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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영국 소녀와 ‘춤바람’에 빠진 올림픽 선수단”

잠용(潛蓉) 2019. 12. 21. 06:3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영국 소녀와 ‘춤바람’에 빠진 올림픽 선수단”

경향신문ㅣ2012.08.08 09:48 수정 : 2012.08.08 12:53

 


▲ 당시 홍일점으로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이화여중생 박봉식이 원반을 던지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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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한국선수단)은~ 연습이 없을 땐 ‘딴스(댄스)’를 하고~ 모사(毛絲·털실)를 사러 저잣거리로 나간다. 그들이 조용할 땐 밥을 먹을 때 뿐….”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던 1948년8월13일 UP조선통신이 해괴한 기사를 타전한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들이 영국 소녀들과 댄스를 즐기는 등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대회가 끝난 뒤 농구협회와 축구협회는 “죽을 죄를 졌다”는 내용의 사과성명을 발표한다. 언론은 “선수는 선수대로, 감독은 감독대로 분열됐다”며 “합심하지 못한 결과”라고 전체 한국선수단을 매섭게 꾸짖는다.


유람단이냐 선수단이냐

“심지어는 어떤 감독은 일 개인에게만 지도를 하였으므로 선수는 선수대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찌 우승을 바랄까보냐? 집안에서 새는 박아지, 들에서도 샌다는 격언도 있거니와….”(<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방 이후 불과 2년 남짓,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단을 위해 거국적인 성원을 보냈다.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올림픽복권까지 발행해서 8만 달러의 출전경비를 마련해주었다. 경비조달에 한숨을 돌린 뒤 종목별 대표선수들을 선발했다. 축구·농구·역도·레슬링·마라톤·권투·사이클 등 7개 종목에 67명(선수 52명, 임원 15명)이었다. 하지만 선수선발 과정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52명 가운데 30대 선수가 31명(60%)에 달했다. 축구의 경우 엔트리 18명 가운데 11명이 30대였다. 농구는 9명 가운데 7명이, 역도는 8명 가운데 6명이. 레슬링은 4명 가운데 3명이 30대였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당초 1940년 올림픽은 일본 도쿄에서, 1944년 올림픽은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 유럽에서 제2차대전이 발발했다. 두 차례의 올림픽은 열리지 못했다. 당시 ‘팔팔’ 했던 선수들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KOREA’의 이름으로 꿈에 그리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니…. 서른을 훌쩍 넘긴 선수들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영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한창 때의 허명만을 믿고 각 경기단체의 고위층을 움직여 대표선수로 속속 선발됐다. 실력이 아니라 연장자의 순으로? 당대엔 장유유서가 통했던 것이다. 서로 가겠다는 ‘아귀 다툼’은 끔찍했다.


“그저 유람격으로 이번 기회를 노리고 덥어놓고 가야만 되겠다는 ‘갈주의’에 사로잡혀 세상에서 욕을 하든지 내 목적을 달성함에는 여하한 수단도 가리지 않겠노라고 무조건 하고 런던행을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이 반면에는 이번 올림픽에는 꼭 이 사람이 가야만 된다고 믿는 그 사람이 결국 못가게 된 것도 있다.”(<경향신문> 8월21일)


우물안 개구리의 우쭐한 자존심
그래도 사람들의 기대는 컸다. 특히 마라톤에 거는 기대가 유달랐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손기정)과 동(남승룡)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1년 전인 1947년 보스톤 마라톤 제패한 서윤복과 최윤칠이 건재하고 있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기록(2시간25분39)은 경이적이었다. 홍종오도 기대주였다.

축구의 경우 ‘근거없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동양권인 일본·중국과의 전적에서 늘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자신감의 근거였다.


당시 홍일점으로 출전한 이화여중 5학년생인 박봉식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18살 박봉식은 그 해(1948년) 4월 28일 올림픽파견선발전 투원반 경기에서 37.08m를 던졌다. 이 기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독일 선수가 던진 세계신기록(37m)를 능가한 것이었다.


