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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효창공원] 냉대받는 '대한민국 정통성'… 시급한 성역화

잠용(潛蓉) 2018. 5. 31. 11:15

정조와 백범이 일군 효창원의 120년 수난사
한겨레ㅣ2018-05-31 05:00 수정ㅣ2018-05-31 09:55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1) 효창공원, 어제와 오늘

▲ 효창공원에 모셔진 8명의 임시정부 지도자와 독립 투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사들. 왼쪽부터 임시정부의 차리석 비서부장, 조성환 군무부장, 이동녕 주석, 김구 주석, 안중근(가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 1921~24년 일제가 국내 최초로 운영한 효창원골프장의 모습. 멀리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울타리가 보이고 골프장에선 유한층 신사들이 골프채를 들고 라운딩을 하고있다. 까까머리 소년들이 골프용구를 들고 캐디 구실을 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신성한 능원에 골프코스를 설치한 데는 옛 조선왕실의 위상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정조가 터닦고 백범이 민족의 성소로 만들어
일제, 군사독재 정부는 체육시설 등으로 훼손
반공투사탑 등 여전히 이질적 시설물들 남아

232년전 정조 이산은 이 언덕에서 목놓아 울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던 비극 앞에서 그는 망연자실했다. 1786년 9월과 이듬해 1월 서울 숭례문 바깥 남서쪽 언덕배기에서는 조선 왕실의 큰 장례가 잇따라 치러졌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1752~1800)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와 문효세자를 낳은 후궁 의빈 성씨의 장례였다. 그해 6월 세자는 5살에 홍역으로 숨졌고, 그로부터 4달 만에 의빈 성씨는 만삭의 몸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역시 세상을 등졌다.


임금의 슬픔은 컸다. 10살 때 궁녀로 궁에 들어온 의빈 성씨는 정조에겐 첫 사랑이자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는 30살에 처음 얻은 아들로 임금이 ‘이제야 아비 노릇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며 겨우 세살에 데꺽 세자로 책봉할 만큼 아꼈던 혈육이다. 상주가 된 정조는 생전처럼 이들의 안식처를 궁궐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여러 신하들과 지관(풍수 전문가)들을 데리고 도성 주위의 길지를 찾았다. 누군가가 도성과 한강 사이의 요지로 솔숲이 울창한 고양 율목동 언덕을 이야기했다. 세번이나 직접 가서 살핀 정조는 뒤로는 깊은 숲이, 앞으로는 한강 물결이 탁트인 풍경으로 펼쳐지는 이 양지바른 언덕이 마음에 들었다. 낙점하고 밤새 장사를 지낸 뒤 ‘효창묘’로 묘 이름을 정했다. 뒤이어 숨진 의빈 성씨의 묘는 세자묘로부터 걸어서 백보 정도 떨어진 왼쪽 산등성이 언덕에 만들었다.


▲ 조선 후기의 지도 <동여도>에 ‘효창묘’로 표시된 효창원. 정조가 문효세자의 묘를 쓸 당시에는 효창묘였다가 1870년 고종에 의해 효창원으로 격상됐다.


이렇듯 효창공원의 역사는 정조의 슬픈 가족사에서 시작된다.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이란 이름도, 묏자리도 모두 정조의 안목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뒤 순조 때 후궁 숙의 박씨, 영온옹주의 묘소까지 들어선 효창원은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왕실 묘역으로 1870년 고종에 의해 ‘묘’에서 ‘원’으로 격상돼 19세기 말까지 성역의 지위를 이어나갔다.


`애기릉’이라고도 불렀던 당시 효창원의 영역은 북쪽으로 만리동·서계동, 동쪽으로 청파동·남영동, 서쪽으로 공덕동, 남쪽으로 도원동, 도화동, 용문동에 이르러 무려 100여만평의 숲이 묘역을 감쌌다. 숭례문을 지나 도성 남쪽 바깥으로 나오면 바로 눈앞에 아스라히 펼쳐졌던 효창원 숲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일제의 발굽에 짓밟히는 시련의 역사를 겪게 된다. 1894년 5월 서울 도성 밖에 진주한 오시마 소장의 일본군 여단 병력 5천여명이 만리재에 주둔해 숲을 걷어내고 숙영지를 만든 게 발단이다. 러일전쟁 때 서울을 강점한 일제는 1906년 둔지미(현재의 용산 미군 기지)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철도 거점을 조성하면서, 효창원 남쪽 영역이던 도원동에 유곽(성매매지역)과 철도 관사를 만들어 성역을 잠식해갔다. 1915년 <매일신보>를 보면 용산 경찰서에서 서장 이임식 잔치를 효창원 일대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 일제강점기 울창한 솔숲이 우거졌던 효창원의 옛 모습.


