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본헌터

[본헌터 44] 군경 유해인 줄 알았더니, 거꾸로 군경에 죽은…

잠용(潛蓉) 2023. 12. 2. 14:18

[본헌터 44] 군경 유해인 줄 알았더니, 거꾸로 군경에 죽은… 
한겨레ㅣ2023-11-29 11:00 수정 2023-11-29 14:12


[역사 논픽션 : 본헌터 44] 곤혹스런 두 보고서
발굴 결과 공개 안한 익산 망성면과 추가발굴 안 한 서울 우이동

▲ 2014년 8월21일 전북경찰청 과학수사대(CSI) 직원들이 전북 망성면 화산리 황산대교 아래 금강변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발굴 당시엔 “경찰들이 한국전쟁 당시 숨진 선배 경찰관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는 사진 설명이 실렸다. /연합뉴스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유해발굴 최종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선주는 자신의 연구소 서가 한켠에 쌓인 서류더미에서 먼지가 잔뜩 묻은 보고서 하나를 꺼냈다. ‘전북 익산 망성면(금강변) 발굴유해 용역 보고서’. 발행일자는 2021년 3월2일로 되어있다. 선주는 용역 보고서를 제출한 뒤 잊고 있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유해발굴을 하지는 않았다. 발굴한 지 6년이 지난 뒤에야 유해를 넘겨받아 분석만 해줬다. 선주가 적은 보고서의 결론은, 애초 발굴단이 짐작했던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였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선주가 작성한 보고서는 그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때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유해 1구가 7월18일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변 갯벌에서 발견됐다. 이틀 뒤엔 20여구가 또 발굴됐다. 유해가 발견된 지역은 충남 강경과 인접한 곳으로 1950년 7월 북한군과 경찰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유해를 발견하고 신고한 이들은 낚시를 하던 초등학생 2명이었다. 경찰은 전북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와 익산경찰서 형사계 직원 40명으로 발굴단을 구성했다. 경찰이 대대적으로 한국전쟁기 유해발굴에 나서는 유례 없는 경우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발굴 지원을 하며 감식을 해주기로 했다. 추가발굴 결과 총 49구의 유해가 나왔다.


경찰은 발견된 유해가 한국전쟁기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경찰 또는 국군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1950년 7월18일 발굴현장과 1.6㎞ 떨어진 곳에서 북한군 6사단과 강경 경찰서원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경찰 82명이 전사했다. 비슷한 시기 국군 7사단 병력과 전북경찰 및 충남경찰 혼성 중대가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발굴을 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경찰복이나 군복, 군화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고무신이 나왔다. M1이나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가 나왔다. 그럼에도 경찰과 군은 미련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유해에 대한 디엔에이(DNA) 검사를 실시했고, 2015년 5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2차에 걸쳐 약 5만6375명의 유가족(경찰 1375명, 국군 약 5만5000명) 유전자와 비교하는 작업을 벌였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 2014년 8월21일 전북경찰청 과학수사대(CSI) 직원들이 전북 망성면 화산리 황산대교 아래 금강변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과 군인이 아니라면 민간인일 수밖에. 군은 이후 업무를 행정안전부 과거사지원단에 넘겼다. 당시는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2005~2010)가 활동을 마친 상태라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담당할 국가 기관이 없었다. 행안부 과거사지원단도 유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매듭은 지어야 했다. 망성면의 유해들은 국군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를 모두 발굴한 경험이 있는 선주에게 왔다. 발굴 유해의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부 등을 분석한 뒤 임시안치시설(세종 추모의 집)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거였다.


선주에게 온 유해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발굴된 이후 5년 이상 비닐봉투 안에 담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머리뼈는 대부분 부서져 조각으로만 남아 있었고 완전한 형태는 2개체뿐이었다. 머리뼈에서 총상흔이 보였다. 유해와 함께 발견된 M1과 카빈 등의 탄피와 탄두를 감안할 때 이들은 아군 소총 등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희생자들의 나이 분포는 1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다양했다. 만약 군경이었다면 20대로 균일했을 것이다. 고무신이나 단추류 등의 유품도 이들이 민간인 희생자라는 걸 보여주었다. 발굴지점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따르면, 북한군이 1950년 7월15일 강경을 장악한 뒤 16일 일단 퇴각하자 17일경에 지역 우익 세력이 적군에 동조한 부역 혐의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시신이 바로 수습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점으로 볼 때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가능성은 작았다.


