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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1794년 4월, 한양에서 생긴 일

잠용(潛蓉) 2019. 12. 24. 07:0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794년 4월, 한양에서 생긴 일

경향신문ㅣ2013.03.12 17:18 수정 : 2013.03.13 14:22



▲ 박제가의 <성시전도시>. 조선의 수도 한양의 풍물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박제가의 시는 정조가 실시한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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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배들은 허리로 인사하고,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吏胥之拜拜以腰 市井之唾唾以齒)”

실학자 박제가가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 남긴 18세기 말 한양의 풍경이다. 하급관리인 아전들의 ‘허리인사법’이 무엇인지는 쉽게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빨 사이로 침을 뱉은 시정잡배들의 인사법이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뭐 지금으로 치면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 동네 양아치들의 전형적인 행태가 아닌가. 이유원(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는 재미있는 일화를 전한다.


어느 날, 이유원과 필담을 나누던 중국사람이 물었다.

“박제가의 시를 보면 ‘이빨 사이로 침을 뱉는’ 시정배들의 인사법이 있다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유원은 순간 당황했다. 조선 시정배들의 불량스런 ‘침뱉기’가 부끄러워씩 때문이었다. 이유원은 잠깐의 생각 끝에 딴청을 피웠다.

“아! 이 시는 내가 처음 보는 시인데요? 그래서 이해를 잘 못하겠네요.”


그러자 중국 사람은 빙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중국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는 듯 그냥 넘어간 것이다.
정조 임금은 조선의 치부를 드러낸 이 박제가의 시가 남의 나라(중국)에 퍼져 놀림감이 되는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임하필기>는 “정조가 박제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자를 색출해서 처벌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규경은 조선 시정배들의 인사법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한 박제가의 시를 두고 “당대의 실정을 잘 형용했다(乃善形容者也)”고 칭찬했다.(<오주연문장전산고>>)


18세기 한양의 풍물을 전하다

그런데 <성시전도시>는 박제가 만의 작품이 아니다.

박제가는 물론, 이덕무, 유득공 등 당대 문사들이 총출동, <성시전도시>를 주제로 시를 썼다. 무슨 말인가. 시간을 돌려 지금으로부터 219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자, 여러분들 <성시전도>를 보고 시(詩)를 지어 바쳐라. 기한은 사흘 뒤 묘시(卯時·오전 5~7시)까지다. 그때까지 제출하라.”


1794년 4월 24일, 정조 임금은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험과제를 낸다. 시험문제로 제시된 <성시전도>는 현전하지 않고 있다. 18·19세기 한양 전역의 풍물을 그린 대형 병풍 혹은 두루마리로 추정된다. 1792년 정조의 명으로 제작됐다. 정조는 완성된 <성시전도>를 보고 ‘7언(言) 100운(韻)의 고시를 지으라’고 명한 것이다. 정조가 규장각 관리들을 대상으로 시험문제를 출제한 까닭이 있었다.

“각 관리들이 사륙문(四六文·중국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하던 4자, 6자 배열 한문 문체)에 능하지 못하다. 한번 시험해보고자 한다.”(<청장관전서>)



▲ <성시전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태평성시도>. 결혼, 장원급제자, 귀부인의 행렬과 상업, 노동, 농사 등에 종사하고 여가를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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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은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7언 백운(百韻)의 장편시를 창작해서 제출했다. 정조는 답안을 직접 평가한 뒤 등수를 발표했다.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申光河)였고, 2등은 검서관 박제가(朴齊家)였다.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 4등은 승지 윤필병(尹弼秉),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유득공(柳得恭)이었다. 정조는 이들 6명의 시에 직접 어평(御評)까지 남겼다.


신광하에게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畵)’, 박제가에게는 ‘말할 줄 아는 그림(解語畵)’라 했다. 이만수는 ‘아름답다(가)’, 윤필병은 ‘넉넉하다(贍)’, 이덕무는 ‘고아하다(雅)’, 유득공은 ‘모두가 그림이다(都是畵)’라는 평을 들었다. 이들 6명을 포함해서 모두 17명이 상을 받았다. 시를 제출했으되 수상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정식 시험에서 제출한 시가 아닌, 개인적인 창작품도 있었다.


