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0. 테러의 일상화 (하)
'댓글부대' 원조가 된 우익 청년단체
한겨레ㅣ2019.10.05. 09:56 수정 2019.10.06. 11:16 댓글 414개
단독정부 수립에 올인한 우익. 미소공위 깨려 반탁 시위 앞장
덕수궁 앞 대규모 시위는 폭력화, 미군정·경찰은 모른 척 방관
호남지역 백색테러 횡행 발맞춰, 우익단체들 미 특사에 편지 공세
분회장 이름 등 사용 같은 필체로,'신탁통치 결사반대' 여론전 전개
실제 시민 여론은 반탁에 냉담
▲ 반탁 시위는 우익 청년단체들이 권력의 비호 아래 세력을 키워나갈 좋은 기회였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반탁을 명분으로 호남 등지에서는 거의 날마다 테러를 저질렀으며, 충청에서는 웨드마이어 미 대통령 특사에게 여론전을 펼쳤다. 사진은 1947년 6월23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인 서울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서 열린 대규모 반탁 시위 모습. 김구 등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소련군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 과격했지만, 경찰은 적극 진압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웨 장군에게 고함
"우리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내조(來朝)하신 귀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탁치정부 같은 내정간섭을 받는 정부를 원치 않습니다. 그럼으로 신탁을 절대로 반대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키 위하여 결사투쟁하고 있습니다. 장군이시여. 우리의 진의를 똑바로 양찰(諒察)하시어 원조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서기 1947년 8월30일
충청남도 천안군 성환면 성월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월리 분회장 김창희(인)”
이 편지가 들어 있는 문서철에는 성월(成月), 대정(大井), 매곡(梅谷), 광주(光珠), 금신(金新) 등 성환면에 있는 거의 모든 리(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광복청년회 분회장 명의로 동일한 내용을 비슷비슷한 필체로 적은 수십장의 편지가 들어 있다. B4 용지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좌우 양단 양면 괘지에 펜으로 쓴 편지들은 모두 동일한 인사말로 시작하며 마지막 문장만 조금씩 다르다. 웨더마이어 사절단 일행이 중복되는 다수의 편지를 보고 긴장했는지, 웃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편지들은 ‘절대 반대’ ‘전취’ ‘결사투쟁’ 등 살벌한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전달했다.
반탁시위 상징된 6·23 데모
요즘 세태에 비유하자면 편지들은 ‘댓글부대’의 작품이고, 분회장들은 매크로가 더 일찍 개발되었더라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한 셈이다. 편지들이 내건 공통의 구호는 ‘신탁 절대반대’인데 아마 중앙에서 온 지시에 따라 성환면 소재 각 리의 독촉, 광청 분회장이 베껴 썼거나, 아니면 양 단체의 성환면 지부에서 일괄하여 작성한 편지들일지도 모르겠다. 분회장으로 이름을 올린 이들은 실제 성환면 거주자도 있겠지만 타지인도 많았을 것이다. 이 문서철에는 한지에 붓으로 쓴 편지도 몇 통 있는데 발신자는 서로 다르지만 필체가 같고, 내용이 꽤 장황하다. 미사여구로 수식된 부분을 제외하고 주장만 추리자면 ‘외세의 간섭 없는 독립정부 수립, 38선 즉각 철폐, 신탁통치 반대, 총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수립’으로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당시 이승만, 김구,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2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정국에 임하여 제출한 정치적 주장과 논리를 종합한 것이다. 댓글부대식 편지들은 그 가운데 ‘신탁통치 반대’로 요구사항을 집약했고, 조직적인 편지 보내기를 통해서 세를 과시하는 한편으로 미국 대통령 특사인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그것이 마치 한국 사회의 다수 여론인 것처럼 압력을 행사하는 구실을 했다.
