다. 가해자들이 한 집에서 10살 아래로 한 명씩만 살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고모 은재와 언니(또는 누나) 만호, 삼촌 복재도 각각 7살, 4살, 1살이었지만 나가지 못했다. 세는 나이로 12살이었던 웅재는 아버지 무섭에게 떠밀려 10살 아래 행세를 했다. 웅재는 동네에서 함께 놀던 주성(본헌터 21회 참조)등과 함께 곡물창고 밖으로 내보내졌다.

▲ 웅재의 천안농고 학생증. 부모를 모두 잃은 뒤 웅재는 큰할아버지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본인 제공

아빠 갑재(26)와 형(또는 오빠) 억호(1)는 아예 곡물창고에 가지 않았다. 갑재는 인민군 점령기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쉬지 않고 했다는 이유로 배방지서 유치장에 끌려갔다가 온양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있었다. 갑재의 아버지 무섭이 연판장 건으로 찍힌 뒤 생긴 일이었다. 억호는 엄마 등에 업혀 칭얼대는 바람에 곡물창고로 끌려가기 직전 작은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살아서 고통이었다. 한 달 뒤 대전형무소에서 무죄로 석방된 아빠는 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가족이 학살되어 증발된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주검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집은 가해자들이 불태워 잿더미가 되었다.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6개월 뒤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우리집의 희생자 수는 도합 11명으로 늘었다.

이제 두 생존자, 웅재와 억호의 인생이 펼쳐질 차례다. 웅재는 큰아버지, 즉 나의 큰할아버지집에, 억호는 작은할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죽은 할아버지 무섭은 삼형제 중 둘째였는데, 나머지 두 집안은 다행히 화를 면한 터였다. 사건 직후 배방국민학교 6학년이 된 웅재는 공부를 잘했다. 천안중학교와 천안농고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인근에서 수재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법조인을 꿈꿨다. 2학년이 되던 1962년에는 학교에 ROTC(학생군사교육단)가 만들어져 지원했다. 학교 성적도, 학군단 성적도 좋았다.

국가는 앞길이 창창한 수재의 날개를 부러뜨렸다. 4학년 장교 임관을 앞두고 있는데 특무대(CIC)에서 조사가 나왔다. 얼마 뒤 대령 계급의 학군단장이 웅재를 불렀다. “넌 안된다”고 했다. “부역자, 빨갱이 가족이라서 안된다”고 했다. 담당 교관인 소령은 함께 눈물을 흘려주며 안타까워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날부로 학군단복을 벗어야 했다. 학군단에서 제적되면서 병적도 사라져 일반 군입대조차 불가능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취직 길이 막혔다. 사법고시도 볼 수 없었다. 웅재 앞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다. 서울 덕수궁 앞에서 법무사를 운영하는 일가친척 한 분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곳에 사무장으로 들어갔다. 모든 걸 숨기고 고졸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 친척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 1974년 경찰의 신원조사회보서에 기록된 억호. 울화병으로 죽은 아버지를 “처단된 자임”이라고 잘못 적어놓았을 뿐 아니라 억호에 대한 사찰 기록을 적어놓았다. /본인 제공

억호도 공부를 잘했다. 처음에는 작은할아버지가 중학교도 못 가게 해 애를 먹었다. “농사일도 바쁜데 무슨 공부냐”면서 학교 대신 들로 나가게 했다. 억호가 나온 동방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찾아와 “내가 중학교 보낼테니 억호를 우리 집에 달라”고 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우리새끼 내맘대로 못하냐”며 소리소리 질렀다. 우여곡절 끝에 1년 늦게 진학해 천안중학교와 천안농고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버스 타고 다니는데 버스비가 없어 1시간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고, 농사일도 병행했다.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작은할아버지 집에 매여있기는 싫었다. 고3 때인 1968년 10월 경기도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일부러 먼 지역을 택했다. 포천군 영북면 사무소에서 사회 첫발을 디뎠다. 억호는 아산 쪽으로는 쳐다도 보기 싫었다. 1972년 병석에 누운 작은할아버지가 불러 아산에 내려갔다. “미안하다, 강하게 키우려 한 거지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면서 사과했다. 희한하게도 그동안 쌓여있던 나쁜 감정이 스르르 녹았다. 작은할아버지는 3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1973년에 고향에 내려왔다. 배방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이어갔다.

