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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스크랩] 글과 그림으로 보는 부처님의 일생 풀 스토리

잠용(潛蓉) 2015. 1. 11. 17:15

 

 

부처님의 일생

 이 글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나타내는 석가모니 팔상성도와 다른 일화 및 그림을 종합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다소 긴 글에,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도 있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한 번 둘러본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難勝 -  

 

고타마는 성(姓)이고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성 뒤에 붙는 붓다라는 존칭은 "깨달은사람" 이란 뜻이다.

고타마 붓다는 그는 현재의 네팔지방에 본거지를 둔 석가족(釋迦族) 출신으로 존칭하여 샤카모니(釋迦牟尼)라고도 불렀다.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다.

붓다는 한자로 "불타(佛陀)" 로 음사(音寫)되었으며 이 명칭은 중국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어미(語尾)의 음이 탈락되어 다만 '불(佛)'이라고도 쓰여졌다.

불은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밖에도 붓다는 세존(世尊) 또는 여래(如來)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지는 카필라 성(城) 교외의 룸비니였다.

기원전 3세기에 처음으로 전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은 여기에 탑과 석주(石住)를 세워 그것을 기념했다.

이 석주는 흙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말에 발굴되었다.

불전(佛典)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에 얽힌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는 탄생 직후 '사방칠보(四方七步)를 걸었다'는 것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종교학적, 민속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따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슛도다나(淨飯)는 조그만 부족국가의 왕이었는데 이 왕의 형제 이름으로 추측컨대 농경 특히 쌀농사를 주로 하는 부족이었던 것 같다.

 

도솔래의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일찍 죽고 이모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비람강생

 

싯다르타는 19세에 아내를 맞아들여 아들인 라훌라를 낳았다.

 

야쇼다라비와 라훌라

 

왕실생활

 

그는 20세가 지났을 무렵부터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29세 때 출가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문유관

 

생노병사 思惟

 

어느 날 싯다르타는 궁전 밖으로 나와 맨 먼저 노인을 만났고 다음에는 병든 사람, 그 다음에는 죽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자신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끝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수행자(沙門)를 보고 자신도 출가 할 것을 결심했다.

이른바 '사문유관(四門游觀)'으로 불리는 이야기다.

 

유성출가

 

젊은 싯다르타는 한밤에 몰래 궁전을 빠져나와 머리를 깎고 남루한 가사를 걸친 수행자가 되었다.

그것은 왕자로서의 신분은 물론 그에 따르는 재산과 명예, 처자와 권속 그리고 일체의 세속적 생활양식을 버렸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사문이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마가다국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선인(仙人) 두 사람에게 진리를 물었다.

그 중 한사람인 알라라 칼라마는 '무소유처정 (無所有處定)'을 터득한 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인 웃다카 라마풋타는 '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을 터득한 선인이었다.

싯다르타는 얼마간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했지만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설산수도

 

그 뒤 그는 다른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삼림(森林)에 들어가 고행에 열중했다.

고행은 6년 동안 계속됐다. 숨을 완전히 멈추는 지식법(止息法)과 하루에 한툴의 쌀만 허용되는 단식 등 가혹한 고행을 계속해 죽음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행은 깨달음을 주지 못했다. 도리어 의식이 몽롱해져 환상에 시달렸다.

이리하여 싯다르타는 고행도 버렸다.

 

그는 가야의 삼림을 나와 네란자라 시냇물에서 몸을 씻고 마을의 소녀 수자타가 끓여준 우유죽을 먹은 뒤 원기를 회복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나무 아래 앉아서 깊은 명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正覺)을 얻었다.

이때부터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타마 붓다로 불리게 되었고 수행자 고타마가 앉았던 나무는 보리수(菩提樹; 깨달음)로 불렀으며 깨달음의 장소는 붓다가야로 불리게 됐다.

이곳에는 뒷날 기념탑이 세워져 불교도의 순례성지가 되었다.

 

고타마 붓다의 출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의 깨달음은 그 문제들을 가장 궁극적이며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법(法;진리)의 발견이며 또한 인생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데서 생기는 괴로움(苦)으로 부터의 해탈이라고 볼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얼마 동안 깨달음의 묘미를 즐기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법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은 워낙 그 내용이 깊고 묘한 까닭에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

경전은 이때 바라문교의 최고신인 브라흐만(梵天)이 설법할 것을 권청(勸請)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범천은 세 차례에 걸쳐 설법할 것을 권청하고 부처님은 이에 응해 설법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내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노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부처님이 설법의 결의를 나타내는 게송이거니와 여기서 범천권청이란 내심의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초전법륜

 

설법을 결심한 부처님은 먼저 일찍이 가르침을 받았던 두 사람의 선인(仙人)을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떠올린 것이 6년 동안 고행을 함께 했던 옛 친구들이었다.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붓다가야를 떠나 약 80km를 걸어서 친구들이 있는 당시의 수도 베나레스로 향했다. 이 여행중 부처님은 아지비카교의 수행자 우파카를 만나 무사독오(無師獨悟)를 설명했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반신반의의 얼굴로 떠나갔다.