서울의 기자들이 호남사정 시찰기자단을 만들어 호남 각지의 테러 사건을 조사하던 와중에 1947년 6월23일 서울을 비롯해 남한 각지에서 반탁 데모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일어난 반탁시위는 2차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던 덕수궁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소련 대표단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과격했지만 경찰은 시위대를 적극 진압하지 않았다. 그날은 마침 음력 5월5일 단오절이었고, 이미 반탁시위를 경계 중이던 당국으로부터 집회 허가를 받지 못한 반탁투쟁위원회, 서북청년회, 전국학생연맹 등 주최 측은 단오절과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서윤복 선수 환영 행사를 핑계로 종로 네거리에 모여서 시위를 시작했다.
덕수궁 앞에서 경찰과 대치 중에 시위대 대표들이 미소공위 미국 쪽 단장 브라운 소장을 만나 전달한 4개 요구사항은 ‘신탁 즉시 철폐, 총선거 실시 보장, 김구씨에 의하여 수립될 정부를 조선 정부로 인정할 것, 이승만·김구 노선 지지’였다. 이날의 반탁시위에 대해 조병옥 경무부장, 이인 검찰총장은 물론 김형민 서울시장, 안재홍 민정장관, 브라운 소장, 러취 군정장관 등 미군정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한국인·미국인 책임자들이 모두 나서서 성명 또는 기자회견으로 주모자와 관계자 처벌, 반탁시위 불허, 미소공위 방해 행위 엄단 등을 약속했으나, 당국자들의 언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2차 미소공위가 열리던 내내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6·23 반탁 데모는 2차 미소공위 기간에 일어난 반탁시위의 신호탄이자 상징물과 같았다.
6·23 반탁 데모가 노리는 정치적 목표는 명확했다. 시위대 대표들이 브라운 소장에게 전달한 요구사항은 앞의 성환면 우익단체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데, 반탁을 명분으로 개최 중인 미소공위를 파탄시키고, 총선거를 통해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반탁’은 1차 미소공위 이래 우익단체들이 집회와 시위마다 단골로 내걸었던 구호였던 만큼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이제 그것이 단순히 구호를 넘어서서 실력 행사를 통해 기껏 재개된 미소공위 파탄을 목표로 삼았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미소공위와 한국인 정당, 사회단체의 협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표방했으나 미군정은 의사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 정당·단체들에 지원을 계속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제 우익단체들의 반탁시위가 미소공위 자체를 위협함으로써 난처하게 되었다. 미소공위 재개 무렵부터 백색테러가 늘어난 것은 우익 정당·단체들이 힘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관철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고, 그것이 호남지역에서는 우익단체의 테러로, 성환면에서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조직적인 댓글 공작으로 나타났다.
▲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분회장의 편지. 신탁통치 결사반대라는 비슷한 내용에 어떤 것은 필체도 똑같았다. /정용욱 교수 제공
▲ 웨드마이어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보내는 비슷한 내용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분회장의 편지. /정용욱 교수 제공
노혁명가 원세훈의 견해
그렇다면 6·23 반탁 데모에 당시 한국 사회 여론은 어땠을까? 조선신문기자회 조사부가 사건이 난 지 열흘이 지난 7월3일 오후 다섯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서울 시내 중요 지점 10곳에서 경찰 입회하에 통행인 2459명에게 반탁 데모, 미소공위 협의 대상, 국호, 정권 형태, 토지개혁 방식 등 5항목의 설문으로 일제히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보면 6월23일 반탁 데모 사건이 독립의 길이라는 응답이 651표로 약 26%를 조금 넘었고, 독립의 길이 아니라는 응답이 1736표로 71%에 조금 못 미쳤으며, 기권은 72표로 3%보다 조금 적었다. 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은 반탁시위에 냉담했거나 부정적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이자 조선농민당 위원장인 원세훈이 국치일인 8월29일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정치원조에 관한 건의서’라는 제목으로 긴 편지를 보냈다. 원세훈은 표지 포함 양면 괘지 11장에 걸쳐 활달한 필체로 미군정 점령 통치의 실상, 미국이 취해야 할 경제원조 방안, 미군정 내 한국인 관리와 경찰의 실체와 부정부패상, 남한 내 여러 정치세력의 성격과 활동 양상을 토로하며 미국이 해야 할 정치적 원조책을 논했다. 그는 당시 중도파로 분류되었고 좌우합작파와 행동을 같이했으나 3·1운동 훨씬 이전인 1911년부터 비밀결사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시작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편지에서 극좌와 극우를 모두 비판했는데, 극우 테러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남겼다.
