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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분단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1956) - 이해연 노래

잠용(潛蓉) 2013. 7. 22. 14:44

 




단장의 미아리고개’ (1956)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노래 이해연)

< 1 >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恨 많은 미아리 고개.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어를 하고 계세요?
어린 영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 2 >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恨 많은 미아리 고개.


(출처 : 가사집 http://gasazip.com/291069)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종전 직후인 1956년에 발표된 트로트 곡이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이며 노래는 이해연이 불렀다. 제목의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말한다. 노래의 제목인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 초기에 조선인민군과 우리 국군 사이에서 맹렬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후 9.28 수복으로 인민군이 서울에서 후퇴할 때 그들이 끌고간 사람들도 가족들은 이 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해야만 했다. 작사가 반야월은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 피난길에서 잃은 기슴아픈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미아리고개에서의 이별이라는 주제로 이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애닯은 사연을 담고 있다. 철사줄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쪽으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기다리는 부인은 남편이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는 너무도 가슴 아프고 슬픈 내용이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남편을 애타게 부르는 가수 이해연의 눈물어린 대사도 삽입되어 있다.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이 노래는 6.25 전쟁의 비극과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을 절실히 토로하여 전쟁의 고통을 겪은 온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결과 이해연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6.25 세대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이 노래가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미아리고개가 슬픔과 눈물과 한의 고개로만 각인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시 강북구청이 '미아동'이라는 동명을 바꾸려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현재 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정상에 위치한 소극장 아리랑 아트홀에 노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가수 이해연(李海燕 1926~ ?)

일제 강점기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난 가수 이해연(李海燕, 1926년~?)은 일제 강점기에 데뷔하여 196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1924년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났는데(1926년이라는 설도 있다) 학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41년 10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군국가요인 <백련 홍련>을 취입하며 데뷔하였다. 이해연은 당시 활동하던 다른 가수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데뷔했다. 그러나 데뷔 이후 <뗏목 2천리>, <소주 뱃사공>, <아리랑 풍년>, <황해도 노래> 등을 발표하며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란의 꽃> 등 군가요를 여러 곡 취입하였다.

 

신민요를 주로 불렀으며 해방 후 악극단 무대에서 활약했는데 1956년에 6.25전쟁의 비극적인 아픔을 그린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 일약 대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작곡가 박춘석과 같이 작업을 했으며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뒤 1960년대 초까지는 음반 취입하였으며 1984년 손인호와 함께 히트곡집을 발행하였으나 현재는 1950년 말 미국으로 이민간 이후 소식이 불분명한 상태이다.

 

이해연의 여동생 백일희는 1955년 <황혼의 엘레지>를 부른 가수이고, 남편 베니 김은 치과 의사 출신이며 1950년대 미 8군 무대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유명세를 떨쳤다. 자녀들은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연안 부두>를 불러 히트시키기도 하였다. 1979년에 발표한 <연안 부두>는 프로야구팀 응원가로도 많이 사용했으며 그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이 불리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해연의 대표곡으로는 <뗏목 2천리 1942><소주 뱃사공 1942> <황해도 노래 1943> <아리랑 풍년 1943> <단장의 미아리 고개 1956> <울어라 대동강 1957> <압록강 7백리 1960> 등이 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