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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본존불상] 경주 이거사 (離居寺)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잠용(潛蓉) 2018. 6. 20. 11:44

[단독]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국가보물로 승격 추진
한겨레ㅣ2017-09-15 16:57 수정 2017-09-15 21:57


▲ 청와대 북쪽 보안구역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 1974년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


석굴암 본존불 특징 계승한 돌부처
서울시 문화재위서 건의안 의결
문재인 대통령 “가치 재조명” 지시 계기
문화재청서 보물 지정되면 경주 이전 논의 급물살 탈 듯

정부와 서울시가 경북 경주의 옛 자리로 돌려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있는 청와대 경내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서울시유형문화재)의 국가보물 승격 절차를 밟기로 했다. 불상의 경주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15일 오전 회의를 열어 청와대 불상의 국가보물 지정 건의안을 확정 의결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위원들이 이견없이 안건을 통과시켰다”고 전했다. 이날 확정된 건의안은 서울시 쪽이 곧 문화재청에 송부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올 하반기중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 회의를 열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심의를 벌이게 된다.


앞서 지난달 서울시 의뢰로 청와대 불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 등 학계 조사위원 3명은 만장일치로 이 불상을 국가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서울시에 이런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사에 관여한 한 전문가는 “8~9세기 석굴암 본존불 양식적 특징을 모두 계승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빼어난 수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당당한 풍모 등 조형적 완결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도 좋아 보물 지정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화재학계는 큰 변수가 없는 한 불상이 보물로 지정될 것으로 보고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불상이 국가보물로 지정되면 그 관할권이 서울시에서 문화재청으로 바뀌게 돼, 정부 차원에서 불상의 경주 이전을 논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행정 요건이 갖춰지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불상의 보물 승격 건의안을 문화재위원회에 올린 데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재직할 때부터 석조불상에 관심이 많았다는 후문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비서실에 “현재 서울시지정문화재보다 더 가치가 있어 보이는 유물이니 제대로 조사해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문화재청 쪽은 “문 대통령의 지시 뒤 대통령비서실에서 문화재청과 서울시에 현장 조사를 거쳐 국가문화재 승격 여부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청와대 불상은 1910년대 경주에서 서울 예장동 왜성대에 있던 당시 조선총독관저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1939년 북악산 기슭의 현 청와대 자리에 새 총독관저가 완공되면서 함께 옮겨져 지금에 이른다. 경주에 불상이 원래 있던 자리는 확실치 않으나, 남산과 도지동 이거사터 등으로 학설이 엇갈리고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청와대 제공]


경주 남산에 '청와대 석불좌상' 쌍둥이 불상 있다
연합뉴스 | 2017/09/21 06:20



▲ 청와대 석불좌상(오른쪽)과 경주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 그림. 청와대 석불좌상은 중대(오른쪽 아래)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고, 하대는 없는 상태다. 그림의 출처는 '경주 남산의 불적(佛蹟)'이다. [임영애 교수 제공]


임영애 교수 조사… 불상 중대(中臺)는 국립춘천박물관서 확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 경북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져 지금은 청와대 관저 뒤쪽에 안치된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과 형태가 매우 유사한 쌍둥이 불상이 경주 남산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석불좌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경주 남산 약수계에 청와대 석불좌상보다 약간 더 크지만, 형태와 양식은 동일한 불상이 있다"고 21일 밝혔다.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은 불상의 머리인 불두(佛頭)가 없고 무너져 있는 상태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조사된 바 있다. 조선총독부가 1941년 펴낸 '경주 남산의 불적(佛蹟)'이라는 책에 그림과 사진이 남아 있다.

임 교수는 두 불상의 공통점이 무엇보다 '삼단사각대좌'라고 강조했다. 삼단사각대좌는 사각형 하대(下臺)·중대(中臺)·상대(上臺)로 구성된 대좌를 말한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대좌 중에는 팔각형 하대와 중대에 원형 상대를 올린 '삼단팔각대좌'가 많다.