“극우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 자주독립을 구호로 공위를 파괴하고 남조선 단독정부를 조직하야 자파의 수중에 정권을 장악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봉건재벌을 포옹하야 진보적 인민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보선(普選·보통선거)의 급속한 실시는 그들이 원하는 것으로 정략에서 나온 데 불과합니다. 그들은 한 노정객을 민족적 최고 영도자로 내세우고 당자 역시 이에 만족한 듯합니다. 그를 국부로 봉대하고 인민에게 무비판적 존경을 강요하매 귀국의 국책을 자파에게 유리하게만 곡해 선전하야 세력 부식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북에서 숙청당한 반역자군과 생활고로 월경한 동포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사감도 있어 보복적 의미로 그 슬하에 들어가서 경향(서울과 시골)에 테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파의 부식(불려서 넉넉히 함)에 급급한 나머지 민주주의자까지 공산주의자로 몰아 그들의 언론과 집회까지 방해하여 남조선은 실로 암흑과 공포 시대를 보내고 있나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남의사(藍衣社, 중국 국민당의 특무기구)의 재판(再版, 되풀이)이 남조선에 출현하려 하고 있으며 군정 관리와 결합이 되어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며 각하께 솔직히 호소하나이다. 38선의 획정은 이 비극을 산출하였으니 약소국의 좌우대립 중 그 어느 나라보다 위험할까 하나이다. 이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육성을 원조해주겠다는 귀국으로서는 유감이겠으며 한인의 가장 원치 않는 정치세력이외다.”
편지에서 언급한 노정객은 이승만일 테고, 그는 중도파 정치가답게 군정 개혁과 민주경찰의 완성으로 불순한 극우세력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우익이 다수를 점한 과도입의원에서 보통선거법이 통과되었지만 총선거는 정치 훈련, 군정 개혁과 민주경찰의 완성이 있은 후에 시행해야 한다는 조언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편지를 읽을 때 극우 테러의 발호와 좌우대립이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편지에는 노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가 당시 정국을 바라보며 품은 솔직한 소회와 우려가 면면에 녹아 있다.
▲ 반탁시위에 대한 서울 시민의 길거리 여론조사 결과를 실은 <조선중앙일보>의 1947년 7월6일치 신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6·23 시위의 폭력적 양상과 이에 대한 경찰의 소극적 태도를 보도한 <서울석간>의 1947년 6월26일치 신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화가의 붓 칭송한 웨더마이어
과연 웨더마이어 장군은 댓글 편지와 당시 남한 사회에 만연한 테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한 체류 중 배포되었는지, 아니면 남한을 떠난 뒤 배포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나 미국 공보원은 웨 장군이 남한 여행 중 ‘조선 문제’에 대해 연설한 내용의 요지를 포스터와 삐라로 만들어 곳곳에 붙였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현 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 ‘권리 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리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희망하는 바로서,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의 붓이나 경기가의 도약봉, 바이올리니스트의 활이나 문장가의 붓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우며 많은 이익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인가. 조선이 통일된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는 인권과 사유재산을 보장하며 자유기업을 장려하는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제일 어려운 문제는 어느 나라든지 무력으로서 권세를 잡으려 하는 욕망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국내나 국외나 이러한 권리의 욕망을 없애거나 혹은 감소시켰으면 더 좋은 목적을 속히 또 용이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파란 눈의 특사가 보기에도 백주대낮에 테러가 활개 치는 남한의 상황은 민망했던 모양이다. 신문사와 기자에게 테러가 빈발하는 상황에서 화가와 문장가의 붓, 바이올린 활을 많이 보급한다고 해서 군사적 수단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웨 장군은 순화된 용어와 완곡한 표현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를 사용하지 말 것, 최소한 자제할 것을 한국인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현재도 여론 조작에 ‘기레기’와 댓글부대가 대거 동원되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양자의 뿌리는 깊고도 길다. 1947년 봄과 여름, 한국 사회에서 양자의 작동은 대부분 상대방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형태로 강요되었다. 마치 그것이 가진 폭력성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9. 테러의 일상화 (상)
"완장 찬 청년들이 농민 구타... 경찰은 테러단과 야합"
한겨레ㅣ2019.09.22. 09:16 수정 2019.09.22. 09:36 댓글 120개
1947년 전국에 테러 공포. '독청' 등 각종 우익단체들
농촌지역 원정테러도 감행, 미 특사에 하소연 편지 쇄도
호남지역 특히 테러 심해, 좌익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마을마다 테러단이 휩쓸어,'사상전향서'·기부금 강요
친일파 출신 경찰은 방조
▲ 1947년 여름 전국은 테러 공포에 휩싸였다.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우익단체들이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백색테러를 자행했으나, 친일파 출신이 장악한 경찰은 방조하거나 이를 조장했다. 대표적인 우익단체의 하나였던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1948년 5월 소련의 철수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집회를 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친애하는 웨더마이어 중장 각하!!!
