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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7. 좌우합작 운동과 미군정

잠용(潛蓉) 2020. 1. 12. 21:48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7. 좌우합작 운동과 미군정

하지와 이승만, 좌우합작 등 놓고 "격렬히 언쟁"하다

한겨레ㅣ2019.08.17. 17:26 수정 2019.08.26. 18:16 댓글 0개

  

1차 미소공동위가 결렬된 이후 여운형 김규식 등 좌우합작 추진
임시정부 수립, 남북합작을 목표 미군정도 입법기구 설치 위해 지원

이승만은 반소련 캠페인 이어 단독정부 수립 공공연히 주장
하지, 미소공위 재개 등 위해 이승만을 "단속"하고 "감시"


▲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사진은 1947년 3월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과 만나 환담하는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국사편찬위소장 자료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남한 정치인들이 좌우합작을 본격적으로 모색하던 1946년 6월 하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그의 정치고문을 지내다 5월 하순 미국으로 돌아간 굿펠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과 북한 주둔 소련 군정부의 움직임, 남한의 정치 동향 등 당시 정세에 대한 미군정의 평가와 점령군 사령관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편지인데 그중에서도 좌우합작에 관한 언급이 눈길을 끈다.

“이승만은 말 많으나 생각이 별로 없어”


“남한에서는 정치적 무한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선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후회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들은 남에서 50 대 50, 북에서 100 대 0, 전체적으로 66과 2/3 대 33과 1/3을 원한다. 여운형과 허헌이 김규식과 회의를 하며 조금씩 진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놀랄 만한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약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을 폐기한다면 이곳의 꼬마들에게 내가 생각하던 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민전은 약화되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고, 그들의 노선을 조금 바꾸고 있는 중이다. (중략)

나는 이승만의 반소 캠페인을 강하게 단속해왔다. 그 노인네는 불행하게도 즉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을 축출하기를 원한다고 너무 많이 발언해서 우익은 물론 좌익 계열의 신문들까지 모두 이를 보도하고 있다. 또 그가 미국에 무역회사를 차려서 한국과의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 보도에는 당신도 등장한다. 다른 모든 한국인들처럼 그는 말이 너무 많고, 반대로 생각이 별로 없다. 내가 제안하는 요점은 당신은 이곳에서의 어떠한 금전적 이해관계에 관해서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널드와 그의 동료들이 정치고문 활동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만나고 있는데, 그놈들을 믿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비소비에트 좌파를 끌어내어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선을 붕괴시키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는 것을 우려한다. 번스가 경제 전문가들을 모집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간다. 데이어도 미소공위를 재개하려는 우리의 처방이 먹히지 않으면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스미스가 계속 이승만을 감시 중이다. 나는 그 늙은 악당을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와 두어 차례 격렬한 언쟁을 나누었다. 그와의 만남은 하느님이 보낸 천사들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성경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략)”


▲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자신의 고문이었던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6년 6월23일)의 일부. 그는 이 편지에서 한국 정치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대한민국사자료집 28권 115쪽, /국사편찬위 간행


▲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자신의 고문이었던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6년 6월23일)의 일부. 대한민국사자료집 28권 116쪽, /국사편찬위 간행


하지 장군은 이승만과 어떤 내용으로 언쟁했기에 그 격렬함을 성경 창세기의 야곱과 천사의 씨름에 비유했을까? 야곱이 천사로부터 축복과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냈듯이 이승만도 그로부터 축복과 새로운 호칭을 얻어냈을까? 하지는 야전에서 무훈을 쌓아온 무장답게 굿펠로가 한국을 떠난 뒤 한 달여간의 정치적 상황 변화를 요점만 추려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는 군인답게 피아 구분이 뚜렷하고, 어투와 필체도 너무 직선적이고 노골적이라 상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남한 정치를 꼭대기에서 관장하는 사람이나 쓸 수 있는 필체이자 내용이다. 편지는 복잡한 계산이 난무하게 마련인 정치의 세계에서 그가 취할 행동에 대해 마치 군사작전을 설명하듯이 판단과 예측, 그리고 방침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도대체 하지가 이승만을 잡아놓으려는 ‘궤도’는 어떤 것인가?


