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世宗은 조선판 '미투'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경향신문ㅣ2019.01.29 15:05 수정 : 2019.02.07 13:42
▲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소년전홍’. 젊은 양반이 이웃집 여인을 희롱하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시대엔 성희롱도 곤장 80대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간송미술관 소장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조선판 ‘미투’ 사건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성균관 유생들의 성범죄’ 사건이었다. 이날 성균관 유생 둘(진사 최한경과 생원 정신석)은 성균관 내의 공자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를 위해 반수(泮水·성균관 옆에 흐르는 물)에서 목욕재계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3일 동안 몸을 깨끗이 하고 모든 언행을 삼가는 치재(致齋) 기간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욕재계 중이던 두 성균관 유생 앞에 평상복 차림의 ‘앳된 부인(幼婦)’이 여종 둘을 거느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진사 최한경이 ‘홀랑 벗은 채(不衣冠)’ 갑자기 뛰어나가 부인을 잡고 희롱하며 욕을 보였다(率然出搏幼婦以戱辱).
바바리맨으로 전락한 성균관 유생
이에 부인은 완강하게 항거하고, 부인의 여종은 “우리집 안주인이에요”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정신석이 부인의 두 여종을 때려서 쫓아버리고는 최한경을 도와서 힘으로 부인을 억눌렀다.
<세종실록>은 두 유생이 여인을 어떻게 욕을 보였는지 적시하지 않았다.
다만 “뒤이어 부인이 쓰고 있던 입자(笠·갓)를 빼앗아 성균관의 재실로 돌아왔다.
정신석에게 쫓겨난 두 여종에게서 “부인이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집에서 사내종(원만)을 급히 현장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여인은 풀려났고, 두 유생은 떠난 뒤였다. 사내종 원만은 즉시 성균관 직숙관(숙직)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나는 홍여강(洪汝康·사료에 나오지 않는 인물)의 종입니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여주인이 병에 걸려 어린 계집종을 거느리고 할머니뻘 어르신 집으로 가려고 반수를 지나다가 두 유생에게 뜻하지 않게 침핍(불법적인 핍박)당했습니다. … 제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현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생이 입자를 빼앗아 갔다니 이를 찾아주십시오.”
공자님에게 올리는 제사를 앞두고 목욕재계 중이던 유생들이 여인을 욕보였다? 이것은 대단한 파문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
성균관이 서둘러 자체조사에 들어가자 최한경·정신석 두 유생이 자백했다. 하지만 둘은 “우린 다만 희롱했을 뿐”이라고만 진술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 부분만 인정한 것이다. 이에 성균관 정록(정8~9품 관리)이 최초에 조사를 의뢰했던 홍여강의 사내종 원만을 소환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사내종 원만의 진술이 오락가락해진 것이다.
“다시 한번 진술해보라. 너의 여주인이 당한 게 맞냐?”(성균관 정록)
“사실은 여주인이 아니고 주인의 유모 딸입니다. 저는 다만 (성균관 유생들을 겁주려고) 여주인이라 말한 것입니다.”(사내종 원만)
사내종 원만의 진술이 달라지자 성균관 정록이 순간 꾀를 내어 다 아는데 왜 거짓말하느냐는 듯 운을 뗐다.
“야. 네 주인의 유모라고? 그 유모라는 여자한테는 본래 딸이 없는데 무슨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성균관 정록의 유도 질문에 크게 흔들린 원만은 다시 말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바로 주인의 ‘비첩(婢妾·여종의 신분으로서 양반집 첩이 된 여인)’입니다. ‘비첩’이란 소리가 싫어서 숨긴 것입니다.”
▲ 신윤복의 <청금상련>. 고위관리들이 의정부나 육조 같은 관아의 후원에서 기생들을 희롱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사법기관에 출두한 성범죄 피해여성 ‘소앙’
여주인→여주인의 유모 딸→비첩까지…. 진술이 세 번이나 바뀌자 성균관 정록은 “안되겠다. 진실을 알아야겠으니 대질심문을 해보자. 첩과 두 계집종은 어디 있느냐. 빨리 불러오라”고 했다. 대질심문이라면 가해자인 성균관 유생 두 사람하고 피해자인 여인과 두 여종이 대면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사내종 원만은 다시 둘러댔다.
“오늘 아침 일이 있어서 모두 외출했습니다. 지금 집에 없습니다.”
사건 조사는 사내종 원만의 모호한 진술로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이때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홍여강의 아들인 홍우명의 첩, 소앙이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행과 부정부패를 규찰하고 수사하는 요즘의 ‘검찰+감사원’ 역할을 했던 사법·사정기관이었다. 두 유생에게 ‘당한’ 여인이 직접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소앙의 사헌부 고소는 ‘조선판 미투’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 구한말 곤장을 맞는 모습. 세종시대의 성균관 유생 최한경은 지나던 부인을 덮쳤다는 혐의로 장 80대의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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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앙의 진술은 왜 오락가락 했을까?