 

 

 

5명의 옛 친구는 베나레스의 북쪽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에서 여전히 고행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부처님을 알아보고 고타마는 고행수도를 견디지 못한 타락자라며 경멸했다.

그러나 막상 부처님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친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맞아들이고 최초의 설법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설법이 끝나자 불제자가 되었다.

이른바 교단은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불교에서는'전법륜(轉法輪)'이라고 한다.

바퀴(輪)는 세계를 지배하는 제왕의 수레를 상징한다.

그리고 법륜(法輪)은 최고의 진리를 상징한다.

바퀴는 어디라도 굴러간다.

이런 바퀴를 굴린다는 것은 최고의 진리를 세계의 곳곳에 펼친다는 뜻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전법륜이라 하거니와 최초의 설법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초전법륜에 관해서는 <초전법륜경>이라는 경전도 있고 또 이 사실을 전하는 자료도 20종 이상된다. 이때의 설법 내용은 대부분이 중도(中道),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8가지의 올바른 길(八正道) 그리고 세 가지의 진리의 표상(三法印)등이었다.

초전법륜 이후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설법했다.

80세로 입멸하기까지 부처님의 교화순력(敎化巡歷)은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인도 일대에 미쳤으며 그 기간은 45년이나 되었다.

베나레스에서 부처님은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와 그의 친구 4명 그리고 또다른 젊은이 50명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베나레스에서 우루벨라로 향한 부처님은 다시 카사파 3형제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수행자 1천여 명을 개종시켜 제자로 만들었다.

 

빔비사라왕 귀의

 

 

부처님은 계속해서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로 가서 국왕 빔비사라의 귀의를 받았다.

왕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성밖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

빔비사라는 나중에 그의 아들 아자타사투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폐되었는데 아자타사투도 끝내는 불교신도가 되었다.

당시 왕사성에는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가 2백5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인물은 사리풋타(舍利弗)와 목갈라나(目建連)였다.

하루는 사리불이 초전법륜 때 귀의한 5비구의 한 사람인 아시바지트(馬勝)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당신은 어느 분의 제자이며 그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다.

마승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긴다(諸法從緣起)

여래는 그 원인을 설법한다(如來說是因)

또한 그러한 법의 인연이 다하는 것까지도 설법한다(彼法因緣盡)

위대한 사문은 이렇게 설법한다.(是大沙門說) "

 

'연기법송(緣起法頌)'으로 불리는 이 게송을 들은 사리불은 진리의 눈을 뜨게 됐다.

그는 즉시 친구 목건련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두 사람은 2백 50명의 동료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사리불은 나중에 지혜 제일, 목건련은 신통 제일의 제자로 존경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부처님보다 먼저 입적(入寂)했으나 그들이 교단에서 차지한 위치와 영향력은 대단했다.

 

마하카사파가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간소하고 고결한 생활 즉 어려움을 견디는 두타행(頭陀行)의 제일인자로 존경을 받았다.

대가섭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 경전을 결집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법회

 

왕사성에서 큰 명성을 얻은 부처님은 이어서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로 돌아와 석가족 사람들 5백여 명을 귀의시켰다.

배다른 동생 난다(難陀), 친아들 라훌라, 이발사였던 우파리(優波離), 사촌동생인 아난다(阿難) 등이 출가해서 부처님을 따랐다.

아난다는 이후 부처님이 입멸할 때까지 약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했다.

 

당시 마가다에 필적하는 대국은 코살라였다. 석가족도 원래는 이 코살라에 종속돼 있었다.

부처님은 이 코살라를 방문해 국왕인 파세나디를 교화시켰다.

왕은 부처님을 따르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코살라의 수도는 사밧티였다. 사밧티에는 수다타라는 장자가 있었다.

그는 자선사업을 많이하여 사람들로부터 '고독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給孤獨長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파세나디왕의 아들 제타태자로부터 광대한 땅읕 사들여 그것을 부처님께 기증했다

이것을 '제타숲'이라 부르는데 한역으로는 기타원(祇陀園), 줄여서 기원(祇園)이라 한다.

이른바 기원정사(祇園精舍)가 그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검이 그 유적을 발굴했는데 그때 실측한 바에 의하면 유적은 2만평이나 되었다. 5세기 초 이곳을 찾아온 중국의 법현(法顯)은 이곳의 탑과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7세기 전반 이곳을 찾은 현장(玄藏)은 이미 건물이 부서지고 초석만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은 평생을 쉬지 않고 유력(遊歷)하며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사위성의 기원정사였다. 특히 여름의 우기(雨期)에는 거의 이 두 곳 중 한곳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는 여성도 있었다. 경전에는 이모이자 양모(養母)인 마하파자파티, 아내였던 야쇼다라, 수닷타장자의 장남의 아내 수자타, 파세나디왕의 부인 마스리카(末利) 등이 열렬한 신자였는데 이중에는 여성출가자인 비구니가 된 여성도 있고 흑은 열렬한 재가신자로 부처님을 따른 사람도 있다고 기록돼 있다.

