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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헌터

[본헌터 46] 세월호 마지막 주검은 어떻게 온전할 수 있었나?

잠용(潛蓉) 2023. 12. 10. 14:08

[본헌터 46] 세월호 마지막 주검은 어떻게 온전할 수 있었나?  
한겨레ㅣ2023-12-06 11:00 수정 2023-12-06 15:33

[역사 논픽션 : 본헌터 46] 누운 세월호에서
발견 위치 등에 따라 손상 정도도 달라

▲ 2017년 4월14일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뒤 세척 작업을 하고 있는 세월호. /사진 공동취재단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여자의 오른쪽 뺨이 미끈거렸다.
손을 살짝 갖다대자 살이 꺼져내리며 광대뼈가 드러났다. 선주는 머리 뒤로 넣었던 왼손을 빼고 시신을 다시 천천히 바라보았다. 반으로 꺾여진 몸에서 비누화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온전한 시신은 처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흩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선미 좌현 객실 3-18 구역이었다. 2017년 5월22일, 그날 세월호에서 시신이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가 3년 만인 2017년 3월23일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4월10일 목포 신항만으로 왔다. 세월호에 탔던 476명(선원·승무원 33명, 승객 443명) 중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9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다. 옆으로 뉘인 세월호는 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진흙 덩이를 꺼내 시신과 유해를 찾아야 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선주는 해양수산부 자문위원 자격으로, 세월호에 갔다.


2017년 4월, 제19대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그해 2~3월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군경에 희생된 유해 38구를 발굴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공동대표이자 발굴단장으로 일하던 때였다. 진주에서 올라오자마자 해양수산부 과장이라는 이의 방문을 받았다. 곧 세월호가 목포로 올 텐데 유해 수습과 감식을 해달라고 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부가 공동으로 참여한다고 했다. 정부에 대한 유족들의 불신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민간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 2017년 6월 세월호가 거치돼 있던 전남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선내수색 중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되자 선주(맨 왼쪽)를 포함한 감식단원들이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선주는 2016년 초여름에 선감도에서 선감학원 사망자 유해발굴을 했다. 선감학원은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82년까지 40년간 경기도가 운영한 수용시설에서 5000여명에 이르는 8~19살 아이들이 강제노역과 폭력에 시달렸다. 수백명이 병사하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2014년의 평화로운 봄날엔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250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세월호는 청소년 보호에 대한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을 상징했다. 국가는 선감도에서 악질이었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는 아예 부재했다. 바다에 빠져 죽어서도 구조되지 못한 이들이 선주를 기다렸다.


마지막 수습된 이는 ○○이라고 했다. 옷에서 신분증이 나왔다. 나중에 실시한 유전자 감식에서도 신원이 일치했다. 단원고 학생은 아니었다. 제주도로 이사를 계획한 아들의 짐을 싣고 배에 올랐던 54살의 엄마였다. ○○은 옆으로 누운 배 밑부분, 외부와 차단된 객실에서 발견됐다. 합성수지로 된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츄리닝은 전혀 썩지 않은 채였다. 선주는 ○○의 시신이 왜 그나마 온전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포렌식 타포노미(Forensic Taphonomy, 법의학적 화석학)라는 책은 오래전부터 선주의 연구실 서가에 꽂혀 있었다. 책 속에서 ‘포렌식 타포노니 인 마린 콘텍스츠’(Forensic Taphonomy in Marine Contexts, 해양 맥락에서의 법의학적 화석학)라는 챕터는 세월호 조사에서 참고할 점이 많았다. 이는 일종의 ‘해양 뼈대학’이었다. 바다에서 건진 유해가 육지에 묻혀있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시기별로 어떤 변화를 겪는지, 발견된 위치와 어종의 구성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등을 연구한 논문이었다.

 

▲ 목포 신항만에 있을 때의 청소를 끝낸 세월호 내부 모습.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가령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가장 먼저 먹장어의 공격을 받는다고 했다. 주검에 위해를 가하는 어종은 바다 윗부분일수록 많다고 했다. 주검이 가라앉고 나면 그 다음엔 해삼, 성게, 가리비 등이 주검에 달라붙어 조직에 손상을 가한다고 했다. 홍합은 무릎 등 관절 부위에 해를 입힌다고 했다. 실제로 세월호 선체에서도 이런 어종이 많이 나왔다.


