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898년 고종의 ‘최애’ 커피에 독을 탔다…‘깜짝 나비효과’ 일으켰다
경향신문 : 2024.09.24 05:00 수정 : 2024.09.25 17:00
(1898년 고종 커피 독살 미수 사건…‘경천동지할 나비효과’ 일으켰다)
‘가을밤 달빛 아래 석조전 테라스에서 즐기는 가배(咖啡·커피).’ 24일부터 11월2일까지 덕수궁에서 올 하반기 ‘밤의 석조전’ 행사가 열린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와 국가유산진흥원이 함께 벌이는 행사다. 참석자들에게는 커피 등 음료와 피칸 타르트 등이 제공된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한 ‘타르트 틀’이 발견된 것에 착안해서 마련된 후식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무엄한 행태라 욕할 수도 있다. 아무리 ‘궁궐뷰’가 좋기로서니, 왜 신성한 고궁을 한낱 ‘카페’로 전락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 발생- 독립신문 1898년 9월13일자가 최초 보도한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 11일 밤 올린 커피차를 많이 들이킨 황태자(순종)는 구토한 후 정신을 잃었고, 조금 마신 고종은 토했다는 ‘황송한 소식’을 담고 있다.
■ 덕수궁, 가배, 커피
덕수궁은 고종(1863~1907)이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거처를 옮긴 뒤 1919년 서거할 때까지 머물던 궁궐이다. 그런 고종이 사랑했던 음료가 커피였다.
조선에 커피를 처음 들여온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로 알려져 있다. 1853년 조선 천주교회 4대 교구장인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 프랑스 신부가 눈에 띈다. 1856년 서울에 부임한 베르뇌가 1861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홍콩)에 서한(3월 30일)을 보냈다. “…커피 40리브르(20㎏), 흑설탕 100리브르 등을 보내달라”(<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2008)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베르뇌는 그렇게 전달받은 커피를 혼자 마셨을까. 함께 활동하던 프랑스 신부들에게도 나눠주었을 것이고, 같이 생활하던 조선인이나 신도들과도 함께 마셨을 것이다.
▲ ‘커피맛이 이상해...’ - 9월25일 일본공사가 본국의 일본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 정보보고. 평소 식전 커피를 즐긴 고종은 11일 저녁에도 저녁을 들면서 커피를 입에 댔다. 그러나 커피 맛이 이상해서 한모금 마시다 말았다. 반면 황태자는 한번에 거의 반잔을 마셨다. 이에 황태자는 토한 후 실신했고, 황제는 구토했다. /국사편찬위 자료
■ 최초의 ‘삭후 커피’
그럼 기록상 ‘조선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인물’은 누굴까. 천문학자이기도 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1855~1916)이 우선 꼽힌다.
로웰은 1883년 조·미 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조선 보빙사를 수행했다. 그 보답으로 고종의 초청을 받아 그해(1883) 말 조선을 찾아왔다. 그런데 로웰이 경기도 관찰사의 초청으로 한강변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은 것을 회고한 기록이 눈에 띈다.
▲ 주범으로 지목된 김홍륙- 커피 독차 사건의 범인으로 김홍륙(?~1898)이 지목됐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으로 러시아어를 배워서 러시아 공사관 통역이 관 인물이다. /정교(1856~1925)의 <대한계년사>에서
“우리는 한강변 정자에 다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식사 후 커피’를 마셨다”(<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Morning Calm)>·1885)는 것이다.
로웰이 당시 ‘커피=최신 유행품’이라고 표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식사 후 디저트용으로, 대화용으로 마시는 커피가 무려 140년 된 풍습인 셈이다.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였던 윌리엄 리처드 칼스(1848~1929)도 유력후보이다. 칼스는 1884년 “조선의 외교고문(독일인)이었던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1848~1901)의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게 된 사치를 고마워하게 됐다”(<조선풍물지(Life in Corea)>·1888)고 회고했다.
▲ 공적이 된 김홍륙- 김홍륙은 러시아 공사관-궁궐 사이를 오가며 고종를 협박까지 하면서 러시아의 이권 획득과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결국 러시아와의 통상 과정에서 거액을 착복한 혐의로 흑산도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1898년 8월23일)
■ 커피를 숭늉 마시듯…
커피를 처음으로 기록한 조선인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1883~1885) 유길준(1856~1914)이었다.
