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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3. 토지개혁 (상)

잠용(潛蓉) 2020. 1. 12. 21:42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3. 토지개혁 (상)

서울 아들의 인민당원증은 북쪽 아버지의 토지 몰수를 막았을까?

한겨레ㅣ2019.06.22. 14:06 수정 2019.06.22. 14:46 댓글 0개 


46년초 북 토지개혁 전격 실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
"농민 해방됐다" 대부분 환영,  지주는 "어떻게 살지 두려워"

남 인사가 북 친구에게 편지 보내 "북조선 정치개혁 알고 싶다네
남은 일제 때보다 나아진 게 없네" 미군정 민심동향에 촉각 세워



▲ 1946년 3월5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내용의 토지개혁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는 제목의 토지개혁 선전 포스터. 8·15해방 1주년기념 중앙준비위원회에서 발간한 <8·15해방일주년기념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에 실려 있다. 왼쪽 상단 태극마크와 오른쪽 태극기 그림은 북쪽 지역에서도 1946년 8월까지는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용욱 교수 제공

미·소 양군 사령부가 1946년 3월부터 양측 간에 서신 교환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양군의 분할 점령으로 중단된 남과 북의 서신 교환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북한에서 온 편지들을 배달하기 전에 모두 검열했다. 아마 소련군도 그랬을 것이다. 미군은 자신들이 중개하는 편지들을 통해서 38선 이북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추적했다. 미군은 그렇게 추적한 북한 사회의 동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항을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부가 작성한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에 매일매일 기록했다. 보고서의 한 항목을 차지한 ‘인접지역 정보요약’(Summary of Intelligence in Adjacent Areas)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3~4월의 ‘인접지역 정보요약’에서 가장 주요한 관심 사항은 단연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소식이다. 3월5일자 167호 보고서가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미확인 보고로 북한 여러 지역에서 지방 인민위원회 위원들이 논 주인을 쫓아내고 있다는 첩보를 처음 전했고, 3월14일자 175호 보고서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3월5일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혁명적 사건의 하나인 토지개혁 법령이 발효되었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서울에서 발간되는 <자유신문> 3월12일자 기사로 소개된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전문을 영역해서 첨부했다.


인민당 아들에게 SOS 보낸 지주

이어서 4월10일자 198호 보고서는 이북에서 이남으로 보낸 편지 몇통의 검열 내용을 인용하여 이북 사람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반응을 가감 없이 전했다.

“최근 입수되어 검토된 38선 이북에서 온 여러통의 편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토지개혁 법령의 발효다. 그 법령을 찬양하는 3월16일자의 한 편지는 ‘마침내 공산당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되었고, 농민들은 해방되었다. 부자들이 권좌로부터 쫓겨났다. 우리 노동자들은 새로운 자유에 환호한다’고 적었다. 3월19일자의 다른 한 편지는 ‘성취된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개혁 법령의 시행이다. 우리 혁명 과정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앞서서 이루어야 할 과업이다. 토지개혁은 어떤 정부라도 피해 갈 수 없는 과제다’라고 했다. 반면 환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38선 이북에 거주하는 한 부유한 조선인은 3월20일 서울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지주로서 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렵다. 나는 돈도 없고 땅도 뺏겼다. 게다가 그들이 그 법령에 따라 내 집을 몰수한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그들은 만약 그 집이 공산주의자의 소유라면 몰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네가 인민당 당원이니 그들에게 너의 당원증을 보여주면 인민당이나 공산당이나 도긴개긴이므로 내 집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이리로 오너라!’라고 말했다.”


이북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에 관해 단편적 소식들을 전했을 뿐이지만 이 보고서를 작성한 미군 당국이나 편지 작성자들이나 토지개혁이 지닌 역사적 의미, 그것의 현재적 의의와 효과를 당대인의 시각으로 진지하게 전달한다. 우선 미군은 토지개혁 법령이 발효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뒤 일어난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편지 발신인 가운데 한 사람도 토지개혁을 가장 중요한 혁명적 성취라고 지적한다. 다른 한 사람은 농민 해방, 권좌로부터 부자들 축출, 공산당의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의 부상을 토지개혁이 초래한 정치사회적 효과로 요약했다.