혹서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36년간 제국주의 기반(羈絆: 굴레)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2년 반이나 되는 오늘날에는 공포와 불안으로 화(化)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해방, 독립을 주고자 진주하신 미군정 하에 있는 남조선에는 왜 이리 살벌한 분위기가 도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상(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하여 ‘빨갱이’라고 하여 남편을 동생을 아들딸을 감옥과 테로(테러)의 심판소로 끌려보내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각하!!! 미군정 내에 있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의 ◯◯단 한민 한독 독촉 그의 테로단 대한노총 서청 광청 건청 등을 해체시키시고 삼상 결정으로 하루속히 실천하여 전 인민 전 여성이 다 잘 살 수 있는 정부로 세워주시기를 진정합니다. 끝으로 각하의 건강을 축하합니다.
1947년 8월30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08의 32
정문자 (인)”
▲ 시민들에 대한 우익단체의 테러 위협을 미국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고발하는 편지. 서울 인사동에 사는 여성 ‘정문자’가 자신의 신원을 밝힌 채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
서울 인사동 여성의 편지
1947년 8월 말 늦더위가 한창인 때 서울 인사동에 사는 한 여성이 미국 대통령 특사로 남한을 방문한 앨버트 웨더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에게 진정서 한 통을 보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절박함을 편지 서두와 중간에서 웨더마이어 장군을 부를 때 연이어 찍은 세 개의 느낌표로 대신했다. 웨더마이어 장군이 이 여성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아니, 이 여성은 편지를 보낸 뒤 과연 무사했을까?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이런 편지를 기명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1947년 8월 서울의 상황이었다. 몽양 여운형조차 한 달여 전 수도경찰청장으로부터 공공연히 정가에 떠도는 암살 협박을 전해 들은 며칠 뒤 피살된 판국에 우익 정당, 단체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우익 청년단체들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며 그 해체를 주장한 편지의 작성자가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상황이 그러함에도 편지 작성자는 주소를 밝힌 것은 물론 이름 아래 도장까지 찍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해주었다. 이 여성은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순진한 것인가? 편지는 해방 이후 미군정하 남한 사회의 변화와 최근 동정을 한두 문장으로 요약해버리고 자신의 고통과 그 해결 방향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단정한 필체에다 능숙한 펜 놀림으로 보건대 편지 주인은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인텔리 여성 같다. 마지막 단락에서 ‘전 인민’ 다음에 굳이 ‘전 여성’을 병렬하여 여성의 입장을 강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1947년 여름, 웨더마이어 장군이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특사로 현지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과 남한을 방문했다. 웨더마이어 장군은 중국 방문을 마치고 1947년 8월26일 서울에 도착했고, 9월6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11박12일 여정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웨더마이어 특사는 남한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들의 의견을 널리 청취한다는 취지로 한국인들에게 서한으로 의견을 보내줄 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홍보했다. 이에 호응해 많은 한국인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이 미국 국립문서관 ‘웨더마이어 사절단 문서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에게 보낸 한국인들의 편지는 그가 방문한 시점의 한국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에게 도착한 한 농부의 편지도 읽어보자.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각하에게 현 농민 상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한 농부입니다. 