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前 上白'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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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氣體候 一向萬康(기체후 일향만강)- 기력과 건강이 한결같이 평안하심 * 伏慕區區(복모구구)-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다 * 無任 下誠之至(무임 하성지지)-그리운 마음 지극해서 둘 곳이 없다 * 頓首再拜(돈수재배)-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 절하다
(이화자 노래)
(장세정 노래) 어머님前 上書 - 이화자
'어머님전 상서'에 얽힌 사연
① 집 떠난 어린 소녀, 밤마다 눈물로 부모님 그려 이화자는 화류춘몽의 노래를 불러서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가수로 출세를 했다. 그리고 이화자는 조선에서 최고의스타가 됐지만 그와 반대로 욕도 많이 먹는 가수였다. 그것은 이화자가 불렀던 화류춘몽의 노래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욕을 먹는 것이다.
(원곡-어머님前 上白)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이화자 노래
복무구구 무임하성 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B 어머님 어머님 이어린 딸자식은 어머님전에 피눈물로 먹을갈아 하소연합니다 전생에 무슨죄로 어머님 이별하고 꽃피는 아침이나 새우는 저녁에 가슴치며 탄식하나요 C 어머님 어머님 두손을 마주잡고 비옵나이다 남은세상 길이길이 누리시옵소서 언제나 어머님의 무릎을 부여안고 가슴에 맺힌한을 하소연하나요 돈수재배 하옵나이다
사실 <화류춘몽>은 이화자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을 한다면 그 노래를 작사한 사람이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 노래가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가사가 화류계 여성들을 배경으로 하여 노래가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깊이를 모르고 이화자가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그녀에게 화살을 퍼붓는 것이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노래를 이화자가 청승맞게 흐느끼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뜻에서 그녀를 비난한 것일 거다.
아무튼 전에도 밝혔듯 이화자의 화류춘몽이라는 노래가 전국 일대 아니 조선팔도에서 수많은 여인들을 울리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않나 생각이 된다. 특히 화류계 여성들은 더욱 이화자를 사랑하면서도 이화자를 미워했다. 이화자로 인하여 수많은 동료 화류계 여인들이 감상에 빠져 자살로서 소중한 목숨을 버렸기에서다. 그리고 이화자는 화류춘몽이란 노래뿐이 아니다. 그녀가 부른노래 중에서도 화류춘몽과 비슷한 노래가 또있다. 그것은 어머님 전상서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39년에서 1942년사이에OK레코드회사에서 발표된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이화자 노래이다. 이 노래 원제목은 어머님前上白이란 노래다. 처음에는 이렇게 노래 제목을 지었다. 그러다가 노래제목이 이해 하기가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어머님전상서로 고쳐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
이 노래도 많은 여인들을 울렸던 노래다. 이노래가 세상에 발표될 당시에 우리나라는 어떠했나 한번 살펴보자. 당시 우리조선은 일제로부터 필설로서는 다 쓸 수가 없는 숨막히는 그야말로 암혹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가 우리조선민족들을 갖은 수법으로 잔인하게 인권을 짓밟으며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등 그야말로 그들의 천하가 되여 우리조선사람들은 그들 앞에 숨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이들로부터 이처럼 당하는 우리조선민족들은 터지는 분노를 참으며 속앓이를 하면서 그들의 만행에 한숨만 쉬며 당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당하다보니 겉으로는 흥흥하면서도 속으로는 터지는 분노를 되새기며 민족들의 가슴에는 내품지 못하는 응어리들이 쌓일대로 싸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특히 대동아전쟁이 극도로 악화되자 이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우리조선민족들에게 거친 만행을 더욱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을 강제 끌어다가 전쟁터로 보내는가 하면 나이먹은 사람들까지도 강제로 끌어다가 전쟁터로 보내는 등 이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것 뿐이 아니였다. 이제 겨우 15세 전후가 되는 나이 어린 소녀들까지도 강제로 끌어다가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서 막사를 쳐놓고 어린소녀들을 그곳에 감금시켜놓고 일본군의 사기를 붇돋아준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막사에 들여보내 어린소녀들을 강제로 성폭행을 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이들의 만행은 차마 글로서는 다 쓸 수가 없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렇케 이들의 만행은 계속됐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나이 어린소녀들을 강제로 시집을 보내는 일들이 많았다. 여기서 재수가 좋은 사람은 이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반대로 공장으로 끌려간 소녀들은 다행이였다. 