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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불교설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도술 시합

잠용(潛蓉) 2013. 5. 9. 08:30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고 출병하여 왜구를 몰아내고 있는 서산대사와 그 승병들- 민족기록화)

◇ “허공에 거꾸로 매단 계란줄”
(서산과 사명대사의 도술시합)

 

서산대사(西山大師)는 1520년 (중종 15)에 나서 1604년 (선조 37)에 입적하셨다. 자(字)는 현응(玄應)이요, 호(號)는 청허자(淸虛子)로 휴정(休靜)은 법명이다. 속세에서의 성은 완산 최(崔)씨였다.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은 서산대사보다 23년 뒤 1544년 (중종 39)년에 나서 1610년 (광해군 2)에 입적했는데 호가 사명당(四溟堂) 일명 송운유정(松雲惟政)이며 자는 이환(離幻)이요, 속세의 성은 풍천 임(任)씨로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였다. 두 사람은 고승으로서 승병장으로 유명하지만 사제지간으로도 더욱 유명하여 많은 일화가 후세에 남아있다.

 

어느 날. 사명당이 스승인 서산대사와 도술을 겨루어보기 위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묘향산(妙香山)을 내려오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평안도를 거쳐 황해도와 경기도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강원도 금강산에 이르렀다.(→사명대사 영정) 

 

저번에는 자신의 수도장인 묘향산에 서산대사가 찾아왔을 때 선녀들이 날라다 준 밥을 먹는다고 자랑하며 자신의 도술을 은근히 발휘해 보려고 했는데, 그날 따라 선녀가 밥을 가져오지 않아서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망신만 샀는데 서산대사가 떠나면서, "내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밥을 먹게 될 것이네." 라고 해서 헛일 삼아 기다렸더니 아닌 게 아니라 선녀들이 밥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서 사명당에게 이르기를, "제 시간에 가져오려고 했지만 천상식관(天上食官)에게 늦어도 괜찮다는 서산대사의 말씀이 계셔서 이제 왔사옵니이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신의 도술이 서산대사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그 후부터 더욱 분발하여 도술 연마에 힘을 기울여 이제는 서산대사와 견주어 볼만큼 되었다는 자신만만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보다 스물 셋이나 아래였으므로, 그 기백이나 패기는 서산대사보다 앞섰지만 그래도 스승 만한 제자는 없는 법이라는 말처럼 도술에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게 뒤졌다. 그렇다고, 사명당이 결코 도술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인 서산대사보다는 못했다는 말이다. 사명당이 한참 도술을 걸어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닐 무렵 세상에는 심심치 않는 소문이 구구했다.

 

그 중에서도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기상천외한 도술에 있어서는 서산대사가 낫다, 사명당이 낫다느니 소문마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두 사람의 도술이 막상막하임을 실감케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산대사가 사명당보다 한 수 위라는 세론이 지배적이었다. 사명당은 자신이 서산대사만 못하다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더 좀 잘해야 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측근에 있는 여러 스님들로부터 서산대사보다는 오히려 사명당이 훨씬 나을 것이란 말이 들려오기도 해 사명당은 내심,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지...' 하면서도 서산대사의 그 신출귀몰하고 신비 속에 쌓인 비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터라 다소 위축감은 없지 않았다.

 

'나에게도 승산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 사명당은, '이번 기회야말로 서산대사와 한판 선의의 경쟁을 하여 천지조화를 부리는 서산대사를 천길 만길 궁지에 빠지게 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해 줘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설레는 가슴에 비록 축지법을 쓰기는 해도 비호처럼 질주하면서도 스승인 서산대사보다 더디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사명대사는 서산대사가 수도하고 있는 금강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했다. 우거진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며 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은 태고의 신비를 더해 주었다. 사명당이 험준한 계곡을 축지법이 아닌 보통 발걸음으로 오르고 있을 때 서산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를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돌리며 상좌승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지금 저 아래 계곡에는 묘향산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사명당이란 스님이 오고 있으니 네가 어서 내려가서 모셔 오너라.”고 했다. 느닷없는 큰스님의 분부에 아무런 영문을 모르는 상좌승은 깜짝 놀라며,

“사명대사께서 수도하시는 묘향산과 여기 장안사는 아주 먼 거리인데 아무 전갈도 없이 올 까닭이 있겠습니까요?”