▲ 토지개혁과 관련한 북쪽의 당시 농민대회 소식을 전한 사진. <8·15해방일주년기념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 중. /정용욱 교수 제공


▲ 1946년 4월10일자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에는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은 북쪽의 한 지주가 남쪽에 있는 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가 소개돼 있다. 미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는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주한미군사령부의 1946년 4월10일치 ‘일일정보보고’의 일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주로 보이는 한 발신자는 토지개혁 와중에 서울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집이라도 보전하라’고 당부한다. 노인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인다. 집칸이라도 건지려는 그의 절박함과 당황감이 편지에 그대로 묻어난다. 아들이 돌아와서 집칸이라도 건졌는지, 인민당(해방 뒤 여운형이 당수로 있었던 중도좌파 계열의 정당) 당원증이 이북에서도 통했는지, ‘새 시대, 새 사회를 위해서 감수해야 할 진통이니 감내하시라’고 아들이 부친을 설득하고 말았는지 뒷얘기가 궁금하지만 아쉽게도 알 길이 없고, 이 단편적 사료로는 더 이상 추적할 방법이 없다. 편지 몇통에 불과하고, 그것도 미군정이 검열 과정에서 주목한 내용만을 파편적으로 전했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놓인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어느 시대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특히 해방 직후라는 시기는 개인의 신상의 변화가 나라와 사회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었으며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북의 토지개혁이 일으킨 반향은 어쩌면 점령기에 미군이 마주한 최초의 ‘북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미군정은 북에서 불어온 이 바람, 식민지 상태로부터 갓 벗어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이 역사적 과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7일 만에 남한 신문 첫 보도

당시 남한을 오간 우편물을 검열하고 작성한 미군 정보보고서들은 1946년 3월 이래 미군 점령정책에 대한 불만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는데, 4월13일자 201호 보고서가 발췌한 서울에서 38선 이북의 친구에게 보내는 3월8일자 편지가 그 전형적 사례다.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난 그 모든 것들에 관해서 꼭 알고 싶으이. 여기 남조선은 일제하에 있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네. 다만 총독부가 군정청으로 바뀌었달까. 심지어 치안마저 일제 때보다 열악하다네.”


3월5일자 정보보고서가 방첩대가 수집한 첩보의 형식으로 이북에서 토지개혁이 시작된 정황을 포착했지만 남한 신문에 그 사실이 처음 언급된 것은 3월12일로 법령 공표 일주일 만이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남한 신문 중 <자유신문>에 실린 법령 전문을 영역하여 별첨했고, 조선공산당 기관지 격으로 서울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 역시 3월12일 북한에서 토지가 분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유신문>은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신문> 3월6일자 기사를, <해방일보>는 북조선공산당 공식 기관지인 <정로>(正路) 기사를 전재하는 형식으로 보도했다. 남한 신문들은 두 신문의 보도를 시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북의 토지개혁 소식을 기사로 쏟아냈고, 많은 신문이 남한에서도 하루빨리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사설을 실었다. 미군 정보당국이 발췌한 위의 편지는 발신일이 3월8일인데 그렇다면 이미 이남 신문에 보도되기 이전부터 이북의 토지개혁 소문이 남한에 유포되기 시작한 셈이다.


▲ “봉건적 토지관계 종언, 농민에 토지 분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역사적 일대과업 수행”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전하는 <해방일보> 1946년 3월12일치 지면. 한국 현대사 자료 총서 5권, 돌베개, /김남식·이정식·한홍구 공편