나의 불만이 있어도 말할 데도 없고 말만 하면 경찰에서 잡아가고 하였습니다. 이 기회를 얻어 각하에게 말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있으니까 어데선지 ‘독청’(獨靑)이란 완장을 찬 청년 오십 명이 트럭을 타고 와서 무조건하고 구타하였습니다. 이유는 ‘삐라’ 부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을 수 없어 대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네들 테로단은 도망하였습니다. 그 후일 전야(田野)에서 일하는 우리 농부를 경찰은 무조건하고 트럭에 태워서 유치장에 넣습니다. 현재는 더 심하게 테로단과 경찰은 야합하야 테로 검거를 계속하고 있으니 우리 농부는 어떻게 살랍니까. 미군정은 점점 신용만 잃어갑니다. 그럼으로 한주먹도 안 되는 친일파의 말만 듣고 인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현 남조선입니다. 우리 농부는 빨리 공위(共委)를 성공시켜서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기대하며 친일파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테로단을 즉시 해체하고 경찰 책임자와 테로 수괴를 엄벌로 처단하며 민주주의 애국자를 석방해야만 암흑 상태의 남조선이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 농촌에서의 우익 테러를 고발하는 내용의 농민 편지. /정용욱 교수 제공
이 편지의 작성자는 자신을 농부로 소개했지만 정갈한 필체와 정연한 논조, 선명한 주장으로 보건대 평범한 농부는 아니고 유식자(有識者)다. 편지에 작성 일자가 나와 있지 않지만 웨더마이어 사절단 문서철에 들어 있는 한국인 편지들이 대부분 8월 말에 작성된 것을 고려하면 이 편지도 8월 말쯤 작성되었을 것이다. 앞의 편지가 당당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힌 데 반해 이 편지는 발신인 주소, 이름 등 신원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문서철에 있는 다른 한국인들 편지 가운데 이런 논조와 주장을 편 편지들은 대부분 무기명이었고, 그런 면에서 앞의 정문자의 편지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테러 시찰기자단의 현장 조사
한 통은 농촌 거주민, 다른 한 통은 서울 거주민이 보냈지만 당시 남한 사회를 바라보는 양자의 상황 인식과 주장은 대동소이하다. 편지들에 따르면 해방의 감격도 잠시였고, 해방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 남한은 공포와 불안에 떠는 암흑사회다. 그러한 상황은 미군정 내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와 결탁한 극우 정치세력에 의해 초래되었고, 그들에 의해 동원된 극우 청년단체의 폭력과 이를 비호하는 경찰에 의해 유지, 확산되고 있다. 두 편지는 테러단체의 해체를 당면한 요구로, 또 미소공위 성사를 통한 정부 수립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농부의 편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친일파를 제외할 것과 경찰 책임자와 테러 수괴의 처단, 정치범 석방을 요구한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위 휴회 이후 서북청년회(서청),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독청), 광복청년회(광청), 건국청년회(건청) 등 우익 청년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또 도시에서 농촌으로 원정 테러를 조직했고, 그 과정에서 지방 지부 설치를 통해 조직을 확대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독청’ 완장을 찬 청년들은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 소속이었을 테고, 그들은 아마 낮에 트럭을 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몰려다니며 테러와 파괴를 일삼았을 테지만 밤에는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읍내의 숙소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낮 동안 좌익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자신들이 장악하지 못한 주변 촌락을 헤집고 다녔지만 아직은 밤에 읍내를 벗어나는 것이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튿날 낮에 경찰과 함께 다시 마을을 찾아와 논밭에 흩어져서 일하는 주민들을 검거한 것도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편지가 묘사했듯이 도회지와 주변 농촌 마을의 점과 선을 따라 일어나는 이러한 부류의 테러가 1947년 봄과 여름에는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기보다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미군정 정보보고서들은 그러한 테러 사건이 각지에서 일상다반사로 일어났음을 보고한다. 