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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추억의 팝송] 'Country Roads' (1971) - John Denver 노래

잠용(潛蓉) 2013. 8. 1. 07:17




'Take Me Home, Country Roads' (1971)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요)
John Denver
 
Songwriter
William Thomas Danoff, Taffy Nivert Danoff, John Denver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Younger than the mountains
Blowin'(growin') like a breeze.
천국 같은 웨스트버지니아
블루릿지 산맥과 세난도어 강
거기의 삶은 나무보다 오래되었지만
산들보다 더 젊고, 
미풍같이 불어와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내가 살던 그 곳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맘마산으로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All my memories gathered 'round her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Misty taste of moonshine
Teardrops in my eye.
나의 모든 기억은 고향으로 다 모여요.
광부의 아내, 푸른 강을 찾아온 낯선 사람들
짙고 먼지낀 그림 같은 하늘
안개같은 달빛 분위기,
내 눈엔 눈물이 고여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내가 살던 그 곳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맘마산으로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I hear her voice
In the mornin' hour she calls me
The radio reminds me of my home far away
And drivin' down the road I get a feelin'
That I should have been home yesterday, yesterday.
이른 아침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요.
라디오는 나에게 머나먼 고향을 상기시켜 줘요
그리고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느낌이 들어요
나는 어제 이미 고향에 갔어야 해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2번)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내가 살던 그 곳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맘마산으로
시골길아,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Take me home, now country roads
Take me home, now country roads
시골길아, 지금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시골길아, 지금 날 고향으로 데려가 줘.
 
* moonshine: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밀주 이름.
(직역 잠용)

 

컨추리송 가수 존 덴버는 1975년 < Sunshine on My Shoulders > 등 No.1 히트곡을 계속해서 터뜨리며 절정기를 맞이했고 그의 노래는 테너 목소리와 감상적인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 거기에 매우 소박하고 순진한 가사가 특징이다. 고향은 언제나 포근한 마음의 안식처같은 그런 곳이니...



◇ John Denver (존 덴버 1943~1997) 

 

 

“Take Me Home Country Road”...
존 덴버의 1971년 히트곡으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던 노래다...

 

이 곡은 “Sunshine on My Shoulders”, “Annie's Song”과 함께 국내에서 꾸준히 애청되고 있는 팝 컨트리의 명곡이다.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Take Me Home Country Road)
"마치 천국과 같은 웨스트버지니아, 블루릿지 산, 셰난도우 강이여. 거기에는 전통적인 생활이 있어서, 나무들보다도 오래고, 신들보다도 젊고, 바람처럼 뻗어가네.

시골길이여, 나를 고향집에 데려다 주오. 시골길이여..."  

 

존 덴버(John Denver)는 70년∼80년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던 커츄리 포크송 가수이다. 특히 환경문제에 대해 갖고있던 지대한 관심을 자신의 음악활동과 접목시켜 아름답고 순수한 노랫말,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음악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단아하고도 대중적인 외모와 더불어 나이나 학벌, 배경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계층에 의해 폭넓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존 덴버는 영화배우 겸 환경운동가로서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덴버는 1943년 12월 뉴멕시코주 Roswell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존 헨리 도이첸도프(John Henry Deutschendorf)으로 공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덴버는 십대에 할머니로부터 1910년형 깁슨 어쿠스틱 기타(Gibson acousic guitar)를 선물로 받으면서 음악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텍사스 공과대학에 재학 중 각종 로컬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고 그가 평소에 사랑한 록키산 지역의 지명을 따 'Denver'라는 예명을 가졌다. 그의 노래중에는 'Rocky Mountain High'란 곡도 있으며 자연을 소재로 삼은 곡들이 많다.

 

1964년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LA로 이주하기 위해 학교를 중퇴한 후 채드 미첼 트리오(Chad Mitchell Trio)와 결합하여 그룹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트리오는 존 덴버의 가입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채드 미첼 트리오는 창설자인 채드 미첼의 탈퇴로 <덴버, 보이스 앤 존슨 Denver, Boise and Johnson>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잠시 활동을 하지만 이것도 핵심인 존 덴버가 솔로 활동을 위해 떠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1969년 존 덴버는 자신으로 인해 세인에게 더욱 알려질 수 있었던 이 그룹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솔로로 데뷔한다. 그의 데뷔앨범인 [Rhymes and Reason](1969)에는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수많은 가수들의 레퍼토리를 장식하게 되는 명곡 'Leaving on a Jet Plane'이 담겨있다. 불행히도 데뷔 앨범은 그가 기대한 것만큼의 성과를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곡 중 하나인 "Leaving on A Jet Plane"이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앨범이다. [Whose Garden Was This]와 [Take Me to Tomorrow] 등 후속 앨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71년 앨범 [Poems, Prayers and Promises]에 와서야 빅 히트곡 "Take Me Home, Country Roads"와 "Sunshine on My Shoulders" 등으로 슈퍼스타 자리에 오른다. 그를 더욱 확고한 싱어 송라이터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Annie's Song"과 "Back Home Again" 등의 연이은 히트곡들 때문이었다. 뒤이어 발표한 [I'd Rather Be A Cowboy](1973), [Sunshine on My Shoulder](1974)와 3백만장 이상의 놀라운 음반 판매를 기록한 [Anny's Song]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며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TV에도 단골로 출연했고 1977년엔 조지 번즈(George Burns)와 함께 히트 코미디 영화에도 출연했다.