유길준은 “서양인의 음식은 빵·버터·생선·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를 숭늉 마시듯 한다”(<서유견문>)는 재치있는 멘트를 날렸다. 유길준이 커피를 마셨다는 언급은 없지만 미국 유학 시절 당대에 유행했던 커피를 즐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 사건의 전말- <고종실록>에 기록된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의 전말. 유배형을 받은 김홍륙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홍식을 통해 커피에 아편을 넣어 고종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사주하고 떠난다. 공홍식은 김종화라는 인물에게 아편을 건네며 ‘은전 1000냥을 주겠다’고 꼬드겼다. 김종화는 아편을 옷소매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주전자에 탔다.
최근들어 최초로 커피를 마신 조선인은 문신 민건호(1843~1920)라는 자료가 발굴됐다. 개항장 부산 해관(세관) 서기였던 민건호는 1884년 7월27일 일기(‘해은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청나라 사람인 당소의(1860~1938)로부터 갑비차(커피차)와 일본 우유, 백설탕 큰종지 하나, 궐련(담배) 1개 등을 대접 받았다.”
민건호는 이후에도 커피를 대접받거나 선물로 보냈다는 내용을 일기에 계속 기록했다.
▲ 김홍륙 사건 판결문- 고종 독살 기도 사건 판결선고서. 대한제국 고등재판소는 10월10일, 주범 김홍륙과, 김홍륙의 사주를 받고 아편담배를 전달하고 고종의 커피에 탄 공홍식, 김종화에게 사형(교수형) 판결을 의결하고, 김홍륙의 부인인 김씨 등은 무죄방면했다.
■ 왕실 만찬에 등장한 커피
커피가 궁중에 들어온 것은 언제쯤일까. 궁중을 드나든 외국인들의 기록 곳곳에 등장한다.
1884년부터 3년간 고종의 주치의였던 호러스 뉴튼 앨런(1858~1932)은 “궁중의 시종들은…나에게 잎담배와 샴페인, 사탕과 과자를 권했고…나중에는 홍차와 커피를 추가했다”(<Things Korean>·1908)고 전했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왕후(명성황후)를 접견했을 때(1895년 초)의 회고가 눈에 띈다.
▲ 법부의 이의제기- 그런데 고등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법부대신 신기선은 “부인 김씨는 남편의 음모를 모를리 없는데도 자백하지 않았으니 태형 100대, 징역 3년형을 내려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이었다. 수프와 생선…속을 채워 말아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적포도주, 커피가 포함되어 있었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1897)
여의사 애니 엘러스 벙커(1860~1938)는 “궁중에서 왕비(명성황후)를 처음 만나 진찰했을 때 커피를 얻어마셨다”고 회고했다.
“…궁중의 대기실에 도착하면 차와 커피와 과일 접대를 받은 뒤…왕비 마마에게로 인도되었다. 국왕과 왕세자는 항상 거기에 계셨다.”(<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1895년 10월호>)
▲ ‘부인은 임신중’- 고종은 “김홍륙의 아내인 김씨 부인을 태형 100대와 3년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법부의 이의 제기와 관련, “부인이 지금 임신중이므로 태형 100대는 면제하고 유배 3년형에만 처한다”고 최종 결정했다.
■ 고종을 매혹시킨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
커피 애호가인 고종은 언제 커피를 처음 마시게 되었을까. <삼천리> 1932년 10월호에 당시 배재고보 교장이었던 헨리 도지 아펜젤러(1889~1953)의 회고담이 실려있다.
“아관파천 때…당시 러시아 공사(베베르)의 조카딸인 손탁이라는 독신 여자가 음식을 지어올렸다…고종이…좋아해서 뒷날 궁중에서 외국 사신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 때 음식 일체를 맡겼다…고종이 땅과 집을 주었는데, 그것이 손탁호텔이다….”