그 당시에 우리조선에는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각지역에다 공장을 지어놓고 나이어린소녀들을 끌어다가 그들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시키고 작은 보수라도 주었다. 그러다보니 가정이 가난하고 먹고살기가 어려운 집에서는 소녀들을 공장에 보내는 예가 많았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공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착한소녀들은 공장에 취직을 하여 작은 보수지만 알뜰이 모아 가정으로 송금하여 가정생활에 보태 쓰는 소녀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녀들이 늘어나자 전국 각처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공장을 찾아서 취직을 하러 가정을 떠나는 소녀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공장이라고 하는 업종은 고무공장을 비롯하여 광목지금의 면직물을 짜는 공장 등 여러종류의 생활필수품들을 만드는 공장들이 전국 각처에 생기면서 어린소녀들과 가정주부들도 일거리가 많이 생기면서 취업의길이 열렸다. 그러나 우리조선사람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질 못했다. 그들 일본인들이 받는 한 달 급여가예를 들어서 30원이면 우리조선사람이 받는 급여는 15원 전후가 된다. 이렇케까지 그들로부터 유린을 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 공장에서 일을 해야 먹고 살겠기에 할 수 없이 참고견디며 힘든 일을 해야했다.
이렇게 살자니 얼마나 고생스러우며 또 얼마나 괴로운 삶인가. 그리고 시골에서 공장에 취직을 한 소녀들은 공장에 기숙사에서 먹고자고하면서 일을 해야만 됐다. 그래서 기숙사에 입사하면 외부와는 완전이 차단이 되며 또한 개인행동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자유라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한다. 그러니 한참 뛰여놀 나이의 소녀들은 답답함은 말할 수도없으며 자유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고향생각 부모님생각은 한시도 머리속에서 떠날 날이 없다.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밤이면 밤마다 그리운 것이 고향이요, 보고 싶은 이가 부모님이다.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면서도 꾹 참고 돈버는 데만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잠시 뿐 부모님 생각은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는 것 또한 어린 그들이었다. 이러한 나이 어린 이들의 삶을 작사가가 빼놓치 않고 잘 묘사한 노래가 바로 '어머님 전상서'다. 이들 공원은 일과가 끝나면 시골집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머나먼 타향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 갈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다.
설사 시간이 있다고 해도 교통비가 만만치 않으며 또한 교통편도 그리 쉽질 않았다. 당시에 교통편이라고 해야 유일한 것이 기차인데 그 기차는 석탄으로 불을 때어 수증기로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처럼 디젤이나 전철이 아니다 보니 기차를 한 번 타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며 교통비로 한 달 봉급이 거의 다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고향에 가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다. 그것 뿐이랴. 고향에 가려면 부모님 선물이며 가족들 선물 또는 가까운 친척 그리고 가까운 이웃들의 선물만 산다고 해도 월급의 몇 배가 든다. 그러니 고향에 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는 것이 그 당시의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일이 끝난 밤에는 피곤하더라도 꼭 부모님께 편지를 쓰게 된다.
편지의 내용은 '어머님 전상서' 노래 가사가 말해주듯이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나이까 복무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일절에서는 어머님이 보내온 편지의 내용이다. 이 편지를 받은 소녀는 어머님이 보고 싶은 그리움에 하염없이 울었음을 표현한 가사이며, 그 소녀의 부모님을 그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말함이다. 이러한 노래를 이화자가 불렀으니 그 노래는 알 만하다. 그리고 이화자의 떨리는 목소리와 흐느끼듯 호소가 담긴 비음은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 그것 뿐이 아니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에 비음을 섞어서 꺾어 넘기는 이화자의 그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이러한 노래가 나오자 조선팔도 어느 곳이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또한 이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치 이 노래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니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노래가 알려지자 모든 직장생활을 하는 소녀들은 이 노래를 듣고 밤새껏 울지 않은 소녀가 없었으며, 또한 고향생각 부모생각에 밤새껏 울다가 잠이 드는 예도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참 꽃봉오리처럼 몽우리져 피어나는 사춘기에 부모님을 이별하고 머나먼 낯선 타향에서 공장생활에 자유롭지 못한 소녀들의 심정은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 그것뿐이었다.
