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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이혼’, 패가망신의 지름길

잠용(潛蓉) 2019. 12. 22. 22:4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이혼’, 패가망신의 지름길

경향신문ㅣ2013.02.20 09:40 수정 : 2013.02.20 13:55


 

▲ ‘간통한 현장을 잡은 것이 아니니 사실파악이 어려울 것’이라는 성종의 언급을 기록한 <숙종실록>.  

“부잣집에서는 아내를 3~4명 맞이한다. 그러나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한다. ~남녀 간 혼인에도 경솔하게 합하고 헤어지기를 밥먹듯 하니 진실로 웃을만한 일이다.”

1123년, 송나라 서긍은 고려여행기(<고려도경>)를 쓰면서 고려사람들의 결혼·이혼풍습을 이렇듯 조롱했다. 서긍은 물론 “고려가 오랑캐(夷狄)의 나라 가운데서는 그래도 문물과 예의를 갖춘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고려가 궁벽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풍속이 박잡(駁雜)하여 오랑캐 풍속을 다 고치지 못했다”면서 손쉽게 이혼하는 고려의 풍조를 비꼰 것이다.


<고려사> 등을 보면 갖가지 이혼의 사례가 보인다.

“최항이 전에 대경 최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지만 ‘병이 있다’하여 버리고 다시 좌승선 조계순의 딸에게 장가드니….”(<고려사> ‘최충헌전’)


“양원준의 아내가 시어머니를 잘 섬기지 않자 아내를 쫒아냈다. 처와 아들이 울며 애걸했으나 끝내 허락치 않고….”(<고려사> ‘양원준전’)

아내가 병에 걸렸다 해서 쫓아내고,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다고 소박시킨다? 비정한 일이다. 이미 <대대례기(大戴禮記)> ‘본명(本命)’편에 기록된 ‘처(妻)를 내칠 수 있는 7가지 죄’, 즉 ‘칠거지악’이 있었으니까…. 칠거지악은 ‘자식이 없거나(無子), 음탕하거나(淫일),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거나(不事舅姑), 말이 많거나(口舌), 도둑질을 하거나(竊盜), 투기를 하거나(妬忌), 몹쓸 병에 걸리거나(惡疾)’ 할 때 처를 내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대대례기>는 통일 진(秦)나라(기원전 221~206) 이전의 의례를 정리한 책이다. 칠거지악의 역사는 깊은 것이다.


그러니 최항은 ‘아내가 몹쓸 병에 걸렸다’면서, 양원준은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했다’면서 부인을 서슴없이 쫓아냈던 것이다.


조선엔 ‘이혼법’이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조에 들어서 ‘이혼(離婚)조항’이 매우 애매하고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조선의 법률인 <경국대전> 등에 ‘이혼’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조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척 신기한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처와 첩을 바꾸고 들일 수 있을 것같은 조선시대에 ‘이혼법’이 없었다니 말이다. 물론 ‘칠거지악’의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더욱이 ‘칠거지악’을 무색하게 만드는 ‘삼불거(三不去)’가 있었다. ‘삼불거’란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쫓아내지 못하고,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지냈다면 역시 쫓아내지 못하며, 처음에 가난하게 지냈다가 후에 부자가 됐을 경우에도 쫓아내지 못한다’는 항목이다.


그랬으니 사안에 따라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참고해서 판단할 따름이었다.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대명률> ‘형전·처첩구부조(妻妾毆夫條)’에 등장하는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준다”는 대목을 들어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하지만 이 조항도 문제는 있었다.


‘아내가 남편을 때리거나 쫓아낼 때’라는 단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교사회에서 이혼은 그리 간단한 법률로 규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정처를 내치고 후처와 첩을 들일 경우 신분질서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천민남자와 양민여성의 혼인’과 ‘처가 있는 데도 처첩을 다시 얻는 일’만큼은 엄격하게 금했다.

