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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흔적의 역사] 4. 직언과 배신 사이

잠용(潛蓉) 2019. 12. 18. 04:0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4. 직언과 배신 사이
경향신문ㅣ이기환 논설위원 입력 2015.07.14. 21:15 댓글 0개


“아첨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한다. 간쟁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목민심서>·사진).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성호 이익은 “바른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성호사설>)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직언, 즉 곧은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 신숙주는 “언로(言路)는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이라면서 “언로가 뚫리지 않으면 나라에 큰 병이 생긴다”고 했다.(<문종실록>)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은 “지나친 직언을 했다 해서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히고 결국 나라와 군주는 멸망에 이른다”고 했다(<양촌집>). 그랬기에 역대 군주들은 과할 정도로 직언을 구했고, 신하들은 죽을 각오로 군주를 다그쳤다.



직간의 ‘끝판왕’은 한나라 창업공신인 주창이었다. 주창은 황제(고조 유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지만 황제를 향해 서슴없이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라고 외쳤다. 유방이 맏아들 대신 애첩의 아들을 태자로 올리려 하자 직언한 것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의 다음 한마디가 청사에 길이 남는다.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열전’). 당나라 태종은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며 조회를 일찍 파했다. 재상 위징의 직언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내전에 들어온 태종은 “나를 욕보인 그 자를 죽이겠다”며 길길이 뛰었다. 그러자 부인인 문덕황후가 되레 “축하드립니다”라고 하례했다. 당 태종이 이유를 묻자 문덕황후는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하다는 뜻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선시대는 어떤가. 가뭄이 극심했던 1690년 숙종은 직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린다(<숙종실록>).


“임금이 부덕한 탓이다. 가여운 백성이 죽어가는데 차라리 죽고 싶다. 임금의 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라. 어떤 말이라도 벌하지 않겠다.” 재변에 임하는 임금들의 태도가 이렇게 저자세였는데도 대신들의 다그침에는 관용이 없었다. 1650년(효종 1년) 영의정 이경여는 “전하가 초심을 잃고 도량이 좁은 탓에 가뭄이 일어난 것”이라고 직언을 퍼부은 뒤 사퇴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효종은 “무능하다고 날 버리는 거냐. 날마다 직언을 올리고 내 허물을 고치게 하라”(<효종실록>)며 뜯어말렸다. 이것이 우리가 깎아내리기 일쑤인 ‘왕조시대’의 으뜸 덕목인 신하의 ‘직언’과 임금의 ‘소통’이었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