그러한 외로운 처지에 놓인 이들 소녀들은 공장에서 일과만 끝나면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에 외롭고 괴로움으로 밤을 지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이들만이 느끼는 생활이며 안타까움이다. 당시에는 우리네 생활이 너무나 가난한데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침략하여 그들은 약소 민족인 우리조선인들을 저희들 노예인양 마구 괴롭히며 농사 지은 곡물까지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빼앗는가 하면 토지까지도 빼앗는 못된 짓을 하며 우리민족을 괴롭혔다. 이러다 보니 우리 민족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하며 죽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들에서 솟는 쑥과 자우녕풀을 뜯어다 삶아서 무쳐 먹는가 하면 산에 올라가 취나물 또는 약초를 뜯어다 먹곤 했다. 그나마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메밀가루 밀가루 등과 옥수수를 갈아서 그 가루를 나물에 무쳐 버무려서 삶아서 먹는 등 했다. 이것도 당시에 부유하다는 집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렇게 먹고 살다 보니 사람의 몰골은 꼴이 아니었다. 얼굴은 누렇게 뜨고 황달에 걸려서 치료도 제대로 받질 못하고 민간요법으로 인진쑥을 다려 먹는가 하면 우렁이껍질을 갈아서 분말로 하여 먹는 등 치료를 해보지만 영양실조로 인하여 황달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병이 나을리가 있으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열심히 치료를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조선팔도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그러나 한번 병에 걸린 환자들이 치유하지 못하고 세상만을 원망하며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갔다. 이렇게까지 병을 고치려고 노력을 해도 잘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마에 시달리다 보니 영양부족으로 끝내는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무척 늘어났다.
그것 뿐이 아니다. '장티프스'라는 병까지 돌아 인명피해는 더 컸다. 이러한 사실들이 꼬리에꼬리를 물고 전국 일대로 퍼지자 공장에서 일을 하는 소녀들은 집안 걱정에 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보니 더욱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이 이들어린 소녀에게 크나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 소녀들은 가까운 상점에 가 편지지를 사다가 고향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소녀들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에 편지지는 세로줄이 그어진 것이 있으며, 또한 가로줄이 그어진 편지지가 있었다. 세로줄이 그어진 편지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고 그리고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글을 썼으며, 세로줄이 그어진 것은 글쓰는 것이 서투른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다.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③ '까막눈'소녀는 대필 편지로 하소연 적어보내 그 당시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귀했다. 특히 여자들은 학교를 안 보냈던 시절이다. 여자가 많이 배워서 무엇에 쓰느냐는 고정관념에서다. 다시 말한다면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되지 공부는 해서 어디에 쓰느냐는 고정관념에서 아들은 학교에 보내도 딸자식은 학교를 안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러다보니 소녀들은 한글을 몰라 편지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대신 편지를 써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향에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편지를 쓰는 공식문장이 있었다. 공식문장이 쓰여져 있는 편지쓰기란 제목의 책자가 문방구에서 판매를 했다.
그 책 속에 들어있는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어머님전상서'라는 문장도 그 책에 실려있는 문장이며 '기체후일향만강하옵나이까'도 그 책 속에 실린 문장이다. 이렇듯 한자로까지 유식한 문장을 서민들은 잘 이용하여 편지를 쓰는 데 사용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글을 못 배운 사람들은 편지도 못 쓰다 보니 배운사람에게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을 하여 부모님께 편지를 보낸다. 이렇게 해서 일단은 부모님께 본인의 안부도 전하고 또한 부모님께도 안녕하심을 묻고 자식의 걱정은 하지 말라는 부탁도 드린다.
그러나 자기가 편지를 쓸 줄을 모르다 보니 남의 손으로 쓴 대필은 항상 미흡함을 느낀다. 그래서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 못하여 안타까울 때도 많다. 그러나 자기가 글을 못 배웠으니 그 답답함은 글로서도 다 쓸 수가 없다. 그 원인은 가난해서도 있지만 아들을 선호하며 딸자식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적으로 무시하던 시대다 보니 같은 자식으로서 태어났어도 자식으로 대접받는 데는 인색했던 시대였다 할까, 아무튼 아들은 가르쳐도 딸자식은 배워서 무엇하느냐고 하면서 시집가서 자식 잘 낳고 잘 살면 된다는 그 시대였다.