▲ 청와대 석불좌상의 상대(上臺, 위쪽)와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의 상대. [임영애 교수 제공]


▲ 왼쪽 무릎의 긴 물방울 모양 무늬. 왼쪽이 청와대 석불좌상, 오른쪽이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

[임영애 교수 제공]


▲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청와대 석불좌상의 중대(中臺). [임영애 교수 제공]


임 교수는 "삼단사각대좌는 고려시대 전기에 유행한 대좌로 알려졌다"며 "청와대 석불좌상과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은 삼단사각대좌가 쓰인 가장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단사각대좌, 두툼한 팔과 손을 보면 불상의 제작 시기는 9세기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대좌 안에 들어간 문양도 두 불상의 공통점이다. 상대(上臺)의 문양을 비교하면 연꽃무늬가 반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임 교수는 설명했다. 임 교수는 "왼팔과 왼 무릎에 있는 긴 물방울 모양의 옷 주름도 비슷하고, 오른쪽 옆구리와 팔 사이에 구멍을 뚫었다는 점도 같다"며 "옆구리와 팔 사이에 공간을 만들면 불상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장점이 있지만, 팔이 부러질 우려가 있어 작업이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임 교수는 조사 과정에서 청와대 석불좌상의 중대(中臺)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중대는 본래 경복궁에 있었으나,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할 당시 이전됐다. 신영훈 전 한옥문화원장이 1961년에 쓴 기록에도 불상의 중대가 경복궁에 별치(別置)돼 있다는 내용이 있다. 청와대 석불좌상 중대의 사면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 긴 칼을 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신장상은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의 중대에도 똑같이 있다.


임 교수는 "청와대 석불좌상의 하대는 아직 찾지 못했다"며 "1939년 작성된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의 보고서에도 하대의 소재를 파악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을 참고하면 청와대 석불좌상의 하대를 복원할 수 있다"며 "국립춘천박물관 중대까지 합쳐 과거의 형태로 되돌리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경주 남산 혹은 이거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와대 석불좌상은 높이 108㎝, 어깨 너비 54.5㎝, 무릎 너비 86㎝로, 경주 석굴암과 양식이 유사하다. 풍만한 얼굴과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눈이 특징으로 '미남불'로도 불린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이 불상은 최근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승격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임 교수는 "청와대 석불좌상은 광배와 하대는 떨어져 나갔지만, 얼굴과 손의 일부 훼손을 제외하면 매우 온전하게 보존됐다"며 "보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 문화계에서 주장하는 불상 이전에 대해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며 "쓰러진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도 쌍둥이 불상이라는 점을 고려해 원형을 복원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청와대 불상' 사라졌던 중대석 발견 
불교신문ㅣ이경민 기자ㅣ2017.09.22 12:38


▲ ‘청와대 불상’으로 불리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석불좌상’


▲ 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찾아낸 중대석.


돌 종류·크기 상대석과 동일... 네 면 새겨진 신장상도 같아

청와대 안치돼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중대석이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발견됐다. 현재 보물 승격이 추진되고 있는 청와대 불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지난 20일 “조사 도중 청와대 불상의 사라진 중대(中臺)가 춘천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상대석과 돌의 종류와 크기 등이 들어맞는 것으로 보아 사라진 석불좌상의 사라진 중대가 확실하다”고 했다.


임영애 교수에 따르면 중대는 경복궁에 있다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며 춘천으로 옮겨졌다. 중대를 찾아낸 임영애 교수는 "중대 네 면에 새겨진 신장상은 청와대 불상의 상대와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고 교각좌로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손에 긴 칼을 쥐고 있다"며 "사라진 중대의 소재가 확인된 이상 중대를 옮겨와 석불좌상의 본 모습을 돌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석불좌상은 일명 ‘청와대 불상’으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 경북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져 대통령 관저가 있는 청와대 침류각 뒤에 100년 가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풍만한 얼굴과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이 특징이다. 오른쪽 옆구리 부분을 뚫어 입체감을 더했으며 왼팔과 왼쪽 무릎 위 긴 물방울 모양의 주름이 눈에 띈다. 높이는 약 1m, 제작 시기는 8~9세기로 추정된다.


지금은 청와대에 자리하고 있지만 본래 이 불상은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1912~3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경주를 찾았다가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인 오히라 료조의 집을 방문했고 이 불상을 발견, 오히라가 서울 남산에 위치한 총독부 관저로 옮겨왔다. 이후 현재의 청와대로 다시 한 번 이운됐고, 그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불상을 조사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은 “석불좌상은 광배와 대좌 하대가 없는 상태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다”며 “통상적인 삼단팔각연화대좌가 아니라 상‧중‧하대가 모두 사각으로 이뤄진 ‘삼단사각대좌’를 갖춘 통일기 신라 불상의 드문 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청에 석불좌상의 보물 승격 지정 신청을 해둔 상태다.

