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남으로 오라고?...
박 대통령의 허망한 북한 붕괴론
한겨레 | 입력 2016.10.19. 05:06
[한겨레] 정치BAR-‘오래된 농담’ 반복하는 박근혜 정부
2014년 6월 개봉한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김정은의 북한은 얼마나 갈 거 같아요?”
“…”
대학교수인 박아무개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남자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국제정치학자인 중국 베이징대학 최현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는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빙그레 웃기만 하던 최 교수가 한마디 한다.
“100년.”
기분 좋게 대취한 상태이던 박 교수가 버럭 화를 낸다. “지방대 교수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요? 사람이 진지하게 물으면 진지하게 답을 해야지, 농으로 받아넘기다니….”
최 교수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답한다.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100년.”
장률이 누구인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오랜 세월 서로 돕고 갈등해온 재중동포와 북한 인민의 신산한 삶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 <두만강>의 감독이다. 최 교수의 ‘100년’이 재중동포 3세이자 소설가 겸 교수였던 장률 감독의 ‘판단’이라면, 박 교수의 “김정은의 북한은 얼마나 갈 거 같아요?”는, 한국 사회에 미만한 ‘북한붕괴론’의 어두운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최 교수와 박 교수의 대화를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북한붕괴론에 대한 장률식 풍자로 읽어도 무방할 터.
◆ 고장난 턴테이블처럼 반복되는…
이태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한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북녘 동포를 향해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 박 대통령은 13일 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 초청 통일대화에서는 “북한 주민의 탈북이 급증하고 있고, 엘리트층과 군대마저 북한의 현실에 절망해 이탈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북한 주민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꿈을 자유롭게 실현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열어놓고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잘해줄 테니 남으로 오라’는 ‘선동’의 빈도와 강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1991년 12월 ‘상호 체제 인정·존중, 내정불간섭’ 등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역대 한국 정부의 대통령 5명(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가운데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발 상황에도 체계적으로 대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국군의 날 기념사)라고도 지시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북한 급변사태’와 ‘남으로 오라’를 한꺼번에 입에 올린 것도 전례가 없다. 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엔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이 착종된 괴물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는 헌법 규정(66조 3항) 위반이다. 무엇보다 ‘탈북 급증’이라는 박 대통령의 진단은, 사실과 다르다. 통일부가 발표한 최신 통계인 지난 1~8월 입국 북한이탈주민은 894명이다. 역대 최대 규모 탈북민이 들어온 2009년의 2914명에 비할 바가 아니고, 박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13년(1514명)보다도 입국 추세가 더디다. 박 대통령의 북한 인식이 ‘사실’이 아닌 ‘북한붕괴론’적 사고에 결박돼 있다는 방증이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북한의 4차 핵실험(1월6일) 이전에도 이런 인식을 자주 드러냈다. “통일은 대박이다”(2014년 1월6일 새해 기자회견)→“내년이라도 통일이 될지 모르니 준비를 잘하라”(2015년 7월10일 통일준비위원회) 따위가 그렇다. 4차 핵실험 이후 ‘막연한 기대’에서 ‘공격적 행동’으로 중심이 옮아갔다. “저와 정부는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켜서…”(2월16일 국회 국정연설)라는 언급이 대표적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지금 대화하는 것은 북한에 시간벌기만 되는 것”(9월12일 여야 대표 청와대 회동)이라거나 “대화에 매달리는 것은 국민들을 위험에 방치하는 것”(10월11일 국무회의)이라며, 대화·협상을 불온시한다. 이 또한 헌법에 적시된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 위반이다.
◆ 김일성 사망에서 시작된 북한 자연붕괴론
북한붕괴론은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역사가 길다. 첫 출현은 자못 심각했다. 1994년 7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원한 수령’ 김일성 주석이 심장마비로 숨을 멈춘 직후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북한을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하며, “북한은 붕괴에 직면해 있다”고 장담했다. “빠르면 사흘, 길어도 3년” 안에, ‘고장난 비행기’가 추락하리라는 기대 섞인 ‘예언’이 김영삼 정부 고위 관료들의 입에서 무시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북한은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김영삼 정부 시기는 남북관계에서 “공백의 5년”으로 기록됐다.
이에 앞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사이 실존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체제 전환 탓에 북한붕괴론이 한국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으나 널리 퍼지진 않았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북한과 오랜 협상 끝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상호 체제 인정·존중(1조), 내정 불간섭(2조), 비방·중상 금지(3조), 파괴·전복 활동 금지(4조)’ 등을 약속해서다. ‘붕괴’가 아닌 ‘공존’의 길이다. 노태우 정부 5년간 남북 당국회담이 164차례 열렸는데, 이는 역대 정부 가운데 노무현 정부(169회)를 빼고는 가장 많다. 보수 정부라고 다 북한붕괴론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두번째 붕괴론이 출현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화해협력과 공존을 도모해서다.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렸다. 동부전선에선 금강산(관광), 서부전선에선 개성(공단)이 ‘평화의 회랑’을 만들었다. 두번째 붕괴론도 ‘죽음’과 함께 출현했다.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숨을 멈춘 직후다. 온갖 ‘예언’이 난무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 위원장의 죽음 이전부터 붕괴론을 부추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2월 말레이시아 동포 간담회에서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천안함 침몰(2010년 3월26일)과 북의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23일),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 제재 조처(2010년 5월24일) 등으로 남북관계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다.
