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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충성서약의 장’ 청와대 터

잠용(潛蓉) 2019. 12. 18. 15:3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충성서약의 장’ 청와대 터

경향신문ㅣ2012.02.01 21:23 
 

경복궁의 북문은 신무문(神武門)이다. 신무문 밖은 요즘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청와대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와대 본관 터가 조선시대 때 ‘공신회맹 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적다. ‘공신회맹’은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서약의 장’이었다.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지도(‘한양도성’)를 보자. 신무문의 북쪽에 회맹단이 표시돼 있다(사진).


‘회맹’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왕과 공신들은 제단 앞에서 4번의 절을 올렸다.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서 향불을 태웠다. 그런 뒤 ‘삽혈(삽血)동맹’을 펼쳤다. 제물의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이었다. 임금을 배신한다면 천지신명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맹세했다. 서로를 ‘혈맹’이라 했다.

 

▲ ‘충성서약의 장’ 청와대 터

  
조선조 태종은 개국과정에서, 그리고 1·2차 왕자의 난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안개정국이 이어졌다. 최측근 공신이라도 언제 배신할지 몰랐다. 태종은 5차례나 공신회맹제를 열었다. 틈만 나면 부하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극도의 공포심을 떨치려 했다. 1417년 4월의 회맹은 특별했다. “(공신의) 자손도 맹세를 바꾼다면 귀신이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다.”(<태종실록>)

공신과 그들의 적장자까지 죄다 모여 무릎을 꿇은 것이다. 1625년(인조 3) 4월의 회맹에는 공신의 적장자들까지 무려 391명이나 참석했다.


“우리 동맹인들은 배신하는 일 없이 억만년토록 유지하자.”(<인조실록> 등)

인조는 이날 “(광해군 때문에) 위태로워진 나라를 구하려 신하들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켰다”고 선언했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 
     
2000년 전 이야기인데…. 어디서 들어본 궤변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바로 그 논리…. 1995년 이른바 ‘12·12사태’ 주모자들이 검찰의 불기소 처분으로 면죄부를 받았던…. 소름 돋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닌가. 다시 ‘회맹 터’를 바라본다. 그 옛날 정권교체의 공신들이 혈맹을 맺은 저 곳.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그들이 모시는 주군에게만 충성을 다짐하기 일쑤였던…. 그러면 지금의 청와대는 어떤가?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