이 가운데 현전하는 <성시전도시>는 12편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발굴해서 정리했다.

즉 정조의 어평을 받은 6명 가운데는 신광하·박제가·이만수·이덕무·유득공 등의 시가 전해진다. 상을 받지못한 서유구의 시도 알려졌다. 이밖에도 개인적인 창작품인 신택권·이학원·신관호의 세 작품이 있고, 최근 안교수가 소개한 정동간과 이희갑, 김희순의 작품이 있다. 안대회 교수의 연구논문을 타임머신으로 삼아 18세기 한양을 방문해보자.


200년 전 사당패의 공연

<성시전도시> 가운데 주목되는 작품은 앞서 소개한 박제가와 신택권, 신관호, 이학규의 시(詩)다.

대부분의 시들이 정제되고 고답적인 언어로 한양의 풍경을 묘사해지만 이들은 있는 그대로,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냈다. 특히 당대의 풍물을 당대 시장바닥의 말로 뱉어내는 어법을 사용한 것이 눈길을 잡아끈다. 안대회 교수의 표현대로 ‘비속(卑俗)의 풍격(風格)’이라고 할까. 정조가 직접 주관한 시험에서 2등을 차지한 박제가의 시가 대표적이다.


사실 박제가는 당대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한 독설가였다. 그는 “사대부는 놀고 먹을 뿐 하는 일이 없으며, 성 안에 분뇨가 넘치고, 냇가의 석축에 인분이 가득차 더러운 냄새가 가득하다”고 비판한 인물이다.(<북학의>) 하지만 임금(정조)이 직접 주관한 시험에서까지 마냥 조선을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인(仁)의 성(城)과, 의(義)의 시장에 나라를 세워 번성함과 화려함만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임금(정조)이 박제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자를 색출해서 처벌했을만큼 한양의 풍물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물가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일세.~ 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며 성을 내며 노려본다.”



▲ 19세기 거리 풍경. 복덕방과 술집이 함께 늘어서 있다.


19세기 한양 뒷골목의 풍경이다. 특히 개들이 옷을 갈아입은 개백정을 알아보고 쫓아가 짖어댄다는 대목에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을 개백정의 얼굴이 떠오른다.

“배우들 옷차림이 해괴하고 망측하다. 동방의 장대타기는 천하에 없는 거라. 줄타기와 공중제비하며 거지처럼 매달렸다. 한 곳에선 꼭두각시 무대에 오르자 동방에 온 칙사(勅使)가 손뼉을 친다. 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


200여 년 전 한양의 시장에서 벌인 광대와 사당패의 공연 한 편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박제가는 이 시를 쓰고는 “이언(邇言), 즉 천박하고 깊숙한 맛이 없는 시일 수밖에 없다”고 자인했다.


담배연기에 휩싸인 한양

신택권의 <성시전도시> 또한 흥미롭다. 담배가 대유행했음을 알리고 있고, 또한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중개업자가 한양의 주택시장을 쥐락펴락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위로는 정승판서부터 아래로는 가마꾼까지/안으로는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즐기지 않으며~잔치자리 첫 대면에는 이 물건을 못빼놓고 비변사 공무로는 저것을 넘어서는 게 없네/연다(烟茶·담배)와 술은 어느 것이 좋은가?”


 

▲ 19세기 한양의 기와집 밀집촌. 당시 부동산중개인들은 번화가에 있는 집들을 투기대상으로 삼았다.
 
정승판서부터 가마꾼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담배가 대유행했음을 알리고 있다. 뿌리깊은 기호품인 술과 비견될 정도로…. 하기야 어디 정승판서 뿐이랴. 중흥군주라는 정조 역시 희대의 골초였다.

정조는 당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며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초(담배)’를 내걸었다.(1796년 11월18일)


그는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며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고까지 했다. 심지어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담배예찬론’을 편다. 임금이 담배를 그토록 애호했으니 백성들은 오죽했으랴. 신택권의 시가 바로 담배연기에 휩싸인 당대 한양의 풍속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강남은 어디?