‘손탁(孫澤·1854~1922)’이 누구인가. 한국사람 이름 같지만 독일계 러시아 공사인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1841~1910)와 관계 있는 독신녀였다. 손탁의 여동생이 베베르의 처남과 혼인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풀네임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독일명 마리 안토아네트 존타크)이다. 프랑스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 시신 훼손 방치- <승정원일기> 1898년 10월12일자. 김홍륙의 교수형이 집행된 다음날(10월11일) 성난 군중들이 김홍륙의 시신을 종로 네거리까지 끌고가 갈기갈기 찢어놓는데도 법부(법무부)가 방치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손탁은 1885년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베베르와 함께 입국했다. 이때 베베르의 추천으로 1886년 왕실의 양식 조리사가 된다. 이후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아관파천 후(1898년 3월) 러시아 공사관 인근에 왕실 소유의 방 5개가 딸린 건물 1채를 하사받았다. 1902년에는 대한제국 궁내부가 국빈용으로 지은 2층짜리 영빈관의 운영을 맡았다. 그것이 손탁호텔이다.
호텔의 1층에 레스토랑 겸 커피숍이 들어섰다. 그러나 손탁호텔 커피숍 등에 드나들면서 커피를 마신 이들은 아무래도 주한 외국인들이 주류였던 것 같다. 1897년~99년 등장하는 독립신문의 커피광고는 모두 ‘영문으로’ 실려있다. 일례로 1896년 9월15일자 독립신문 영문판에는 독일인 알베르트 고르샬키(1856~1917)의 식품점에서 로스팅한 모카 및 자바 커피의 원두를 팔고 있다는 광고가 실려있다. 고르샬키는 1897년 3월20일 정동길에 베이커리 카페를 열고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최초의 베이커리 카페다.
▲ 연좌제 폐지와 사형제도 개혁- 부인까지 처벌한 것과, 교수형을 당한 죄인의 사체를 무참히 훼손한 것 등이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1894~95년 공포된 갑오개혁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옛 제도 중에는 연좌죄(죄인의 아내, 아들, 친족까지 연대 처벌)가 들어있었다. 또 정당한 재판을 받고, 사형도 감옥 안에서 교수형으로 집행하도록 한 규정도 마련해놓았다.
■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
주한 외국인과 왕실 등 일부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커피’가 대한제국 정국을 회오리 속으로 빠뜨린 사건의 주역이 된다.
고종 커피 독살 기도사건이다. <고종실록>, <매천야록>, <독립신문>, 주한일본공사관의 정보보고 등을 토대로 사건을 복기해보자. 1898년(광무2) 9월 11일 저녁이었다. 이따끔 양식을 즐겼던 고종은 식전에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 “옛 법을 부활하라”- 보수파들은 ‘고종 커피독살 기도사건’을 ‘옛 법 부활’의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김홍륙과 같은 대역죄인들은 연좌제와 노륙법(죄인의 스승, 부인, 아들까지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법) 등 옛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연일 상소문을 올렸다.
그날도 고종은 식전에 커피를 입에 갖다댔다. 그런데 맛이 좀 달랐다. 고종은 “커피맛이 늘 변하는 거냐”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두 세 모금 찔끔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황태자(순종)는 한 두 번에 걸쳐 커피 한 잔을 들이켰다.
곧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황태자가 토한 뒤 실신했고, 고종 역시 구토증세를 보였다. 시중을 들던 내시(7명), 궁녀(3명), 별입시(1명) 등 그날 커피를 맛본 이들이 모두 중독되었다. 경무청의 수사 결과 밝혀진 범인은 놀라운 인물이었다.
▲ 관민공동회 개최- 이 고종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의 판결을 계기로 1897년 10월29일 오후 4시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관하는 역사적인 관·민 공동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양 의정(내각 수반) 등 전현직관리들과 각 사회단제, 각급 학교학생, 맹인은 물론 백정들까지 총출동했다.
■ 범인 김홍륙은?
20여 일 전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김홍륙(?~1898)이었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으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러시아어를 배워 러시아 공사관 통역관이 된 인물이다.