[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청와대 불상, 옮기지 말라"… 조계종, 불상 경주 이전에 제동
연합뉴스 | 2017/09/24 07:55


▲ 청와대 석불좌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종단 "출처 규명되면 옮겨야" vs 경주 문화계 "하루빨리 내려와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이 100여 년 전 일본인이 경주에서 서울로 옮긴 '청와대 석불좌상'의 경주 이전에 반대하고 나섰다. 조계종 관계자는 2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청와대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의 원래 봉안처가 규명될 때까지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이달 초에 청와대, 문화재청, 서울시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경주 이전 장소로 거론되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불상이 가서는 안 된다"며 "신앙의 대상인 불상이 박물관에 가면 전시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학계에서는 청와대 석불좌상의 제자리를 놓고 경주 남산이라는 의견과 도지동에 있었던 이거사(移車寺)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경주 지역에서는 불상의 출처를 이거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남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계종이 청와대 석불좌상의 이전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표면적 이유는 불상의 봉안처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상의 조속한 경주 이전을 촉구해 온 경주 문화계는 이전 장소가 문제라면, 합의를 통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은 "국가 소유인 청와대 불상의 이전 장소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주로 논의된 이유는 안전하고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라며 "국립경주박물관이 싫다면 경주시청이나 불국사로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이어 "일단 불상을 경주로 옮겨놓고 나서 나중에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지면 다시 이전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불상이 청와대에 있으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많은 불자와 문화재를 사랑하는 국민이 가까이에서 불상을 볼 수 있도록 하루빨리 고향인 경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조계종이 청와대라는 상징적인 정치 공간에 불상을 두고 싶어하는 속내가 있어서 석불좌상 이전을 꺼린다고 지적한다. 불교계는 이명박 정권 당시 일부 개신교 단체가 종교적 편향성을 이유로 청와대 불상 이전을 요구할 때마다 "전통문화의 산물인 불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반박했다.


학계 관계자는 "조계종은 개신교계의 주장에 쫓겨 불상을 이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면서도 "10년 전쯤에는 종교적 색채가 옅은 문화재라는 논리로 청와대 불상 이전을 반대했던 조계종이 지금은 거꾸로 신앙의 대상이라는 이유를 내세운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조계종이 청와대 석불좌상의 이전을 반대하는 것은 그간 종단이 해외 문화재를 환수할 때마다 역설한 문구인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정신과 배치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 원장은 "불교계는 박물관에 있는 불교 유물들이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유독 청와대 불상만은 경주행을 반대한다"며 "불교계가 청와대 불상에 쏟는 관심을 경주 남산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불상에도 기울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psh59@yna.co.kr]


日帝가 옮긴 불상… “원래 고향 경주로”vs“권력상징 靑에 둬야”
동아일보ㅣ김상운 기자ㅣ2017-09-30 03:00수정 2017-09-30 03:00



▲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석조여래좌상’(사진[1]). 대통령 관저 뒤쪽에 있는 보호각 아래 안치돼 있다. [2]는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경성 왜성대(현 서울 남산 일대) 총독 관저로 옮겨졌을 당시 모습. [3]은 경주 남산에 있는 약수계 불상으로, 청와대 불상과 흡사해 같은 석공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DB·임영애 교수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청와대 석조여래좌상 이전 논란 왜?

‘청와대 불상’으로 알려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청와대 앞 검문소와 연풍문(방문객 출입구)을 차례로 통과해 비서동 앞에 들어서면 춘추관(청와대 출입기자실)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외국 손님을 맞는 상춘재가 보이며, 여기서 다시 직진해 대통령 관저 뒤쪽으로 가면 한자로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서 청와대 유일의 정자인 오운정 건너편으로 나아가면 단청 지붕의 보호각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보안구역이라 청와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이 가볼 수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부터 8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청와대 불상을 둘러싸고 최근 이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통일신라 당시 불상이 처음 들어선 천년고도(千年古都)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문화재계 일각과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청와대의 상징성을 감안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광복 이후 이 불상은 청와대가 갖는 상징성과 맞물려 해프닝을 빚었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등과 같은 대형 참사가 잇따르자 세간에는 “개신교 장로 출신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웠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청와대는 1994년 보안구역 안으로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가 불상을 전격 공개했다. 
 
