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2. 1947년 여름-희망고문의 끝자락
미 특사가 뭐길래... 좌우의 여론 구애전 달아올라
한겨레ㅣ2019.11.02. 10:06 수정 2019.11.04. 15:26 댓글 6개
1947년 재개된 2차 미소공위, 반탁단체 문제로 교착상태된 때
웨더마이어 미 대통령 특사 방한, 미소공위 결렬 바란 우파신문
"이승만은 한국 자체" 선전전, '통일임시정부' 희망한 좌파신문
"미소 협조를" 시민 목소리 실어, '미소공위 낙관' 다수 여론과 달리
역사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흘러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된 1947년은 좌우가 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우익은 이승만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요구한 반면에 좌익은 미소공위의 성공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희망했다. 이 때문에 47년 3·1절은 기념행사도 동대문운동장(우익)과 남산(좌익)에서 따로 열렸으며, 행사를 마친 양쪽은 결국 충돌해 사상자를 냈다. 사진은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우익의 3·1절 기념행사 장면으로, “이 박사 절대 지지”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보인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웨더마이어 특사 방한에 맞추어 남한 신문들이 사설 형식으로 해당 언론사의 견해를 전달하거나 독자 투고, 인터뷰로 한국인들의 여론을 수집하여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했다. <대한일보>는 서울 이화동에 거주하는 김희경의 편지를 독자투고 형식으로 1947년 8월30일부터 9월8일까지 장장 8회에 걸쳐 1면에 상자 기사로 게재했다. 그 서두 일부를 소개한다.
‘이승만 띄우기’ 앞장선 <대한일보>
“장군이 오시자마자 장군 숙사는 문전성시가 될 줄로 압니다. 각계 명사와 면담하시기에 장군은 피곤과 권태까지도 느끼실 줄 압니다. 그러하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미천한 몸으로서 당돌하게도 장군에게 이 글을 올리는 소이(所以)는 (1) 장군이 만나시는 분은 우익 아니면 좌익 또는 중간파 요인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어느 쪽의 촉탁을 받았다거나 적어도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인사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가 다 자당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므로 그렇다고 하면은 이때까지 장군이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서 들은 바와 대차가 없을 것이기로 장군께서 친히 여기까지 오시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이 땅 천민의 가슴속에서 북받쳐 나오는 소리가 오히려 더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한 것, (2) 장군과 회담할 명사들은 외교적 언사에 능숙하여 8월9일(브라운 소장의 성명일) 이전에 우리들이 귀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으리라고 추측되는 까닭입니다. 즉 금월 9일 브라운 소장의 대성명이 나오자 조선 민중은 실로 감격하여 갑자기 친미 기분이 가득하여졌는데 이 아름다운 현상을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브라운 소장의 성명이 나오기 전의 이 나라 민중 심리를 알게 하시어 이것이 금후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조치하여 주시라는 것. 그리고 저의 여쭌 말씀이 모 정치세력의 노선을 지지하는 결과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자신에 색채가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 정당의 주장이 천리(天理)에 맞는 까닭이올시다. 저는 아무 배경도 선입견도 없는 천민인데다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 내 자신의 파장을 항상 맞추려고 애쓰는 까닭에 하나님 혹은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하는 사람의 소리라면 내 귀에 들어올 것이고 따라서 나의 부르짖음은 그의 부르짖음과 일치된 이치인 까닭이올시다.”
이 글의 주인공인 23살의 젊은 여성은 웨더마이어 장군이 한국 실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파적 견해만 되풀이하거나 외교적 언사나 일삼는 명사들 대신 자신과 같은 천민(賤民)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동시에 그가 하려는 얘기가 결과적으로 모 정치세력의 노선을 지지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정치적 색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정당의 주장이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까지 동원하여 그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을 전달했다.
