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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학살보고서] 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② 초등생·주부·부상자 총살까지

잠용(潛蓉) 2019. 5. 23. 22:13

5.18 진상 속속 공개
[5.18 학살보고서] 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KBS뉴스ㅣ2019.05.22 (17:27) 수정 2019.05.22 (18:08)  취재K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입니다.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진압 장면의 하나입니다.


1980년 잔혹했던 5월... 한 도시에서 열흘동안 165명 사망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동안 숨진 희생자는 몇 명일까? 검시보고서 등을 통해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165명입니다. 당시 광주직할시의 인구가 87만 3천여 명이었으니, 짧은 기간에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 165명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총상이 131명으로 가장 많았고, 특수 제작된 진압봉이나 소총 개머리판 등에 맞은 타박상이 18명, 차량 사고가 12명이었습니다. 심지어 대검에 찔린 사람도 4명이나 됩니다.


▲ 신군부 작성 5.18 사망자 165명 사인별 분류신군부 작성 5.18 사망자 165명 사인별 분류


전두환 씨 등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망한 165명은 계엄군에 위협을 가할만큼 극렬한 시위를 했던 걸까요. 또는 시위에 가담했다면 잔혹하고, 끔찍하게 진압을 해도 되는 걸까요. '고의적이고 악질적 의도 드러나'...신군부도 숨기려 했던 검시결과 검토 보고서 신군부도 이같은 점을 의식했는지 사망자들의 검시 결과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1985년 6월 작성된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섭니다.



▲ ‘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서‘5·18 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 보고서


▲8발의 총탄이 관통한 사망자 ▲유방이 칼에 찔리고 총탄 2발에 맞은 19살 여성 ▲임신 7개월의 임신부 사망 ▲온몸을 두들겨 맞은 뒤 총에 맞은 숨진 남성 등 시신에 '잔인한 상흔'이 많다고 기록했습니다. 특히 후면의 총상, 두개골의 자상 등을 볼 때 방어적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악질적인 의도가 드러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때문에 국회 자료 제출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하고 실제 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국민 대상 시위 진압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

전문가들은 5.18의 잔인한 학살행위는 1979년 부마항쟁 진압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분석합니다.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항쟁 교훈집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하고, 간담을 서늘케해 데모 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 보안사 작성 부마항쟁 교훈집 중보안사 작성 부마항쟁 교훈집 중


이에대해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당시 신군부가 정권 장악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공수부대 투입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게 아니라 적을 대상으로 전투를 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연관기사] 검시 기록으로 본 5·18…“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광주총국 기획 ① 다시보는 5.18 검시기록 “잔혹한 학살·고의적 살인”

[5·18 학살보고서]
① 검시 기록으로 본 학살
② 초등생·주부·부상자 총살까지   [곽선정 기자coolsun@kbs.co.kr]


[5·18 학살보고서] ② 초등생·주부·부상자 총살까지
KBS뉴스ㅣ곽선정 입력 2019.05.22. 18:05 수정 2019.05.22. 18:09 댓글 3234개 
 

▲ 사진출처/ 5·18기념재단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들에 대해 당시 신군부가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분류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사망자의 79%인 131명이 총상 사망자였는데요. 당시 군이 소지하고 있던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를 폭도로 분류했습니다. 군에 저항하려고 했기 때문에 총을 쐈다는 주장이었죠. 과연 그랬을까요?


KBS 취재팀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광주지검의 '변사체 검시보고'와 1997년 국립묘지 이장 당시 유골을 감정했던 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 또 검찰과 별도로 보안사가 작성한 검시참여 결과보고서와 1998년 공개된 사망자 검시내용 및 사망진단서, 각종 증언자료도 확보해 분석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망자들의 몸에 남겨진 흔적들이 전하는 당시의 사망 경위를 추적했습니다.


'맞아 죽은' 최초 사망자 '농아인 김경철'

5.18 당시 첫 사망자인 김경철(당시 24세) 씨. 1980년 5월 19일 금남로를 지나다 계엄군에 잡혔습니다. 김 씨는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인이었습니다. 장애인증을 내보이는 그에게 군인들은 대답하지 않는다며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 전신 타박상 입고 사망한 농아 청년 김경철 씨 사망 부위
 

그의 참혹했던 죽음은 검시 기록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뒤통수와 얼굴, 오른팔과 왼쪽 어깨, 허벅지, 엉덩이 등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멍이 들고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김 씨는 뒤통수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 불량하다" <대검으로 머리 찔러>... 시신 은폐까지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증언에 대해 유언비어라고 반박했던 신군부. 하지만 대검에 의한 사망자도 있습니다. 택시운전사 민병열(당시 31세) 씨는 전남대 앞에 세워둔 택시를 가지러 갔다 계엄군에 끌려갔습니다. 구금 상태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민 씨에게 공수부원이 자세가 불량하다며 대검을 휘둘렀습니다. 민 씨의 검시 내용을 보면 뒤통수에 길이 3cm, 폭 1cm의 자창과 선상 골절, 대검 추정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대검이 단단한 뒷머리뼈를 관통해 뇌를 직접 손상시켜 숨졌다는 뜻입니다. 실제 1997년 5.18 희생자들을 구묘역에서 국립묘지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유골 감정이 이뤄졌는데 민 씨의 유골은 뒷머리 골절이 확인됐습니다. 1997년 유골을 감정했던 박종태 교수(전남대 법의학 교실)는 "대검으로 해서 후두골 기저부가 골절이 됐다면 그건 굉장히 큰 힘으로 주어진 손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민병열 씨 시신검안서


▲ 대검에 뒷머리 찔려 사망한 민병열 씨 부상 부위


숨진 민 씨는 사망 후에도 고초를 겪었습니다. 광주 교도소 인근에 가매장 됐다가 열흘 이상 지나서야 망월묘역에 안장됐는데, 5.18 사망자들의 시신을 분산 이장해 망월 묘역을 없애려는 신군부의 '비둘기 작전'에 의해 1982년 가족도 모르게 화순으로 이장되기도 했습니다.