특히 1947년 5, 6월에 호남지방에서 빈발했던 테러 사건들은 그 잔인성과 농민들이 입은 혹심한 피해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군정청과 산하 부서들, 서울시청, 경기도청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공동으로 ‘호남사정 시찰기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시찰기자단은 6월22일부터 28일까지 김제, 완주, 부안, 줄포 등 전북 지방을 시찰했는데 어디에서나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경찰 면전에서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고, 심지어 기자수첩을 빼앗는 등 기자를 폭행했다. 기자단은 28일 정읍에서 광주로 이동하여 6월29일부터 7월1일까지 담양, 나주, 광주 등지를 시찰했고, 목포, 장성 등 예정했던 다른 지역 시찰을 포기하고 7월2일 서울로 상경했다. 경무부가 기자단을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전라북도 현지 경찰은 해당 지역 안내를 독청 등 청년단체에 맡겼고, 청년단체원들의 협박과 폭행을 방관했으며, 기자단은 조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현지에서 기자단을 처음 맞이한 것은 도처에 붙어 있는 “지방단체가 경찰권을 발동하여 좌익분자의 가옥을 몰수할 것”이라는 삐라였다. 기자단에 의하면 호남지방에서 만연한 테러 사건은 대개 공통된 조건하에 공통된 수단으로 전개되었다. 테러단은 50~60명을 단위로 야음을 타서 개인 또는 집단적 목표에 대하여 폭행 파괴를 자행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기자단이 분석한 테러의 원인은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우익 진영의 좌익 진영에 대한 정치공세가 파괴적 수단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피해를 입은 마을은 좌익이 강하다는 극히 간단한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기자단은 이를 ‘적구(赤狗) 타도와 반탁 구호가 독립봉으로 나타나서 인민의 머리 위에 날아온’ 것이라고 묘사했다.
▲ 우익 청년단체의 테러가 극심했던 호남지역을 현지 취재해서 쓴 <조선중앙일보>(1947.7.5)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1948년 8월5일 미군 한국대표단 고문인 보스 중령이 서울 우이동의 대한민족청년단(족청) 캠프에서 단원들에게 운동기구를 선물하고 있다. 족청 역시 대표적인 우익 단체였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경찰은 방관, 조장, 야합”
기자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테러단은 마을을 습격한 뒤 주민들에게 “사상전환서”를 강요하고 독청 가입을 촉구했으며, 또 기부금 강제징수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농민들에게 익숙한 것이자 동시에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상전환’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일제가 집요하게 강요한 ‘전향’ 공작을 대중적으로 확대하여 일부 인사들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까지 강요한 것이었고, 단체 가입과 기부금을 강요한 것 역시 일제 말 전시동원체제 아래서 자주 겪었던 익숙한 경험이었다. 아마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2년 만에 이런 일을 다시 겪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고,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동족과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던 자들로부터 그런 핍박을 받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자단은 또 경찰은 우익 청년단의 테러를 방관, 조장했고, 또 그들과 야합했다고 했다. 테러를 당한 주민들이 경찰에서 조사되기 전에 테러단 특설 취조실에서 온갖 악형으로 예비취조를 당하여 형벌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자단은 호남지방에 테러가 멋대로 횡행하는 것은 당국과 청년단체의 언론 탄압, 경찰의 방관이 이를 조장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기자단은 극우단체들이 테러를 동원하여 반탁의 애국심을 강요하고 그것을 경찰서장이 공공연히 ‘사상전환’이라고 말하는 것이 현재 호남지방의 상황이며, ‘테러단의 만행이 애국심의 발로이며 그 결과가 독립을 위한 시련이므로 그대로 간과되어야 한다는 합리성이 그럴듯하게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위험한 사상’이라고 적고 있다.
해방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947년 여름, 한국 사회는 도시건 농촌이건 청년단체의 노골적인 폭력과 테러에 의존하는 동원의 정치가 일상을 지배했고, 다수의 대중이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몽양 여운형만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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