새 정부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올 6월부터 문화재청이 청와대 불상의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불상 이전과 국가문화재 지정은 별개 사안이라고 말하지만 문화재계는 이르면 연말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면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불상은 기구한 내력만큼이나 탈(脫)권위와 일제 잔재 청산, 종교계 갈등의 복잡한 요소들이 잠복해 있다. 불상에 얽힌 사연을 하나씩 풀어본다.


‘미남 불상’ 어떻게 생겼나?

8,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청와대 불상은 ‘미남불(美男佛)’로 불릴 정도로 용모가 수려하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팔과 손, 유연하게 흘러내린 법의(法衣) 자락 등이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이마에는 백호(白毫·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흔적도 남아 있다. 최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가 불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불교미술사학)는 “보통 이 시기 불상은 얼굴이 제대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는데 청와대 불상은 코끝이 살짝 깨졌지만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며 “잘 만든 수작으로 보물급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잘 보존된 몸체와 달리 불상을 떠받치는 받침대인 대좌(臺座)는 3분의 1만 남아있다. 이 시기 대좌는 위치에 따라 상·중·하대가 한 세트를 이루는데 청와대 불상은 현재 상대(上臺)만 있는 상태다. 그런데 최근 임 교수가 청와대 불상의 중대(中臺)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미술사학자 신영훈 씨가 1961년 논문에서 밝힌 청와대 불상 중대의 실측치가 춘천박물관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대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청와대 불상과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대좌의 가장 아랫단을 구성하는 하대(下臺) 없이 불상을 상대와 중대 위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중대를 따로 보관하던 중 어느 시점엔가 청와대 불상과 한 세트라는 사실이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임 교수는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별도 보관된 중대를 옮긴 사실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하대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총독부박물관 관계자가 경주에 내려가 여러 절터를 돌며 하대를 찾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최고 권부(權府)로 오기까지

신라 왕경에 봉안된 불상이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온 과정에는 암울한 한국 근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이야기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언론과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1912년 11월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곳곳을 순시했다. 이때 데라우치는 지역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정원에 놓인 불상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사업상 총독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던 고다이라는 눈치껏 불상을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에 있던 총독 관저로 보냈다. 총독부는 1939년 총독 관저를 왜성대에서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광복 이후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게 된 연유다.


흥미로운 건 일제강점기에도 최고 권부에 좌정한 불상의 거취가 논란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 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제목의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이 불상은 경주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해 견딜 수가 없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어 “박물관에서는 불상을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된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해 보려고 희망하는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기관이 아닌 총독 관저에 있다 보니 불상에 대한 보존 조치가 미흡했지만 총독 눈치를 보느라 박물관이 속만 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불상 원래 자리는 어디?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내력과 연관돼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정확히 어느 사찰에 봉안돼 있었는지를 알아야 이전 위치를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불상이 경주에서 온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사찰 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사기> 등 사료와 일제강점기 기록들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경주 남산이나 이거사(移車寺)터, 유덕사(有德寺)터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흔적만 남아있는 이른바 폐사지(廢寺址·절터)들이다. 이 때문에 보존 관리를 위해 전문 인력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화재는 제자리에 두는 게 원칙”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경주 남산설은 앞서 언급한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 중 “(청와대 불상이) 총독부박물관 홀에 진열돼 있는 약사여래와 같은 골짜기에 안치돼 있었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발언에 근거한다. 여기서 언급된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청와대 불상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남산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해당 불상이 경주 유덕사터에서 왔다는 총독부박물관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최고위 관료였던 최유덕이 자기 집을 내놓아 유덕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유덕사를 이거사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불상이 경주 남산에 있다는 임영애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를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왼팔과 왼쪽 무릎 위에 새겨진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옷 주름이나 상대(上臺)의 연꽃무늬, 중대(中臺)의 신장상 조각 등 전반적인 형태에서 두 불상이 꼭 빼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와대 불상의 출처가 남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같은 석공이 만든 불상이라도 각기 다른 사찰에 봉안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전(移轉)을 둘러싼 논란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경주 이전이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더불어 총독부의 강압적인 문화재 침탈을 바로잡는 조치임을 강조한다. 일제강점기에 함부로 옮겨진 불상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논리다. 총독부는 1915년 9, 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제102호)’ 등 전국 각지의 석탑들을 경성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당시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와 관저가 들어섰다.