“특히 집주름(가쾌·부동산 중개업자)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천 냥을 매매하고 백냥을 값으로 받으니(千민買賣百緡價)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역시 신택권의 시에 나타난 한양의 풍속이다. 18세기 한양에 이른바 부동산 중개업자가 ‘동쪽 집, 서쪽 집’으로 이사를 유도하고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부동산 중개료가 매매가의 10분의 1임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남촌과 북촌에는 이름난 집들이 몰려있어/부귀한 자는 성세(聲勢)에 기대야지/예부터 양반은 조용하고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自古兩班喜靜僻)/지금은 사대부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而今士夫貪喧비)”

 


▲ 술자리를 벌이는 남자들. 18세기에도 의기투합한 남자들끼리 하이파이브로 인사하고 침을 잇 사이로 쓰윽 뱉는 불량기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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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이 시대에도 곳에 따라 집의 가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유층은 동네의 이름값과 위세를 감안해서 지금의 강남과 같은 특정한 곳에 모여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시대에 따라 부촌의 조건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외진 곳을 선호했던 양반들이 낮고 번화한 동네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던 것 같다.

“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고 했으니 말이다.


부동산 중개업자를 뜻하는 집주름(가쾌)의 존재는 <영조실록>에도 나온다.

“윤성동이라는 인물이 사족(士族)인데도 집주름, 즉 부동산 중개업을 생업으로 삼았으니 이런 무뢰배가 어디있겠냐”고 탄핵하는 기사다.(1753년)

이 기사로 미뤄보면 당시 부동산 중개업이 성업을 이뤘고, 이 직업을 가진 자를 좋게 보지 않고 ‘무뢰배’로 폄훼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판 힙합전사의 인사법

‘의리’를 외치며 의기투합하는 한량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직도 연조(燕趙)의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 말 달리고 투계(鬪鷄) 하면서 한 자나 되는 칼을 찼네. 문득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酒樓茶肆掌一抵)”


이 시는 전국시대를 풍미하던 천하의 협객을 그리며 ‘의리’를 외쳤던 한양 한량들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의기투합한 한량들끼리 만날 때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장면이 생생하다. 어찌보면 ‘힙합전사들’의 독특한 인사법같기도 하고…. 다음 시귀가 걸작이다.

‘취한 뒤엔 고담준론, 공자들을 압도하며 한평생 호화로움 언제나 자신하네.(醉後高談凌五公 一生豪華長自恃)’


술에 취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대고…. 심지어는 ‘인천 앞바다에 배들어 오면’하는 허풍을 해대는 꼴이라니…. 이 시는 홍문관 교리이자 초계문신(抄啓文臣·규장각의 엘리트 문신)이었던 김희순(1757~1821)의 작품이다. 박제가의 시처럼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한양의 풍속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광통교 색주가, 구리개 약국노인

이밖에도 시장통 뭇사람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증거한 시들도 있다.

“바닥에 쌓인 생선에선 비린내 살살 풍겨오고/사람보고 냅다 달리는 놈은 돼지라네.~까만 머리 어른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를 이고/동이가 울며 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이학규의 <성시전도시>)

“가련타! 광통교 색주가는 별자(別字) 쓴 등을 걸고 탁자에 늘어놓았네./가련타! 구리개 약파는 늙은이는/망건쓰고 어슬렁거리며 주렴 안에 머무네.”(신관호의 <성시전도시>)


뭐 무슨 설명도 필요없다. 종로~청계천~을지로를 무대로 살아간 시장 사람들의 ‘하루하루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야말로 한 편 한편이 200여 년 전 ‘한양의 거리와 시장’을 주제로 한 르포르타주의 결정체 같다. 지금으로 치면 신문사 사회부 현장기사? 그러고 보니 <성시전도시>를 쓴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고담준론을 논하는 학자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사회부 기자’의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지금 기자들이라면 한번 비교해보라. 자신이 쓴 가사들과 200여 년 전 학자이자 기자였던 분들의 <성시전도시>를…. 필자는 부끄럽기만 하다.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市井之唾唾以齒).”