아관파천(1896) 이후 조선-러시아의 밀월 시대에 출세가도를 달린다.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담당하며 고종의 입과 귀가 되었고, 정3품-종2품-정2품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 백정의 연설- 이날 관민공동회에서 발언기회를 얻은 백정 박성춘은 “내가 비록 신분은 가장 천하지만 충군애국하는 길은 알고 있다”면서 “관민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천민 출신이었던 탓에 일본 공사나 친일파는 물론 보수파와 개화파 인사들로부터 야유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않았다.
러시아 공사관-궁궐 사이를 오가며 러시아의 이권 획득과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러시아의 뜻을 거스르면 안된다”는 식으로 조선 조정 대신들은 물론 황제(고종)까지 압박했다.
▲ 헌의 6조 합의- 이날 열린 관민공동회에서는 국가의 자주권 표방, 국민의 참정권 보장은 물론 행정 일반의 근대화 등을 골자로 한 헌의 6조가 채택되었다. 특히 고종 커피 독살 기도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재판과 형률 관련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피고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아관파천 후 환궁(1897년 2월)과 대한제국 선포(10월 12일) 이후 한-러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다. 1898년 1월21일 러시아가 부산 절영도(영도)의 조차(일정 기간 빌려 씀)를 요구하며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독립협회 주도로 1만명 이상이 운집한 만민공동회(3월10일)가 러시아의 침략을 성토했다.
가뜩이나 십자포화를 받고 있던 김홍륙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러시아와의 통상 과정에서 거액을 착복한 혐의로 흑산도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고종실록> 1898년 8월23일)
▲ 고종의 입장- 그러나 고종은 불과 며칠만에 관민공동회가 합의한 헌의 6조를 번복했다. 그러면서 보수파의 극심한 반발을 받아들여 독립협회를 혁파했다. 고종은 그렇지만 보수파가 외친 ‘옛 법의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남편은 교수형, 부인은 유배형
김홍륙은 곱게 떠나지 않았다. 8월26일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평소 친한 사이였던 전선사(궁중 음식 담당 관청) 주사인 공홍식에게 아편 담배 한 냥을 건넸다.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넣으라”면서…. 그런 뒤 신문(서대문)을 나선 김홍륙은 부인(김조이·金召史)에게 “공홍식이 편지를 부탁하면 잘 전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유배지로 떠났다. 김조이(혹은 김소사)는 성만 있고 이름이 없는 여인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 커피의 최초 도입- 조선 천주교회 4대 교구장인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 프랑스 신부는 1856년 서울에 부임한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홍콩)에 “커피 좀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잇달아 보낸다. 그렇게 커피를 전달받은 배르뇌는 프랑스 신부들은 물론 같이 생활하던 조선인이나 신도들과도 커피를 함께 마셨을 가능성이 크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요즘 커피> 특별전 도록에서
공홍식은 9월11일 궁궐의 창고지기였다가 쫓겨난 김종화에게 아편담배를 넘겼다. “성공하면 은전 1000원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김종화는 아편 담배를 옷소매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주전자에 무사히 넣었다.
수사 및 재판 결과 고등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판결 의견을 고종에게 제시했다.
“김홍륙·공홍식·김종화 등은 교수형…(김홍륙의 부인인) 김조이 등은 무죄….”(10월10일)
그런데 법부대신인 신기선(1851~1909)은 “고등재판소의 판결을 따르지만 남편의 음모를 모를 리 없는 부인(김조이)에게 태형 100대와 징역 3년에 처해야 한다”(<고종실록> 1898년 10월10일)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고종은 “임산부(임신 5개월)인 김조이에게 그같은 처벌을 내릴 수 없다”면서 유배형(백령도)으로 최종 처결했다.
▲ ‘식후 커피=조선의 최신 유행’- 1883년 말 조선을 방문한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4년 1월 한강변에서 경기도 관찰사로부터 식사대접을 받고 당대 조선의 최신 유행인 ‘식사후 커피’를 마셨다고 전했다.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서
■ 갈기갈기 찢긴 시신
부인의 판결을 두고 근대적 사법기관인 고등재판소와 보수파 법부대신(신기선)의 견해 차이는 사소한 듯 보인다. 그러나 김홍륙 등이 교수형을 당한 다음날(10월11일)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법부가 이미 교수형에 처해진 김홍륙의 시신을 거리로 끌고 가도록 방치한 것이다. 분노한 군중은 김홍륙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김홍륙을 찍은 사진에는 ‘교수형이 집행된 시신은 종로 광장에 끌려나왔고, 군중 한 사람이 배를 가르자…운운’하는 설명이 붙어있다.