그러나 <세종실록>의 기사를 읽으면 뭔가 석연치 않은 냄새를 풍긴다.
“소앙이 사헌부에 고소했는데, 소앙 역시 처음엔 강간미수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단지 희롱만 당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자못 의심했다.”
소앙이 용기를 내어 사헌부에 성균관의 두 유생을 고소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처음엔 ‘강간미수’라고 진술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희롱’으로 말을 바꿨다. <세종실록>은 소앙이 왜 또 진술을 바꿨는지는 쓰지 않았다. 다만 “소앙이 진술을 바꾸자 사람들이 자못 의심의 눈길을 던졌는데, 그 사건이 사대부 집과 관련된 것이어서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고 썼다.
소앙의 진술과 관련해서 사대부 남편 집안(홍씨 가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가해자인 두 유생과 그 가문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그리고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가 또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 알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록 기사인 것 같다. 오죽했으면 당대의 여론도 이 사건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했을까.
어쨌든 이 사건을 수사한 사헌부는 ‘정신석은 태(회초리) 40대, 최한경은 장(곤장) 80대에 해당된다’고 세종 임금에게 고했다.
“공자에게 올리는 제사를 집전하는 임무를 맡은 정신석은 부인의 입자(갓)를 빼앗고 희롱했으니 태형 40대에 처해야 합니다. 또 최한경이 소앙을 강간하려고 침핍한 죄는 장 80대에 해당됩니다.”
미심쩍다 재수사 명한 세종
사헌부의 최종수사 발표를 들은 세종은 여전히 미심쩍다면서 재수사를 명했다. 세종은 “들리는 바로는 단지 이에만(강간미수에만)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다시 진상을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임금에게까지 미심쩍은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성균관 유생 성범죄 사건은 당대의 핫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가히 조선판 ‘미투’ 사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사헌부의 재수사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헌부는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고소한 사람의 진술로만 결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렇지만 거듭거듭 조사하고 추궁해도 소앙의 진술은 ‘성희롱만 당했다’는 것이어서 그 이상의 죄상을 밝힐 수 없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결국 세종은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분을 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사헌부의 수사결과와 세종의 판결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앙의 진술이 오락가락했음에도 결국 최한경의 강간미수 혐의는 인정했으니 말이다. 당시 조선은 모든 범죄의 판결에 1367년 제정된 명나라 형법(<대명률>)을 따랐다. 성범죄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 ‘형률·범간조)
‘최한경 사건’을 다룬 사헌부는 <대명률>의 강간미수죄 처벌형량(장 100대, 유배 3000리)보다는 낮춰 장 80대가 적당하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여론을 청취하고 “내 들으니 (강간미수 이상의) 일이 벌어진 같으니 재수사하라”고 지시한 세종 임금의 자세도 나름 평가할 만하다.
▲ 태장을 받는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조선풍속도’. 강간미수를 저질러도 이렇게 80~10대 가량의 매를 맞은 뒤 유배형을 당했다. /숭실대박물관
대사면령에도 포함되지 않은 성범죄
앞서 살펴보았듯 조선시대 성범죄는 <대명률>에 따라 엄벌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 임금은 1471년(성종 2년) 1월24일 20세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의경왕으로 추서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다.
“24일 새벽녘 이전에서부터 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죽이려고 저주해서 행위)한 것과, 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무리 국가적인 대사면령이라도 강간범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못박은 것이다.
▲ 1438년(세종 20년) 지나던 여인 일행을 폭행하고 성희롱및 강간미수 혐의로 조사받고 장 80대 형을 받은 최한경은 6년 뒤인 1444년(세종 26년) 정기과거인 식년시에서 33명 합격자 중 5등의 성적으로 급제했다.(<국조방목>) 최한경은 이후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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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경의 그후
그러고 보면 성범죄 처벌의 경우 오히려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더 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선시대의 형벌이 이상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사법부의 저울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균형 잡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녀자 강간죄가 아무리 추상같다고 한들 천민의 경우 법률에 따라 교수형으로 처벌됐지만, 양반이나 종친의 경우 장과 유배형 등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또 추상같은 처벌을 내렸다는 여러 사례들도 끝까지 살펴야 한다. 마지막까지 읽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저 처벌을 받은 대목에서 읽기를 마무리하면 안된다. 필자도 왕왕 그런 잘못을 저질러 앞부분만 읽고 경솔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단적인 예로 성균관 유생 최한경의 후일담을 보자.
1438년(세종 20년) 최한경은 양반의 첩인 소앙을 강간미수(혹은 성희롱)한 죄로 장 80대의 처벌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최한경은 6년 뒤인 1444년(세종 26년)에 실시된 식년시(3년 만에 치르는 정기 과거)에서 최종합격자 33명 중 5등(병과 2등)으로 당당히 합격한다. 최한경과 함께 소앙 여인 일행을 욕보인 정신석 역시 20등(정과 10등)으로 급제했다. <필원잡기>와 <사가집> <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이 전체 3등(을과 3등)을 차지한 과거였다.
