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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불길하니 딸이다”

잠용(潛蓉) 2019. 12. 18. 15:1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불길하니 딸이다”
한겨레ㅣ2012.01.18 20:51 수정 : 2012.01.18 23:48


▲ “불길하니 딸이다”
 

“부호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아들일까요(婦好娩 嘉)?” “신(申)일에 낳으면 길(吉)하니 아들일 것이다(申娩吉 嘉).” “(하지만) 갑인일에 낳았다(甲寅娩). 길하지 않았다. 딸이었다(不吉 女).”

은(상) 무정(武丁·기원전 1250~1192)의 왕비인 부호의 출산이 임박했다.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했다. 점(占)을 쳤다. 그 결과를 새긴 갑골을 보면 무정왕은 아들을 어지간히 바랐다.


하지만 출산 날짜를 맞추지 못해 딸을 낳았다. 갑골문은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다(嘉)’고 했다. 반면 딸을 낳으면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不嘉)’고 했다(사진은 출산하는 여성을 표현한 토우). 3200년 전의 일이다. ‘딸=불행’이라는 전통은 이어진다. 공자도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고 했다. 이유가 기막히다.

“가까이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近之則不遜 遠之則怨).”(<논어> ‘양화’)

주나라 무왕은 은(상)의 마지막 군주(주왕)를 치면서 출사표를 던진다.


“옛말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했소(牝鷄之晨 惟家之索).”
주왕이 부인(달기·달己)’의 말만 듣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꼬집은 것이다. 김부식도 선덕여왕을 비난하면서 “비천한 여자가 왕이 됐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삼국사기> ‘신라본기’)이라 했다.


하지만 ‘여인천하’가 태평성대였던 때도 많았다. 한나라 고조(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를 보자. 남편(고조)이 죽자 정권을 잡아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고조의 애첩이던 척부인의 손발과 눈귀를 없애 돼지우리에서 살게 했다. 그러면서 ‘사람돼지(人체)’라 불렀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달랐다.


“정치가 안방에서 이뤄졌지만 천하가 태평했고, 백성들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본기’)는 것이다. 당 고종의 아내인 측천무후는 국호를 주(周)로 바꿔 황제를 자칭했다(690년). 이후 15년간 피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과거제의 인원 수를 늘렸고, 농업 발전에 힘쓰는 등 성세를 이끌었다.


결국 역사가 ‘여자 핑계’를 대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었을 뿐…. 그러고보니 최근까지 여야 3당의 수장을 여성들이 차지했다. 은(상)의 정인(貞人·점을 담당한 관리)이 부활하면 이런 점궤가 나오지 않을까?    
“길(吉)하다. 기쁠 것이다(嘉). 그러니 딸을 낳을 것이다.”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