▲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 최초로 커피를 마신 조선인은 민건호(1843~1920)라는 자료가 발굴됐다. 부산 해관(세관) 서기였던 민건호는 1884년 7월27일자 일기에서 “청나라 사람인 당소의로부터 갑비차(커피차) 등을 대접받았다”고 기록했다. /부산박물관 소장·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유배형이지만 어쨌든 부인까지 처벌한 것과, 교수형을 당한 죄인의 사체를 무참히 훼손한 것 등이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보수파는 갑오개혁(1894~95)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후원 아래 추진된 개혁책이기 때문이었다.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옛 제도 중에는 연좌죄(죄인의 아내, 아들, 친족까지 연대 처벌)와 노륙법(죄인의 아내와 아들, 스승도 참형에 처함) 등이 있었다. 또 정당한 재판을 받고, 사형도 감옥 안에서 교수형으로 집행하도록 규정해놓았다.
▲ 궁중의 커피 경험- 궁궐에서 명성황후를 접견한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대접받은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이었다. 그 중에는 커피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애네 엘러스 벙커는“…궁중의 대기실에 도착하면 차와 커피와 과일 접대를 받은 뒤…왕비 마마에게로 인도되었다”고 기록했다.
■ 보수파의 반격
보수파는 갑오개혁 이후 개혁법의 시행을 밀어붙인 개화파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이 와중에 터진 ‘고종 커피독살 기도사건’을 기회로 삼았다. 보수파들은 “죄인들을 저잣거리에 끌어내 그 몸을 동강 내고 그 살을 씹어먹고 그 살갗을 깔고 자야 통분한 심정을 풀 수 있다”(<고종실록> 1898년 9월18일)고 아우성쳤다.
전 군수 최낙주는 “김홍륙은 마누라와 모의해서 변고를 일으켰으니…주모자와 추종자에 노륙법을 적용시켜야 한다”(<고종실록> 1898년 9월17일)고 주장했다.
이에 윤치호(1865~1945) 등 개화파는 “오히려 김홍륙의 시신을 끔찍하게 훼손하도록 방치한 수구파 대신들을 사납게 탄핵했다.
▲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 대한제국 왕실의 찬사(요리사)로 일한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과, 1909년 손탁의 뒤를 이은 엠마 크뢰벨 등 왕실의 잔치 의례를 맡은 서양여성들. 당시 고종은 손탁의 음식을 좋아해서 궁중 연회의 음식 일체를 맡겼다. /명지-LG한국학자료관소장
■ 백정까지 발언한 관민 공동회
마침내 1897년 10월28일부터 종로 사거리에서 역사적인 관·민 공동회가 열렸다. 특히 이튿날(29일) 오후 4시 열린 회의에는 박정양 의정(내각 수반)을 전·현직 정부 대신들이 참석했다.
황국협회 등 각종 사회단체는 물론 각 학교 학생과 맹인·승려는 물론 최하 천민인 백정(박성춘)까지도 참석했다. 실로 각계 각층의 백성들로 구성된 민회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발언기회를 얻은 백정 박성천의 언급이 심금을 울린다.
▲ 손탁호텔 커피숍- 손탁은 1898년 러시아공사관 정문 왼쪽에 건물 한 채를 받은 뒤 1902년에는 건물 맞은편에 황실이 마련한 영빈관의 운영까지 맡았다. 그 영빈관을 손탁호텔이라 했다. 손탁호텔의 1층은 레스토랑 겸 커피숍으로 운영됐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자료
“나는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관민이 합심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정교·1856~1925의 <대한계년사>)
이 자리에서는 국가의 자주권 표방, 국민의 참정권 보장은 물론 행정일반의 근대화 등을 골자로 한 ‘헌의 6조’가 채택되었다.
