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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베트남 파병과 위문공연★2011.11.26.

잠용(潛蓉) 2014. 1. 11. 07:58


 

 

 ★사진으로 보는 베트남 파병과 위문공연★




의무·공병 부대에 이어 1965년부터는 전투 부대가 파병되기 시작한다. 채명신 소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맹호부대를 파병하면서 예하의 군수 지원 부대인 십자성부대와 함께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주민들에게 의료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백마부대(67년 2월).




백마1호 작전으로 노획한 베트콩 무기 전시(67년 2월).


독수리번개 69-2호 4단계 작전중인 맹호부대 장병들



1970년 전후 월남위문 공연 사진들


가수 윤복희(↓)




가수 이미자(↓)




미니스커트의 원조 윤복희님 답게 미끈하다.    
                   미국생활을 한 가수 윤복희님은 서울 깍쟁이 아가씨같고

이미자님은 시골순둥이 아까씨 같이 보인다.

오늘날 당시의 빛바랜 사진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수 박재란(밀짚모자 목장아가씨)(↓)



가수 현미(↓)



진짜 현미씨인가 의심이 든다.
요즘 간혹 TV에 나오시는 현미씨와 비교해 보시라.
그렇다고 혹여 모르는 분들은  쌀과 현미를 비교지 마시라.

1971년 미스코리아 월남 위문공연(↓)



당시의 우리나라 최고의 미인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손주, 손녀들을 보고 있을까.

가수 권혜경(산장의 여인)(↓)



코메디언 서영춘(↓)


고인이 되신 서영춘님....
저당시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 코메디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땅딸이 이기동(작고), 비실비실 배삼룡, 막둥이 구봉서,  ♪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곱뿌 없으면 ♬.....의 살살이 서영춘..... 진짜 웃겼지요

영화배우 최은희(↓)



코메디언 배삼룡과 박시명???(↓)


명예정훈대위로 베트남에서 위문 공연을 펼치기도 했던 나훈아는
이후 갑작스런 결혼 발표와 함께 가요계 은퇴 선언을 하는 등 문제가 커지면서
73년 극비리에 공군에 자원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오른쪽 가슴에 나훈아라는 예명 대신 최홍기라는 본명이 눈에 띈다
백마부대로부터 명예정훈대위로 임명돼 베트남에서 생활하던 모습. 
갑짜기 위문공연을 떠나느라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에도 불참해
MBC로부터 방송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고노이 섬에서 보초 근무 중인 남진의 모습.
가요계에서는 무서울 것 없는 당채 최고의 스타였지만
베트남에서는 마이크 대신 M-16 소총을 든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가수 남진 (↓)



모자를 빗껴쓰고 팔을 좀 올리고 지긋히 눈을 감으며 부르는 노래....
그 자세로 보아 아마도 "미워도 다시한번" 이 아닌가 싶다.
♬ 이 생명 다하도록....자쟈쟌~~..... 아~아 안뇽~~♪

가수 이한필(↓)



지금의 미니스커트와 많이 구별된다.
저때는 주로 원피스였는지....(↑)


위문공연시 빠질수 없는 고고춤 & 트위스트....(↓)
조국에서 온 공연단과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파월장병들....
♪ 빗빠빠 룰라... ♬...♩..... 앗싸~~~



35년 ~ 40여년 정도 지난 빛 바랜 사진 속에 지난날의 시대가 보이는 것 같다.
중딩때 군인이 되면 월남전에 한번 가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어쩌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가 무지하게 혼난 기억이 있다. 

고딩때 미군들이 완전 철수하는 바람에  월남 생각도 완죤히 철수해 버렸다.

하여튼 그시대를 이끈 파월장병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아~.... 또한 당시의 위문공연단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좌측이 조은돌

            사진속의 주인공은 연락바랍니다>

 <중앙이 조은돌 오른쪽 유희문 병장...파주가 고향이었는데 보고싶네요. 연락주세요>

 

 <조은돌 ↗>

 

1964년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한 미국은 다른 나라의 참전을 절실히 원했다. 그러나 NATO 회원국 등 믿었던 국가들 중 어느 나라도 응하지 않았다. 미국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됐다.


전통의 우방국들로부터 직접 개입요청을 거부당한 미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군만이 유일하고 지속적으로 동원 가능한 군대였다. 게다다 한국군은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고 반공사상이 투철했으며 무엇보다 비용이 쌌다.


한국 또한 참전을 절실히 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통한 안정 유지와 정통성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들어갈 재원 확보라는 경제적 이유도 한 몫 했다.


1964년 9월 의무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여명의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 2월 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가 장도에 오르고 뒤이어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전투부대를 파병해 73년 철수할 때까지 31만 여명이 참전했다. 8년여 동안 평균 주둔 인원은 5만명.


미국의 용병이라는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참전으로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1965년부터 1972년 까지 한국의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얻은 수익과 군인, 노동자들이 받은 인건비 등은 7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이 기간 한국은 또 베트남과의 무역으로 2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이 밖에 참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1억5000만달러의 차관과 한국 상품의 대미수출 확대를 약속 받았다.

남의 나라 전쟁에 남의 나라 젊은이들 대신 참전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피 흘린 대가였다.


사상 처음으로 우리 군대를 해외에 보내 한국전쟁 때 미국에 진 빚의 일부를 갚았다는 점과 국군의 현대화와 전력 증강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 등도 베트남 파병의 성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참전의 상처는 깊었고 후유증도 컸다. 5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1만6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에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할 수많은 한국인 2세 ‘라이따이한’들이 남았고 귀국한 군인들은 고엽제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 자료출처 : 주월한국군  

 


 

 

◈아름다운 황혼열차◈

카페지기 석양노을

 

출처 : 아름다운황혼열차(黃昏列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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