일본인들은 팽창하던 경성(서울)에서 당시 가장 큰 녹지였던 효창원 일대를 유원지와 공원, 주택지로 개발하려 했다. 이런 의도 아래 효창원 핵심부의 숲을 벌채하고 들어선 것이 1921년 6월 문을 연 경성 최초의 골프장이다. 영국인의 설계로 닦은 이 효창원 골프장은 9홀 규모로 문효세자의 묘를 울타리를 치고 빙 둘러싼 모양새여서 왕실 묘원의 존엄성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한국골프 100년사>에는, 조선 왕실의 후예인 영친왕도 여기서 골프를 즐겼다고 나와있어 더욱 착잡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철도국 산하 조선호텔 이용객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이 골프장은 이용객들이 친 골프공이 효창원을 찾아온 조선인들을 맞히는 경우가 많아 민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골프장이 1924년 폐장한 뒤로 효창원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의 천막촌이 들어선 수용소가 됐다가, 본격적인 공원으로 개발된다. 일본인 거류민들은 시민대회 등을 열어 땅 소유자인 이왕직(옛 조선 왕실)에 공원터를 내놓게 하라고 총독부, 경성부를 압박했다. 결국 1927년 이왕직이 허락하면서 무상임대 방식으로 효창원의 절반 이상이 공원터로 넘어갔다. 효창원이 공원이 된 기점은 이때부터다.


1930년대 말에는 공원을 유원지로 만들어 아동용 놀이시설 등을 세우고 벚꽃나무, 플라타너스 같은 외래 나무들을 능묘 주변 곳곳에 심었다. 일제는 1940년 ‘효창공원’을 공식 명칭으로 정하고, 급기야 1944년 스스로 일으킨 침략전쟁의 희생자 충령탑을 세운다며 효창원의 모든 무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서삼릉은 임금과 정비의 능이어서 왕자, 공주, 후궁의 묘는 들일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일제가 이장을 강행한 데는 효창원과 서삼릉의 격을 낮춰 조선 왕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깔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정조는 모자 사이인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가 지하에서도 가까이 하길 바라며 두 묘를 지척에 두었는데, 일제의 강제 이장으로 서삼릉에 있는 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는 2km이상 떨어져있게 됐다.


▲ 1946년 일본에서 유골을 거두어 와서 조성한 삼의사의 묘역에 참배하는 김구(가운데 흰 도포입은 이). /백범김구선생기념자료집에서 발췌


해방 당시 5만여평의 빈 땅만 남은 효창원은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눈에 들면서 되살아났다. 1946~49년 사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자들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오늘날 효창공원의 핵심인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삼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의 가묘,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인 묘역, 그리고 1949년 암살된 백범의 묘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백범이 왜 효창원을 선택했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임정 시절부터 의기투합했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과 함께 먼저 간 애국자들의 묏자리를 찾다가 정한 곳이라는 게 당시 지인들의 증언들이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의 홍소연 전시실장은 “일제가 왕실 묘역을 침탈하고 강점했던 곳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택을 마련한다는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당연히 이곳을 골랐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백범은 자신과 의기투합해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친 삼의사의 묘역 기단에 `유방백세’(遺芳百世)란 친필을 새겨넣었다. 삼의사의 이름이 ‘후세까지 길이 향기롭게 전해지라’는 뜻이었다.
해방 직후 효창원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푯대로서 민중의 참배 행렬이 끊일 새 없었다. 백범이 암살되지 않고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국립묘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구를 정적으로 여긴 이승만은 백범 사후 효창원에 경찰을 배치해 참배를 막았다. 여우가 살던 울창한 숲의 아름드리 나무들은 벌채돼 사라졌고, 철조망 쳐진 세 묘역엔 잡풀들만 무성해졌다. 더욱이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서울시는 1956년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를 옮기고 체육관, 운동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몰래 세워 공사를 강행했다. 삼의사와 백범 묘역이 전쟁 뒤 아이들 놀이터로 변하면서 존엄성을 상실했다는 핑계였다.