신료들은 물론 국왕까지 남의 집 이혼 송사에 나서 ‘감놔라배놔라’ 하는 대목이 여럿 보인다. 사안에 따라 ‘강제이혼명령’을 내리기도, 거꾸로 ‘이혼불가판결’도 내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녀 간의 문제를 다룰 때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한다(罪疑惟輕)’(<서경> ‘대우모(大禹謨)’)는 원칙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으면 간통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법도 있었다. 또 하나, 자칫 이혼을 결정했다가는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혼인도 이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조선사회였던 것이다.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줘야 한다?

1704년(숙종 30년)에 일어난 유정기와 그의 처 신씨(신태영) 사이에 발생한 격렬한 이혼소송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있다. 사헌부의 상소대로라면 유정기의 처 신태영은 극악무도한 여인네였다.


 

▲ 조선말기의 신혼부부. 두루마기와 장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신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지아비는 물론 시아버지를 마구 꾸짖고 욕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습니다. 심지어는 더러운 물건을 좨주(祭酒)에 섞고 사당에서 난동을 부려 제석(祭席)의 물건을 마구 깨뜨렸습니다. 참다못한 남편은 신씨를 내쫓았습니다.”

사헌부의 상소에 따르면 신씨는 내쫓긴 뒤에도 분가한 아들 집에 머무른다. 그러다 아들을 찾아온 남편과 한바탕 싸운 뒤 한 밤 중에 단신(單身)으로 뛰쳐나갔다. 이후 친정오빠의 집에 머물던 신씨는 오빠와 싸운 뒤 오빠집에 불을 지르는 등의 ‘괴악(怪愕)’을 저질렀다. 참다못한 유씨 집안은 정식이혼을 위해 예조에 소송을 제기했다. 집에서 쫓아낸 뒤 15년 뒤였다.


하지만 ‘국법에 이혼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유정기는 ‘유(兪)’씨 가문의 대종(大宗·동성동본의 일가 가운데 가장 큰 종가의 계통)이었다. 유씨 일족 50여 명이 “패악한 여인에게 종사를 맡길 수 없다”며 연명으로 재차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또한 기각됐다. 소송은 당사자인 유정기가 죽은 뒤에도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는 측은 “강상의 윤리를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부부의 연을 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장령 임방은 “부부의 도리는 부자 및 군신의 도리와 다름이 없다”며 “윤기와 풍속을 해친 신씨를 반드시 이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혼법이 비록 <국전(國典)>에 없다지만 <대명률>을 보면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준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동안 조선은 <대명률>을 따랐는데, 어찌 그 또한 <국전>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임방은 신씨가 한 밤 중에 단신으로 집을 나간 것을 두고 “만일 흉악범을 만났다면 반드시 오욕을 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편을 욕했을 뿐, 때리지는 않았다.”

숙종은 “형조가 신씨 사건을 엄정히 조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신씨는 수 천 마디의 진술서를 통해 조목조목 무죄를 주장했다. ‘남편이 비첩(婢妾·여종)에

 


▲ 첫 상면하는 신랑신부. 혼인할 때 처음 얼굴을 보았을 터이니 부끄러운 얼굴표정이 역력하다.

게 고혹되어’ 자신을 모함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편과 싸우고 한밤중에 혼자 집을 나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남편에게 핍박을 받아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나간 게 아니라 여종들과 함께 나간 것입니다.”


신씨의 진술로 재판은 신씨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공조판서 김진규는 “신씨는 남편을 구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씨를 <대명률>의 예로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명률>의 이혼허용 조항은 ‘아내가 남편을 때렸을 경우’로 한정시켰습니다. 신씨는 남편을 구타한 것이 아니라 욕만 했을 뿐입니다. 욕과 구타는 엄연히 다릅니다. 또 그렇게 정식이혼을 하고 싶었으면 아내를 쫓아냈을 때 하면 될 것을 10년이 훨씬 지난 뒤 소송을 낸 연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지금 유정기는 이미 죽었는데 누구랑 이혼한단 말입니까.”