이밖에 역도의 김성집(75㎏급)과 남수일(60㎏급)도 기대를 모았다. 복싱의 한수안도 한번 해볼만한 선수로 꼽혔다. 그랬으니 당시의 메달예상은 마라톤에서 금메달은 확실하고 축구에서 은·혹은 동메달, 역도·복싱에서 몇 개의 메달을 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물안 개구리였다. 기대를 모았던 박봉식은 여자 투원반에서 자신의 최고기록에도 못미치는 33.8m로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축구는 첫 판에서 아주 고무적인 성과를 냈다. 세계중상위권인 맥시코를 5-3으로 제압한 것이다. 김용식·배종호·이유형·민병대·홍덕영·정남식 등 나름 스타급으로 구성된 터여서 으쓱할만한 스코어였다. 2차전 상대는 스웨덴이었다. 얼핏 보면 한 수 아래의 팀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이 스웨덴을 3-2로 꺾은 바 있었으니까. 그 때 일본대표로 뛰었던 이가 바로 김용식이었다. 그랬으니 스웨덴을 앝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재앙이 일어났다. 스웨덴은 압도적인 체격과 체력을 바탕으로 당시로는 드문 논스톱 패스로 우리 팀을 압도했다. 전반 0-4, 후반 0-8, 합계 0-12.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최다실점패. 22살의 골키퍼 홍덕영은 50여 개의 슛을 막아내느라 혼쭐이 났다나 어쨌다나. 여담이지만 스웨덴은 축구 우승을 차지했다.


“아! 악몽의 레이스!”



▲ 해방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며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위해 거족적인 환송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환송행사에 모인 인파. /국가기록원 제공


마라톤은 악몽의 레이스였다. 8월7일 시작된 마라톤 레이스에서 최윤칠은 반환점을 돌면서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해서 27㎞부터 선두를 질주했다. 메인스타디움에서 기다리던 한국선수단은 38㎞ 지점까지 최윤칠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에 “이젠 우승이다”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막상 스타디움에 1착으로 들어오는 선수는 벨기에의 게일리였다. 또 반전이 일어났다.


마지막 트랙을 돌던 게일리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흐느적거렸다. 결국 뒤따르던 아르헨티나의 카브레라가 역전 우승했다. 게일리는 영국의 리처드에게까지 추월당해 3위로 걸어 들어왔다. 게일리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최윤칠은 40㎞ 지점에서 그만 다리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 것이다. 결국 최윤칠과 개일리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탈진한 틈을 타 카브레라가 어부지리로 우승한 것이다. 처음부터 부진했던 홍종오는 25위(2시간56분51초6), 서윤복은 27위(2시간58분51초6)에 머물렀다. 우승자 카브레라의 기록이 2시간 34분 51초였다. 4년 전 손기정이 세운 우승기록(2시간29분12초)보다 4분이나 늦은 기록이었다.


마라톤의 부진 소식이 전해지자 난리가 났다. <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보도.

“(마라톤) 참패소식이 라듸오를 통하여 국내에 알려지자 성미조급한 사람은 격분에 못이겨 ‘라듸오’ 통을 두드려 부셔버렸다는 등, 어떤 사람은 이번 마라톤 경주의 참패는 무슨 곡절이 꼭 잠재해 있다는 등 갖가지 억측과 유언비어가 날을 거듭하여 높아가고 있다. 두 사람 이상이 뫃인(모인) 곧(곳)에는 반드시 마라톤 참패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경향신문>은 참패의 원인 11가지를 꼽고 있다.

“1) 각 개인의 실력만을 위주로 삼어 전반적에서 기력을 미리 소모했다.

2) 국내에서의 협동정신 배양과 합동 연습기회가 단기간이었다.

3) 감독이 많아(두사람) 선수 각자가 누구의 지시를 받어야 옳을 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감독의 불통일.

4) 식사관계로 인한 도중의 사고발생.

5) 선수 각자가 코-취의 지시에 불복종한 것.

6) 조국의 영예를 몰각하고 자기개인의 영예를 위하여 서로 작전계획도 없이 질주하여 외국선수에게 어부의 리(利)를 주게 된 것.

7) 자기의 역량만 알고 남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것.

8) 최(윤칠)선수는 최선수대로, 서(윤복) 선수는 서선수 대로의 무모한 폭주는 우리가 실력부족하다든 홍선수로 하여금 유리하게 된 것.

9) 출발로부터 최선수는 단연 선두로 달렸으며 서선수는 선두를 안빼낄랴(빼앗기지 않으려고) 전반전에 너무 속도를 낸 것.

10) 이상 모든 결과로 인해 국내에서 측정한 자기기록(서윤복 2시간32분1초, 최윤칠 2시간34분41초, 홍종오 2시간39분35초) 등의 기록에도 및이지 못한 가장 불량한 기록을 짖고 만 것.