독립운동가 지인들은 맞섰다.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은 묘역 앞을 헤집는 공병대 불도저 앞에서 아예 드러누웠다. 그는 당시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란 한시를 지어 <동아일보>에 실었다. ‘…일곱 선열의 영혼/땅속에 묻혀 말라버린 뼈/일찍이 무슨 죄를 졌기에/멋대로 공병대 괭이 아래 파헤치는가”라고 울부짖었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김두한 의원이 주도한 국회의 반대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면서 공사는 겨우 막았다. 하지만, 정부는 1959년 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 전용 경기장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다시 건립을 밀어붙였다. 결국 백범의 유족과 지인들은 이장하지 않고 일정 간격을 띄워 운동장을 짓는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합의를 하고 만다.


▲ 1959년 11월 효창운동장 공사 기공식장. 1년도 채안되는 기간에 효창원 언덕을 깎아 스탠드와 관중석을 갖춘 경기장을 급조했다


▲ 1965년 효창경기장이 들어선 효창원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 경기장 옆 오른쪽 위부터 아래쪽 방향으로 백범, 삼의사, 임정요인들의 묘역이 보인다. 울창했던 숲이 상당부분 사라져 묘역 주변은 앙상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다.


1959년 11월 착공해 60년 10월 완공된 효창운동장은 옛 제실과 연못을 뭉개고 들어서 묘역의 숨통을 60년 가까이 옥죄는 족쇄 구실을 했다. 급조된 시설이었지만, 60년 2회 아시안컵의 한국팀 우승을 필두로 한-일 정기전, 월드컵 예선, 중고연맹전 등 한국 축구사의 주된 무대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운동장의 양면적 역사는 대중에게 원래 성역이던 효창원의 훼손에 대한 기억과 인식을 교란시켰다.


이질적인 시설물 건립을 통한 공간의 정체성 훼손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백범 동상을 남산에 세우는 등 백범을 예우하는 듯하면서도 효창원은 철저히 등한시했다. 묘역 사이 계곡을 골프장 조성을 위해 마구 파헤치고 들머리와 통로는 행락객들의 음주가무판이 되도록 내버려뒀다. 효창원의 정수리 자리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백범 묘역 위에는 반공기념탑, 대한노인회관, 육영수여사 송덕비 같은 관제 시설들을 세웠다. 세간에선 1990년대까지도 효창원에 애국선열 묘역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행락 유원지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박정희의 유원지화, 반공공원화 정책이 낳은 결과였다. 역설적으로 효창공원은 80년대 백범과 인연이 멀었던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에야 묘역 정비와 개방이 이뤄지게 된다. 뒤늦게 일곱 선열의 사당 ‘의열사’가 생기고 묘역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것도 이 시기다.


▲ 1960년대 서울시가 골프장 건설을 염두에 두고 효창원 자락에서 진행했던 배수관 공사 풍경. 백범 김구의 묘역이 안쪽에 보인다. <한국일보>에 실렸던 사진으로 당시 효창원의 열악한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공원의 성역화는 90년대말에 들어서야 시작됐다. 김대중 대통령 지시로 백범기념관이 생겼고, 노무현 정부 시절엔 체육계 반대와 서울시의 소극적 태도로 무산됐지만, 운동장 철거로 국가적인 기념공간을 만들려는 계획도 추진됐다. 과거처럼 외세나 독재정권이 노골적으로 묘역을 파괴하던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효창원을 휴식과 운동을 위한 시설로만 생각하곤 한다. 지난해 용산구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의 의결까지 거치면서 독립운동가 묘역 봉분 바로 옆에 행인이 불쑥 나타나는 나무데크길을 만든 것은 “왕릉에 생각 없이 케이블카를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비판을 받았다.