 

'32세의 그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라고 <뉴스 위크>지가 1976년 공언한 대로 존 덴버는 전성기 시절 내내 '미국의 목소리'(The voice of America)로 통했다. 그의 청량제 같은 노래들과 수더분한 '촌스런' 외모는 곧 1970년대 중반의 '미국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미국은 존 덴버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했다. 1974년과 1975년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색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워싱턴 정가는 갈피를 못잡고 휘청거렸고 국론은 '고도의 민주주의 나라'라는 위상을 무색케 할만큼 완전 분열되었다. 미국인들은 허탈했고 피곤했으며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건강한 미국'을 얘기해 주고 공허한 그들의 마음을 위무해 주어야만 했다. 그가 가수라면 더욱 좋았고, 나아가 '쉽고 맑은' 노래를 들려준다면 더 좋았다. 이런 세태에 존 덴버는 딱 들어맞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명반 [Blood on The Tracks]를 내놓은 밥 딜런으로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을 달래 주기란 힘들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격동의 1960년대가 떠오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존 덴버는 우선 마음이 편했다. 그에게 근심거리란 없어 보였고, 다시 세상은 살만한 곳인 듯했다.

 

그 자신도 1970년대 중반의 상황이 자신을 수면 위로 부상시켜준 원천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븐틴>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여, 내가 세상이 왜 행복한 곳인가를 노래할 때 내게 그대의 귀를 주오”라고 말했다. “난 미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삶의 축복에 대해 노래한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노래부른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노래 제목만 들어도 즐거워했다. "Sunshine on my shoulder", "Take me home, country roads", "My sweet lady", "Thank god I'm a country boy" 등.. 참으로 낙천적이고 전원적이며 밝고 명랑했다. 이런 곡들은 모두 싱글 차트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차라리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I'd rather be a cowboy)"고 하고 "집에 다시 돌아온(Back home again)" 것을 찬양하고 산과 바다, 시골이 무대인 그의 노래가 거부감을 줄 리가 없었다. 그는 실제로 산을 사랑한 컨트리 보이였다. 산이 많은 도시 덴버의 이름을 따 개명까지 했다.

 

그는 또 27세의 나이에 유랑과 속세의 삶을 살다가 로키산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매년 시간을 내서 콜로라도의 전원에 있는 아스펜 집에 몇 주씩 묵곤 했다. 그는 '콜로라도의 정신'이었다. 그 결과 주지사 존 밴더후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계관시인'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닉슨과 포드 대통령 교체 이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가치를 대변했다.

 

해맑은 컨트리 음악을 들고 나온 그가 환영받은 것은 당시의 보수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정서를 견인한 주역이었기에 1974년과 1975년에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영국 로커 엘튼 존을 추월했다. 팝적인 컨트리 록은 강렬한 하드 록과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대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패망으로 시끄럽고 혼잡스런 서민들에게 이러한 음악들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존 덴버는 정반대의 '컨트리 팝'으로 록의 퇴각을 강제했다. 록 진영은 갑작스런 그의 인기 행진에 놀랐다. 록 비평가들이 볼 때 덴버 노래의 낙천적 분위기는 건강한 정서의 반영이 아니라 단순한 '도피적 심리'에 불과했다. 혼탁한 세상을 잊고 편하게 살자는 심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를 악평하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를 '팝음악의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일컫는가 하면 '록의 미키마우스'라고 내리깔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래가 대중들을 사로잡은 '어처구니 없는' 실상에 록 언론의 주도층은 궁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었다.

 

1974년 여름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Annie's song"만 해도 그렇다. 삶의 축복을 노래하는 그의 지향을 축약한 이 노래는  이후 수년간 결혼식 때 축가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4년 뒤에는 아일랜드 플루트 주자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시켰다. 널리 알려진 바와같이 이 곡은 그가 캠퍼스 커플로 1967년에 결혼한 아내 앤 마텔(Ann Martell)을 위해 쓴 곡이었다.

 

스키 리프트에서 10분만에 썼다는 이 곡은 노랫말 가운데 애니(앤의 애칭)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노래가 애송되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 곡은 <피플>지로부터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러브 발라드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 들어서 존 덴버는 이 축복의 찬가를 부를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영원할 것만 같던 아내 앤 마텔과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1979년에 궤도를 이탈했다.