▲ 우익을 대변하는 신문 중 하나인 <대한일보>는 1947년 8월 ‘한국의 어린 여성이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보내는 눈물의 보고서’라는 제목의 연속 기고문을 게재했다. 내용은 이승만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 촉구였다. <대한일보>의 47년 8월30일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독자투고는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했지만 장, 절까지 나누어 서술한 장황한 보고서 형태다. 장 제목을 열거하면 ‘1장 한국이 독립을 못한 원인, 2장 자치능력 있는 우리 민족, 3장 민생의 도탄은 위정의 실수, 4장 이승만 박사는 한국 그 자체, 5장 대미감정의 호전’으로 되어 있는데, 수신자는 웨더마이어 장군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장이 ‘기승전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팬레터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한국이 독립을 못한 원인은 미국의 의사가 조선 민중에게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미국이 한국의 민의를 대표하는 이승만 박사와 협조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남한 사회의 혼란과 생활조건의 악화는 위정(爲政)의 실패인데 우리에게 자치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미군에게 행정능력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미국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승만이 미국의 대방침과 철저히 일치되어 있음에도 미국이 이승만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승만이 한 정당의 당수, 한 정치세력의 두목이 아니고 그가 곧 조선이고, 조선 사람으로서 이승만을 국부로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조선인의 탈을 쓴 외국인’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이 정도면 팬레터를 넘어서 광신자의 팬덤 현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그가 70여년 뒤의 한국 사회를 보았다면 이 땅에 한국인의 얼굴을 한 외국인이 너무 많아진 것에 적잖이 당황했을 듯싶다.
이 투고는 ‘한국의 어린 여성이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드리는 눈물의 보고서’라는 신파조 제목을 달았고, 편지 주인은 글에서 자신이 ‘시골에 살고 아무 배경도 선입견도 없는 미천하고 나이 어린 여성’임을 수차 강조한다. 하지만 이 글은 내용에서 보듯이 독자투고를 가장한 일종의 이승만 찬양 기사다. 연재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누구라도 신문사 또는 이승만 쪽이 사주해서 만든 위장된 민초의 의견이라는 판단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대한일보> 주간이 극우지 <대동신문>을 발간하던 이종형의 부인 이취성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노골적인 선동을 지면을 이용해서 공공연히 펼친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소협조로 통일된 새 나라”라는 희망
<대한일보>가 ‘미천한 어린 여성’의 편지를 동원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을 때, <조선중앙일보>는 9월2일 2면 한 면을 거의 전부 할애하여 독자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 기사는 ‘웨 특사에게 보내는 시민의 소리, 전인민은 바란다, 미소협조로 이루워지는 통일된 새 나라’라는 제목 아래 각계각층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또는 공개서한을 실었다. 공개서한은 평론가 오기영의 것이다. 그는 후일 자신의 평론집 <자유조국을 위하여>에 ‘조선의 실태 ― 웨더마이어 사절에 보낸 서한’을 실었는데, 그곳에 이 편지가 8월26일 작성된 미발표 원고라는 사실을 밝혔다. 신문은 그 서한의 극히 일부를 인용했다. 기사 제목은 신문사 쪽의 ‘희망적 사고’를 드러내지만 인터뷰 하나하나의 내용은 제목으로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 좌파 계열의 신문인 <조선중앙일보>는 1947년 9월2일치 신문에서 ‘웨 특사에게 보내는 시민의 소리, 전인민은 바란다, 미소협조로 이루워지는 통일된 새 나라’라는 제목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바라는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담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오기영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청산을 주장하지만 해방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독립을 이루지 못한 원인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문화인 박율은 10월항쟁의 재조사를 요청했으며, 서울대 학생 문승규는 미소공동위원회 적극 추진을, 변호사 박철은 경제 면에서 온건사회주의적 정책을, 정치 면에서 좌우합작 정부를 하루라도 속히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자유노동자 문충식은 큰 집에 앉아서 자동차로 찾아드는 사람만 만나서는 조선 실정을 모를 테니 거리로 나와서 조선인들을 만나볼 것을 권한다. 초등학교 교원 한병한은 당시 조선의 형태로 보아 장군이 인민의 진실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는 감상을 솔직히 내비친다. 제일토건회사 사장 김상근은 적산(敵産)은 조선인의 피와 땀을 끌어모은 것이니 미국에 대한 배상으로 쓰지 말고 당연히 조선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국대 철학과 교수 강세형은 미소공위가 50차례 이상 지속되면서도 양국이 타협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며 양국이 비밀정책을 단념하고 대립을 해결하라고 촉구한다. 의사 정민택은 미소 협조, 어떤 간섭도 없는 남북 총선거, 애국반의 개입 없는 비밀선거, 선거 전 남북 모두 정치범 석방 등 구체적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이 신문을 비롯하여 당대의 거의 모든 신문이 타블로이드판 2면 체제를 유지했는데 <조선중앙일보>는 그날 다른 기사들을 포기하고 지면의 절반 가까이를 시민들 의견을 싣는 데 사용했다. 장군에게 시민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다른 기사들을 포기할 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셈이다. 웨더마이어 장군이 남한을 방문한 1947년 8월은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점령한 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고, 한국 사회 나름으로 왜 그리 독립이 지연되는지 그 원인과 해결책을 둘러싸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1947년 5월 2차 미소공위 개회 이후 남한 사회는 미소공위 성사 여부를 둘러싸고 양분되었고, 신문 보도 또한 그 자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장군에게 보낸 한국인 편지들도 미소공위 성사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인가, 아니면 반탁운동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폐기하고 남한 총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인가로 크게 양분되었다.