11) 한국 마라톤 선수들의 무모한 폭주는 드듸어 각국 마라톤 선수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및이게(미치게) 하여 국제적 위신을 일케(잃게) 하고 전체적으로 기록을 불량케 한 것,”



▲ 한국-스웨덴의 축구 2회전 경기. 한국은 스웨덴을 얕잡아 봤지만 0-12로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1가지 패인은 선수단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올림픽 출장전 합숙소에서~ 합숙의 목적을 몰각하고 A라는 선수는 개인행동을 취하여~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주어야 할 감독자조차 선수들을 합심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아무리 선수는 선수대로, 감독진은 감독진대로 불화햇다고 해도 3천만의 명예와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서로 합심해서 외적(外敵)에 당함이 마땅하거늘~.”(<경향신문> 8월20일)


최윤칠 선수도 훗날 당시 훈련방법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불평 같지만 연습이 잘못되었어요. 참가선수가 저하고 서윤복·홍종오 등 3명이었는데 모두 경기에 미숙했었어요. 이렇게 선수가 미숙하면 코치의 힘이 절대적인 것인데…. 그런데 시합 1주일 전에 선수 자신이 마음대로 조절하라니 ‘쉬면 조절될 것이다’하고 생각하고 하루에 30분도 연습을 안했거든요. 시합날은 40년 이래의 더위인데다 20마일 이상 지나면 체온이 식고 염분이 지나치게 나오니 경련이 일어나게 되더군요.”(<동아일보> 1964년 1월7일)


공업용 피부 도포제를 벌컥벌컥 한 까닭은? 

더 기막한 것은 역도에서 일어났다. 역도 60㎏급에 출전한 남수일은 이름난 술꾼이었다. 선수단 가운데 최고령 선수였다. 런던행 비행기에서 선수들은 승무원이 주는 조그만 병의 양주를 받았다. 남수일은 이게 웬 떡이냐며 들이킨 뒤 빈병을 가방에 넣었다. 이게 화근이 될 줄이야. 선수촌(초등학교)에 입촌한 남수일은 조사연구원으로 수행한 마라톤 영웅 손기정, 라디오 중계반 아나운서 민재호 등과 한방을 썼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손기정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육포와 대구포 등을 본 민재호가 입맛을 다셨다.


“달도 좋고 안주도 좋네, 여기에 술만 있다면….”

그러자 남수일은 자기 가방에서 3~4병의 술병을 꺼냈다. 병에는 한가득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게 문제였다. 사실 이 액체는 술이 아니었다. 공업용 살시실산이었다. 당시 선수단의 의무담당은 유한철씨였다. 그는 선수들의 근육을 풀어 줄 피부도포제를 사려고 런던의 약품시장을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2차 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의 물자사정도 좋지 않았다. 마땅한 제품이 없자 공업용 살리실을 대용품으로 구입해서 선수들에게 나눠주었다.

남수일은 바로 그 용액을 술병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재호가 술타령을 하자 깜빡 술로 착각하고 술병을 내놓았다. 세 사람은 기쁜 마음에 조그만 잔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한데 술맛이 유난히 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리실산액을 허벅지에 바르면 쏴하고 쏘는 기운이 뒷다리에 미칠만큼 독했다. 더욱이 공업용이었으니 제대로 마신다면 큰 일이었다. 손기정과 남수일은 두번째 잔을 사양했다.


▲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단의 단체사진. 30대 선수들이 60%를 차지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난 민족 반역자야!”

하지만 민재호는 “운동선수들이 뭐 그러냐”고 호기를 부리며 벌컥벌컥 마셔댔다. 큰 일이 일어났다. 손기정과 남수일은 데굴데굴 구르다 화장실에서 모두 토해냈다.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었던 둘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끙끙 앓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후. 괴성이 선수촌을 뒤덮었다. 민재호가 뒤늦게 발작을 일으켜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몸집이 컸던 민재호의 비명은 마치 곰의 울음소리 같았다. 축구·농구·육상선수들 모두가 창졸간에 달려왔다. 공업용 살리실산 용액을 벌컥벌컥 마셔댔으므로 죽지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진통제를 맞은 뒤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났다. 축구가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기록적인 참패를 당한 것이다. 민재호는 그 참사의 소식을 듣자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나 때문이야. 나!”

자신이 살리실산 용액을 마시고 광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축구선수들이 잠을 설쳤다는 것이었다.


 

▲ 올림픽 출전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올림픽복권. 복권 앞면에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씨의 사진을 넣었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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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태 때문이야. 난 민족 만역자야!”