▲ 최초의 베이커리 카페- 1896년 9월15일 독일상인 알베르토 고르샬키가 서울 정동에 새롭게 로스팅한 모카 커피와 자바 커피를 팔고 있다는 광고가 실렸다. 고르샬키는 1년 뒤인 1897년 3월20일 정동에 베이커리 카페를 열었다.
그 중 고종 커피 독살 기도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재판과 형률 관련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중대 범죄의 경우 특별 공판을 진행하되 피고에게 철저하게 설명해서 마침내 자복한 경우 형을 시행한다’는 항목이었다.
헌의 6개조를 보고 받은 고종은 ‘중추원 설치’, ‘탐관오리 처단’, ‘민폐 처리’ 등 기타 항목까지 포함시켜 약속했다.
자그만치 126년 전에 민과 관이 협의해서 개혁에 합의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120년전의 믹스커피- 고종 커피독살기도 사건 이후 커피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후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커피를 파는 가게의 광고가 속속 등장한다.(위 사진) 120여년전의 믹스커피 광고.(아래 사진) 각설탕과 섞은 커피가루를 더운 물에 넣으면 설텅과 커피가루가 풀어져 달달한 커피가 된다.
■ 오락가락했지만…
물론 만장일치로 채택된 헌의6조는 불과 며칠 만에 번복되고 말았다. 보수파의 극심한 반발에 고종이 굴복한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의회 설립도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고종은 이후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다. 다시 20일도 지나지 않아 보수파 관리들을 처벌한다.
그러자 위정척사파의 마지막 보루인 최익현(1833~1906)은 12월10일 ‘옛 제도 복귀’를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최익현은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교수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 “사형의 경우도 사사(賜死·사약), 교수, 효수, 요참, 거열, 노륙 등 옛 법에 따라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익현을 비롯한 보수파의 몸부림은 도도한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고종이 끝내 보수 회귀의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개화파든, 보수파든 우국충정은 방법론상의 문제였지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따지고보면 개화파 인사 가운데 친일파로 돌아선 자들도 많고, 보수파(위정척사파) 중에서 의병장이 되거나 독립운동에 나선 분이 상당수이다.
▲ 밤의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리는 ‘밤의 석조전 행사’ 행사에서 가배(커피)를 즐기는 장면. 2024년 하반기 행사는 24일부터 11월2일까지 열린다. /국가유산진흥원 제공
■ 최초의 믹스커피
커피와 관련해서는 최익현의 마지막 상소 중 한 구절이 눈에 아른거린다. 최익현은 “외국에서 온 음식물과 다과 등은 절대 성상께 올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독살 사건의 매개가 된 커피 등을 마시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고종 독살 기도 사건을 계기로 커피가 인지도를 한껏 높였다. 황성신문 1900년 11월24~27일자에는 ‘청향관 가피차 파는 집’ 광고가 등장했다.
▲ ‘요즘 커피’- 11월10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요즘 커피’ 특별전. 외래 음료에서 민속 음료가 되기까지 한국의 커피 문화를 다루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황성신문 1901년 6월19~21일자에 각설탕 속에 커피가루를 넣은 가배당 광고가 나온다. 더운 물에 가배당을 넣으면 설탕과 함께 속에 들어있던 커피가 풀어진다. 영락없는 믹스커피이다.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지금 커피전문점 수가 10만개에 이르렀다. 그저 가볍게 버릇처럼 한 잔 씩 마시는 커피에 이렇듯 130년전 대한제국을 뒤흔든 격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참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에서도 ‘요즘 커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외래 음료에서 민속 음료가 되기까지 한국의 커피 문화를 다루고 있다. 시간나면 찾아가보기를 권한다.
(※ 이 기사를 위해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이길상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준우 국가유산진흥원 궁능사업실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 이길상, ‘고종 커피독살 기도사건의 역사적 의미’, <한국커피문화연구> 8권1호, 한국커피협회, 2022
□ 이완범, ‘커피의 한국유입과 한국인의 향유시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5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 강찬호, ‘문헌을 통해 본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 <관광연구> 제28권 3호, 대한관광경영학회, 2013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특별전 도록), 2019
□ 국립민속박물관, <요즘 커피>(특별전 도록), 2024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명상음악/ 홀로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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