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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4. 토지개혁 (하)

잠용(潛蓉) 2020. 1. 12. 21:44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현대사
14. 토지개혁 (하)

미군정, "토지개혁 없으면 남한 민주화도 없다" 해놓곤

한겨레ㅣ2019.07.06. 10:56 댓글 6개 


45년 10월 소작료 제한하는 등 남한 토지개혁 시급성 알았으나
여론조사 결과 핑계로 결국 포기- 조사방식, 객관성·공정성 결여
농촌 아닌 서울·경기만 조사하고 사업가·노동자, 농민보다 많이 포함

결국 일본인 농지만 매각하고 끝내 지주층 반발 제압할 의지 약하고
유상분배' 호응 못 얻을까 우려 탓


▲ 미 군정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한국 정부 수립 이후로 연기하자는 여론조사 결과를 이유로 결국 포기했다. 대신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지에 대해서만 경작 중이던 농민들에게 15년 분할상환 방식으로 유상 매각하는 농지개혁을 1948년 3월 실시했다.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이 그해 3월22일 관련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 오른쪽 옆에 민정장관 안재홍의 모습이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미군정이 1946년 4월 38선 이북의 삼호(함경남도 낙원군에 위치)로부터 이남의 김해에 사는 친구에게 배달된 편지 검열을 통해 북한의 인민위원회 성원이 소련군의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이남을 오간 사실을 포착했다. 발신자는 남한에서 생산되는 쌀과 동해 북단에서 잡히는 명태를 교환할 것을 제안한다. 편지는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남조선에서도 쌀의 수출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려고만 하면 방법은 찾을 수 있다. 38선은 처음 우려했던 것만큼 장애요인이 아니며, 거래만 성사된다면 한몫 잡을 수 있다”고 적었다. 편지는 제안한 거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덧붙인 뒤 “이 문제를 생각해본 뒤 가능한 한 빨리 전보를 보내게. 그러면 삼호 인민위원회를 대신하여 내가 그곳으로 가겠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1945년 가을 이래 북한의 식량 부족은 매우 심각했다. 남한과 달리 식량의 절대적 부족으로 위기가 초래된데다 가난한 군대였던 소련군의 식량 반출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식량 위기가 심각해지자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위해 1946년 1월 서울을 방문한 소련군 대표단은 회담 내내 미군 대표단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며, 심지어 이북으로부터 이남에 제공되는 전력 사용료를 식량으로 대납해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위의 편지는 식량 위기가 심각해지자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남한으로부터 쌀 밀수를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즈음 북한의 식량 수급 상황을 전한 또 다른 정보보고서는 “지금 북조선에서 인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렵다. 농민조합에 의한 쌀의 매입과 판매는 토지개혁 법령 덕분에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다. 소작농들은 느긋한 반면 지주들과 무직자들은 곤경을 겪고 있다. 현재 식량 배급은 공직자들과 매우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식량 위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쌀의 공출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토지개혁이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라 할 만하고, 토지개혁으로 농촌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바뀌면서 배급도 빈민과 공직자 위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경남 김해 지역의 쌀과 북한 함경남도 삼호 지역의 명태를 바꾸자는 내용의 북한 편지를 검열했던 1946년 4월의 미군정의 정보보고서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처음엔 포괄적 농지개혁 계획

북한의 토지개혁이 이남에 몰고 온 ‘북풍’에 미군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확인할 것은 미군정의 토지개혁 정책이다. 미군정은 진주 직후인 1945년 10월5일 군정법령 제9호로 소작료 3·1제(전체 수확량의 1/3 이하로 제한)를 공포하여 식민지 지주제 아래서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의 부담을 경감해주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처음 있었던 소작료 제한조치였으나 고율 소작료를 가능하게 한 종래의 봉건적 토지소유제를 완전히 해체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경제고문단과 협력하여 일본인 소유 농지를 소작농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1947년 10월에 나온 ‘남한 경제상황’(The Economic Situation of South Korea) 보고서는 그 계획이 불발한 사정을 전한다.