신문들의 웨더마이어 장군 방한 보도 역시 상당 부분 그 쟁점과 연결되어 소비되었다. 위의 김희경 편지에서 언급한 미소공위 미국 쪽 대표단장 브라운 소장의 8월9일자 성명은 미소공위 협의 대상 단체를 놓고 미소 간에 여전히 의견충돌이 계속됨으로써 사실상 회담이 1946년 5월의 1차 미소공위 결렬 당시로 돌아갔다는 점을 실토하고, 반탁단체들도 협의에 참가하여 의견을 개진할 의사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미국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 성명은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미국이 공식화한 것이고, 우익계열 정당 단체들한테는 2차 미소공위 재개 무렵 미군정이 취한 반탁운동 억제 방침을 철회하여 반탁운동에 푸른 신호등을 켜준 것으로 읽혔다. 김희경의 편지가 브라운의 성명을 대성명으로 치켜세운 이유다.
▲ 1947년 남한의 운명을 손에 쥐었던 두 미국 군인. 웨더마이어 장군(왼쪽)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남한에 파견돼 활동했으며, 브라운 소장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쪽 대표로 일했다. 1947년 6월2일 한국에서의 활동과 관련해 서훈을 받은 브라운 소장을 웨더마이어 장군이 축하하고 있는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미소공위 성공 여부와 정부 형태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고 있는 <여성신문>(1947년 6월12일) 지면의 일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67%가 ‘미소공위 성공’ 기대했지만
당시 남한의 여론은 이 현안을 어떻게 보았을까? 2차 미소공위 재개 직후인 1947년 5월28일 미군정 공보부는 한국인들이 지지하는 협의 대상 단체를 묻는 여론조사를 서울시 모처에서 실시했다. 미군정은 이 문제가 미소 간 회담에서 최대 쟁점이고, 자신의 회담 전략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사가 실시되자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공보부 조사원들이 미리 결탁해둔 사람들을 동원하여 불순한 투표를 했다고 주장했고, 역으로 공보부도 민전 측에서 이 조사를 미리 예측하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모략을 책동했다고 서로 비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약 열흘 뒤인 1947년 6월9일 한국여론협회가 서울시 충무로 입구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통행인 1100명을 대상으로 세 가지 설문을 가지고 여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공위 성과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절대 성공 740명(67%), 의문시된다 202명(18%), 기권 158명(14%)’이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만일 결렬된다면 남조선 단독정부를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사반대 689명(63%), 찬성 253명(23%), 기권 159명(14%)’으로 집계되었다. 정권 형태를 묻는 마지막 설문에는 ‘인민위원회 596명(54%), 자유민주정권 206명(19%), 진보적 민주정권 72명(7%), 연립정권 33명(3%), 기권 193명(17%)’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조사 결과를 놓고 보자면 서울시민 가운데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위 재개 직후 그 성공을 낙관했고, 단독정부에 대한 반대가 찬성을 압도했다.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많은 한국인들이 현실적인 독립의 길은 미소공위를 성사시키는 것뿐이라는 데 동의하는 분위기였고, 그 실패가 가져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 여론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고, 미소 양국이 협조를 통해 문제를 풀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자 한국 사회는 물론 미소 양국 모두 새로운 타개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위 성공’이라는 희망고문이 끝나가는 가운데 반탁진영이 외치는 ‘반탁’과 ‘단정 수립’이 어떤 비극을 잉태할지 두려움과 공포가 한국 사회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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