판의금부사 홍수헌의 의견은 법을 담당하는 의금부의 수장다웠다. 그는 ‘신씨의 실행(失行)사실을 입증할 증거부족’을 들어 ‘이혼불가’를 주장했다.

“신태영의 성품과 행실이 좋지않은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부모에게 욕설한 것과 좨주를 더럽혔다는 것’은 오로지 유정기의 주장일 뿐입니다. 진술한 자들이 모두 ‘유정기에게 들었다’고 할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집안의 일을 참증(參證·참고하여 증거로 삼음)하겠나이까. 게다가 남편인 이미 죽었으므로 신문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신완도 “신태영이 한밤중에 혼자 나갔다는 유정기측의 주장도 거짓임이 드러났고 다른 죄상도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면서 신태영의 ‘무죄’를 주장했다.


 

▲ 신윤복의 <청금상련>. 고위관리들이 의종부나 육조 같은 관아의 후원에서 기생들을 희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처를 버리고 이혼하면 패가망신할 수 있었다.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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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논쟁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남편 유정기가 10년이 지나서야 소장을 제출한 까닭이 뭐냐”, “(바람을 피운) 비첩의 말만 믿고 부인을 무고한 것이 아니냐”, “신태영이 남편을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욕설을 한 죄로 이혼시키면 국법에 어긋난다”는 등의 주장이 이어지면서 남편 유정기 측의 처지가 점점 옹색해졌다. 숙종은 부인 신태영을 비난했지만 이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후를 살피건대 신태영의 죄는 이혼시켜 마땅하다. 하지만 이혼시키는 것은 법전에 위배될 뿐 아니라 중에 무궁한 폐해를 열어 놓을 염려도 없지않다.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그대로 두어라.”

이렇게 한 신하 부부, 그것도 이미 남편이 죽은 뒤 진행된 이혼소송은 임금과 신하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간신히 일단락이 됐다.


“현장을 잡지못하면 간통죄는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부연 설명할 것이 있다. 바로 ‘현장을 잡지 못하는 간통죄는 성립할 수 없다’는 법조항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484년(성종 15년)의 일이다. 전 현감 이윤검의 아내 손씨를 ‘간통죄’로 고소됐다. 부부가 서울(남편)과 청도(아내)로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청도의 아내 손씨가 노비 금산과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휴서(休書·이혼증서)를 만든 남편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러 달이 지나 손씨 집안에서 돌아온 딸을 덜컥 다른 남자와 재혼시켰다. 이윤검의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는데 부인이 재혼한 것”에 분개한 것이다. 이윤검의 집안은 관찰사를 통해 형조에 “손씨를 엄벌에 처해달라”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조정의 공론과 수사결과는 흥미로웠다. 신료 가운데 심회의 의논이 흥미롭다.

 


▲ 신윤복의 <소년전홍>. 갓 혼인한 젊은 유생이 이웃집 여인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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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이 어두운 밤에 있었던 일을 다른 이가 어찌 알겠습니까. 또 법률에 이르기를 ‘간통하는 현장을 잡은 것이 아니면 논죄하지 않는다(非奸所捕獲 勿論)’고 했습니다. 내버려두는 게 나을 겁니다.”

성종 역시 “간통한 현장을 잡은 것이 아니니 끝까지 추궁하더라도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此非奸所捕獲 雖窮鞫 得情爲難)”이라고 밝힌다. 전 남편이 제기한 소송은 기각된 것이다. 남편으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지만 증거가 없다는 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처가 있는데 처첩을 또 얻으면?’