최한경은 과거합격 후 글씨를 잘 쓴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았다. 급제 8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년) 형조의 도관정랑(정 5품)이 된 지 두 달 만에 성균관 직강(정 5품)으로 옮겼다. 이때 사간원 좌헌납 송인창이 “송사를 다루는 관리(도관정랑)를 두 달 만에 바꾸는 것은 잘못됐다”고 간언하자 단종은 “최한경이 글씨를 잘 써서 춘추관에서 벼슬을 할 만하므로 옮겨준 것”이라고 답했다.(<단종실록>) 단종은 “만약 그것이 무리한 면이 있다면 도관정랑과 성균직강을 겸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편법을 쓰면서까지 최한경을 발탁했다. 최한경은 이후 <세종실록> 편찬에 사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문명을 떨친 최한경이었지만 역시 여자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질투까지 심했던 모양이다.
1456년(세조 2년) 행호조정랑이던 최한경은 기생 청루월을 첩으로 삼고는 사령(부하관리) 이덕중에게 청루월의 심부름을 들게 했다. 청루월이 만나는 다른 남자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감시뿐이 아니었다. 최한경의 사주를 받은 이덕중은 청루월에게 희롱하는 남자만 보면 해코지하며 그 남자들의 말다래를 끊어놓았다. 급기야 이 일이 발각되어 탄핵을 당하자 최한경은 이덕중을 피신시키고, 다른 가노(집안 노비)를 시켜 대신 소송에 임하게 했다. 그러다 일이 발각되자 이덕중에게 금품을 쥐여주고 발설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최한경은 사헌부의 탄핵에 따라 파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3년도 안된 1459년 이전에 불사조처럼 복귀해 이듬해 당상관에 올랐다. 최한경은 이후 첨지중추부사와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를 거친 뒤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한 뒤 사망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성균관 유생 시절 강간미수 사건의 가해자였고, 또 관직생활 중 기생과의 스캔들로 파직당한 인물이 훗날 최고 지성이라는 성균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지금보다 오히려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해자가 누구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저울추가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다.
▲ ‘단오풍정’. 동자승들이 단옷날 그네타기 놀이를 나온 여인들이 시냇가에서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엿보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정훈희의 ‘꽃밭에서’와 최한경의 ‘꽃밭에서’
필자는 최한경 관련 기사를 준비하다가 사뭇 흥미로운 자료 하나를 보았다. 가수 정훈희씨의 노래로 알려진 주옥같은 가요 ‘꽃밭에서’의 가사가 실은 최한경이 성균관 유생 시절 어릴 때부터 연모해오던 ‘박소저’라는 여인을 위해 지은 연애시였다는 것이다. 출처도 최한경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반중일기(泮中日記)>라는 것이다. ‘반중’은 성균관 인근의 동네를 일컫는다.
“꽃밭에 앉아서(坐中花園) 꽃잎을 보내.(膽波夭嶪). 고운 빛은(兮兮美色) 어디에서 왔을까(云河來矣). 아름다운 꽃이여.(灼灼基花) 어찌 그리도 농염한지(何彼艶矣) 이렇게 좋은 날에(斯于吉日) 이렇게 좋은 날에(吉日于斯) 그 님이 오신다면(君子之來) 그 님이 오신다면(美人之歸) 얼마나 좋을까(云何之樂)”
그런데 필자가 아무리 찾아봐도 최한경이 썼다는 <반중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정보자료에도 <반중일기>는 찾을 수 없다. 고전 전문가에게도 문의해봤지만 자신도 처음 보는 자료라고 했다.
그런데 출처를 찾아가던 필자는 고 최인호 소설가의 2007년작 산문집 제목이 <꽃밭>이며, 그 책의 서문에 조선조 유생 최한경의 ‘꽃밭에서’라는 시에서 산문집의 제목(<꽃밭>)을 땄다고 밝힌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필자는 찾지 못했는데 최인호 소설가는 분명 출처를 알고 썼을 것이 아닌가. 누구든지 최한경의 <반중일기>와 ‘꽃밭에서’ 출처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필자에게 연락 바란다.
만약 그 주옥같은 노랫말의 주인공이 만약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맞다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또 다른 후일담이 있다. 최한경이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기사관(춘추관 관리·사관)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범죄 가해자의 화려한 변신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최한경 사건은 최한경 그 자신이 편찬에 참여한 <세종실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는 과연 581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성범죄 혐의로 구설에 오를지 알았을까.
지금 이 순간까지 다른 역사서도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처럼 훌륭한 반면교사가 어디 있는가. 어떤 시대를 살든 행동거지 조심해야 한다. 법의 심판을 피했다고 좋아할 것인가. 역사의 포폄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기사는 장재천의 ‘조선 전기 성균관의 성범죄 소고-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제93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8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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