“소작농에게 일본인이 소유했던 약 50만 에이커의 논과 15만 에이커의 밭을 판매하려던 이 계획은 한국인 부재지주 소유 토지를 포함하는 전체 토지개혁의 1단계에 해당했다. 이 계획은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나 미군정이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 기초해서 1946년에 그 실행이 연기되었다. 이 여론조사에서 한국인들은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을 선호했다. 미소공위가 1946년 3월에 개최될 예정이었고, 그 당시는 한국 정부가 1946년에 수립될 것이 기대되었다.”


보고서는 미군정도 일본인 소유 농지(귀속농지)는 물론 한국인 부재지주 소유 농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농지개혁을 계획했으나 한국인들이 오히려 한국 정부 수립 뒤로 개혁을 미룰 것을 원해서 계획이 연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언술은 부분적으론 사실을 반영하고, 부분적으로는 시간적 선후관계의 오류, 사실의 왜곡과 그에 대한 합리화를 포함한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관한 여론조사를 1946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첫번째 조사는 3월5~11일 서울과 근교 경기도 지역에서 실시되었고, 그 조사 결과를 토대로 3월12일 ‘농지 처분, 산업과 기타 자산의 국유화에 대한 조선의 여론’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론조사들은 모두 일본인 소유 농지와 한국인 대지주 소유 농지의 처리를 설문 항목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여론조사들은 설문의 내용적 적실성, 추출된 표본의 대표성, 조사 방식의 적절성 등의 측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귀속농지는 대부분 미군정이 신한공사를 설치하여 관리했고, 그 처분에 관해서는 미군정의 의지가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했다. 마찬가지로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의 견해가 중요했을 텐데 위의 여론조사들은 정작 그들의 의견을 제쳐두고 일반인들의 의견을 조사했다. 그것도 서울과 근교의 경기도 지역에서 조사를 벌였는데 당시 서울은 농촌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경제적 환경에 있었고, 따라서 서울과 근교 지역의 주민들이 농촌 사회의 여론을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미군정은 남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여러 차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지역이나 대상이 편중되는 등 객관성을 상실했다. 사진은 여론조사 내용을 담은 보고서(1946.5.15) 하단에 하지 사령관이 “농민만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모습. /정용욱 교수 제공

 
실제 조사 인원수도 사업가·전문직과 노동자가 농민의 두 배 이상이다. 보고서 작성자는 이를 경기도와 남한의 인구 구성 비율로 보정했다고 적었지만 지역적 대표성과 함께 표본 추출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당시 가두조사의 기술적 제한성을 고려하더라도 서울과 근교 지역에서, 또 농민의 갑절이 넘는 다른 사회계층을 표본으로 추출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장군도 표본의 대표성 문제를 눈치챘는지 5월15일자 보고서 여백에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아처 러치에게 “러치 장군, 전적으로 농민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할 것을 제안하오”라는 지시사항을 적고 있다.


‘미루자’는 의견이 60%?