이혼을 규정하는 법은 없었지만 ‘천민남자와 양민여성의 혼인’과 ‘처가 있는 데도 처첩을 다시 얻는 일’은 엄격하게 금했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니 적첩의 분수를 어지럽힘은 불가합니다. ~명나라 법률에 ‘처가 있는데 첩을 처로 삼는 자는 장 80대를 치고, 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얻는 자는 장 90대를 친 뒤 이혼시킨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1413년(태종 13년) 사헌부는 처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다시 처와 첩을 두는 남자들의 행위를 엄금하자는 상소를 올린다. 태종은 이를 가납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었기에 그럴만도 했다. 1417년 사간원은 이 법의 취지를 “남편이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를 다투어 각종 소송이 난무하는 것을 막기 위해”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1452년(문종 2년) 전 헌납 고태필이라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아내가 시퍼렇게 있는데 “처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후처를 맞이한 것이다. 문종은 “죄질이 좋지않으니 장 90대를 치고, 후처와 강제이혼시킨 뒤 전처와 재결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媤 world’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다.


또 같은 해(단종 즉위년) 천첩을 사랑한 나머지 정처를 박대한 혐의를 받은 전 부사직 이계성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사헌부가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이계성은 정처를 때려 상처를 입히고, 한겨울에 재산을 빼앗아 쫓아냈음을 밝혀냈다. 조사결과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이계성은 괘씸죄로 첩과 ‘강제이혼’ 처분을 받았다. 1457년(세조 3년) 선성군 이무생은 창기(娼妓)를 사랑, 아내를 내쫓은 뒤 “아내가 스스로 나간 것”이라고 거짓으로 고했다. 창기를 사랑하고 본처를 버린 대가는 비쌌다. ‘강제이혼령’은 물론 부사직에서 파면 당했다. 이와함께 이무생과 혼인한 첩기는 ‘경역(京役·서울에서의 노역형)’의 처벌을 받았다.


천민 남성과 양민여성의 결혼 엄금한다

태종은 또 1405년부터 천민이 양민여성과 결혼하는 행위도 일절 금지시켰다.

“노비의 소생은 어미와 아비의 신분을 따릅니다.(從母從父). 그러니 천민이 양녀들과 혼인하면 그들의 소생은 모두 천민이 되고, 그에따라 천민의 수가 갈수록 늘게 됩니다. 그러면 병역 등 나라의 공역(公役)을 담당할 양민의 수가 줄어듭니다.”


1401년(태조1년) 예천부원군 권중화의 상소다. 무슨 뜻이냐. 조선시대 초기엔 천민과 양민이 결혼하면 천민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종부법’이 시행됐다. 또 조선시대 땐 천민은 병역을 비롯한 각종 공역대상에서 빠져있었다. 그러니 천민 남성-양민 여성의 혼인이 양산되면 양민 수가 줄어들고, 그에따라 공역에 임하는 사람의 수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랬으니 양 신분계급끼리의 혼인을 막은 것이다. 예컨대 1423년(세종 5년) 경상도 거창의 노비 정용이라는 자는 양녀와 혼인한 죄로 곤장 80대와 베 200필, 그리고 ‘강제이혼’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혼테크’ 잘못하면 패가망신했다.

조선시대에도 ‘혼테크’, 즉 결혼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잘못하면 역사에 이름을 크게 더럽히거나 아예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세조 때 득세한 한명회 집안의 일이다. 어느 날 한명회는 밀양에 사는 박씨의 재산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박씨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유부녀였다. 한명회는 계략을 꾸몄다. 당대의 세도를 배경으로 임금(세조)을 움직인 것이다.


“박씨가 이미 다른 사람과 정혼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고 합니다.”

과연 한명회의 세도는 굉장했다. 박씨는 결국 본남편과 이혼한 뒤 한명회의 조카인 한언과 재혼하기에 이르렀다. 인과응보인가. 다음 대인 성종대에 이르러 문제가 생겼다.

한언의 아들인 한홍윤이 형조의 낭관으로 발탁되자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선 것이다. “‘재혼한 사족의 자제들은 청현직(요직)에 등용되지 않는다’는 <경국대전>의 조항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대간들의 논박에 탈락된 한홍윤은 다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것일 끝이었다.