보안상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청와대를 벗어나 많은 사람이 감상할 수 있는 곳에 불상을 둬야 한다는 명분도 있다. 이와 관련해 광복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청와대 불상은 정밀 학술조사나 국가문화재 지정이 지금껏 이뤄지지 못했다. 최근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문화재청과 서울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불상의 정확한 출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전부터 추진하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폐사지에 뒀을 때 관리 부실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불교계 입장도 변수다. 조계종은 최근 “불교계와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통해 제대로 된 정책이 수립되고 이에 따라 보존 환경이 마련되는 게 우선”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즉각적인 불상 이전에 사실상 반대한 셈이다. 앞서 조계종은 이명박 정부 때 일부 개신교 단체가 종교적 편향성을 이유로 불상 이전을 요구한 데 대해서도 반대했다.


청와대 안 문화재 또 무엇이 있나?

靑 관저 뒤 바위엔 ‘天下第一福地’ 조선시대 글씨 남아..

대한제국 시절 침류각도 문화재



▲ 대통령 관저 뒤쪽에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바위(위쪽 사진)는 이곳이 예부터 최고의 길지로 꼽혔음을 보여준다. 현 관저 자리에서 상춘재 근처로 옮긴 침류각(아래쪽 사진)은 1905년 고종 때 건립됐다. /청와대 제공


청와대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남아있다.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연접해 있다보니 조선시대 유물이나 유구가 대부분이다. 2007년 대통령경호실이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 문화유산’에 따르면 관저 뒤쪽에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가 새겨진 바위는 300∼4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청와대 일대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글자 왼쪽에 ‘延陵吳据(연릉오거)’라는 관지(款識·그림이나 글씨 뒤에 작가 이름이나 날짜를 표기한 것)가 새겨져 있는데, 중국 남송시대 연릉에 살던 오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침류각(枕流閣·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3호)은 1905년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전각이다.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짓는 과정에서 상춘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각 이름인 ‘침류(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보인다. 침류각은 고종 당시 신무문 밖 후원에 건립한 전각들 가운데 청와대에 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을 이은 정면 4칸, 측면 2칸짜리 몸채에 좌우 한 칸씩 돌출시킨 구조다. 이 밖에 비서동 근처에는 조선왕실이 경복궁 후원에 관상용으로 둔 괴석(怪石)들이 남아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단독] ‘청와대 불상’에 절하는 데라우치 총독 사진이 나왔다
한겨레 :2017-12-03 17:51수정 :2017-12-04 00:40



▲ 데라우치 총독이 옮겨온 경주불상 앞에서 배례하는 장면. 1913년 2월 서울 남산 총독부 관저 부근에서 개안식을 열면서 찍은 것이다. 총독의 뒤에 참석한 승려들도 보인다.


1913년 2월 경주서 옮긴 불상 개안식 사진 발견
정인성 교수가 도쿄대박물관에서 발견해 공개
데라우치 총독의 불상 앞 배례 장면 생생하게 포착
불법반출 불상 사유화 문화재밀반출 면죄부 줘

청와대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불상(서울시 유형문화재)이 일제강점기인 1913년 경주에서 서울 예장동 왜성대 조선총독 관저 근처로 옮겨진 직후 열린 개안식 행사사진들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청와대 불상을 담은 옛 사진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찍은 것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 초대 총독이 고개 숙여 배례하는 장면 등이 담겨 눈길을 끈다.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 박물관 소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불상의 옛 개안식 사진 2점을 발견했다며 3일 사진들을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사진들은 1910년대 조선 고적조사를 벌였던 건축사가 세키노 타다스의 자료들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라고 한다. 정 교수는 “당시 세키노와 함께 조사하며 사진 촬영을 전담했던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츠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 눈덮힌 서울 남산 기슭의 총독관저 옆 계곡에 안치된 경주 석불.