 

상좌승의 이 같은 부정적 태도에 서산대사는, “압”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손바닥을 펴 보이며,

“보아라, 저기 오고 있지 않느냐?”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손바닥을 쳐다보는 순간 또 한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손바닥 안에는 사명당이 오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상좌승은 몸둘 바를 모르고 곧장 사명당을 마중하려고 발자국을 띨 무렵 서산대사는 다시 상좌승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계곡을 쭉 내려가다 보면 사명당이 물을 거꾸로 몰고 올 테니 시냇물은 반드시 역류할 것이고 그러면 바로 근처에 사명당이 올 게야.” 


상좌승은 서산대사의 예지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자신에 찬 소리여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좌승이 정신 없이 가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계곡의 맑은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물방울이 튀어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산모퉁이를 돌아설 무렵 사명당이 눈에 띄었다. 상좌승은 사명당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스님, 스님께서는 정녕 사명대사이신지요?”

 

사명당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서산대사가 마중을 보낸 상좌승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서산대사보다 한 수 뒤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마중을 나온 상좌승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그동안 서산대사의 안부를 묻고는 이어서 “도술을 하는 모습을 잘 봤느냐?”며 진짜로 궁굼한 사항을 물아보았다. 그러나, 상좌승은 자신으로서는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신출귀몰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어느덧, 장안사에 당도하여 법당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을 때 서산대사께서 법당의 돌계단을 막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사명당은 인사에 앞서 공중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붙잡아 주먹에 쥐고서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소승이 쥐고 있는 이 참새가 죽었을까요, 아니면 살아 있을까요?" 하고 첫 질문을 가볍게 던지자, 서산대사는 껄껄 웃으면서, "손 안 에 쥐고 있는 새이므로 그 새의 생사는 오직 그대 사명당에게 달려 있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죽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 새를 그대로 날려보낼 것이고, 살았다고 하면 손을 꼭 쥐어 살생도 불사할 테니 말이오."

(→서산대사 영정) 

 

서산대사의 이와 같은 혜안을 담은 말에 사명당은 주먹 안에 있던 새를 휙 하고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런데, 이젠 서산대사가 내려오던 돌계단을 다시 올라가 법당에서 향을 피워놓고 문턱을 넘어서면서 사명당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대사. 내가 지금 한 발은 법당 안에, 또 한발은 법당 밖에 두고 있는데 과연 어떡하겠오? 내가 밖으로 나갈 상이요? 아니면 법당 안으로 들어갈 상이요?" 하고 애매 모호한 질문을 던졌다. 이를테면 방금 사명당의 새에 관한 질문을 이용한 반격이었다.


사명대사가 생각하기를, “내가 밖으로 나올 거라고 말하면 틀림없이 안으로 들어 갈 것이고,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 밖으로 나올 거라.”고 예단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자. 서산대사가 사명당에게,

 

“대사 무얼하시오. 답을 내야 할게 아니요?" 하고 독촉하자 사명당은, 내가 멀리서 왔으니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하는 것보다는 나와서 손님대접을 할거란 생각에, “예, 대사님. 지금 법당 밖으로 나오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고 답을 했다.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서산대사가 혹시 “아니요, 나는 법당에 볼일이 있어 다시 들어 갈 겁니다.” 한다면 큰 낭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역시 스승답게,

 

“그렇소. 대사가 묘향산에서 예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손님대접을 하기 위해 내가 나가야지요.”

 

 하고는 돌계단을 내려왔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그 같은 넓은 마음씀에 고마운 생각을 가지면서 서산대사와 정중한 예를 나눈 뒤 자신이 묘향산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고하고 정식으로 도술을 겨루어 볼 것을 정중히 제의하였다.

 

서산대사 역시 풍문에 사명당의 도술이 비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터라 쾌히 승낙을 했다. 그리고 먼저 사명당의 도술을 펴 보라고 하자. 사명당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바랑에서 바늘이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 하나를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한참동안 무언응시(無言鷹視)를 하였다. 그러자 그릇에 담겨 있던 바늘이 모두 먹음직한 삶은 국수로 변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보란듯 국수를 먹으며 서산대사에게,

 

"사부님 시장하실 텐데, 좀 들어보시지요." 사명당의 언행은 좀 경솔한 데가 있었으나, 서산대사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사명당이 남겨놓은 국수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아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묘향산에서 이곳까지 국수를 가지고 오시다니 참으로 잘 먹었습니다. 모두가 사명대사의 덕이지요.”

