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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월남전 영웅 채명신] "나를 조국 위해 목숨 바친 사병 곁에 묻어달라"

잠용(潛蓉) 2018. 8. 18. 08:09

[Why] 베트남戰의 영웅 채명신 장군,

그는 왜 사병 묘역에 잠들어 있나?
조선일보ㅣ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ㅣ2018.08.18. 03:03 댓글 321개

 

 

▲ 채명신(1926~2013) 장군 /일러스트=이철원

 

[김동길 인물 에세이] <37>채명신(1926~2013)
박정희가 존중하고 경계한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군인, 6·25 땐 백골병단 신화
월남전 파병 반대했지만 결국 한국군 사령관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사병 곁에 묻어달라' 유언

내가 아는 장성이 몇 있었다. 그러나 내가 형님처럼 가까이 대하던 장군은 오직 채명신이 있었을 뿐이다. 황해도 곡산 사람인 그는 경북 영덕의 명문가 규수 문정인을 만나 그 가문의 사위가 됐다. 문정인의 오빠 문태준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어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를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시골 사람 채명신이 어떻게 그런 부잣집 딸의 손목을 잡을 용기를 냈을까. 아마도 산신령을 방불케 하는 그의 눈썹에 그 처녀가 먼저 반한 것은 아닐까?

 

그는 1948년 목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5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사실이 그의 일생과 조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가 5기생이기 때문에 박정희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박정희는 채명신이 유능하고 패기 있는 군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기도 하였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채명신과 박정희 사이 의견 충돌이 불가피했던 경우가 세 번 있었다. 채명신은 군인의 정치 참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군사 쿠데타에 가담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5·16 전날 밤에야 조창대 중령을 보내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협조를 부탁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채명신은 그 군사혁명이 실패했을 때 국가가 겪게 될 혼란을 상상하고 아찔하였다. 그는 즉시 1군 사령관 이한림을 만나서 설득하였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를 찾아가 협력을 요청했고,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뛰어들었다.

 

두 번째는 박정희가 2·18 민정 불참 선언을 번복하고 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군인답지 않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줄곧 침묵을 지켰다. 세 번째는 박정희가 국민에게 유신체제를 강요하면서 "유신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았을 때였다.

 

채명신은 그런 독재체제에 순응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박정희는 노발대발하였다. 그래서 채명신은 별을 하나 더 달지 못하고 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억울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한 번도 박정희를 원망하거나 못마땅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를 반대하는 능력 있는 군인이 군에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했을 것이므로 직업외교관도 아닌 채명신을 스웨덴이라는 먼 나라의 대사로 보냈던 것이다.

 

그의 군 생활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1948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주도 9연대로 발령받아 4·3사태로 뒤숭숭할 뿐 아니라 남한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소대장으로 위험천만한 나날을 보냈다. 1949년에는 보병중대장으로 승진하여 송악산 전투에 참여하였고 그해 11월에는 남파된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태백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전쟁 중에는 '백골병단(白骨兵團)'이라고 불리던 유격부대를 이끌고 여러 번 인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지어진 뒤에는 제3군단의 작전참모 그리고 이듬해에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비리 척결에 전심하며 훈련소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는 월남전에 한국군이 참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겼고 월남 사람들의 우상인 호찌민의 군대와 싸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으나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단호한 참전 의지를 표명한 박정희는 그에게 월남전 참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 연유로 하여 채명신은 뜻하지 않았던 길을 또 한 번 걷게 된 것이었다.

 

그는 늘 식구들에게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의 묘역에 묻어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당국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미망인 문정인이 대통령에게 직접 탄원서를 올려 마침내 허락이 떨어져 그는 월남전의 사병 전사자들과 함께 거기 잠들어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월남전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으로서는 명분이 뚜렷한 전쟁이었다. 김일성은 우리의 참전을 극구 비난했지만, 인민군의 재침을 사전에 봉쇄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웠다. 한·미 군사동맹은 한층 더 공고해졌고 미군은 한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라고 극찬하였다. 월남전에서 한국사령관을 지낸 채명신에게는 닉슨 대통령이 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끝으로 화랑도의 화신이며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군인 채명신에게 일제하에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들이 즐겨 불렀고 나도 좋아하는 시 한 수를 띄운다.

 

"공중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채명신은 죽지 않았다.

 


 

11월 25일 채명신(87) 초대 주 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별세하셨습니다. 6.25의 영웅은 백선엽 장군이고 월남전의 영웅은 채명신 장군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월남전의 영웅이 별세하셨습니다. 널따란 장군 묘역보다 좁은 사병묘역을 택하여 어려운 이 시대의 귀감(龜鑑)과 참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육사5기생인 그는 6.25때 소위로 참전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수없이 치렀고 월남전에서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도 유명하신 분입니다.  

 

▲ 만년의 채명신 장군


채명신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20대 나이에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1965년 육군작전참모부장 시절 주월 한국군 초대사령관에 임명돼 4년8개월간 지휘했습니다. 당시 주월 미군으로부터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고 태권도를 이용한 심리전과 대대급 소규모 작전으로 탁월한 전과를 올렸지요. 69년 이세호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귀국한 그는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지만 3년 뒤 대장 진급이 좌절되며 2군사령관(중장)으로 전역했습니다. 1926년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 47년 월남한 뒤 육사 5기로 군 생활에 들어섰습니다. 516 당시 5사단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까지 진출해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 사진을 꺼내 들고 월남전을 회고하는 채명신 장군

 

▲ 1966년 7월 일시 귀국한 채명신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가운데)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묻힌 월남전 전사자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월남전 참전용사 제2묘역의 사병의 묘비와 똑같은 고 채명신 중장의 임시 묘비

 


▲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예비역중장의 묘지에서 30일 삼우제가 열렸다.

특전사 군종 참모를 지낸 김충렬씨(75·목사)가 유가족들을 위해

아코디언으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최정동 기자]


전쟁(戰爭)은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悲劇)입니다. 대 참극(大慘劇)입니다. 그러나 그 참극은 역사라는 들판에서 잠시도 멈춘 일이 없습니다. 소인배(小人輩) 같은 지도자들이 판 치는 세태(世態)에 벼락과 같은 빛과 힘으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쟁을 치르며 가족과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역사와 함께 병존하고 대참극의 현장 속에서 직무를 수행하며 삽니다. 채명신 장군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살다간 주인공입니다. 그는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루고 쳐내려 온 공산군과 싸워야 했고 국가의 명을 받아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군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전쟁에서 죽어가는 젊은 부하들을 지켜 보아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실제로 그는 병사들의 주검을 보면서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업적도 모두 부하들의 공로로 돌렸다고 합니다. 그 같은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진실임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먼저 간 젊은 부하 사병 곁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령관이 장군의 묘역이 아니라 사병과 함께 영면(永眠)한 것입니다.

 

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지난달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 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항상 감사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