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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28] 퉁, 퉁, 퉁…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유해가 나왔다

잠용(潛蓉) 2023. 10. 7. 23:33

 [본헌터 28] 퉁, 퉁, 퉁…‘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유해가 나왔다
한겨레ㅣ2023-10-04 11:00 수정 2023-10-05 13:31



[역사 논픽션 : 본헌터 28] 승갑이라는 모티브
유명해진 다부동 369고지 유해, 그리고 방태산 현리의 권순

▲ 2000년 발굴된 승갑의 군화 옆에 허벅지뼈가 같이 나왔다. /청계 인류진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선주가 책임조사원으로 참여한 육군유해발굴단은 7년간 지속되었다. 애초 기한이었던 3년의 두 배를 넘게 했다.
7년간 발굴된 유해는 총 1503구다. 2007년 1월부터는 정식 부대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어 현재까지 유해발굴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부터 2022년까지 총 23년간 발굴된 유해는 1만3121구다. 선주는 유해발굴이 국방부로 넘어간 뒤에는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23년간 발굴된 피아 군대의 1만3121구 중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해가 있다. 바로 승갑이다. 선주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고 회상한다. 이 드라마는 실제로 영화가 되었다. 승갑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선주를 비롯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죠.”

퉁, 퉁, 퉁.
반나절 동안 소득이 없어 무료하던 발굴병은 별 생각 없이 호미로 땅바닥을 여러 차례 두드린다. 퉁, 퉁, 퉁 울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문득 병사의 눈길이 그 지점을 향한다. 무언가 삐죽 솟아있다. 옆을 살살 파본다. 머리뼈 조각이다.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고 다른 부위의 뼈들과 함께 호루라기, 삼각자, 연필, 라이터, 만년필, 장화 한 켤레, 플라스틱 숟가락 등의 유품이 출토된다. 주목을 끈 것은 반투명 삼각자에 새겨진 이름, 崔承甲. 유해의 주인공을 특정할 단서가 나왔다. 병적부를 뒤져 해당 병사의 신원을 확인한다. 국군 제1사단 17연대 소속 일병, 1924년생, 전사 당시 26살. 이번에는 제적등본을 뒤져 아내와 딸을 찾아낸다. 마침내 75세의 노인이 된 승갑의 아내가 발굴병의 등에 업혀 남편이 있는 산을 오른다.

▲ 2000년 발굴된 승갑의 머리뼈. 오른쪽 아래가 눈두덩. /청계 인류진화연구소 제공

2004년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러한 유해의 첫 발굴 순간과 가족에게 연락이 닿는 과정을 조금 각색해 영화 도입부로 삼았다. 가령 삼각자의 이름을 따라 승갑의 가족을 찾아 연락을 했는데 살아있는 승갑이 덜컥 전화를 받고, 그 삼각자는 승갑이 아니라 승갑의 동생 것이라는 식이다. 삼각자를 통해 전쟁과 함께 함께 참전했다가 각자 국군과 북한군으로 갈라져야 했던 형제의 비극적 운명이 드러나는 시나리오로 영화의 상상력은 발전해 나간다. 영화 속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삼각자 대신 만년필이 발견되고, 일병 승갑이 아닌 하사 진석이 등장한다.

승갑은 육군유해발굴단의 사업을 널리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발굴 현장과 50년만의 뒤늦은 부부 상봉이 대대적으로 방송을 타면서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승갑이 나온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지역 369고지는 328고지에 이은 두 번째 발굴 현장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2000년 4월21일로, 발굴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됐을 때였다. 퉁, 퉁, 퉁 울리던 소리는 땅속의 주검이 삭아 공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950년 8월1일부터 9월16일까지 절체절명의 낙동강 최후 전선에서 국군 1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공세를 막아낸 격전의 현장이기에 의미도 각별했다.

