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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1. 미 특사와 민생 파탄 해법

잠용(潛蓉) 2020. 1. 12. 21:53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1. 미 특사와 민생 파탄 해법

미 특사에 "민생회복 위해 친일·모리배 청산부터" 호소했건만

한겨레ㅣ2019.10.18. 19:16 수정 2019.10.18. 21:16 댓글 0개   


미소 냉전 격화 앞둔 1947년 중반, 남한에 경제지원 방안 강구 위해
웨더마이어 미 대통령 특사 방한, 각계 인사 '민생파탄 해법' 편지 써

좌익뿐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도, "민생파탄 원인은 미군정과 결탁한
민족반역자·모리배 농간 탓" 지적, 친일파특별법 미군정 반대로 좌절


▲ 해방 3년째인 1947년 들어 쌀값 등 물가 상승과 생필품 부족으로 일반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며, 사회적 갈등은 점증했다. 미국은 47년 후반 웨더마이어 특사를 한국에 보내 남한의 경제 상황 등을 살펴보게 했다. 사진은 47년 4월 서울 남대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웨더마이어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중국과 남한을 방문한 1947년 8~9월은 미국의 대중(對中) 정책과 대한(對韓) 정책 모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한국 사회 내부적으로도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무언가 새로운 방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 군대가 국공내전에서 군사적 패배를 거듭했고,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드러나면서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점차 대중적 지지를 잃어갔다. 미국은 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확대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과 소련이 협의 대상 정당, 단체의 선정을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계속했고, 남한 내 정치·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던 만큼 점령지 사정에 대한 미국 정부 나름의 평가가 필요했다. 미국의 대중·대한 정책 변화와 관련하여 웨더마이어 사절단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사절단의 구성 시점부터 귀환 뒤 최종보고서를 제출할 때까지 미국 국내는 물론 중국, 남한에서 정계와 여론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웨더마이어 사절단은 워싱턴에 있는 정책 입안자들을 대신해서 남한 사정을 조사하고, 나아가 그들을 대신해서 현지 점령군 당국의 견해를 청취하는 구실을 했다.


'공업신문’ 1면 사설로 ‘특사 방한’에

웨더마이어의 중국 방문 목적은 현지 사정 파악의 의미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제스에게 부패한 관리들의 숙청과 정부 쇄신 요구를 전달하는 목적도 있고,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후자의 임무가 은근히 강조되는 편이었다. 반면 한국 방문은 원조 법안의 의회 통과를 돕기 위한 것이라는 경제적 동기가 대외적으로 강조되었다. 미국 정부는 웨더마이어 사절단을 파견하여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의지를 과시하고, 대한 경제원조 계획에 대해 의회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했다. 미 국무부는 1947년 봄 이래 ‘적극적 대한정책’의 주요 정책수단으로 간주하던 경제원조 계획에 대한 승인과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의회는 원조법안의 심의를 가을 회기로 미루었다. 국무부는 웨더마이어가 그의 보고서를 통해 원조계획을 지지해준다면 가을 회기에 원조법안을 무난하게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1948년 10월 미국 국방부 건물에서 찍은 웨더마이어 장군의 모습. 그는 전해인 1947년 8월 중국과 한국에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돼 현지 조사를 벌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파견한 웨더마이어 특사의 방한을 앞두고 이에 대한 기대감을 신문 1면 사설로 표현한 <공업신문> 1947년 7월16일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미 군정 때 농민들에게 식량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 미 군정기 암시장의 쌀값은 정부 매입가보다 평균 7~8배가 비싸서 농민들은 가능한 한 암시장에 쌀을 판매하려고 했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미국 정부가 웨더마이어 특사의 방중·방한 사실을 발표한 것은 1947년 7월 중순이었다. 그의 방한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공업기술협회의 기관지 <공업신문>은 1947년 7월16일 그의 방한에 대한 기대를 1면 사설로 실었다. <공업신문>은 과학인, 기술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최초의 공업기술 신문으로 공업계, 광업계, 건설계 소식을 주로 담았던 일간신문이었으나 중요한 정치, 사회 현안이나 국제 소식도 다루었다.


“웨더마이어 중장의 ‘멤버’는 재계와 공업, 경제 즉 산업경제의 주요 포인트를 조사하고자 하는 데 있어 각각 그 방면의 통(通)이라 할까 사계의 권위를 망라한 데 대하여 더욱 기대가 큰 바가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일찍이 경제에 굶주리고 있느니만치 신생 조선의 산업 재건에 대하여 전면적 원조를 바라는 바이며 특히 공업국가로서 부끄럽지 아니할 만한 모든 시설에도 유의하여 실제적이요 현실적인 속임 없는 실정 조사에 착수하여 경제조선으로서의 장차(將次)를 독립국가로 완전히 인도하여 나아가 세계 안전 평화 및 경제 안정 기도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이 사설은 당시 한국 사회가 마주한 경제 문제의 핵심을 한마디로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로 정리했고, 그 해결 방도의 하나인 산업 재건에 필요한 원조에서 미국이 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명했다. 웨더마이어 사절단은 방한한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이틀에 걸쳐 미군정 당국자들로부터 남한 사정과 한반도 정세를 종일토록 청취했다. 첫날은 남한 정치상황과 한반도 군사정세에 대해서, 이튿날은 남한 경제상황과 미소공동위원회 진행상황에 보고와 토론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미군정 경제전문가는 원조가 철회되자마자 남한 경제는 붕괴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고, 점령 당국이 여전히 최소한의 구호 차원의 정책밖에 펴지 못하는 입장이라며 소련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구하는 것은 실질적인 원조뿐이라고 강조했다. 이틀에 걸쳐 미군정 관리들은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남한 점령 이후 현재까지 상황 전개와 현재 정세, 향후 전망을 보고했는데 사실상 그간의 점령 정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이유를 나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좌익과 우익의 대조적 편지 내용

그러면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한국인들은 민생 파탄의 원인과 해결책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민생문제: 폭압과 테러가 이처럼 심한 틈을 타서 모리배가 준동함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앙등하는데 수입은 적고 하니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저의 가족이 8명으로 생활비가 2만원은 가져야 하는데 급료가 겨우 3천원 미만이오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호구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도 까딱하면 파면이니 거리에는 무수한 실업자 홍수랍니다.”