▲ 미군은 북한의 토지개혁법령 전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일일정보보고’에 첨부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북한의 토지개혁은 3월5일 법령 공표 뒤 바로 시작되었고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 아래 한달이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몰수 대상은 일본 국가, 일본인, 그리고 일본 단체의 소유지, 민족반역자와 월남자의 토지, 5정보(1정보=3천평=9917㎡) 이상의 지주 토지였다. 몰수한 토지는 집집마다 가족의 수와 노동력에 따라 분배했다. 토지개혁의 목표는 소작제도의 해체였고, 5정보 미만을 소유한 지주라도 소작을 주는 토지는 모두 몰수했다.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토지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몰수한 뒤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아들의 귀가를 요청하는 위의 편지 작성자는 아마 5정보 이상의 토지 소유자였을 것이다. 토지개혁 결과 집집마다 평균 1.63정보(약 4890평)의 땅을 가지게 되었고, 토지개혁은 북한 당국에 대한 주민의 지지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해방 뒤 봉건적인 토지소유제도와 식민지 지주제를 철폐하기 위한 토지개혁은 편지가 지적했듯이 어떤 정부도 피해 갈 수 없는 과제였고, 남한의 미군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한의 모든 당파들 역시 개혁의 대상과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한결같이 토지개혁을 강령이나 정책으로 채택했다. 즉, 과수원과 임야를 포함한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전답 위주로 농지만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일본인 기업과 대지주 소유 토지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대지주의 토지도 포함할 것인가, 무상 또는 유상으로 몰수할 것인가, 무상 또는 유상으로 분배할 것인가가 쟁점이었지 한반도에 있는 어느 정치세력도 토지개혁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친일관료와 지주, 자본가의 정당으로 간주되던 한민당조차 토지개혁을 주장했고 그들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제시했다.


▲ 토지개혁 뒤 북한 농민들을 대상으로 만든 포스터. /정용욱 교수 제공


▲ 토지개혁 이듬해에 나온 북한의 선전 포스터. /정용욱 교수 제공 


▲ 북쪽의 토지개혁으로 남쪽 민심이 동요하자 미군은 1946년 4월11일 거리에서 약 400명의 시민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객관성과 과학성을 결여하고 있어 조사 결과는 신뢰하기 어렵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남한 주민 73%가 토지개혁 반대?

위의 편지들을 의식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미군정 공보부 여론조사과는 그해 4월11일 서울 거주자 398명을 대상으로 가두면접 형식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미군정은 점령 뒤 다양한 방법으로 남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시행했으므로 이 조사가 새로울 것은 없으나 보고서 제목과 설문 내용이 흥미롭다. ‘서울에서 일본과 소련의 선전 효과’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제목만으로는 미군정과 일제 총독부 시절, 소련군의 북한 점령통치를 단순 비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문을 구성하는 비교항목은 세 나라에 대한 응답자의 주관적 반응과 인식을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시사적인 사안을 반영한 것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알고 있는지, 또 미국과 소련 중 어느 나라가 신탁통치를 더 원하는지 묻는 항목 정도다.


여론조사, 특히 가두면접과 같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조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없던 일이고, 그 자체로는 미군정이 표방했듯이 한국인의 여론을 점령통치에 반영하는 근대적이고 진일보한 통치방식이었지만 이 여론조사는 표본 추출, 문항 구성 등 조사·취급 방식의 측면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우선 서울시내 길거리에서 행인 400여명을 임의로 추출하여 표본으로 삼았지만 같은 서울이라도 도심부에 있는 종로를 거닐던 행인과 변두리인 영등포를 걷는 행인은 그 사회경제적 지위가 사뭇 다를 테고, 그들의 정견이나 의식 또한 달랐을 것이다. 또 그들 가운데 농민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더 흥미 있는 것은 토지개혁에 대한 설문과 그 결과다. 설문은 북조선 토지개혁 법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들었다면 미군정이 이남에서도 비슷한 법령을 실시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전자에 대해 89%가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고, 후자에 대해서 21%가 ‘네’, 73%가 ‘아니오’, 그리고 6%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어설픈 조사지만 토지개혁에 관한 설문 결과를 놓고 보면 어쨌든 서울 거주자 열에 아홉은 북조선 토지개혁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게 응답한 사람 대부분은 남한에서 미군정이 토지개혁 법령을 실시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셈이다. 이 여론조사 결과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 북한 농민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던 토지개혁을 서울 거주자들은 바라지 않은 것인가? 많은 신문이 대다수 농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토지문제를 해결하라는 사설을 싣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조사 결과가 나왔으며, 미군정 여론조사의 숨은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