효창원을 바라보는 정부와 지자체, 시민의 인식이 여전히 얕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소연 실장은 시민과 하나가 되려 했던 백범 김구의 정신을 효창원에 올곧게 투영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백범은 ‘백정’과 ‘범부’의 줄임말이에요. 백정과 범부가 주인되는 ‘민국’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유해가 누워있는 성소가 효창원입니다. 성역화로 수난의 흔적을 되새기며 대한민국의 뿌리를 일깨우는 교육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232년전 정조는 효창 언덕에 묻은 연인 의빈 성씨의 제문에 애끊는 마음으로 썼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의 물음은 효창원에 묻힌 백범과 여섯 지사들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사진 백범기념사업회, 홍소연 실장 제공>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푹 꺼진 봉분, 먼지 쓴 묘비... 냉대받는 '대한민국 정통성'
한겨레ㅣ2018.05.31. 05:06 수정 2018.05.31. 09:56 댓글 1260개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현장

[한겨레]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옛 효창원)을 국가 차원의 민족·독립 공원으로 격상하자는 논의가 쏟아지고 있다.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묻힌 효창공원을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자는 뜻이다. 메마른 묘역 위로 5월의 햇살이 쏟아졌다. 잔디를 찾아보기 힘든 묘역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고, 묘비에는 희뿌연 흙과 벌초 때 흩날린 풀들이 마구 달라붙어 있었다. “노여워 마시고, 부디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거친 땅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차영조(74)씨가 묻힌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주요 시설물과 부적절한 시설물들/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옛 효창원) 안 독립운동가 8인의 묘역(안중근 의사 가묘 포함)은 황폐했다. 대부분의 묘역은 ‘떼’(잔디)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맨흙이 드러나 있었고, 윤봉길 의사와 이동녕 선생의 묘역은 봉분 곳곳이 움푹 내려앉아 있었다. 윤 의사 묘역 뒤편으로는 봉분 흙이 흘러내린 상태였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애국선열을 예우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밖에 대우하지 못하는가.” 차씨는 비통해했다. 그러면서 ‘임정요인 묘역’에 마련된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비석에 묻은 흙먼지를 맨손으로 연방 닦아냈다. 이들은 임시정부에서 각각 주석, 군무부장,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들이다. 차씨는 차리석 선생의 아들이다.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이들 임정 지도자를 비롯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가 잠들어있다.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조성돼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시기 위해 1946년 김구 선생 주도로 마련해놓은 곳이다. 효창공원에 묻힌 일곱 선열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열사도 1990년 건립됐다. 애국선열의 묘소가 몰려있는 곳이지만 국가 차원의 예우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곳의 관리주체는 중앙정부가 아니다. 용산구가 관리를 맡고 있다. 법적 지위는 사적이자 공원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사적 330호인 효창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용산구가 근린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며 “사적은 대체로 지방정부가 관리를 맡는다”고 말했다.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 묘역. 묘역에는 잔디를 찾아보기 힘들고,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봉분 곳곳이 움푹 파여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근린공원으로 관리돼 오면서 독립운동가 묘역과 무관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 어지러움을 더하고 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항일운동가 묘역을 훼손하기 위해 설치한 것들이다. 애국선열 8인의 묘역 앞은 관중 1만8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2만7641㎡(8360평) 규모의 효창운동장에 가로막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인 백범을 억누르기 위해 1960년에 지은 운동장이다.