억호는 삼촌 웅재와 달리 연좌제는 피한 줄 알았다. 그러나 아산군청에 근무하던 1990년, 우연히 책상에 놓여있던 인사기록카드 문서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1974년 경찰이 작성한 신원조사회보서에 억호에 대한 사찰 기록이 있었다. “부 맹갑제는 6·25 당시 리인위 위원장으로 활약타 9·28 수복 당시 처단된 자임.” 리인위는 리 인민위를 뜻했다. 사실과 다른, 엉뚱한 내용이었다. “처단”운운도 마찬가지였다. 울화병으로 죽은 사람을 학살했다고 한 것은 경찰의 실적 부풀리기였을까, “사상관계 : 용의점 발견치 못함, 성질 소행 : 온순 단정한 편임.” 자신도 모르게 감시당했다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쭈뼛 섰다. 다행히 억호는 2009년 아산시의회 국장까지 무사히 공직생활을 마쳤다.

 

▲ 억호가 2023년 5월13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 성재산 교통호 발굴 현장 앞에 있는 컨테이너에서 유해들을 리무진 장례차로 옮기기 전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유해들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사진 고경태 기자

삼촌 웅재는 참 감사한 사람이다. 곡물창고에 끌려가 죽은 가족의 수가 9명이 아니라 10명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만삭이던 엄마 배 안에서 죽은 나까지 특별히 셈해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웅재가 슬하에 둔 삼남매 자식들은 아빠의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웅재는 1951년 곡물창고의 살풍경과 1964년 ROTC에서 제적당하던 순간을 되새길 때마다 목이 메다 못해 통곡을 한다. 원혼들이 너무 불쌍하고, 꿈을 못 이루고 썩은 듯한 자신이 애처롭고 또 애처로워서다. 얼마 전 어느 기자와 통화를 할 때도 눈물을 철철 흘렸다. 다른 가족들은 국가에 의해 생명을 학살당했고, 웅재는 살아남았으나 역시 국가에 의해 사회적으로 처형당했다. 제2의 학살이었다. 84살인 지금은 폐암과 싸운다. 누가 그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오빠(또는 형) 억호도 참 감사한 사람이다. 2020년부터 아산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억호는 성재산에 묻혔으리라 추정되는 가족의 유해를 찾고 있다. 2020년 봄 배방읍 공수리 965번지 변전소 주변(크라운 제과 건물 인근)의 한 지점을 판 적도 있다. 어느 포크레인 기사가 1980년대 중반 변전소 터파기 공사를 하다 서너 마대 분량의 유골을 발견해 다른 곳에 묻어주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물 쓰레기들만 잔뜩 나왔다.

▲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의 유해 발굴 현장. 올해 10월부터 공수리 883, 643, 653번지 지점을 다시 발굴할 예정이다. /네이버 지도 캡처

억호는 다른 곳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옛 신도리코 공장 부지인 배방읍 공수리 883번지다. 1995년 공장을 지을 때도 유골이 나왔다고 했다. 그곳으로부터 남쪽 340m 지점에 있는 공수리 110번지에서는 2023년 3월 62구가 나왔다. 발굴 뒤 감식 결과 모두 남자였다. 이번에 만약 883번지에서 여자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1·4후퇴 시점에 가족 단위로 끌려간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나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태아의 뼈는 약해서 금방 부스러진다. 나를 임신했던 엄마가 나온다면 엉덩뼈에 나의 미세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아, 맞다. 드디어 몇 주 뒤 883번지 그 지점을 판다. 73년 전 못다 피어난 9개월짜리 태아가 응원을 보낸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