공개된 사진 2점은 식장에서 데라우치 총독이 배례하는 장면과 예물이 놓여진 불상을 측면에서 찍은 장면을 각각 담고있다. 모두 별도의 보존용 종이에 끼워진 것이 특징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등장하는 사진의 경우, 눈이 덮힌 바위 앞에 안치된 불상 앞에 예단 탁자를 놓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배례를 하는 데라우치와 지켜보는 일본 승려 2명의 뒷모습이 보인다. 실제로 데라우치는 1913년 2월16일치 일기에서 관저 앞 절벽 아래 안치된 불상 앞에서 승려 마루야마 화상의 주재로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안식을 열었다고 기록해, 사진의 장면과 부합된다.


데라우치가 경주에서 반출된 불상을 별도의식까지 치르며 맞아들였고, 야쓰이 등의 관학자까지 불러와 사진을 찍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진에서는 상대만 있는 대좌 위에 앉은 당당한 불좌상의 모습과 그 아래 개안식 예물로 올린 접시의 과일들과 촛대를 볼 수 있다. 사진을 끼운 보존지에 ‘조선총독저신라석불개안식’‘데라우치총독예배’라는 설명을 적어 총독이 주도한 개안식임을 일러준다.



▲ ‘조선총독저신라석불개안식’이라고 쓰여진 불상사진 보존지(커버). 데라우치 총독이 예배했다는 문구도 그 아래 적혀있다.


정 교수는 “불상은 1912년 11월 총독의 경주 순시 당시 환심을 사려는 현지의 일본인 유지에 의해 몰래 반출됐고, 개안식 뒤에도 이 사실이 오래 묻혀있다가 21년이 지난 1934년 3월 <매일신보>에 총독부박물관이 불상 소재를 찾았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면서 “사진들은 데라우치가 개안식을 통해 불법반출된 불상을 사유화하고, 조선 유적지에서 암약하던 일본인들의 문화재 밀반출 행위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청와대 불상은 1939년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 자리에 새 총독관저가 지어지자 다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지난 9월 서울시문화재위원회가 불상의 국가보물지정건의안을 의결한 뒤로 문화재청 전문가들이 지정여부를 가리기위한 조사작업을 벌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정인성 교수 제공]


‘청와대 불상’ 경주로 가나?
YTNㅣ게시일: 2017. 8. 20.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청와대를 보러 온 관람객들입니다.

[인터뷰 홍영수] (경기도 고양시) : "주말에는 6개월 치가 다 예약이 마감돼 있었고,(이것도 방학이라서) 평일 날은 좀 어려웠어요. 간신히 했어요." 1시간 반가량 청와대 곳곳을 둘러보는 관람 코스. 제한된 장소에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 후원엔 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가 한 점 있습니다. 바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입니다.


[인터뷰 신상빈] (경기도 용인시) : "못 봤어요. 아예 못 봤어요. 코스에 없나 본데."

[인터뷰 홍순] (인천시 서구) : "저희는 가족들이 놀러 다니면서 이런 불상도 많이 보는데 여기서는 못 본 것 같아요. 확실히." 이 불상은 최근 한 시민단체가 원래 위치로 되돌려 달라는 진성서를 청와대에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불상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왜, 언제부터, 청와대 안에 있게 된 걸까?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는 불상. 직접 본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청와대 불상에 얽힌 길고도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봤습니다. 청와대 후원 숲 속, 보호각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석조 불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의 높이는 1.16m. 석굴암 본존상의 축소판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로 꼽힙니다.


[인터뷰 박임관] (경주학연구원 원장) : "양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볼륨이 있고 그다음 무르팍이 아주 크게 웅장하게 되어 있어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상은 관람이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화면 역시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것으로,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촬영 허가가 난 적이 없습니다.


