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 이석기 유죄 입증?..
국정원 "자신 있다" 법조계 "쉽지 않아"
국민일보 | 입력 2013.08.31 05:25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지하혁명조직(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비공개 모임에서 발언했다고 알려진 그 내용으로 '내란음모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 법조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의 발언내용 자체는 대단히 위험한 수준이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선 내란음모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녹취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정보원은 '녹취록 이외에도 다른 증거들이 많다'며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 발언의 맥락이 중요=
녹취록에 따르면 이 의원은 지난 5월 비공개 RO 모임에서 "전쟁을 준비하자. 정치·군사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이어진 소규모 그룹 논의에서는 '전쟁 시 통신과 유류 등 국가 기간시설을 우선적으로 타격한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나왔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런 발언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충분히 처벌 가능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내란음모죄를 적용할 경우 조금씩 해석이 달랐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30일 "내란죄가 형법상 가장 무거운 죄임을 감안한다면 비록 음모 단계라 하더라도 유죄 인정을 위해선 훨씬 더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녹취록 발언들이 나온 '맥락'을 살피는 일이다. 회합에 참여한 RO 구성원들의 관계, RO의 구성 목적, 5월 회합 이전의 다른 모임들에서 나온 발언 등 관련 사실들이 녹취록의 발언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한다. 즉, 녹취록이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증거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다른 증거들도 많이 수집해 둔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예컨대 녹취록에서는 평택에 있는 유류탱크 폭파와 관련된 대화가 등장한다.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은 "탱크가 니켈합금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두께가 90㎝에 이른다"며 "이미 조사를 해놨다"고 했다. 국정원은 RO가 녹취록의 말뿐 아니라 이들이 내란을 위한 실제 준비활동을 하는 등의 움직임을 지난 3년간의 내사를 통해 확보했을 수도 있다. 법원이 이 의원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것은 국정원이 RO의 내란음모 혐의를 입증할 꽤 많은 정보를 이미 수집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 실행 가능성이 입증돼야=
실행 가능성도 수사기관이 입증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RO가 얼마나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준비를 했는지, RO가 그런 계획을 이행할 만한 수준은 되는지 등을 밝혀야 한다. 검찰 관계자는 "오며가며 커피나 마시다 나라가 마음에 안 든다고 '뒤집어 버리자'고 했다고 내란음모를 적용할 수는 없다"며 "분노의 수준과는 분명히 구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음모가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과 그 이후 사회에 미칠 파괴력·영향력 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 관계자는 "이 부분은 이후 재판 과정에서 양형 판단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국정원 등이 보유한 증거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수집된 것인지도 중요하다. 이미 공개된 녹취록은 국정원이 법원으로부터 감청영장을 발부받아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정원이 지난 3년간 수집한 증거들이 모두 적법한지는 검증받아야 할 부분이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국정원이 핵심 증인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고 받은 일부 진술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 아마추어 같은 '엉성한' 압수수색=
국가정보원은 지난 28일부터 2박3일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을 집중 압수수색했다. 그러나 대치과정에서 압수수색 범위가 축소되고, 보좌관에게서 압수한 물품이 분실돼 압수수색 자체가 무효화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내란음모 혐의라는 초유의 공안사건에 걸맞지 않은 어설픈 압수수색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압수수색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국정원의 압수수색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차는 28일 오전 8시10분부터 29일 오전 0시45분까지였고, 이 의원 보좌관인 우위영 전 대변인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었다. 2차는 29일 오후 2시30분부터 30일 오전 2시30분까지 이 의원에 대한 신체 압수수색과 집무실 수색이다. 이후 3차는 다시 우 전 대변인의 주거지에 대한 추가 압수수색이었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30일 오전 7시쯤 수색을 종료하고 철수했다. 진보당 홍성규 대변인은 "국정원이 압수해간 물품은 모두 11종"이라며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간한 자료, 민주당이 작성한 '여론조사로 본 단일화 정부, 시사점 및 제언' 등 문건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가장 어이없는 일은 국정원 수사관들이 우 전 대변인의 휴대전화와 메모리카드를 분실한 것이다. 당초 국정원은 1차 압수수색에서 우 전 대변인의 메모리카드를 분실했다. 진보당 측은 3차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이 문제를 제기했고, 양측이 압수물품 목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휴대전화도 분실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처음에는 휴대전화를 압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압수수색 장면을 촬영한 영상물을 확인한 뒤 분실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당 측은 "증거조작 행위"라고 강력히 항의했고, 국정원은 우 전 대변인에게 압수한 물품을 전부 돌려줬다. 우 전 대변인을 10시간 이상 압수수색했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된 셈이다.
압수수색은 시작부터 꼬인 측면이 있다. 국정원은 첫날 이 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광범위하게 압수수색하려고 했지만 진보당의 육탄방어에 밀려 실패했다. 양측은 이 의원 신체와 집무실만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사무실 내 다른 보좌진들의 책상은 수색하지 못해 축소수색이라는 지적이 있다.
29일 오후 10시쯤 국정원이 이 의원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긴장이 고조됐고 오후 11시40분쯤에는 압수물품 목록을 놓고 충돌하면서 3시간 동안 수색이 중단됐다. 국정원은 2차 압수수색에서 이 의원과 직접 관련된 파일만 복사하는 방식으로 압수수색을 진행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국정원 측이 진보당 관계자들을 향해 "실컷 떠들어라" "당신들은 원래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자극해 압수수색이 더 어려웠다는 관측도 있다. 한편 국정원은 이날 오후 여의도 국회 인근 우 전 대변인 원룸에 대한 추가 압수수색을 벌였고 진보당 측은 "압수수색 종료를 선언해 놓고 다시 여성의 거주지를 포위한 것은 치졸한 복수"라고 비난했다. [정현수 엄기영 정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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