 

이 말을 들은 사명당은 자신의 도술이 일단 성공적이라 생각하고 서산대사에게, “대사님, 바늘이 국수가 되었으니 속이 거북하지는 않으신지요?” 하자 듣고 있던 서산대사는, “글쎄요, 그러면 사명대사께서 이미 뱃속에 들어 있는 국수를 다시 바늘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지요?” 그러자. 사명당은, “이미 봄이 지나 가을이 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국수가 바늘로 다시 돌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 사명당의 이 같은 말은 바늘이 국수는 될 수 있어도 국수가 바늘로 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서산대사의 입에서는 아까 먹었던 국수가 반짝거리는 바늘로 변하여 그릇에 쌓이고 있었다. 당황한 사명당은, “이 시합에서는 소승이 졌습니다.” 라고 항복했다.

 

그러자 이번이야말로 견주어 볼만하다며 바랑에서 계란 백여 개를 꺼내더니 보통 사람은 하나도 세우지 못하는데 백여 개를 일직선으로 하나하나 위로 쌓아 올렸다. 그러다 보니 쌓아 올린 계란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수척(數尺)에 다달아 바람만 불어도 금새 허물어져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사명당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서산대사에게,

 

“자아, 이젠 대사님 차례입니다.” 하고 은근히 독촉을 했다. 보고만 있던 서산대사는 별일 아니란듯이 사명당과는 정반대로 허공에서부터 거꾸로 계란을 쌓아 내려오는게 아닌가? 계란을 다 쌓아 내려온 서산대사는 일직선으로 된 계란을 공중에 매단 상태에서 몇 차례 빙글빙글 돌린 다음 그것을 큰 지팡이로 만들어 사명당에게 건네주며, “대사, 여기 있습니다. 지팡이가 이제 낡은 것 같으니 이것을 짚고 다니시지요.”ㄴ 하고 사명당 앞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이에 초조해진 사명당은,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비장술(秘藏術)로 서산대사를 놀라게 해야지...” 하며, 마음을 굳게 다잡아먹은 사명당은 초조하고 당황한 마음에서 합장하여 다시 기분을 회생시키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리면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커먼 먹구름이 금방 장안사의 지붕 위를 덮어씌우며 어두워졌다. 그러자 “으앗”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허공에 거꾸로 짚은 채 동동 떠 있었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주문을 외자 천둥이 치기 시작하고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져 금방이라도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될듯한 기세였다. 사명당의 위세는 당당하다 못해 거의 광기(狂氣)마저 서린듯한 느낌을 주었다.


온 세상을 꿀꺽 삼켜버릴 듯한 사명당의 도술은 서산대사조차도 깜짝 놀라게 했다. 사명당이 도술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오자 모든 것은 평온해졌다. 아직도 이마에는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사명당에게 서산대사가 조용히 말했다. “참으로 대사는 듣던 대로 도술이 대단합니다.” 라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이만하면 감히 누가 내 도술을 따라올 수 있으랴”'하는 오만한 생각에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원, 대사님도 겨우 이런 걸 가지고 뭘 칭찬까지...” 하고는 겸손한 척했다.


이때. 서산대사는 자신의 차례임을 알자 아까 사명당이 합장한 모습 그대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참으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사명당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지만, 서산대사의 합장 모습엔 뭔가 불안한 점이 엿보였다. 서산대사가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는 곁에 있던 지팡이를 허공으로 ‘휙’ 집어던지자 사명당이 도술을 걸 때와 같이 이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둥 번개가 일기 시작하더니 폭우가 쏟아져 사방이 물바다가 될듯한 기세였다.