여운형이 암살당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인 1947년 7월22일 주한미군사령부 군사실은 ‘여운형의 죽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보부로 보냈다. 그 보고서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미국의 목표를 첫째, 이승만과 김구 계열에 대한 의존의 점진적 철회, 둘째, 중도파 수립, 셋째, 과도입법기구 설치로 정리했는데, 하지 장군은 보고서에다 의미심장한 논평을 달아서 정보부로 회송했다. 그는 “6쪽은 사실과 다르네. 우리가 우파와 노는 것은 사실은 우파를 리버럴에게 접근하게 만들고, 좌파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이네”라고 연필로 휘갈겨 쓴 뒤 해당 부분의 ‘이승만과 김구 계열에 대한 의존의 점진적 철회’를 ‘한국인의 자체 합작 노력에 대한 의존의 포기’로, 또 ‘중도파 수립’을 ‘중도파 수립을 압박’으로 정정했다. 이 논평에서 리버럴은 당시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감안하면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를 의미할 테고, 좌파는 조선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은 온건좌파, 특히 그 대표자인 여운형을 의미한다.


이 논평은 하지 장군이 편지에서 한 얘기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해준다. 여운형과 허헌은 좌우합작의 좌측 대표였고, 이들이 우측 대표인 김규식, 원세훈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 장군은 편지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동시에 그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음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하지 장군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주려는 것은 아마 과도입법기구의 설치나 과도정부 수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지가 언급한 궤도는 이승만의 반소캠페인을 자제시켜서 그가 더 이상 미소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단정(단독정부) 수립 발언 역시 자제시켜서 미군정이 추진하려는 입법기구 내지 과도정부 수립이 단정 수립 기도로 공격받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었다. 전자와 관련해서 미소공위가 휴회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결렬된 것이 아니고, 1차 미소공위 결렬 책임을 둘러싼 공방에서 미군정도 자유롭지 않았다.


▲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1946년 5월)된 뒤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주도로 좌우합작 운동이 시작됐다. 미소공동위 재개를 바란 미군정은 초기에는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나, 우익 지도자였던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그와 갈등을 빚었다. 사진은 1945년 11월24일 상하이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중앙)와 그의 숙소인 경교장으로 방문했던 하지 중장(오른쪽), 왼쪽은 이승만. 국사편찬위 소장 자료

이승만과 하지, 굿펠로에게 각각 편지

하지가 굿펠로에게 편지를 보낸 1946년 6월23일을 전후하여 이승만도 몇 차례나 남한의 정계 동향과 하지 장군과 얽힌 얘기를 편지 또는 대외비의 비망록 형식으로 굿펠로에게 전달했다. 이승만은 6월19, 22, 27일과 7월3일에는 비망록을, 6월21, 23, 28일, 7월2일에는 편지를 보냈고, 같은 기간 굿펠로 역시 세 통의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양자의 빈번한 교신은 이승만과 굿펠로가 경제적 이권 양도와 관련한 스캔들로 남한 신문에 오르내린 사정도 있지만, 특히 이승만이 좌우합작과 관련한 남한 정계의 풍향 변화, 그중에서도 하지의 의중에 대해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나 이승만이나 모두 이 미묘하고 중요한 시기에 상대방의 의중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덧붙여 자신의 셈법을 굿펠로에게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야곱과 천사의 씨름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이승만은 6월19일과 22일 굿펠로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미국이 옹호하는 구도는 “김규식으로 하여금 여운형과 다른 한두 명을 우리(이승만과 미군정)와 일하게 끌어들이고, 이북의 이웃들에게 부의장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며, “미소공위의 갑작스런 정회 이래 하지 장군은 이승만을 수반으로 삼아 세 명의 저명한 지도자 이승만, 김구, 김규식으로 이루어진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고 적었다. 이승만의 비망록은 부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담고 있지만 미국의 발상과 의도를 잘 드러낸 측면이 있다.