 

석가족 멸문

 

데바닷다의 음모

 

 

앙굴리마라 귀의 

 

 

부처님이 활약했던 지역은 대체로 붓다가야에서 왕사성, 쿠시나가라, 카필라바스투에 이르는 선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메나레스, 사위성, 코삼비에 이르는 범위였던 듯하다.

 

부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였다.

이 위대한 죽음(마하니르바나)을 기록한 텍스트는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역경전 등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를 종합해 재구성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왕사성을 나와 날란다를 거쳐 파탈리푸트라(오늘의 파트나)로 온다.

이곳에서 갠지스강을 건너 북상해서 베살리마을에 닿았다.

이곳은 상업도시로 번영하던 도시다. 이곳에서 우기를 보내고 최후의 설법을 실시한다.

 

"나는 주먹(師拳) 속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설법했다."

"자신을 등불(또는 섬)로 삼고 자신에게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다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여름안거가 끝나자 이런 술회도 한다.

"베살리는 아름답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 아난다여, 이것이 내가 베살리를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경전에는 악마가 나타나 부처님에게 입멸할 것을 권하자 3개월 뒤에 입멸할 뜻을 밝히는 대목도 있다. 아난다는 슬픔에 잠겨 악마에게 죽음을 유혹하지 말도록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남긴다.

"나는 이미 늙었다.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들을 남겨두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다.

나는 자신에 귀의하기로 했다. 비구들이여, 부지런하며 정신을 바로 하고 계율을 잘 지켜라.

올바른 사유(思惟)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라.

이처럼 법(法)과 율(律)에 의해 부지런히 노력하면 윤회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종말인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발길은 고향으로 향했다.

부처님은 사람의 아들이며, 사람은 죽을 때 역시 고향을 향하는 법이다.

부처님은 도중에 파바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를 가르친다.

그 춘다는 부처님께 '스카라맛다바'를 공양했다.

'스카라'는 산돼지고 맛다바는 부드럽다는 뜻이니까 '연한 돼지고기'였던 것 같다.

남방불교 승려들은 탁발 때 반드시 육식을 기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팔리어 해석대로 하면 부처님이 육식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정진요리 (精進料理)'라 하여 육식을 피하는 북방불교에서는 이를 '전단이(栴檀栮)'이라고 한역하고 있다.

전단나무에서 난 버섯이란 뜻이다. 어쨌거나 이 음식이 복통을 일으켜 부처님은 깊은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마도 이질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은 병을 앓으면서 무리하게 여행하여 쿠시나가라에 도착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마을 밖에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있었다.

부처님은 나무 그늘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웠다.

아난다가 몹시 슬퍼하자 부처님은 이렇게 훈계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일찍이 나는 모든 것이 덧없음을 가르쳤고 사랑하는 것과는 반드시 헤어져야 함을 가르치지 않았느냐." 부처님은 기력이 점점 떨어져갔다.

거의 사경에 이르렀을 무렵, 수바드라라는 외도수행자가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다.

 

아난다가 거절했지만 부처님은 이를 승락하고 그를 위해 설법했다.

"수바드라여, 나는 29세에 진리를 찾아 출가했다. 그 후 50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옳은 이치와 진리의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내가 설한 법은 능히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여래는 일체지(一切智)의 근원이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최후 제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밤이 길어지자 부처님은 독백처럼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쌍림열반

 

이 말씀을 끝으로 부처님은 입읕 다물고 눈을 감았다.

조용하고 편안한 입멸이었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은 통곡했으나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은 소리를 죽이며 참고 견디었다. 부처님의 열반은 인도 달력으로 카루치카의 달(태양력으로는 11월)의 보름날 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음력 2월 15일을 열반일로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에 따르고 있다.

 

 

 

부처님의 유신은 정중한 의식을 거쳐 화장되었다.

사람들은 사리를 수습해 집회당에 모셨다. 그때 마가다의 아자타사투왕을 비롯 8개국에서 사리를 모시고 싶다고 하여 결국 사리는 8개국에 나누어져 사리탑이 세워졌다.

 

1898년 카필라바스투의 옛 땅 가까이에 있는 피푸라바에서 프랑스의 고고학자 펫페가 고탑지(古塔址)를 발굴하면서 사리를 모셨던 항아리 1개를 발견했다. 그 사리용기의 표면에는 이런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석가족 출신 불세존(佛世尊)의 유골을 담은 그릇이다. 이 그릇은 명예로운 석가족의 형제와 자매, 처자들이 봉납한 것이다."

명문의 글자는 소위 아쇼카 문자로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출처 : 혼자 가는 길
글쓴이 : 難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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