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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망향가요] '타향살이' (1934) - 고복수 노래

잠용(潛蓉) 2013. 8. 1. 14:13


(이상희 유화 ‘고향 풍경’)
"他鄕살이 " (1934)
(原題는 他鄕)

金陵人 작사/ 孫牧人 작곡/ 노래 高福壽
(1934년 6월 이원애곡(高福壽고복수) / 타향 SP 오케레코드 발매)



< 1 >
他鄕살이 맺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故鄕 떠나 十餘年에
靑春만 늙~ 고.

< 2 >
浮萍 같은 내 身勢가
혼차도 氣막혀서
窓門 열고 바라보니
하날은 저~ 쪽.

< 3 >
故鄕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렷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 날.

< 4 >
他鄕이라 情이 들면
내 故鄕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他~ 鄕~



(가수 고복수 (1911~1972 경남 울산 출신)


(타향살이 - 고복수)


(고복수 타향살이 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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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떠난 우리 민족 설움 달래준 노래 


(1930년대 북간도로 건너간 조선 이주민들의 한많은 타향살이)


□ 일제에게 조국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한맺힌 설움을 달래주던 노래<타향살이>!
그 노래를 불러주던 고복수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40여년이 흘러갔지만 중국과 소련땅에서 지금도 살고있는 우리 교포들은 타향을 부르면서 아직도 고향땅을 몾잊고 그리고 있다. 1991년 KBS에서 인솔한 최희준, 방미, 현숙, 양수경 등의 <소련 교포 위문 공연단>이 알마타이에서 공연할 때 고복수의 아들 고영준이 아버지의 <타향살이>를 노래불렀다.


“타향이란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를 4절까지 노래하는 동안 교포 2세와 3세가 다같이 함께 따라 불러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민족의 가요가 된 <타향살이>는 1934년 작곡가 손목인의 작품으로 작사가인 금능인은 동요창작과 보급운동을 하던 인물로 본명은 승응순이다. 노래의 원래 제목은 <타향>이었지만 나중에 가사의 첫 구절인 <타향살이>가 제목으로 변해 굳어졌다. 히트곡이 된 "타향"은 국내보다는 중국과 만주지방으로 간 이민자들에게 더욱 많이 불러졌다. 기록에 의하면 1927년 만주지방으로 이민간 조선인이 100만명이 넘었으며 고향을 떠나 함경도 등 산악지대에서 화전민이 된 사람도 12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젖꿀이 흐르는 내 땅 버리고 남의 집 종사리 왠말이런가
해마다 봄 오면 고향간다고 십여년 벌어도 갈길이 아득
울어라 울어라 애원의 소리”
<1932년 농민: 내신세>





많은 조선인들은 가혹한 일제 식민지 수탈에 못이겨 자작겸 소작을 부치던 영농생활을 청산하고 조상대대로 지켜온 고향을 뒤로한채 너도나도 만주 벌판과 러시아로 떠나갔다. 나중에 돈 벌어서 먹을 만하면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조선 땅 고향을 찾아오리라 하면서 북으로 떠나 이 <타향> 노래를 부르면서 설움을 달래었다. [사진] 왼쪽부터 고복수, 남인수, 김정구


그래서 <타향>에는 민족의 설움이 서려 있고 한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담겨 있다. 1940년 만주 하얼빈의 극장공연에서 고복수가 <타향>을 부르자 객석에서 다같이 합창 하면서 눈물의 바다를 만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30대의 한 여인이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와서 자기를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편지 한통을 전하면서 전쟁에 남편을 여의고 부모형제를 만나고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한 여인의 자살사건이 보도되었다. 전날 찾아온 바로 그 여인이었다. 비보를 접한 고복수는 순진하고 순한 천성에 밤새도록 잠을 못하고 그 이후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차로 하룻밤 걸어서 또 오백리 만주라
그 곳은 우리님 계신다오.
빚에 팔려 시집간 우리 누님은
7년전 동짓달에 찬 눈물 흘렸다오”
<1935년 조선문학사:여인>

고복수의 대표곡은 민족의 한과 울분, 설움이 그 특징이다.


“구름따라 흐르는 몸
마음이 설워 낯설은 땅
찬 자리에 남모를 눈물”
<이원애곡 1절>



도라가리 말만하고 안간지 몇 해
가람가에 조각 달도 모래가 되고
그 옛날의 푸른 언덕 장미가지도
잎새조차 시드른지 이제 몇 해런가?”
<꿈 길 천리 2절>


◇ 최초 가수 선발에서 가수로 입문

1933년 부산에서 열린 콜럼비아 레코드 가수선발 경남 예선에서 1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934년 2월 서울에서 열린 결승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흰 고무신에 바지 저고리와 검정 두루마기 차림의 고복수는 유달리 큰 키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2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5원으로 구두와 양복 한 벌을 사입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취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이 스카웃하였고 그해 5월에 <타향>과 <이원애곡>으로 데뷔하면서 두 곡 모두 힛트하였다.


[사진] 오케 악극단 단원들(1939년)


경남 울산에서 큰 잡화상을 하던 여유있는 집 아들로 태어난 고복수는 어릴때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고,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학예회 마다 언제나 뽑혀나가서 창가를 불렀다. 외삼촌이 사 준 유성기(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부산에서 실업학교 재학 중에 부모 몰래 60원을 훔쳐서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1936년 말에 나온 <짝사랑>이 계속 힛트하여 1937년의 고복수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노래 가사 중에 으악새에 관하여 한동안 설왕설래 말이 있었다. 으악새라는 새는 없고 억새풀을 뜻한다는 설과 상징적인 새라는 설로 분분하였지만 가고 없는 작사자의 뜻을 알 수는 없다. 1939년 8월에 나온 음반 <피장파장> 이후의 고복수 노래는 보이지 않는데 미성의 가수 남인수, 김정구 등 신진가수 등장으로 음반 취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글/ 가요사랑방)



고복수(高福壽) - 타향살이 (A stranger),1934 (원창)


‘타향살이’ - 고복수 Live(1960)


[북한] 계몽기가요 '타향살이'(4절 전곡)와 '동무생각'(思友)


☞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전한 고복수의 타향살이
☞ 타향살이와 알뜰한 당신(고복수와 황금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