취재진이 청와대에 불상을 직접 찍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문제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불상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까? 수소문 끝에 취재진은 문화유산 답사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강대철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강 씨가 청와대에서 불상을 직접 본 때는 2015년 11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진도 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불상의 옆 모습과 뒷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보존 상태가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강대철] (옛문화답사회 대표) : "딱 보니까 석굴암의 본존불 생각이 딱 나더라고요. 당당한 자세라든가 또는 조각기법, 그다음에 전체적인 느낌 같은 것이 상당히 가치 있는 문화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좋은 작품이 좀 더 대중들한테 보여졌으면 좋겠는데 외롭게 여기 계신가 하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죠." 통일신라 불상이 청와대에 있게 된 이유는 뭘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는 경주 남산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거라고 적혀 있습니다. 불상이 처음 있었던 자리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논밭을 지나 마을 뒷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산 아래 탁 트인 지형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신라시대에 '이거사'(離居寺 경상북도 경주시 도동동에 있던 절) 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 <끝>


'청와대 불상' 있었던 경주 이거사 터 무너진 탑·잡초만 무성
연합뉴스ㅣ2018.12.07. 16:46 댓글 68개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 경주시 "복원·정비하겠다"
(경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거기는 찾아가기 어려울낀데. 가도 별로 볼 것도 없고." 6일 오후 경북 경주시 도지동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청와대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 이거사 터 위치를 묻자 이같이 말했다. 도지동은 경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마을이다. 경주와 울산을 잇는 7번 국도와 동해선 철길을 끼고 있다. 이거사 터는 지난 4월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된 청와대 '경주 방형대좌 석불좌상'이 애초 있었다고 추정되는 절터다. 청와대 불상은 1912∼1913년께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오히라 료조(小平亮三·또는 고다이라 료조)가 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 관사가 있던 서울 남산 왜성대로 옮겼다. 이후 1939년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현 청와대 자리)를 지으면서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됐다. 오히라 료조가 불상을 입수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 별세한 이근직 경주대 교수 부인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이 연합뉴스에 제공한 일제강점기 자료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에 따르면 도지리(道只里) 이거사터 항목에 다이쇼(大正) 2년(1913) 중에 총독부로 불상을 이전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때문에 청와대 불상이 애초 경주 이거사 터에 있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불상은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공관 뒤편을 산책하다가 불상 가치를 재평가해볼 것을 지시해 올 4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1977호로 지정됐다. 경주에서는 청와대 불상을 경주로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는 여론이 퍼지고 있다. 경주시, 경주시의회,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시민운동본부는 지난 달 7일 협약을 맺고 '경주 방형대좌 석불좌상'을 경주로 반환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불상 출토지로 거론되는 이거사 터는 관리가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 방치된 탑 (경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경북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 터에 탑이 무너진 채 방치돼 있다.

/2018.12.7  



▲ 무너진 탑 (경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경북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 터에 탑이 무너진 채 방치돼 있다.

/2018.12.7



▲ 나뒹구는 탑 부재 (경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경북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 터에 탑이 무너진 채 방치돼 있다. /2018.12.7



▲ 본 모습 잃은 불상 (경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경북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 터 주변에 불상이 본 모습을 잃은 채 보호각 안에 자리 잡고 있다. /2018.12.7
 
자동차 길안내기나 유명 인터넷 포털사이트 지도에서도 이거사 터는 검색되지 않았다. 도지동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마을에 가 작은 안내판만 보고 찾아간 이거사는 옛 이거사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찰이었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 다시 찾아간 이거사 터는 마을에서 떨어진 밭에 방치돼 있었다. 안내판이나 보호책이 없고 주변은 경작이 이뤄져 어지러웠다.


사찰을 대표하는 탑은 파손돼 기단과 옥개석이 널려 있었다. 무너진 탑 사이로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한쪽 길이가 3m 넘는 기단이나 정교한 옥개석 모양으로 봤을 때 이중기단의 3층 석탑으로 상당한 크기와 수준을 자랑하는 탑임을 추정할 수 있다. 기단 안에는 큰 돌이 자리 잡고 있어 발굴 조사와 복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는 돌로 된 불상인 석조여래좌상이 작은 보호각 안에 앉아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고 머리를 후대에 만들어 시멘트로 붙여 놓아 본래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이 불상과 청와대 불상의 관련성도 앞으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펴낸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도지동 사지(절터)는 '이거사'나 '유덕사'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봤을 때 이거사는 통일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보고서에는 '석탑재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고 석탑 제작 시기와 사리공 특이점으로 봐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돼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청와대 불상을 이거사에 영구 안치하기 위해 조례를 만들고 이거사지 복원과 정비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sds123@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