실학자 박제가가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사진)’에 남긴 18세기 말 한양의 풍경이다. 지금으로 치면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 동네 양아치들의 인사법이다. 정조는 조선의 치부를 드러낸 박제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자를 처벌했다(<임하필기>). 그런데 ‘성시전도시’는 박제가의 작품만이 아니다.


정조는 한양의 풍물을 화폭에 담은 ‘성시전도’를 완성한 기념으로 규장각 관리 등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을 펼쳤다(1794년). 이후 상당수의 문인들이 ‘성시전도’에 그려진 ‘한양의 풍물’을 주제로 시를 읊었다. 안대회 교수(성균관대)가 발굴 정리한 12편의 ‘성시전도시’는 당대 한양의 풍물을 생동감있는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위로는 정승판서부터 아래로는 가마꾼까지/안으로는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즐기지 않으며….”(신택권의 ‘성시전도시’)


담배의 대유행을 묘사하고 있다. 하기야 당시 골초의 대명사는 다름 아닌 정조 임금이다. 정조는 1796년 “남령초(담배)만큼 유익한 것은 없다”며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초’를 내걸 정도였다. 그러면서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며 담배예찬론을 폈다. 신택권은 또 부동산 중개업자(집주름)의 부동산 투기도 고발했다.

“집주름이… 동쪽 사람에게 서쪽 집 가리키고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받으니(千민買賣百緡價)…. 예부터 양반은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지금은 사대부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而今士夫貪喧비).”


사람들에게 ‘동쪽 집, 서쪽 집 사라’며 매매를 부추겨, 매매가의 10분의 1을 부동산 중개료로 챙겼고…. 또 조용하고 외진 곳을 선호했던 양반들이 부동산 바람을 타고 낮고 번화한 동네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양의 한량들은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친다(酒樓茶肆掌一抵)”고 했다(김희순의 ‘성시전도시’). 저들끼리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한량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으로 치면 ‘힙합전사’들의 독특한 인사법 같기도 하고…. ‘성시전도시’ 한 편 한 편은 200여년 전 ‘한양의 거리와 시장’을 주제로 한 르포르타주의 결정체다. ‘성시전도시’의 저자들은 고담준론을 논하는 학자였지만, 동시에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고 고발하는 ‘기자’였음을 알 수 있다.

“위로는 정승판서부터 아래로는 가마꾼까지/안으로는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즐기지 않으며….”(신택권의 ‘성시전도시’)


담배의 대유행을 묘사하고 있다. 하기야 당시 골초의 대명사는 다름 아닌 정조 임금이다. 정조는 1796년 “남령초(담배)만큼 유익한 것은 없다”며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초’를 내걸 정도였다. 그러면서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며 담배예찬론을 폈다. 신택권은 또 부동산 중개업자(집주름)의 부동산 투기도 고발했다.

“집주름이… 동쪽 사람에게 서쪽 집 가리키고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받으니(千민買賣百緡價)…. 예부터 양반은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지금은 사대부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而今士夫貪喧비).”


사람들에게 ‘동쪽 집, 서쪽 집 사라’며 매매를 부추겨, 매매가의 10분의 1을 부동산 중개료로 챙겼고…. 또 조용하고 외진 곳을 선호했던 양반들이 부동산 바람을 타고 낮고 번화한 동네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양의 한량들은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친다(酒樓茶肆掌一抵)”고 했다(김희순의 ‘성시전도시’). 저들끼리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한량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으로 치면 ‘힙합전사’들의 독특한 인사법 같기도 하고…. ‘성시전도시’ 한 편 한 편은 200여년 전 ‘한양의 거리와 시장’을 주제로 한 르포르타주의 결정체다. ‘성시전도시’의 저자들은 고담준론을 논하는 학자였지만, 동시에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고 고발하는 ‘기자’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안대회, <도시문화사 ;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35권, 한국고전문학회, 2009

<성시전도시 9종>, ‘문헌과 해석’ 봄호, 문헌과 해석사, 2009

<새로 찾은 ‘성시전도시’ 세 편과 ‘평양전도시’ 한 편>, ‘문헌과 해석’ 봄호, 문헌과 해석사, 2013


[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