그러나 정작 아들들은 공부를 많이 했어도 취직을 못하고 건달생활을 하는, 가정에도 도움이 안되는 실업자 생활을 하며 술이나 먹고 술주정을 하여 동네사람으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받으며 욕을 먹는가 하면 자기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도 철학은 있었다. 그 원인은 일제로부터 억압된 세상을 살자하니 그럴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한 잔 술에 한을 풀고 두 잔 술에 울어보는 그들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살기가 너무 안타까워 술로서 마음을 달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한 시대에 딸들은 일제가 운영하는 각종 공장에 취업을 하여 다소 얼마라도 벌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돈을 보내는 착한 딸들이 많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술로서 세상을 한탄하며 술로서 세상을 사는 아들보다는 공부를 안 가르치고 푸대접을 했던 그 딸자식이 오히려 부모님께 효도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지. 그나마 이러한 사람들은 복받은 소녀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대의 위안부로 꽃다운 젊음을 모질게도 짓밟힌 소녀들은 어떠했는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들이다.
그들은 우리 조선의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아 말하기도 안타까운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옴을 또 한번 느낀다. 이러한 만행을 인간으로서 정말 해도 되는 건지 그들에게 묻고싶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그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어찌 같은 인간이면서 인간을 처참하게 짓밟고 잔인한 학살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이렇게 우리 조선민족을 짓밟고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도 지금도 뉘우침은 커녕 독도가 그들의 땅이라고 생떼를 쓰니 이것이 그들의 올바른 양심인지 아니면 우리영토를 과거와 같이 통채로 빼앗자는 것인지 일본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민족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과거에 당했던 맺힌 한을 지금껏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말이다. 어머님 전상서라는 노래도 일제의 만행 때문에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어다 그들의 장병들에게 위안부로 어린 소녀들을 짓밟아 놓고 또는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강제로 끌어다가 일을 시켜먹고 노임도 제대로 주지않는 등 노동임금마저 착취하며 자유를 구속하고 공장밖에도 나갈 수 없는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시키며 인권을 유린하는 그들의 만행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 어떻게 그들을 이해해야 되는가?
우리는 이들을 다시 한번 깊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다. 이렇게 어린 소녀들이 부모 밑에서 재롱을 부리며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아름답게 성장해야 할 꽃 봉리같은 아름다운 소녀들을 끌어다가 이처럼 한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 어린소녀들은 부모가 그리웁고 그리워도 집에조차 갈 수 없는 처지다보니 밤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타도록 안타까운 밤을 지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끝>
[글] 김명환 -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2007.05.04) -------------------------------------- ◆ 이화자 [李花子] 1917∼1949. 민요가수. 인천 출생. 가요작곡가 김용환(金龍煥)에게 발굴되어 1936년 폴리도르레코드사에서 신민요풍의 노래 〈초립동 草笠童〉과 〈에헤라 노아라〉 두 곡을 녹음하였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민요가수 왕수복(王壽福)·선우 일선(鮮于一扇)을 능가하는 민요가수로 주목을 끌었다. 계속해서 〈왜그렁타령〉·〈남원의 봄빛〉·〈아무랑에 고소해〉·〈참말 딱해요〉·〈천리몽 千里夢〉 등을 음반으로 출반하여 그의 인기가 날로 높아갔다.
193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거액을 내놓아 전속시키고, 박시춘(朴是春) 작곡인 〈어머님전상서〉·〈목단강편지〉 등이 새로 나와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 뒤 김용환 작곡의 〈꼴망태 목동〉·〈님전화풀이〉또한 인기곡이 되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1940년까지 수많은 민요풍의 노래를 녹음하였으며, 대개가 박시춘·김용환의 작품들로 〈화류춘몽〉·〈물방아〉·〈허송세월〉·〈초가삼간〉·〈삽살개타령〉·〈신 오돌독〉·〈신 노들강변〉·〈겁장이 촌처녀〉·〈노래가락 범벅타령〉 등이었다. 1941년부터는 오케레코드사 전속단체인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무대공연의 인기가수로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복 이후 지방순회공연단체의 일원으로 객지생활을 하였고, 일가친척이 없이 쓸쓸히 지냈다. ≪참고문헌≫ 歌謠 60年史(黃文平, 全曲社,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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