급기야 민재호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죽어버리겠다고 자해하기 시작했다. 남수일과 손기정은 자해하는 민재호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떻든 생명을 건진 세사람은 이날을 재생의 기념으로 삼고 의형제를 맺었다. 남수일은 이 소동후 이틀만에 경기에 나섰지만 4위에 그쳤다. 페더급인 남수일이 갖고 있던 공인기록은 335㎏이었다. 하지만 그날 만신창이가 된 남수일은 겨우 307.5㎏을 드는데 그쳤다. 만약 그가 자신의 공인기록만 들었어도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해프닝일 터….


첫 오심의 희생자
또 하나 기막한 일이 복싱에서 일어났다. 복싱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은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코만을 2회2분만에 KO로 물리치고 4강에 올랐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한수안을 양쪽 고막을 다쳐 고열에 시달렸다. 한수안의 4강 상대는 이탈리아의 반디낼리였다. 한수안은 다음 날 오후 8시가 경기시간인 줄 철석같이 믿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시간이 오후 5시일 줄이야. 경기시간이 바뀐 것이 한국선수단에게 통보됐지만, 그 사실이 코치와 선수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안 한수안은 부랴부랴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경기시간에 닿았다. 하지만 식사도 못하고 여전히 터진 고막 때문에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상대인 반디낼니는 한수안이 강적이라 생각하고 덤비다가 3번이나 파울을 범했다. 하지만 실격이 선언되지 않았다. 아깝게 판정패한 한수안은 이튿날 3~4위전에서 승리, 동메달을 땄다. 당시 선수단의 임원으로 참가한 정상윤(선수단 총무 겸 농구감독)의 회고.


“한수안은 사실은 금메달을 딸 것이었어요. 코리아가 알려지지 않은 핸디캠 때문에 심판의 편견이 우승을 막았죠.‘(동아일보 1964년 1월7일)
그렇게 보면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이 지긋지긋하게 당한 ‘오심의 시발’이 바로 한수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희대의 판정번복 사태도 일어났다. 남자육상 400m에 출전한 미국팀은 1위로 골인했다.


 

▲ 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 기사. 런던올림픽 참패의 요인을 6회 시리즈로 다뤘다. 신문은 선수들이 합심을 하지 못하고 사리사욕에 움직인 결과 참패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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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심판진은 바통터치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실격판정을 내렸다. 미국팀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심판의 심의는 사진필름까지 동원된 끝에 4일간이나 벌어졌다. 판정은 결국 번복됐다. 오심·판정번복의 역사는 이렇게 시공을 초월해 일어나는 것인가?

또 하나의 성과는 잘 알려졌듯이 역도 75㎏급의 김성집이 당당 동메달을 딴 것이었다. 김성집은 이집트의 엘 투니와 같은 합계 380㎏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계체량에서 1.92㎏ 가벼운 김성집이 동메달을 가져왔다. 이 동메달은 한국이 KOREA라는 이름으로 딴 첫번째 메달이었다.


당시 런던올림픽 조직위는 메달집계가 아니라 6위 이내의 입상자까지 점수를 부여했다. 동메달 2개를 딴 한국은 종합점수 13.75점로 참가 59개국 가운데 24위에 올랐다. 동양권에서는 인도(금 1개)에 이어 2위의 성적이었다. 미국(645.5점)과 스웨덴(347점), 프랑스(224점)가 1·2·3위를 차지했다.


“영국 소녀와 딴스(댄스)에 빠졌던 한국선수단”

올림픽이 끝나자 책임론과 문책론이 거세게 일었다. 정식감독을 보내지 않은 조선농구협회과 조선축구협회는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했다.

“우리 겨레가 1억5000만원의 올림픽 후원권(복권)을 샀다고 하여 뽐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좋은 기술이 있었음에도 합심이 없어졌다는데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하는 것이다.”(<경향신문> 1948년 8월22일)


 

▲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단이 입촌식을 참석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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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선수단이 지탄을 받은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UP조선통신의 보도 내용이었다.

“그들은(한국선수단) 아침부터 밤늦도록 행복을 누리고 있다. 연습이 없을 때엔 ‘딴스(댄스)’를 하고 소학교(선수촌으로 쓰던 곳)의 피아노를 치고 또 물건을 사러 저자로 나가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조용할 때란 식사 때 뿐이다.~이젠 제법 이곳 소녀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딴스를 즐기고 있으며 그들의 일부분은 고국으로 가지고 갈 모사(毛絲)를 희망하고 있다.”


