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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3.1운동 민족성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이 울고 있다

잠용(潛蓉) 2018. 8. 14. 08:22

'박카스 할머니' 영업 흥정하는 곳... 3·1절 성지 탑골공원이 운다
중앙일보ㅣ신준봉ㅣ2018.08.14. 00:07 수정 2018.08.14. 06:36 댓글 463개


▲ 공원 안의 손병희 동상.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내년 3·1운동 100주년-탑골공원 이대론 안 된다 <상>
-독립성지? 어르신 해방구? 역사 잃고 헤매는 탑골공원

세계적 비폭력 저항운동 발상지 지금은 노년층 집합소 이미지
'박카스 아줌마' 떠오르는 장소 "청년도 찾는 문화공간 만들어야"
 
지난달 27일 오후 4시. 서울 탑골공원은 거대한 찜통 같았다. 기자의 스마트폰 화면은 34도를 찍고 있었다. 함께 공원을 찾은 이호선 숭실사이버대(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가 팔각정 왼쪽 벤치를 보라고 귀띔한다. 이 교수는 200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탑골공원 노인 실태를 연구해 왔다. 할머니 한 분에 할아버지 둘. 할머니는 한눈에도 나들이객 차림이 아니다. 꼭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복장이며 인상이 어딘가 이상하다. 이 교수는 “저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다 흥정이 성사되면 곧바로 공원 구석으로 가 스킨십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상대로 몸을 파는 박카스 할머니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내년 100주년을 맞는 3·1 운동의 발상지 탑골공원의 현주소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비폭력 저항운동이 시작된 곳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그런 역사성을 21세기 탑골공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일거리가 마땅치 않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노년층의 집합소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다. 활기 넘치는 실버 공간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탈선 괴담이 잊을 만하면 불거진다. 탑골공원의 수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대 흐름, 정치 이념 변화에 따라 크고 작은 부침을 겪어 왔다.


공원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1852~1919)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아내 민비를 잃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한 상황에서 ‘도시개조 준칙’을 발표했다. 도로를 파먹고 들어온 ‘가가(假家)’를 철거해 길을 넓히는 사업에 주력했다.



▲ 사회복지원각에서 운영하는 탑골공원 북서쪽 급식소의 무료 점심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하루 200~300명이 먹는다. 담장 가운데 보이는 공원 북문은 노숙자 등의 공원 내 시설 훼손을 우려해 종로구청이 잠가놓았다. , [뉴시스]
 
탑골공원도 이때부터 추진됐다. 서울대 이태진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1896년 탁지부(度支部·국가 재정 담당) 고문이었던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탑골공원이 조성됐다는 기존 역사해석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수도의 얼굴을 바꾸는 민감한 사업이 국왕의 정치적 결단 없이 진행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시각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싹튼 근대 공원은 산업화에 따라 악화된 도시민들의 복지와 위생을 위한 공간이었다. 탑골공원 조성은 산업화를 겪지 않은 대한제국이 표정으로나마 근대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이었다는 얘기다.


공원의 첫 번째 수난은 일제시대 때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공원을 떠맡은 총독부는 1914년 공원 안에 탑다원(塔茶園)을 개설해 생맥주 등을 팔았다. 1919년 다원을 증축해 승리(勝利)라는 이름의 요정을 꾸몄다. 1919년 서거한 고종 황제 입장에서는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도시공간의 의미는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해 재단되거나 정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하는 개인과 정치·경제논리를 내세워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층 간의 대립과 갈등에 의해 성격이 규정된다(문학평론가 신수정).


탑골공원도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밀고 당기는 과정을 겪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회의 의장 신분이던 1963년 초등학생까지 참가한 국민성금을 거둬 공원 안에 3·1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자신의 친필 한글 현판 ‘삼일문’을 주 출입구인 남문에 달았다. 기념탑은 79년 신군부에 의해, 삼일문 현판은 2001년 한국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에 의해 각각 철거된다. 그러는 와중에 공원은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해 나름의 방식으로 활용됐다. 중앙일보 1967년 12월 16일자 3면 기사는 그때까지의 공원 풍경을 생생히 전한다. 해방 후 관리소홀을 틈타 걸인들의 휴식처, 여름철 피서지였던 공원이 기사가 게재되는 무렵에는 노인들의 휴식처, 우국지사가 불만을 토하는 장소, 어린이들에게는 10층 석탑을 오르내리는 놀이터였다는 것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공원은 2001~2002년 대규모 홍역을 치른다. 이번에는 역사적 의미가 과도하게 부여된 성역화 작업이었다. 실상은 월드컵을 앞두고, 1990년대 중반부터 공원을 점령하다시피 해 온 노인들을 몰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구충작전 같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벤치 등 노인들의 쉴 곳을 없앤 결과 성역화 전 하루 2000~3000명에 이르던 노인 이용자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현재 탑골 공원 이용자는 하루 300~400명쯤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해방 직후부터 공원의 명물이었던 이야기꾼들까지 함께 사라졌다. 건국대 신동흔 교수에 따르면 김한유(작고)씨 같은 이름난 이야기꾼들은 수백 명씩 청중을 몰고 다녔다. 자생적인 연희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내년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공원은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는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종로구가 각종 정비계획을 세워 실행 중이다. 무얼 어떻게 건드리냐에 따라 성격이 바뀔 것이다. 지나친 성역화도, 노인들의 해방구도 답은 아닌 것 같다. 3·1 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공원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젊은층이 찾는 매력적인 문화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기대 안창모 건축과 교수는 “현재 탑골공원은 3·1 운동 당시의 모습이 크게 훼손된 상태다. 당시의 역사성을 살려 재정비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 건축가는 “탑골공원뿐 아니라 공원 주변 낙후된 도심도 한꺼번에 개선하는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