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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국왕의 주치의는 '대장금'

잠용(潛蓉) 2019. 12. 22. 23:2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왕의 주치의는 '대장금'

경향신문ㅣ2013.03.06 09:47 수정 : 2013.03.06 15:25


▲ 경혈을 나타낸 인체도. 경혈을 점으로 새겨 표시하고 기혈 흐름을 선으로 나타났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의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遂使男醫按摩肌膚) 망측합니다.”(<태종·세종실록>)
1406년, 조선이 여의사 제도를 도입한 까닭이다. “남의의 진맥이 부끄러워 병을 숨겨 죽는 부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각 도의 관비 가운데 10~15살 사이의 영리한 동녀(童女)를 뽑아 ‘서울 국비 유학’을 시켰다. 이들은 사서(四書)는 물론 어려운 의학서적까지 독파해야 했다. 3년 연속 ‘불통(不通)’을 받으면 다시 관비로 전락했다.


조선시대 여의 가운데 으뜸은 대장금(大長今), 흑온 장금(長今)일 것이다. 대장금은 1515년부터 1544년까지 무려 29년간이나 왕(중종)을 그림자처럼 보살폈다.

사실 대장금, 혹은 장금이 국왕(중종)의 명실상부한 주치의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중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장금=임금 주치의’였을 가능성이 짙다.


대장금을 총애한 중종
대장금(혹은 장금)이 실록에 등장한 것은 1515년(중종 10년)이다. 중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원자(훗날 인종)을 낳고 일주일만에 죽자 문제가 생겼다. 의원 하종해와 의녀 장금 등이 ‘약을 잘 못 쓴 죄’로 탄핵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의녀 장금의 죄가 더 컸다. 장금이 장경왕후의 증상을 전하면 의원(하종해)이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의녀 장금을 도리어 두둔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이 어찌 약처방과 관계가 있는가. 또 의녀 장금은 왕후의 출산에 공이 커서 당연히 큰 상을 받았어야 했지만, 대고(大故·왕후의 죽음) 때문에 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베풀지 못할 지언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


원자인 인종을 출산하는데 공을 세운 장금을 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지만, 중종은 일축하고 만다. 장금의 기록은 7년 뒤인 1522년 다시 등장한다. 중풍과 감기를 앓던 자순대비의 병이 호전되자 임금이 의녀 장금과 신비(信非)에게 쌀과 콩 각 10석씩 하사했다는 기록이다. 1년 뒤인 1524년 중종은 의술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대장금에게 전체아(全遞兒)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조금 괜찮아 대내(大內·왕과 왕비, 대비의 거처)를 출입하면서 간병하니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어라.”(<중종실록>)


의녀는 원래 전체 인원이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근무기간 동안 급료를 받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중종은 왕와 왕비, 대비전을 드나들며 간병하는 대장금에게 전체아, 즉 ‘상근하고, 급료의 전부를 지급받는 내의녀’의 직분을 하사한 것이다.


“장금이만 남기고 다 나가라”

<중종실록>을 보면 대장금이 대전에 머물면서 직접 임금(중종)을 돌봤음을 알 수 있다.(1544년)

“의녀 장금이 나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상(중종)께서 삼경(밤 11~새벽 1시 사이)에 잠 드셨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 됐습니다.고 했다.”


중종은 이 즈음, 재미있는 명령을 내린다.

“아침에 의녀 장금이 내전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약방에 전교했다. ‘지금 제조와, 의원, 의녀들이 모두 왕래하고 있는데 이제 의원과 제조는 해산하여 돌아가라.”

중종이 의녀 장금만을 남기고 제조와 남자의원들을 모두 내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찌 여자에게 몸을 맡기시옵니까.”

중종은 의원들 대신 장금의 진맥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요즘 풍한증이 있구나. 맥을 짚은 의녀의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올리라.”(1532년), “소소한 약에 관한 의논은 의녀를 통해 전해줄 터이니….”(1544년), “대소변이 보통 때와 같지 않구나. 의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써야 할 약을 의논하여라.”(1544년)


이 <실록>에 나오는 의녀가 대장금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록>은 임금의 병을 치료한 의녀 대장금에게 상급을 내리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여러 달 병을 앓다가 거의 회복됐구나.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 쌀과 콩 각 15석씩 내리고….”(1533년),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 도합 5석, 은비에게 쌀과 콩 3석씩 하사하라.”(1544년)


대장금이 사실상 중종의 주치의였음을 알려주는 방증자료들이다. 대신들은 이같은 대장금의 활약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내의원 총책임자인 제조 홍언필 등이 불만을 터뜨렸다.