1440년(세종 22년)의 일이다. 전 우의정 노한이 탄핵 당한다. 우정언 정차공의 상소를 보면 기가 찬다.

사건의 진상인즉은 우의정을 지낸 노한의 외증손이 현감을 지낸 허만석의 어린 딸과 혼인했다. 노한이 노린 것은 부유한 허만석의 재산이었다. 문제는 허만석이 사망한 뒤 상복도 채 벗지않은 허만석의 어린 딸을 갖가지 말로 구워삶아 혼인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은 “만약 상(喪)이 끝나면 다른 부유하고 세력있는 자가 허만석의 딸과 결혼할 까 두려워 혼인을 서두른 것”이라 비난했다.


이 사건은 사헌부의 국문으로 이어졌고, 사헌부는 ‘강제이혼’ 판결을 내렸다. 노한은 세종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으나, 역사에 ‘돈벌이를 위해 혼인장사를 한 재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폭력 남편의 비참한 말로

폭력남편은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1490년(성종 21년) 행사직 조지산이 급히 성종임금을 찾아와 아룄다.

“사위 한환이 제 딸의 머리털을 잡고 휘두르고, 옷을 벗겨 마구 때려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됐습니다. 이전에도 제 딸을 구타하고 재물과 장식품을 빼앗아 갔습니다. 만약 사위와 제 딸을 함께 살게 한다면 제 딸은 아마 맞아 죽을 겁니다. 아비로서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이혼시켜주십시요.”.


위급에 빠진 아버지의 눈물겨운 상소였다. 더욱이 사위가 장인마저 때렸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윤필상 등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조지산을 응원했다.

“원나라 법률서 <지정조격(至正條格)>에 이르기를 ‘사위가 장인을 욕하면 그 아내가 이혼한다’고 했습니다. 한환은 이미 장인을 구타했습니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형국이니 이혼시켜야 합니다.”


성종은 이 패륜의 사위에게 이혼명령은 물론 유배령까지 내렸다. 또 있다.

1457년(세조 3년) 전주부윤 이숭지는 애첩을 너무도 사랑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정처를 구타하고 침학(侵虐)한 뒤 소박한 죄는 씻을 수 없었다. 조정은 이숭지와 첩의 강제이혼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이숭지를 유배형에 처했다. 1459년(세조 5년) 때 정처를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힌 훈련관 녹사 최명전은 유배형을 받았다.


“비첩의 말만 듣고는 칼로 아내 김씨를 찔렀고 무릇 집안에서 잃은 물건은 김씨의 의복을 팔아 충당하니 김씨는 언제나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하고 있었다.”

세조는 최명전이 공신이었지만, 유배형의 처벌을 내렸다. 정처를 무고한 첩은 장 100대의 엄벌로 다스린 뒤 관비로 영속시켰다. 또한 칼로 아내를 찌르는 등 포학을 저지른 남편과 본부인이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했다.


종친도 어려웠던 이혼과 재혼

또, 신하들이 지엄한 왕족의 가정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감히 공주의 이혼을 청한 예도 있었으니….
1404년(태종 4년)의 일이다. 태종 이방원의 맏딸 정순공주는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이거이의 아들인 이백강과 혼인했다. 하지만 임금의 사위가 된 이백강은 아버지 이거이가 ‘두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죄를 받자, 서인(庶人), 즉 평민으로 신분이 떨어졌다. 그러자 신하들은 “평민이 된 이백강과 정순공주는 혼인을 유지할 수 없다”면서 “두 사람을 이이(離異), 즉 이혼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장인인 태종은 “인정상 어찌 이혼을 시키겠냐”고 무마해 공주의 이혼만은 간신히 저지됐다.