설문 결과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귀속농지나 한국인 지주 소유 농지나 그 처분을 모두 한국 정부 수립 뒤로 미루자는 의견이 60% 안팎으로, 미군정 아래서 매각하거나 무상으로 분배하자는 의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여론조사들에서 표본의 다수를 점했던 서울과 근교 지역의 사업가·전문직의 경우 토지개혁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았거나 오히려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부재지주일 가능성이 더 많았다. 게다가 식량정책 등 미군정 경제정책의 거듭되는 실수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불신이 한껏 증폭되었던 사정과, 농민의 경우에도 미군정하에서 처분된 농지가 한국 정부 수립 후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세했을 것을 참작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능히 예상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신문기자회가 1947년 7월 초순 서울 시내 중요 지점 10곳에서 행인 2459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중 토지개혁 방식을 묻는 항목에 대해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17%,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68%, 유상몰수 무상분배가 10%, 기권이 5%였다. 미군정의 1946년 3월12일자 조사에서 일본인 소유 농지의 무상분배를 원한 비율은 14.5%였다. 1년 뒤이긴 하지만 누가 여론조사를 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미군정 공보부 여론조사과의 리처드 로빈슨 대위는 이미 4월 초에 앞의 여론조사 결과를 예측하면서 토지개혁을 연기할 것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38선 이남의 일본인 소유 농지 매각령에 대한 예상 가능한 반대’(1946. 4. 7)인데, 제목부터 남한 주민들이 미군정의 일본인 소유 농지 매각에 반대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해서 작성되었고, 그렇다면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는 미군정이 예측한 결과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모든 정당, 정파가 토지개혁의 절실한 필요성에 동의한다는 점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봉건적 상태에 있는 조선이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은 매우 고상하지만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시작하기에는 여러 가지 반대 요소들이 있고, 장래 한국 경제의 구조를 구축할 중요한 결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나의 중요한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요소 중 첫째는 군정이 미래의 한국 정부에 소작농들에게 경지를 매각할 것을 의무 지울 권한을 가졌는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가뜩이나 미군정의 권위가 실추하고 있는데 분배해야 할 토지의 산정부터 최종 분배에 이르기까지 누가 그것을 주도할 것이며, 판정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소송을 제기하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등 실제 분배 과정에서 일어날 복잡한 문제들의 관리였다. 첫째는 법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이 개혁을 실시했을 때 장래에 일어날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미군정이 토지개혁 실시를 주저하고 연기한 보다 현실적 이유는 또 하나의 요소인 한국인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보고서는 일본인 소유 농지의 방매를 미군정이 할 것인가 한국 정부가 할 것인가를 물었던 3월12일자 조사 결과, 일제에 비해 미군정이 더 낫다는 여론이 겨우 절반을 넘어 51%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 응답자 중 55%가 미·소 양군 철수를 원한다는 3월 하순의 조사, 양군이 철수하면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42%가 양군의 즉시 철수를 원한다는 더 당황스러운 사실 등 당시 남한의 여론 동향을 들어 미군정 및 미군정 정책의 안정성과 지속성에 대한 신뢰가 매우 저조한 상태이고, 특히 최근 북한이 공표한 토지개혁 법령에 비추어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하려는 장기 분할상환 방식의 유상매각 방안이 바람직하지 않고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연기가 필요한 주요 이유로 제시했다.


▲ 미군정 공보부 여론조사과의 리처드 로빈슨은 1946년 4월 초에 남한에서의 토지개혁 실시를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사진은 보고서의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 남한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내용의 미군정 리처드 로빈슨의 1946년 4월 초 보고서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감당할 자신 없었던 미군정

로빈슨은 미군정 내 자유주의적 개혁론자로서 부임 이래 계속 토지개혁을 주장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이 보고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실제 사정을 드러낸다. 로빈슨은 토지개혁의 정치적 효과를 강조하며 토지개혁이 없으면 남한의 민주화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보고서를 작성할 무렵에는 미군정이 구상했던 일본인 농지 처분 방안을 연기하고, 대신 미군정이 미래에 한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줄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며, 그 조치만이 급진 좌파들의 선동을 방지하고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중산층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로빈슨이나 한국인 정당, 정파들이나 모두, 일제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갓 벗어난 한국 사회가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봉건상태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고, 그 첫걸음이 토지개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실현은 그것을 절실히 원하는 농민의 바람과 상관없이 점령 당국이 고려하는 정치적 효과에 따라 실시 시기가 저울질되었다. 미군정의 토지개혁 정책은 결국 점령 말기인 1948년 3월 신한공사가 소유했던 일본인 소유 농지만을 경작하던 소작농들에게 15년 분할상환 방식으로 유상매각하는 데 머물렀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지 기반이 되었던 한국인 지주층을 급속하고 철저하게 해체해야 할 이유나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식량 위기로 미군정에 대한 신뢰와 인기가 극히 저조한 상태에서 북한의 급진적 개혁과 대비되는 미군정의 온건한 개혁책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와 동력을 마련할 수 없었다.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