▲ 2000년 발굴된 승갑의 유해 옆에서는 삼각자와 나침반 등의 뼈가 나왔다. 삼각자에 승갑의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었다. 머리뼈는 쪼개진 채로 나왔다. 팔뼈, 허벅지뼈, 갈비뼈, 등뼈 등이 그 옆에 있다. /청계 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승갑을 확인시켜준 것은 삼각자와 함께 호루라기, 만년필이었다. 아내는 전쟁 일주일 전 승갑이 휴가 나왔을 때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에 오기 전 동네 한문 선생을 지내 글씨를 잘 썼다고 해 만년필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승갑이라는 사실은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했다. 허벅지뼈와 치아를 잘라 연세대 법의학교실에서 디엔에이(DNA) 조사를 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머리뼈. 승갑의 머리뼈는 북한군의 총탄에 의해 부서진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었다. 선주가 보기에는 총탄이 아니라 발굴 과정에서 깨졌을 가능성이 컸다. 발굴병이 무심코 땅바닥에 내리친 호미가 손상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 이미 머리뼈는 조각난 상태였다. 사진에 상당 부분 온전한 것처럼 나온 머리뼈는 발굴 뒤 붙여놓은 것이다. 2001년 9월 강원도 방태산 인근 현리 지구에서 발굴된 권순의 이야기도 영화 감이었다. 권순을 찾아낸 사람은 전사 당시 1살이었던 딸의 남편, 즉 사위였다. 딸은 본인이 한 살 때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찾고 싶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해왔다. 예비역 육군 중사였던 권순의 사위는 군인 출신의 정보력과 촉을 발휘해 장인의 생전 부대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

▲ 맨 위부터 발굴 뒤 감식한 등뼈, 갈비뼈, 빗장뼈, 어깨뼈. /청계 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승갑이 나온 다부동에서는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했지만, 권순이 나온 현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현리 지구는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국군 3·9사단과 북한군 6·12·32사단, 그리고 중국군 2개 군이 참전했던 전투 지역이다. 그해 5월14일부터 22일까지 중국군의 2차 춘계공세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국군은 16~17일 북한군의 야간 공격으로 지휘체계가 마비되어 결국 패배했다.

권순의 군 동료들은 사위에게 “당일 부대원들이 트럭에서 내리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고 여러 명이 다쳐 결국 죽었다”고 말했다. 한 동료는 자신의 손자가 입대한 근처 부대에 면회차 왔다가 이곳이 본인의 참전 지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을을 방문해 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다는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권순의 사위는 마침내 현장에서 그 증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육군본부에 발굴을 요청했다.

권순은 현리 마을 주민에 의해 산기슭 교통호에 묻혀 있었다. 직접 묻어준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다만 권순을 묻어준 아버지 옆에서 이를 목격했던 아들이 살아있었다. 1951년 사건 당시 11살이었다고 했다. 집의 창고에서 그 전날 다리에 부상을 입고 숨어들어온 듯한 병사가 죽어있었다는 거였다. 고통을 참느라고 손으로 얼마나 땅을 움켜잡았는지 병사의 손톱이 다 빠져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뒷산에서 칡순을 끊어와 목에 걸고 군인을 끌어당겨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집 뒤 소나무 숲 속의 교통호로 밀어 넣었다고 했다. 마을 인근 논밭에는 다른 병사들의 시체도 있었는데, 그날 그렇게 아버지가 같은 자리에 묻어준 주검은 세 구였다고 했다. 그 아들은 죽기 전 오전에 자신의 집에 왔던 키가 작은 병사가 있었으며 명찰에 붙어있던 이름이 권순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했다. 흥미로운 일은 권순이 발굴되기 전날 그를 묻어준 아버지가 아들의 꿈에 나타나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일 누가 찾아올 텐데 찾는 게 위에 있을 것이다.” 선주가 교통호를 파헤쳤을 때 돌판 위에 유해 하나가 나왔다. 이를 수습하고 돌을 들어보니 또 두 사람이 나왔다. 꿈대로 맨 처음 나온 사람이 권순이었다. 목격한 이의 기억대로 키가 작았다.

▲ 승갑의 부인과 딸이 유해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권순은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에서 가족들이 추적에 나서 찾아낸 처음이자 마지막 경우였다. 승갑은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경우였지만 가족들은 어느 날 50년 만에 느닷없는 통지를 받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후유증도 있었다. 승권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했는데, 승갑의 친가 쪽에서 재혼한 아내가 안장식에 와서는 안 된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발굴단의 군 간부들이 진땀을 흘리며 설득을 했다. 딸의 노력으로 갈등을 봉합했고 승갑의 아내는 안장 현장에서 어렵게 마지막 한 삽의 흙을 뿌릴 수 있었다.

승갑과 권순 덕분에 육군유해발굴단은 세상에 존재의 의미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미군에 비하자면 너무 늦게 태어난 조직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유해를 거두어갔다. 육군유해발굴단의 7년 동안 발굴된 유해 총 1503구 중 1182구가 국군인데 반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유해가 8구뿐이었던 이유였다. 북한군 217구, 중국군 96구였는데 말이다.(2000~2022년 총 발굴된 1만3121구 중 유엔군 유해는 32구) 그래서인지 미군 당국은 한국의 유해발굴에 무심했다. 아니 우습게 봤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