“의녀의 진맥이 어찌 의원의 정밀한 진찰만 하겠습니까. 천박한 의녀의 식견보다는 의원들의 진맥을 받으소서.”(1544년)

 


▲ 신윤복의 풍속화. 의녀(가운데) 기생들과 함께 국왕이나 관리들이 베푸는 연회에 불려가는 신세였다.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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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이비인후과 전문의 ‘장덕과 귀금’

대장금만큼은 아니지만 의술로 이름을 떨친 의녀들의 이름도 <실록>에 심심찮게 보인다.

예컨대 제주출신 의녀 장덕(張德)과 그의 제자 귀금(貴今)의 진료과목은 치과와 이비인후과였다. 그런데 두 여인의 의술은 당대(성종 시대) 최고였던 것 같다. 1488년 <성종실록>을 보자.

“잇병을 잘 고치는 의녀 장덕은 이미 죽었다.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다. 이·눈·귀 등 여러가지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뽑아보아라.”


장덕은 충치는 물론 코와 눈 등에 난 모든 부스럼 치료에 뛰어난 의술의 보유자였다. 그런 장덕이 죽자 치과 및 이비인후과 분야 전문가가 없어 국왕의 명으로 장덕의 후임을 찾은 것이다.

사실 장덕은 죽기 전에 의술을 귀금이라는 제자에게 전수해주었다. 귀금은 장덕의 계집종이었다. 조정은 귀금의 신분을 면천(免賤)시켜주고, 여의로 삼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귀금이 스승에게 배운 의술을 제자들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가 귀금을 면천시키고 여의(女醫)로 삼았다. 조정은 그 의술을 널리 전하고자 두 사람의 여의를 귀금의 제자로 붙였다. 그러나 귀금은 의술을 숨긴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성종은 귀금을 불러 “고문이라도 해서 네 죄를 묻겠다”고 엄포를 놓았다.(1492년) 그러자 귀금은 “억울하다”며 속사정을 털어놨다. 
“전 7살부터 의술을 배워 16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전 성심성의껏 가르쳤는데, 그들이(제자들이)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귀금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능력이 없어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데야 스승이 어쩔 재간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귀금의 말마따나 10년 가까이 배운 의술을 쉽게 남에게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의녀 장금의 활약상을 전하는 <중종실록>. 남자 의원들은 장금의 말에 따라 약을 지어 올릴 뿐이었다.


‘끼’ 때문에 쫓겨난 명의 애종

또 한사람 이름난 여의사는 애종(愛鍾)이었다. 그런데 애종은 어쩐 일인지 임금(선조)의 눈밖에 나 있었다.

1600년(선조 33년), 선조의 정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음을 앞두자 약방제조 김명원이 선조임금에게 아뢴다. “의녀 애증이 문자를 조금 알고, 의술도 다른 의녀들보다 우수하니 중전마마를 진찰하고 돌보게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하지만 선조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일축해버린다.

“애종은 창녀(倡女·여자 광대)인 듯 하다. 비록 의술이 빼어나다 해도 궁궐에 함부로 출입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약방제조의 권유가 워낙 끈질겼던 탓인지, 애종은 결국 왕후의 간호를 맡게 됐다. 왕후는 결국 죽고 말았다. 가뜩이나 미움을 밭았던 애종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애종은 맥박의 도수와 증후의 경중을 살피지 않고 약을 잘못 써서 끝내는 ‘망극의 변(왕후의 죽음)’을 당했으니~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추국하여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합니다.”


선조는 “음탕한 의녀를 내전에 가까이 둔 것이 잘못”이라고 후회한다. 하지만 “사람은 밉지만 약을 잘못 쓴 죄는 없다”며 “내의녀의 적에서만 삭제하라”고 명한다.