◆ 김정일 사망, 장성택 처형 때도…
김정은의 불안한 리더십도 일조
그때도 북한은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2011년 이후 북한 경제는 지금껏 한 차례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지 않았다(한국은행). 5·24 조처 이듬해인 2011년 북-중 무역이 전년 대비 162%로 급증했다(중국 해관). ‘풍선효과’다. 상황이 이런데도 당시 이 대통령은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2012년 9월25일 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 초청 다과회)며, 북한 붕괴의 미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13년 겨울, 세번째 붕괴론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그해 12월12일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이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고모부인 ‘2인자’ 장성택의 처형·죽음이 불쏘시개로 쓰였다. 남재준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그해 12월21일 국정원 송년회에서 “2015년에는 자유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통일대박론’(2014년 1월6일 새해 기자회견)을 들고나왔다. 그 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김영삼·이명박 정부의 ‘북한붕괴론’은 김일성·김정일의 죽음과 연결돼 있다. ‘유일무이한 최고통치자이자 독재자가 쓰러졌으니 북한은 무너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다. 박 대통령의 붕괴론도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 20대에 최고권력자가 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리더십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박 대통령의 붕괴론적 인식이 4차 핵실험과 5차 핵실험(9월9일)을 거치며 매우 공격적으로 달라지는 추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황을 통제하고 안정시킬 작동 가능한 정책 수단의 소진에 따른 짜증, 정책 실패에 쏠릴 여론의 비판적 시선을 흩트리려는 특유의 정략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 미국이 싫은 중국, 북한 버리지 못해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첫째, 북한은 조만간 무너질까? 둘째, 북한이 붕괴하면 한국 주도로 통일이 이뤄질까? 첫째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중국’을 비켜 갈 수 없다. 중국은 북한 대외무역의 90% 남짓을 차지하고, 북한이 소비하는 원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중국이 미국처럼 경제봉쇄에 나서면 북한 체제가 오래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 정세의 안정과 평화 수호,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3원칙)을 강조하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런 방침은 희로애락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1월2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라고 거듭 확언한다. 북한의 ‘깽판’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이 3원칙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주한미군이 1500㎞에 이르는 압록강·두만강 접경에 주둔하면 중국은 어떨까? ‘미군과 국경을 맞대느니 골칫덩어리 북한이 낫다’, 이것이 중국이 북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중국은 한반도를 해양세력의 침범을 막는 완충지대로 여겨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명이 대군을 파병하고, 1894~95년 망해가는 조선에서 일본과 전쟁(청일전쟁)을 치르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이 압록강까지 밀리자 마오쩌둥이 대군을 파병한 이유다. 청이 청일전쟁에서 대패하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유린했다. ‘완충지대가 사라지면 대륙이 위험에 빠진다’, 이게 중국이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다.
◆ 독일 통일은 동·서독 협상 결과…
북한 급변사태로는 흡수통일 불가능
둘째 질문은 국제법과 현실의 측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유엔은 휴전선 이북 지역에 대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부인한다. 유엔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1950년 10월1일, 그래서 10월1일이 ‘국군의 날’이 됐다)하자, 그해 10월7일 총회에서 ‘결의 376(V)호’를 채택해 38선 이북 지역을 유엔군 사령부가 접수하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가 “한반도의 구호와 재건”을 책임지도록 결정했다. 한국의 주권이 유엔 감시 아래 총선을 치른 지역(38선 이남)에 한정된다는 유엔 ‘결의 195(Ⅲ)호’(1948년 12월12일)가 결정의 근거다.
‘급변 사태’로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북한의 권력층과 인민은 남한에 ‘흡수합병’되기를 바랄까? 독일 통일은 동독의 붕괴로 이뤄진 게 아니다. 동독 인민이 총선에서 서독과 통일을 주장한 정당을 다수당으로 뽑은 뒤 동·서독 정부의 협상을 거쳤다. 빌리 브란트 이후 서독 정부의 일관된 동방정책이 동독 인민의 마음을 얻은 덕분이다. 사람들 사이엔 국적·혈통·피부색·성별·나이를 불문하고 공유하는 인간관이 있다.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이 진짜 친구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제71차 유엔총회 계기에 9월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난민정상회의’에서 난민 문제 해결에 “3년간 2억3천만달러 이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수해로 고통받는 북녘 동포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커녕 민간 차원의 대북 직접 지원조차 금지하고 있다. 그러고도 ‘잘해줄 테니 오라’면 누가 믿을까?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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