 

잉꼬나 다름없던 둘은 덴버의 엄청난 성공에 불안과 위기를 느낀 앤이 남편과 '의사 소통이 중단됨을 느끼면서' 악화되었다. 이혼 수속을 밟은 두 사람은 마침내 1983년 갈라서고 말았다. 존은 이 무렵을 이렇게 회고한다. “애니와의 이혼은 내 생애 가장 뼈아픈 순간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16년간 부부였다.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는 조용히 앉아 '우리 잘 안되고 있어'라고 얘기했다. 난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난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다른 데 눈을 돌리는 게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혼을 맞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슬쩍 입장을 내비쳤다. “난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난 너무 바빠서 한 여인을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없다. 내 마음속의 마지막 일은 관계를 지속할 여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하여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성에 대해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당시 언론은 잉꼬 부부였던 존과 애니의 이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결같이 '아니 존 덴버가 이혼이라니...' 라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가 'Anny's Song'만 부르지 않았어도 충격은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쇼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 8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수 없다'는 말과 달리 호주 출신의 늘씬한 가수 겸 배우인 카산드라 델라니(Cassandra Delaney)와 재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28살인 델라니는 45세였던 존 덴버보다 무려 17살 연하였다. 그는 지난 1990년 한국을 찾아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진 바도 있다. 콘서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애니의 노래'의 주인공인 애니와 왜 헤어지게 되었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은 좋아질 때도 싫어질 때도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휴식도 없이 내리 10곡 이상을 부르는 등 놀라운 호흡량과  성량을 자랑한 내한 무대에서 그는 끝내 최고의 레퍼토리인 '애니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델라니와의 부부 생활도 순탄하진 못했다. 4년간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두 사람은 1992년 이혼 법정에 들어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 그는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환경운동가' 요 '마음씨 좋은 컨트리 보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구속된 것이었다. 199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델라니와 이혼을 확정짓고 난 뒤 축하하는 뜻에서 과음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50만 달러의 벌금과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라는 징계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그가 1976년에 설립한 윈드스타 파운데이션(Windstar Foundation)도 갈수록 재정이 악화돼 규모와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존의 고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 사건 1년 뒤인 1994년 8월 21일 자정, 다시 만취상태에서 1963년형 포르셰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날 사고도 델라니와 이혼 별거 수당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잘 안 풀려' 그만 홧김에 음주한 것 때문이었다. 존 덴버는 '캐시(카산드라)가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음주운전 사고 재범으로 그는 유죄판결이 날 경우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몰렸지만 명성에 힘입어 다행히 그같은 화는 면했다. 하지만 이는 '만능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제기를 불능으로 만드는 치명타 역할을 했다. 환경 운동에 나서고 기아 문제와 복지 부문, 그리고 반전 활동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모든 찬란한 순간들이 빛을 잃어가는 순간이었다.

 

1976년 이후 그가 인기 차트 톱 10에 랭크시킨 곡은 하나도 없었다. 1982년 이미 오페라 음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와의 크로스오버 듀엣곡인 "Perhaps Love"를 함께 부르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주류에서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의 테니스 헌트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난 요즘 젊은이들이 살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의 가수로서의 시대는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었고 4년 연속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시대도 거의 마침표를 찍었다. 대신 1980년대 이후 그는 가수로서보다는 환경운동가, 우주 탐험과 같은 쪽에 관심을 돌렸고,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연을 하는가 하면 1987년엔 원전 폭발사고가 있었던 체르노빌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음악을 통한 외교 대사로서 러시아와 중국을 두루 방문하게 된 그는 자선 활동이나 생태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음반활동이 저조해졌다. 이로 인해 몇몇 음악 비평가로부터 그의 음악이 너무 무미건조하고 유약하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세대와 계층, 국적을 막론하고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존 덴버는 지난 1997년 10월 12일 자신의 전용기로 태평양 상공을 비행하던 중 불의의 항공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전세계의 음악팬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글/ 공사모에서)



'Take me home, country roads'/ John Denver


John Denver - 'Take Me Home Country Roads'


John Denver - 'Take Me Home Country Roads'


John Denver - Take Me Home, Country Roads - Live (1972)

 John Denver guest-hosted 'Burt Sugarman's The Midnight Special'

and performed "Take Me Home, Country Roads"

 


John Denver - Country Roads (1995)


◇ John Denver's first live album, An Evening with John Denver (1975), was a lavish two-LP set accompanying a network TV special, released at his commercial peak. His second live album, The Wildlife Concert, is a lavish two-CD set accompanying a cable TV special and home video, released at his commercial trough. Denver performs most of his Top Ten hits from the '70s (but not "Thank God I'm a Country Boy," the big hit off the last live album), getting the bulk of them out of the way early on the first disc. He adds some well-chosen covers by folk peers such as David Mallett (the antiwar "You Say the Battle Is Over") and Tom Paxton ("Bet on the Blues"), selects some of his better, if less familiar, songs of the last decade ("The Harder They Fall," "Falling Out of Love"), and introduces new material touching on his favorite romantic ("Is It Love?") and political/ philosophical themes. With such a balanced set list, he manages to revitalize the best of his catalog, reassert his folk roots, and, to an extent, redefine him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