뒤늦게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용산구가 근린공원으로 관리
국가 차원 예우 찾을 수 없어 백범 묘 30m 위쪽에 반공탑
원효대사 동상도 뜬금없어 “내년 임시정부 100년 앞둔 지금
독립운동 정신 바로세울 적기”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효창공원을 훼손한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백범 묘역에서 북쪽 30m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대표적이다. 1969년에 세워진 위령탑 한쪽에는 탑 건립을 위해 찬조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그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이 1972년에 지은 대한노인회 중앙회 건물과 신광학원 도서관(현 대한노인회 서울시 연합회), 대한노인회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만든 ‘육영수 여사 경로 송덕비’도 그대로 남아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세운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가 1969년 들여놓은 10m 높이의 원효대사 동상도 뜬금없는 모습으로 효창공원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원효대사 동산 건립은 일제 때 이 지역 이름인 ‘원정’(元町)과 ‘효창원’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원효로’라는 엉터리 이름에서 비롯한 일이다. 원효로는 일제의 잔재나 다름없는 이름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인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김용삼 운영위원은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 묘역을 훼손하기 위해 효창운동장과 반공투사 위령탑, 노인회, 육영수 송덕비, 원효대사 동상 등을 마구 세웠다”며 “사실상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하는 이런 시설물부터 철거하는 일이 성역화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역사가 외면해 온 독립운동가들의 위상을 하루빨리 재정립 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사학·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는 “효창원을 보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한 독립운동가들의 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어떤 방식으로 훼손돼 왔는지 잘 알 수 있다”며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그들이 추구한 독립 정신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효창원을 속히 국가 차원의 독립운동가 추모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 내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밝혔다. 차영조씨도 “효창원이 지금과 같은 공원이 아니라 애국선열들에 대한 ‘추모의 장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기록의 장소’, 임시정부의 정신과 업적을 자손 대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장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김구 등 7명 잠든 효창공원, 독립운동 성지로 가꾸어야
한겨레ㅣ2018-05-31 05:00 수정ㅣ2018-05-31 09:55


▲ 5월16일 오전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모습. 삼의사 묘역과 의열사 앞으로 효창운동장이 거대하게 들어서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만들었지만 임시정부 기념관 하나 없어

효창공원 안장된 애국지사들 대한민국 정통성 상징적 인물
민족독립공원 성역화에 최적 보훈처 “국가차원 예우 바람직”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옛 효창원)을 국가 차원의 민족·독립 공원으로 격상하자는 논의가 쏟아지고 있다.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묻힌 효창공원을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자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효창공원 성역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지난해 1월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 하나 없다. 적어도 효창공원에 독립열사들을 모시는 성역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인 2015년 2월9일에도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후손으로서 제대로 도리를 다하자면 효창공원 일대를 우리 민족공원·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도 함께 모아야 한다. 중국에서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다시 봉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독립운동에서 찾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지난 3·1운동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과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로 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난해에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참배한 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존재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등 애국자들에 대한 정책을 담당하는 국가보훈처도 효창공원 독립공원화에 긍정적 태도다. 보훈처의 고위 관계자는 2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효창공원을 민족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그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들을 국가 차원에서 예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내부적으로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효창공원 앞에 나쁜 의도로 지어진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효창공원의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 국민들이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보훈처는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효창공원 민족공원화 사업’을 추진했다가 체육단체, 주민 등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한 경험이 있다.


여당 쪽에서도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책연구소인 민주연구원은 최근 ‘대한민국 정통성 확립을 위한 역사의 재정립’ 보고서를 펴냈다. 박혁 연구위원은 이 보고서에서 “백범 김구를 비롯해 효창원에 안장된 분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평화통일 이념 등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를 세운 인물들”이라며 “대한민국 정통성과 헌법 정신의 회복을 위해 효창원에 계신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효창원을 성역화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효창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는 7명이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이동녕 주석, 차리석 비서장, 조성환 군무부장, 그리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시기 위한 가묘도 마련돼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이지만, 아직 제대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은 국립 시설이 아니다. 서울시 용산구가 근린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성역화 방안은 다양하게 제시된다. 먼저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격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시업 성균관대 전 명예교수는 “효창원 묘역은 그곳에 안장된 이들에 걸맞게 국립선열묘지가 돼야 한다”며 “효창독립공원, 국립 효창원 등 이름을 어떻게 짓건 국립묘지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효창공원과 지역적으로 무관한 경기도의회도 지난해 8월 ‘효창원 국립묘지 승격 촉구 건의안’을 채택해 국회에 제출했다. 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은 “백범 김구 선생 등 건국의 주역을 국립묘지에 모셔야 하며, 이장이 어렵다면 효창공원을 국민적 상징성이 있는 공간으로 승격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효창공원에 임시정부청사를 복원하자는 제안도 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사학)는 “국내에서 임시정부와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 효창원”이라며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이곳에 이전 복원하고, 효창원을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독립공원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아올 수 있게 효창공원을 경건한 추모 공간과 개방적 시민 공간으로 함께 만들자는 의견도 나온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조성된 쪽은 경건한 추모의 공간으로 성역화하고, 현재의 효창운동장 자리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광장이나 숲을 조성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