경찰과 군으로서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강경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한 군경 전사자가 대부분이리라 믿고 발굴을 했는데, 거꾸로 군경의 주도나 방조 속에서 희생됐을지 모르는 민간인들이 나온 셈이었다. 유해발굴 초반엔 떠들썩하게 언론에 알렸으나, 최종결론이 밝혀진 뒤에는 침묵해버렸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곤혹스러운 사례는 또 있었다. 군 발굴단이 민간인 유해를 수습한 뒤 발굴을 멈춰버린 경우였다. 선주는 한참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뒤지더니 파일을 하나 찾아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인수천 옹벽보강공사 현장에서 수습된 유해의 감식보고’. 발행일자는 2018년 3월30일로 돼 있다. 선주는 역시 감식보고서를 제출한 뒤 잊고 있었다. 망성면과 마찬가지로 직접 현장에 가서 유해발굴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망성면처럼 6년이나 지난 뒤 유해가 오지는 않았다. 최초 발굴로부터 두 달 만에 감식을 의뢰받았다.

 

▲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인이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 319번지의 2017년 11월 현장. /남인우 법인권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제공

2017년 11월16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338번지 인수천 옹벽 공사를 하던 노동자들이 땅속에 묻힌 유해를 발견해 신고했다. 강북경찰서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나서 유해 6구를 수습한 결과 6살 어린이부터 60대까지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로 추정되는 유해가 나왔다. 6구의 유해는 위아래로 3~4겹 혼재돼 있었다. 일부 유해는 손목을 철삿줄로 결박당한 채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남은 유해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추가 발굴작업을 하지 않고 흙을 덮었다. 이들 유해는 2023년 10월이 돼서야 진실화해위를 통해 세상 빛을 보았다.


한국전쟁기에 한강 이북에서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한 부역혐의자 처형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난 경우는 우이동이 처음이었다.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군은 현장에 유해가 2구 이상 더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굴을 하지 않았다. 군은 민간인 유해를 발굴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였다. 국방부는 관련 업무를 행정안전부로 넘겼다. 당시에도 진실화해위는 1기를 마치고 2기 출범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행정안전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유해 감식과 분석을 외부에 용역준 뒤 민간인으로 밝혀지면 세종 추모의 집으로 보내는 거였다. 용역을 맡은 선주는 유해를 개체별로 분류해 나이·성별·키재기 등의 조사를 했다. 6구중 2구만 남녀식별이 가능했다. 2구는 모두 남자였다.


선주가 유해와 함께 받은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우이동 발굴지점 근처에 살던 중학교 음악선생(당시 45~50살)의 가족일 가능성이 컸다. 우이동 토박이라는 80대의 남성 제보자는 “중학교 1학년 때쯤(1950년 10월경) 경찰이 6.25 전쟁 이전 자신의 학교 음악 선생 일가족을 인수천 주변에서 사살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시체는 묻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 죽은 사람은 음악 선생 부부와 선생의 장모, 7살 이내의 아들 2명 등 총 5명이었다고 했다. 장소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2017년 11월 서울 강북구 우이동 338번지에서 유해를 우연히 발굴·수습한 지 5년 만인 올해 10월, 서울 강북구청이 진실화해위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이곳을 공식 발굴해 1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조사원이 1차 노출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삼한문화재연구원 제공

▲ 2017년 11월 서울 강북구 우이동 338번지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가 나온 것으로 알고 발굴하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나오자 발굴을 중단하고 이곳에 부직포와 흙을 덮어놓았다. 그로부터 5년 만인 올해 10월, 서울 강북구청이 진실화해위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이곳을 공식 발굴하며 부직포를 벗겨놓은 모습. /삼한문화재연구원 제공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우이동의 경전철 자리와 다른 두 곳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했다. 아침마다 트럭에 실려 와 사살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가해자가 경찰인지 우익 청년단원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선주는 한계를 절감했다. 이것은 ‘시스템의 부재’라는 한계였다. 망성면에서 유해를 수습한 경찰과 군은 왜 적극적으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탐문할 수 없었을까.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민간인 유해발굴팀이 정보를 공유한다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유가 지속될 만한 구조가 아니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7년 1월 정식부대로 창설됐으나, 민간인 희생자 발굴팀은 진실화해위가 살아있을 때만 기능했다. 진실화해위가 한시적 기구이다 보니 발굴팀은 불안정한 존재였다. 선주는 망성면과 우이동 유해의 감식요청에 흔쾌히 오케이했지만,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군인·경찰·민간인 유해 발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센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