미국이 좌우합작 과정에서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합작의 성사를 통한 입법기구 또는 과도정부의 설치였다. 그러나 그것에 못지않게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우익 일반의 참여를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계속 확보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 출발 시점부터 이승만이나 김구가 합작 지지 세력으로 나서거나 최소한 우호적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은 합작운동 초기에 김규식이 별로 의욕을 보이지 않자, 심지어 이승만에게 김규식을 설득해 좌우합작에 나서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미국은 우익 정치세력의 통합과 강화를 꾀하면서 우익연합의 대표로 중간우파를 내세웠다. 미국은 1947년 후반 단독정부 수립안이 현실화되기 전까지 이러한 구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후에 나타나는 하지와 이승만의 불화는 전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좌우합작에서 의도한 기본적인 세력 배치의 다른 하나는 좌익의 일부를 견인하거나 좌익을 분열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군정 내에서 좌우합작을 주선하며 한국인과 접촉창구 역할을 했던 것은 하지 장군의 편지가 지적했듯이 아널드와 그의 동료들이었는데 특히 버치 중위가 초기에 여운형, 허헌과 김규식, 원세훈 사이를 오가며 모임을 주선하고 아널드 군정장관이 이를 지휘했으며, 그의 이임 후에는 미소공위 미국 쪽 대표단장을 하게 되는 브라운 장군이 그 역할을 맡았다.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 지원은 처음부터 입법기구 설립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지향점을 가졌지만 좌우합작의 주된 당사자인 김규식과 여운형은 미국의 구상과는 다른 목표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남한의 좌우합작에 이은 남북합작으로 진정한 민족통일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 개시 이전부터 통일정부의 창출을 돕기 위해서는 여러 정파를 대표하는 연락위원회 내지 협의위원회의 수립이 필요하고, 미군정의 주도로 설치된 민주의원으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정읍 단독정부 발언 이후 단정수립설이 우익을 중심으로 확산되자, 미소공위 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민주의원, 민전과 관계없는 좌우의 통일조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양자는 모두 좌우 양측의 대표기관이 가진 제한성과 좌우합작을 위한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 1946년 2월14일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식에서 하지 중장의 연설을 듣는 김규식, 이승만, 김구 /국사편찬위소장 자료


좌우합작에 우익은 소극적

문제는 좌우합작에 대한 양측의 구상을 조정하여 좌우합작의 출발점과 전술적 목표를 설정하고, 좌우합작을 양씨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6월과 7월의 좌우합작을 위한 예비회담들은 이 문제를 조정하는 데 소비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의 발전 경로나 단계의 설정, 발전 전망, 좌우합작운동의 성사를 위한 세력배치 등에서 양자 사이에는 부분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좌우합작을 통해 미소공위를 재개시키고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한다는 기본목표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또 양자는 좌우합작에 근거해 남북합작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좌우합작운동 초기만 해도 좌익 측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에 비해 우익은 좌우합작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군정 보고서들은 여운형과 허헌이 좌익계열 정당의 충분하고 전면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김규식, 원세훈은 우익 지도자들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우익 내에는 좌우합작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고, 좌우합작의 성사 가능성을 타진하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저울질을 계속했다. 반면에 좌익은 미소공위 재개운동과 좌우합작을 연결시키고자 했고, 좌우합작이 우익으로부터 온건우파를 분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익도 좌우합작의 필요성과 좌우합작에 대한 대중적 압력을 부정할 수 없었고, 7월22일 정식 예비회담을 개최할 무렵에는 좌우합작 참여자들이 좌우합작을 통해 미소공위를 재개시킨다는 목표에 잠정적으로 동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중도 좌·우파와 우파, 좌파가 모두 망라되었다.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