세월호 유해 수습은 뻘과의 전쟁이었다. 수색팀이 객실에 들어가 진흙 덩이를 일일이 손으로 퍼내 양동이에 담아 가져왔다. 진흙 속에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가 다 들어있었다. 그 안에는 유해와 함께 신발·가방·안경·의류·휴대폰 등 유품도 있었다. 20명의 여성 인부들이 2인1조씩 나뉘어 진흙이 담긴 체에 물을 쏘아 내용물을 걸러냈다. 체는 가로세로 폭과 깊이가 1m로 된 망으로 돼 있었다. 망 간격은 3㎜로 촘촘했다. 사람의 치아 조각 하나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을 포함해 도합 4명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학생들을 내보내고 끝까지 남았던 단원고 체육교사 △△은 5월5일 배 바닥 바깥 수중에서 허벅지뼈와 정강이뼈가 나왔다. 각각 5월13일과 16일 발견된 나머지 두 명은 단원고 여학생 ▲▲와 ▼▼이었다. 한 명은 머리뼈가, 또 한 명은 아래턱뼈와 손가락뼈가 나왔다. 나머지 5구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옆으로 기울어진 세월호 안에는 30m짜리 두 개의 타워가 세워져 있었다. 뻘에서 뼈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면 타워 계단을 올라가 확인을 했다. 선주는 해양수산부 자문위원 신분이었으나 실제로는 선체조사위원회 조사관 2명과 함께 수습과 감식을 주도했다. 함께 참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사람들 중에 선주보다 경험과 전문성을 더 쌓은 이가 없는 현실이었다. 초기에는 뼈 발견 즉시 검사의 지휘를 받으라는 요구에 당혹해 하기도 했다. 이 유해들을 변사체로 간주한다는 이유였다.


선주는 2016년 봄 한국방송(KBS) ‘추적 60분’팀의 의뢰를 받아 선감학원 묘지 터에서 치아 5개를 발굴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밤 11시 안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집으로 왔다. 변사체이기 때문에 검사 지휘를 받아야 한다면서 감식 준비 중이던 치아를 가져갔다. 세월호는 선감학원과 또 달랐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 달간 진행하는 유해 수습이었다. 뼈 발견 즉시 검사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해양경찰의 말은 코미디 같았다. 세월호에 파견 나온 검사는 초임이었다. 개뼈다귀와 사람 뼈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선주는 뼈가 나오면 주변 발굴조사를 끝낸 다음에 검사가 투입되어도 늦지 않을 거라 했지만 듣지 않았다. 두 손을 들고 집에 가겠다며 짐을 쌌다. 그제서야 말이 통했다. 선주는 집에 가지 않았다.

 

▲ 2017년 3월23일 바다 위로 떠올라 4월10일 목포 신항만으로 와 옆으로 누워있는 세월호. 2017년 9월 드론을 띄워 촬영한 사진이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선주는 세월호 진흙 덩이에서 나온 먹장어, 가리비, 해삼 등의 해양생물들을 현장에서 임시로 설치한 냉동보관함에 보관해놓았다. 중요한 연구 자료였다. 세월호 사건에 관해 애통해하고 진실과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과 또 다른 차원에서, 인류학적 연구 성과를 축적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긴급하고 필수불가결한 사안으로 선체조사위원회의 정식 승인을 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선주는 목포의 한 대학 해양학과 교수에게 이와 관련한 연구 제안을 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그에게 냉동보관함에 있던 해양생물들을 모두 건네주었다. 그 뒤 실제 연구가 진행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DPAA라고 불리는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엔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한 USS아리조나호(1177명 사망)의 유해와 유품 처리 매뉴얼이 있었다. 이 자료를 DPAA로부터 받아내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에 전했다. 세월호도 이러한 보고서나 매뉴얼을 만들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주는 2017년 6월, 두 달 반 만에 세월호를 떠났다. 육지보다 훨씬 긴 발굴 여정이었다. 바닷속 유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