“애종을 입진시킨 것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합당한 의녀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은 밉지만(其人可惡) 죄를 줄 수는 없다.”(<선조실록>)


그런데 애종의 의술은 뛰어나기는 했나 보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항복은 내의녀에서 쫓겨난 애종을 다시 불러올리자고 간언한다.

“의녀 중에 애종이 가장 의술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선조 때 ‘끼(氣)가 있다’ 해서 쫓아내 지금껏 쓰지 않고 있습니다.(以爲有氣黜而不用) 이 때부터 내의녀의 씨가 말랐습니다.”

이쯤해서 궁금한 것은 애종이 무슨 끼(氣)를 부렸고 음탕한 짓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애종의 의술 하나 만큼은 이렇게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으니….


수사관이 된 의녀들

이렇게 몇몇 출세한 여의들도 있었지만 다른 여의사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들의 팔자는 셌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의 직분은 그야말로 기본업무일 뿐이었다. 온갖 궂은 일에 불려다녔으니까…. 좋은 말로 팔방미인이라 할 수 있지만, 나쁜 말로는 오지랖이 넓다고나 할까. 특히 여의의 곁가지 업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직분이 ‘수사관’ 혹은 ‘검시관’, 또는 ‘감사관’이 됐다. 1434년(세종 16년), 종실을 감찰하는 종부시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종학(宗學·종친들의 학교)에 입학한 종친들이 어머니나 부인의 병을 핑계삼아 결석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제부터는 의녀를 보내 어머니나 부인의 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의녀가 종친들의 꾀병여부를 조사하는 감찰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1490년(성종 21년), 행사직 조지산이 성종에게 달려와 고했다.

“사위(한환)가 제 딸을 상습폭행하고 있습니다. 딸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며 옷을 벗겨 함부로 때리는데, 그 상처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제 딸이 죽습니다. 제발 이혼을 허락해주소서.”


그 말을 들은 성종은 즉각 “의녀를 보내 조지산의 딸 상처를 살핀 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수사관이 된 의녀 영로는 한환의 처 조씨의 상처를 살핀 뒤 보고했다.

“조씨에게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집에 계집종의 시신까지 있었고, 다른 종(奴) 한사람도 곧 죽게 될 것 같습니다.”




▲ 허준의 의학서인 <동의보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호화혼수 적발에도 동원

1529년(중종 24년), 서울의 서부(西部)에 살던 유정이라는 이의 자녀 2명이 굶주림 때문에 얼굴이 누렇게 뜨고, 신체가 퉁퉁 부었으며, 노비 2명은 이미 굶어죽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자 한성부(서울시)는 의녀를 파견, 그 실태를 파악하게 했다. 과연 유정의 자녀들은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의 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지방 백성들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도성 안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랴.”


중종은 의녀의 보고를 듣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물어 서부참봉 이찬종을 의금부로 넘겼다.

심지어 호화혼수 적발에도 의녀가 동원됐다. 1502년(연산군 8년), 사헌부가 만연한 호화혼수 풍조를 개탄한다.

“근래 고관대작과 부잣집들이 허영심과 사치에 빠져 앞다퉈 호화혼수 경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결혼식 현장에 담당공무원과 의녀(醫女)를 보내어 호화혼수 여부를 낱낱이 감찰하도록 하라.”


의녀들이 남의 집 혼인날에 현장을 지키면서 혼수품이 무엇인지, 돈을 얼마나 쓰는지, 손닙접대는 어떻게 하는지 일일이 체크했던 것이다. 문제는 만약 호화혼수를 적발하고도 고발하지 않다가 발각되면 감찰했던 의녀도 곤장 100대를 맞았다는 것이다. 의녀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술자리에 끌려간 의녀들

이렇게 뼈빠지게 부림을 당한 여의사들에게 그 무엇보다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 있었다. 심심찮게 술자리에 불려 나가고, 때로는 사대부의 노리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연산군 때 극심했다. 1504년, 연산군은 “잔치 때 젊은 의녀 80명을 선발해서 깨끗한 옷으로 가려입힌 뒤 기생들과 함께 어전의 섬돌 위에 앉히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더구나 “의녀의 동원을 정례화 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또한 “의녀는 글은 물론 음악도 배워야 한다”며 음악을 배우지 않는 의녀를 탈락시켰다. 연산군은 강금이라는 의녀를 직접 선발하기도 했고, ‘의술을 겸비한 아름다운 의녀를 숨기는 자는 죄로 다스린다’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국왕 뿐 아니라 사대부의 연회에도 곧잘 끌려다녔다. 오죽했으면 중종은 1510년 “지금부터 각종 연회에 의녀 및 창기의 참석을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렸을까. 1517년 정언 임권의 상소를 보자.