▲ 모리배의 준동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시민의 일상 삶을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서울 서대문구 오윤덕의 편지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위 편지는 1947년 8월31일 발송되었고, 서울 서대문구 홍파동 거주 오윤덕이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오윤덕은 좌익 성향의 시민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 앙등의 원인으로 모리배의 준동을 꼽았다. 극우 단체들이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조직적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좌익 쪽에서도 조직적 편지 쓰기가 있었고, 그런 면에서 양쪽의 편지 내용을 비교하면 그들의 주장과 그 속에 간직된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좌익 쪽 편지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대체로 미군정 내 친일파의 준동과 그들과 결탁한 모리배의 발호를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극우 쪽 편지들 가운데 경제위기 현상을 언급한 것이 없지 않지만 그 원인을 분석하거나 지적한 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모든 편지가 그저 ‘반탁’과 ‘총선 실시’ 구호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민생 파탄과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모리배를 주목한 것은 좌익 계열만이 아니었다. 아래 인용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학회를 대표했던 유명한 어문학자 이극로가 1947년 9월1일 장군에게 제출한 ‘조선 국내사정 보고서’ 중 ‘경제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생산원료의 엄격한 통제 배급과 함께 생산품의 계통적인 분배로 하여 다소간이라도 합리적인 운영방안을 취한다면 생산도 증진하고 물가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로 생산원료는 모리배 수중으로 생산품은 간상배 수중으로 입수되어 인민은 도탄에 빠지고 공장은 생산원료의 부족과 입수난으로 곤경에 빠지는 현상이다.”


▲ 저명한 어문학자인 이극로가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조선 국내사정 보고서’의 일부. 이극로는 이 보고서에서 ‘생산원료는 모리배 수중에, 생산품은 간상배 수중에’ 있다고 지적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이극로는 당시 민생 파탄의 원인을 ‘생산원료는 모리배 수중에, 생산품은 간상배 수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 줄로 정리했다. 그는 일제 강점 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 이상 옥고를 치렀고, 해방 직후 함흥 감옥에서 들것에 실려 나왔던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직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1946년 조선건민회라는 민족운동 단체에 참가하여 그 단체를 이끌었다. 1946년 중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자 그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한 것은 1947년 봄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무렵부터다. 1948년 4월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관선 의원으로 진출한 정이형(鄭伊衡·본명 정원흠)의 편지는 더욱 적나라하고 신랄하다. 그는 4장 분량의 영문 타이핑 편지를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하여 점령 정책의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했는데 그 가운데 셋째 항목에서 남한의 경제위기와 모리배 문제를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이른바 미국인 통제하에 있는 적산(敵産)들이 모리배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적절한 방법으로 일본인 기업과 공장에 있던 비축물과 재고품을 처분했더라면 남조선에서 경제적 불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물품들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면 남조선에서 혼란과 무질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 사정을 들으셨을 겁니다. 공장의 재고품과 원료는 모두 사라졌고, 기계는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들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80% 이상의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우리는 원료, 기계, 기술자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정직한 관리인이 필요합니다. 한국인 가운데 많은 수가 지난 40년간 일제 강점 아래서 도덕적으로 밑바닥까지 타락했다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정직한 토대 위에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부디 정직한 전문가들을 보내시어 그들이 우리 인민들을 정직하게 이끌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패한 관리가 정부의 공무원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어떤 경제적 회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더라도 당신은 먼저 관재처(미군정 내 적산 관리기구) 관리나 과거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기업과 공장을 관리하고 있는 조선인 관리자들을 모두 엄격하게 심사해야 합니다.


부패한 관리, 사리사욕만 채우려 드는 기업가와 상인, 악명 높은 친일파 경찰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겁니다. 현 정부로부터 어떤 선을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 독립운동을 하다 1927년에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해방 때까지 옥살이를 했던 정이형이 투옥됐을 때 찍은 수형자 사진.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 독립운동가 출신의 민족주의자 정이형은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패한 관리, 사리사욕만 채우려 드는 기업가와 상인, 악명 높은 친일파 경찰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정용욱 교수 제공

민족주의자 정이형의 좌절

정이형은 3·1운동 참가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1920년대 전반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에서 정의부 출신 혁명가들과 국내의 형평사 계열 활동가들을 연결하여 고려혁명당이라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정당을 창설했으나 1927년 3월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19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6년 12월30일 과도입법의원 제6차 본회의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奸商輩) 조사위원회’를 특별위원회의 하나로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회가 성립되었고,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법 제정을 주도했으나 미군정이 법안 인준을 거부하여 종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된 지 불과 2년, 점령군 당국자는 물론 남한 거주자 전부가 남한 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서 외부의 원조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토지개혁이나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 처리 등 구조적 개혁도 필요했고, 식량위기 해소,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진정, 재정·금융의 안정, 생산의 재건과 실업자 해소 등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된 한국인 편지들은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개혁의 주체인가를 심각하게 묻고 있다. 친일파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였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입법의원이 제정하려고 한 친일파 처리 특별법이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배, 전범에 더하여 굳이 간상배를 적시한 이유일 것이다.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