동메달리스트 김성집이 BBC방송를 통해 “국기게양식 당일밤 우리 일행은 정신통일이 못되어 매사에 큰 지장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도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같은 소식은 참패 후 그 원인조차 모르고 있던 국내동포들에게 불타는데 부채질격으로서 큰 분격을 주었다. ~이와같은 일이 일이 설사 있어도 한번쯤 관대하게 용서하여 차후에 이런 일이 없도록 잘 지도하는 것도 사랑에서 용솟음치는 정리일 것이다.”(<경향신문> 8월24일자)


이같은 보도가 과장됐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국내여론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런던대회에 참석한 정상윤은 선수단이 ‘댄스에 빠졌다’는 보도에 이와같이 해명했다.

“영국에서는 우리의 구청장 비슷한 사람이 대회가 끝나자 돌아가며 파티를 열어주었어요. 우린 농구선수가 영어도 제일 나은데다 ‘댄스’도 할 줄 알아 파티에 보냈죠. 그런데 그곳 UPI기자가 코리아는 야만국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지 영어도 하고 ‘댄스’도 한다고 제깐엔 신기해서 쓴 것이 와전된 것 같아요.”(<동아일보> 1964년 1월7일)


뭐, 판단은 독자에 맡겨야 할 것이다. 어찌됐든 런던의 64년 전 모습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그들(한국선수단)은~ 연습이 없을 땐 ‘딴스(댄스)’를 하고~ 모사(毛絲)를 사러 저잣거리로 나간다. 그들이 조용할 땐 밥을 먹을 때뿐….”


런던올림픽이 한창이던 1948년 8월13일 UP조선통신발로 해괴한 기사가 타전된다. 한국선수들이 영국 소녀들과 댄스를 즐기는 등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었다. 선수단은 “합심(단합)이 없으니 죽일 놈, 살릴 놈 소리를 듣는 것”(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자)이라는 욕을 먹었다.

“집 안에서 새는 박아지, 들에서도 샌다는 격언도 있거니와 바로 우리 선수단을 두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경향신문)


대체 무슨 일인가? 사람들은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첫 출전한 선수단에 거국적 성원을 보냈다. 올림픽복권까지 발행해 8만달러의 출전경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잡음이 터져 나왔다. 30대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온갖 로비를 벌여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52명 가운데 30대 선수가 60%에 달했다. 그래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과 최윤칠 등이 버틴 마라톤은 확실한 금후보였다. 하지만 믿었던 마라톤은 악몽의 레이스가 됐다. 38㎞까지 선두를 달리던 최윤칠이 탈진한 것이다. 결국 기권했다. 서윤복은 27위로 처졌다. 사람들은 ‘라듸오통’을 집어 던졌고,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맞았다. 과연, 선수단 내 알력이 있었다.


“선수가 코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초반 레이스부터 우리끼리 폭주(暴走) 함으로써 외국선수에게 어부의 리(利)를 주었다.”(경향신문 8월19일자)
역도의 남수일은 피부 도포제로 구입한 공업용 살리실산 용액을 술(양주)로 잘못 알고 마시는 바람에 경기를 망쳤다. 4위에 그쳤다. 역시 살리실산 용액을 벌컥벌컥 들이켠 민재호 아나운서는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 때문에 한국선수들 모두 밤잠을 설쳤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한국축구는 스웨덴에 0-12로 대패했다. 민재호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죽는다”고 자해했다. “내 추태 때문이야. 내가 민족반역자야!”
  
동메달을 딴 복싱의 한수안은 앞당겨진 경기시간을 착각해 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준결승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맞상대인 이탈리아의 반디낼리가 3번이나 파울을 범했지만, 주심은 실격처리하지 않았다. 억울한 판정패. 그렇게 보면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을 괴롭혔던 ‘오심의 시발’이 바로 한수안이었을까. 어떻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참고자료>
<한국역사전1-순간의 힘을 모아>, 조동표, 국민체육진흥공단, 1998
<스포츠영웅, 영원한 올림피언 김성집>, 고원정, 대한체육회, 2012

, 대한올림픽위원회, 1996
<올림픽정치사>, 허복·오동섭, 1985
<올림픽인간드라마>, 오도광, 기시모토 겐·가와즈 히데오, 고려원, 1985
<한국농구 80년>, 대한농구협회, 1989
<불멸의 혼 손기정>, 이태영, 대한체육회, 2012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