 

그러자 서산대사가 허공중에 꼿꼿이 선 채로 손으로 내리던 폭우를 다시 하늘로 올라가게 조화를 부렸다. 뿐만 아니라 계절을 자유자재로 조화시켜 한동안 꾀꼬리가 우는 푸른 봄을 만들기도 하였다가, 잠시 뒤에는 함박눈으로 온 천지를 흰 옷으로 갈아 입히고, 그 가운데 먹음직스런 감이 주렁주렁 열리게 하는 등 사명당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불가사의한 도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자, 사명당은 벌떡 일어나 서산대사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아서, “대사님, 진작 알아 뵙지 못한 미런함을 용서해 주십시요.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사님을 저의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우매했던 소승을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하자. 서산대사는 꿇어앉아 있는 사명당의 손을 부여잡고, “대사, 이러시면 안됩니다. 일어나시지요.” 하면서 사제지간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그 뒤로, 사명당은 어떤 경우에도 스승님 앞에서는 감히 ‘도’자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자신의 도술이 서산대사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인터넷)

 

◇ 왜왕(倭王)을 놀라게 한 사명대사의 신통력

 

조선 선조 때 유정(惟政, 사명대사의 호)이 수신사의 명목으로 일본에 건너가니, 왜인들은 미리 그의 도술을 시험하여 기를 꺾고자 하였다. 왜인들은 여러가지 시험을 하였는데, 그가 학문이 깊고 도술이 높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으므로 처음에는 그가 가는 길목에다 비단 병풍을 펼쳐놓고 거기에 왜인들이 멋대로 지은 선시(禪詩)를 적고 사명대사가  지나가는 길 좌우에 늘어 세워 놓았다. 사명대사는 그 앞을 지나가며 슬쩍 병풍에 쓴 글들을 훑어보고는 모두 기억해 두었다. 그 길로 관사에 들어가자마자 왜인들은 병풍에 쓰인 글에 대해서 물었다. 사명대사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조금 전에 지나치며 본 싯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외우니 왜인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놀랐다. 


이번에는 다시 철마(鐵馬)를 불에 달구어서 거기에 유정을 올라 타게 했으며 또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유정은 큰비가 내려 불더미를 감쪽같이 식혀버렸다. 그 다음에는 무쇠 풀무로 달군 화방 속에 앉혔는데 타 죽기는 고사하고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으며, 그 불구덩이 속이 온통 얼음으로 변해 있어 유정은 도리어 큰소리로 호통쳤다. 


“너희 섬나라에 나무가 많다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찬 방에서 사람을 욕보이는가?” 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간특한 왜인들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유정을 괴롭혔지만 유정은 모든 것을 도술로써 잘 막아내어 자신은 털끝만치도 상한 데가 없었다. 이에 왜왕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한 신하들은 크게 놀라 선인(仙人)이나 생불(生佛)이라고 우러러 받들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금으로 만든 가장 훌륭한 교자에 유정을 태워서 모시고 다녔는데 화장실에 갈 때도 그렇게 금교자에 모시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왜왕에게 두 나라가 길이 친화를 하기로 다짐받고,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 포로를 모두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떠날 때 남녀 동포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고역 속설(한글 본 임진록(壬辰錄)과 사한당(四漢堂)) 등의 책에 의하면 매년 소녀의 인피(人皮) 300매와 15~6세 소년의 고환(膏丸) 서말(3斗)을 조공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여 왜왕의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유정은 포악무도한 왜국에 가서 그들을 꼼작 못하게 억눌러 놓고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까지 3,000 명과 그 밖의 많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가 바다를 건너 동래부두에 이르렀을 때 동래부사 송상윤은 수신사가 유정(惟政)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가 승려임을 못마땅히 여겨 병을 핑계 삼아 마중하러 나오지 않았다. 유정이 도임할 때도 응당 부사로서 사신을 배웅하러 나왔어야 할 직책인데도 업신여기고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었다. 이에 유정이 알아보니 부사는 병을 앓는 것이 아니고 기생들을 대리고 주연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국가의 기일(忌日, 왕실릐 제삿날)이기도 하였다. 유정 대로하여 동래부사를 단칼에 베고 이 사실을 국왕께 상계하였다. (문화콘텐츠 닷컴)

 


(금강산 장안사의 웅장한 모습 1930년대)

 


(장안사의 옛터- 6.25 때 불타 지금은 주춧돌과 층계만 남아 있다)


김영동 대금독주 - 歸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