무차별 총격에 확인 사살까지... 시신엔 13발 총상도

계엄군이 지나가는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1995년 검찰 조사 등에서 버스 총격 사건은 1건으로 정리됐지만, 목격자 증언과 군 기록 등을 봤을 때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최소 2건 이상의 총격이 있었다는 주장은 여전합니다. 취재팀은 검시보고서 등을 토대로 주남마을 등 지원동 일대에서 발생한 차량 총격 사망자를 추려냈습니다. 관을 구하려고 버스에 탄 박현숙 씨, 화순 집으로 돌아가던 김춘례, 고영자 씨 등 13명입니다. 계엄군의 총세례에 버스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웅크리고 있었을 피해자들. 김춘례 씨의 경우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 기준 가슴과 복부, 허벅지 등에서 13개의 총상이 확인됐습니다. 다른 피해자들 역시 비슷하게 다발성 총상이 기록돼 있습니다. 같은 날 지원동에서 숨진 것으로 기록된 손옥례 씨는 총상뿐 아니라 가슴 부위에 자상까지 확인됩니다.


▲ 버스 속에서 온몸에 총상 입고 사망한 김춘례 씨 사망 부위
  

군이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뒤 차량에 올라가 확인 사살을 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습니다. 실제 11공수 박 모 소령은 1995년 검찰 조사에서 대원들이 차 속으로 들어가 총을 쐈다는 무전을 받았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부상을 입은 생존자 3명 가운데 남성 2명은 계엄군이 야산으로 데리고 가 사살했고, 시신은 암매장돼 있다가 열흘이 지나 마을 주민에 발견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체 검안 결과 머리 부분에 치명적인 총상이 발견됐습니다. 부상자를 즉결 처리했던 사실은 광주에 출동했던 공수부대원 최영신 중사의 1989년 양심선언으로 알려졌습니다. 취재팀이 최근 만난 최영신 씨는 "'없애버려' 이렇게 얘기하고 바로 `'너,너,너가 데리고가'... 조금 있으니까 총소리가 네발이 선명하게 울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군인 이동 경로 따라 사망자 발생,,, 오인사격 화풀이로 총살까지

5월 24일 광주 외곽 봉쇄를 맡았던 11공수부대는 20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광주 비행장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민가 방향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해 군인을 보고 손을 흔들던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당시 11세) 어린이와 저수지에서 놀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당시 12세) 학생이 사망합니다. 방광범 학생은 총상으로 추정되는 부상으로 왼쪽 두개골이 가로 16cm, 세로 18cm의 광범위한 크기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에 대해 이호 전북대 법의학과 교수는 "우발적 총상이나 유탄으로 볼 수 없고 키가 크지 않은 형체의 물체를 향해 정조준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 방광범 학생 시신 검안서


▲ 왼쪽 측두부 부상으로 사망한 방광범 학생 총상 부위


11공수는 광주 효천역 앞에서 보병학교와 오인사격을 벌입니다. 군은 오인사격을 확인하고 곧바로 사격 중지명령을 내렸지만 군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오자 그 일대에서 닥치는 대로 화풀이 보복 살인을 벌입니다. 집에 있다 공수부대원에게 끌려나간 권근립 씨 등 3명은 집 인근 철길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세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가슴부위 관통 총상이 확인됐습니다. 중학생 아들을 마중 나간 박연옥 씨는 군인을 보고 놀라 하수관로에 몸을 숨겼지만, 군이 뒤쫓아 총을 쏘면서 하복부와 회음부에 관통 총상을 입고 숨졌습니다. 하수관로에 웅크린 채 숨어있던 여성에게까지 총을 쏜 것을 증명하는 총상입니다. 이날 하루에만 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1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5.18 39주년... 반인도적 학살행위 진상규명 필요

1997년 대법원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전두환 씨 등에게 내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잡기위한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정작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이나 폭력에는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때문에 5·18 때 민간인을 살상한 행위를 국제법상의' 인도에 반하는 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조직인 군대를 동원했고 발포명령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주민이 죽거나 다쳤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사전에 계엄을 확대하는 등 민간인을 공격할 수 있는 정책이 있어 범죄 성립요건이 충족한다는 겁니다.


이재승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고 그리고 그것이 한두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것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은 이미 12. 12부터 시작되는 일종의 권력 탈취라는 목적에 의한 것"이라며 범죄 성립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문가들은 소급 처벌 등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앞으로 구성될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추가적인 사실을 밝혀내 사법기관에 수사 요청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합니다. 박경규 연구원(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은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도 이런 법률적 문제점과 쟁점들에 대해서 미리 준비하고 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공소시효가 없는 데다 전두환 씨 등 신군부는 물론 현장에서 작전에 관여한 군 고위 간부까지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검시 기록에 남겨진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군의 자위권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곽선정 기자 coolsun@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