온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 종친이 있었으니, 바로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1466~1525)이었다. 훗날 연산군의 총희(寵姬)였던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노비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제안대군은 불과 14살의 나이에 김씨와 이혼했다.(1479) 김씨가 잔병치레가 많아 후사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박씨와 재혼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안대군이 다시 전처인 김씨와 사통한 것도 모자라 김씨의 집에서 동거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박씨가 여종들과 동침, 동성애를 즐긴다는 고발장이 접수된다. 의금부의 조사 끝에 동성애 건은 무고로 밝혀졌다.


하지만 왕대비 안순왕후는 “박씨가 불순한 행동으로 왕실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를 들어 이혼을 결정한다. 신하들이 “20살도 안돼 두 어 해에 걸쳐 두 번 씩이나 배필을 바꾸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림돌이 제거되자 제안대군은 첫번째 부인 김씨와 재결합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는 “만약 (전부인) 김씨와 재결합이 허락받지 못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협박, 드디어 허락을 얻는다. 온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제안대군의 혼인-이혼-재혼-이혼-본처와의 재결합 사건은 이렇게 결말이 난다.


이쯤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처첩을 마음대로 들이고 내칠 수 있는 조선시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던 이들이여. 꿈깨라.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터이니….

“법에 ‘간통 현장을 잡지 못하면 논죄하지 않는다(非奸所捕獲 勿論)’고 했습니다.”(<성종실록>)


1484년(성종 15), 원로대신 심회의 주장이다. 현감을 지낸 이윤검이 “(아내)손씨가 노비와 정을 통했다”면서 제기한 이혼소송에서 간통죄의 ‘증거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성종도 “현장을 잡은 것은 아니니 끝까지 추궁해도 사실파악이 힘들 것”이라고 판결했다(사진). 이것은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한다(罪疑惟輕)”는 <서경>을 따른 것이다. 남편으로서는 억울했을 것이지만, 증거 운운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조선의 <경국대전> 등에는 ‘이혼을 규정하는 법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대부의 이혼은 녹록지 않았다. 예컨대 1704년(숙종 30) 유정기는 아내 신태영을 상대로 정식으로 이혼소송을 냈다. “시아버지를 욕하고, 더러운 물건을 제주(祭酒)에 섞고, 아들 집에 머물 때는 한밤중에 가출하는 등 패악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유씨 일족 50여명이 소장에 서명했다. 하지만 극심한 논쟁 끝에 소송은 기각됐다. “(이혼 규정이) 국법에 없다”는 이유였다. 이혼을 주장하는 측은 “<대명률>을 보면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준다’는 조항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고 측’은 “<대명률>의 이혼조항은 ‘아내가 남편을 때렸을 경우’에 해당된다”고 반격했다. 부인이 욕설만 했지, 때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의금부 수장(검·경의 수장)인 판의금부사 홍수헌은 “아내 신태영의 죄상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법정증거주의’를 들었다. 또 ‘처가 있는데 처첩을 얻는 일(유처취처·有妻娶妻)’도 엄격하게 금지됐다(1413년).


남편이 죽은 뒤 처첩 간 적장자를 둘러싼 각종 소송이 난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입법이었다. 1452년(문종 2) 고태필이라는 이는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후처를 맞이했다가 들통났다. 문종은 “죄질이 좋지 않다”며 “곤장 90대를 치고, 후처와 강제이혼 뒤 본처와 재결합하라”는 명을 내린다. 폭력남편 역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1490년(성종 21), 조지산이라는 이가 사위(한환)를 고발했다. 사위가 아내(조지산의 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옷을 벗긴 뒤 마구 때렸다는 것이었다. 한환은 장인까지 구타했다. 장인은 “잘못하면 제 딸이 죽는다”며 “빨리 이혼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성종은 강제이혼령을 내리고 한환을 유배시켰다. 처첩을 마음대로 들이고 내칠 수 있다며 조선시대를 꿈꾸는 남성들이 있다면? 아서라.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