“의녀를 둔 까닭은 의술을 배워 궁중과 사족의 부인병을 치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대부의 연회에 의녀들이 참석하니 의술을 배울 여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1535년 대사헌 허항은 “혜민서의 훈도들이 무뢰한들과 어울려 의녀들을 데리고 연회를 베푼다”고 고발했다. 이에 따라 의녀 열의(烈伊)를 수사한 결과 혜민서 훈도 이세영 등이 의녀 4~5명을 불러 술판을 벌이고 동침한 사실을 밝혀냈다. ‘혜민서 훈도(訓導)’, 즉 ‘혜민서 교수’가 상관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의녀들과 술판을 벌이고 동침했으며, 뇌물까지 받았다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의녀들은 이렇게 천민이라는 신분의 멍에에 말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운명도 감수해야 했다. ‘타고난 팔자’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머리가 좋고, 누구보다 재주가 뛰어났던 조선시대 의녀들은 당대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희숙 교수(숙명여대)의 말마따나 의녀는 최고의 팔방미인이자 커리어우먼이었던 것이다.

“남의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男醫按摩肌膚) 망측합니다.”(<태종·세종실록>)


1406년, 조선이 여의사 제도를 도입한 까닭이다. “남의의 진맥이 부끄러워 병을 숨겨 죽는 부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각 도의 관비 가운데 10~15살 사이의 영리한 동녀(童女)를 뽑아 ‘서울 국비 유학’을 시켰다. 이들은 사서(四書)는 물론 어려운 의학서적까지 독파해야 했다. 3년 연속 ‘불통(不通)’을 받으면 다시 관비로 전락했다. 임금(중종)의 주치의 노릇을 했던 대장금(혹은 장금)은 대표적인 의녀였다. .
“1544년, 의녀 장금이 말했다. ‘어제 저녁 상(중종)은…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3일이 됐습니다.’ ”(<중종실록>·사진)


중종은 이즈음 “내의원 제조와 (남)의원들은 모두 돌아가라”는 명을 내린다. 오로지 대장금만이 24시간 중종의 곁을 지킨 것이다. 남의는 그저 대장금이 알려주는 왕의 증세에 따라 탕약을 올릴 뿐이었다. 내의원 제조 홍언필은 “어찌 천박한 의녀의 진맥에 의존하시느냐”며 항의했다(1544년). 중종의 ‘장금 사랑’은 유명하다. 1515년, 대장금은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은 직후 승하하자 “ ‘산후조리’에 책임이 있다”고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왕후의 원자 출산에 공이 큰 장금에게 상을 내리지 못할 망정 죄를 줄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제주 출신 의녀 장덕(張德)과 그의 제자 귀금(貴今)은 ‘치과 및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장덕은 충치는 물론 코와 눈병 치료에 뛰어난 의술의 보유자였다. 장덕의 계집종인 귀금이 그 의술을 배웠다.”(<성종실록> 1488년)


성종은 장덕이 죽자 귀금에게 제자 2명을 붙였다. 하지만 귀금은 의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성종은 “고문이라도 받아야 정신차리겠느냐”고 엄포를 놓지만, 귀금이 딱 잡아뗀다.

“전 7살부터 의술을 배워 16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가르쳐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쩝니까.”

  
선조로부터 “음탕하다”며 내의원에서 쫓겨난 애종(愛鍾)도 의술만큼은 뛰어났다. 광해군 때인 1612년, 이항복은 “애종의 의술이 가장 좋았는데, ‘끼(氣)가 있다’ 해서 쫓아낸 일이 있다”며 안타까워한 바 있다. 임금과 사대부의 술판에 불려 나가는 의녀들도 많았다.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이 늘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조선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한희숙, <의녀>, 문학동네, 2013
김호, <조선의 명의들>, 살림, 2007
박선미, <조선시대 의녀교육연구- 그 양성과 활동을 중심으로>, 중앙대 박사논문, 1995


[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